108화. 21살, 폴란드 바르샤바
약 30분 정도 지나고.
“......”
“......”
대회의장에 사람들이 모였다.
중앙에 자리한 한강에 시선을 모았다.
“저는 말이죠. 이 회사의 전체를 쥐락펴락할 권력이 저에게 있다손 치더라도 여기 계신 대표님들과 사업부장님들이 하던 일을 중간에 가로채 제 입맛대로 바꿀 생각 없어요.”
한강은 오늘 느낀 점을 임원진들에게 전달했다.
“대표분들도 마찬가집니다. 아래에서 하는 사람들이 업무가 느리더라도 끝까지 맡기세요. 직원에게 일을 시켰다면 그 일은 그 직원 고유의 일입니다. 관여하거나 중간에 가로채지 마세요. 도움을 바라기 전까진.”
직장 내 스트레스로 작용하는 부분 중 하나.
각자 본인들이 해오던 일들이 있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모든 걸 다시 하라며 중간에 자르고는 한다.
한강은 그러한 부분들을 지적했다.
“저 회장님 한 가지 여쭤도 되겠습니까? 지금 말씀에 대한 의도가 무엇인지요.”
고호경이 의문 어린 얼굴로 입을 열었다.
왜 이런 말을 하는지 저의를 확인하기 위함이다.
“파츠넷에서 저를 보자더군요. 소송이 끝난 시점에 말이죠.”
시선을 고호경에게 가져갔다.
“파츠넷에서요?!”
“네. 이걸 어떻게 해석하시나요?”
“음......”
“일이 꼬였으니, 소송에 대한 문제를 저와 나누려 하기에 이건 아니다 싶었습니다.”
“......”
“전 제 사람들을 믿고 일을 맡기고 싶단 생각이 들었어요.”
질문을 하던 고호경의 심장이 요동쳤다. 간질거리는 말일 수 있지만 말속에서 진심을 느끼자 저도 모르게 부끄러운 감정이 스멀스멀 위로 올라왔다.
“일이 늦어도 전 여러분을 기다리겠습니다. 빠른 사람, 느린 사람 전부 제가 품은 사람들이니까요. 제 말 무슨 뜻인지 아시리라 믿습니다.”
이 정도면 모두 알아들었으리라 생각했다.
한강은 추가적인 지시사항을 더 내린 뒤 자리를 파했다.
***
따르르르릉.
전화기가 요란하게 울린다. 정신없이 전화를 받던 사람들은 연달아 들려오는 전화벨 소리에 인상을 구겼다.
“파츠넷 비서과장 이하온입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얼굴 표정과 달리 말투는 더없이 상냥했다.
“아, 네! 아, 안녕하세요. 네. 네. 대표님께 전달해 드리겠습니다.”
어디서 전화가 왔는지 본인을 하온이라 소개한 여직원은 깜짝 놀라 목에 힘주어 대답했다.
“어디기에 저러지?”
함께 자리해 있던 직원들은 아리송한 얼굴로 여성을 바라봤다.
하온은 자리에서 급하게 일어나 대표실로 뛰다시피 걸어갔다.
또각또각, 구두 굽 소리가 복도에 바쁘게 퍼졌다.
“대표님, 이하온입니다.”
문을 두들기고 안으로 들어갔다.
“무슨 일이야?”
김민국 파츠넷 대표가 모니터에 가져간 시선을 떼어내 하온에게 가져갔다.
“한리버 더움에서 연락이 왔었습니다.”
“오, 그래. 말해보게.”
기다리던 연락에 김민국은 기대 어린 심정으로 하온의 입을 주시했다.
“유한강 회장님은 대표님과 만날 이유가 없다며, 모든 일은 고호경 대표에게 일임하였으니 그곳과 모든 일을 마무리 짓길 바라신답니다.”
“......”
김하온은 본인이 말하면서도 얼굴이 붉어졌다.
어떻게 말을 해야 하나 싶던 이야기를 들은 대로 고스란히 고해버렸다.
“......허허.”
하지만, 김민국은 그 부분에 대해 신경 쓸 여유 따위 없었다. 오로지 드는 생각은.
‘망했구나... 망했어...’
암담한 미래였다.
“알았네... 일보게...”
힘 빠진 목소리로 멍하니 서 있는 하온을 밖으로 내보냈다.
김민국은 심한 압박감을 느끼며 눈을 질끈 감았다.
지금까지 해오던 모든 일들이 더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
[파츠넷 부도 위기 직면, 백억 원대 소송비에 돌아오는 채무 만기가 당장 코앞으로 당도했다.]
[제일은행 파츠넷에 대한 만기 연장 없어.....]
[제일은행 채무 만기 45억 원...]
며칠 뒤, 파츠넷에 대한 기사가 대문짝만 하게 실렸다.
“우리가 파츠넷을 인수하면 어떨지 싶습니다.”
어제 파츠넷 대표와 미팅을 가졌다.
[우리 회사는 백억에 달하는 배상금을 물을 여건이 되지 못합니다.]
만화사업 투자비만 최소 60억에 달하는 미래전략사업으로 투자를 감행했으나, 대표의 엄한 짓으로 회사는 망하기 직전까지 와버렸다.
파츠넷의 재무 상태는 그야말로 최악.
초기 한리버를 설립했을 당시 봐오던 재무보다 몇 배는 좋지 못했다.
“파츠넷을 인수하면 우리에게 떨어질 이득이라도 있나요?”
인수는 좋다, 하지만 파츠넷에서 얻을 수 있는 게 무엇인지다. 악화된 기업을 살리는데 들어가는 돈은 상당했으니까.
“일본의 고덴샤 저작권을 들고 있습니다. 큰 수익은 몰라도 장기로 봤을 때 유리해 보입니다.”
“음... 거기서 잘나가는 만화가 있나요?”
저작권을 가지고 있다면 이제 대표적으로 알 만한 작품이 무엇이 있는지 알아야 한다.
“명탐정 코난이 대표적입니다.”
“방금 명탐정 코난이라 했나요?”
“네, 한창 인기몰이를 하고 있는 만화입니다. 회장님도 아실 겁니다.”
“허, 그게 고덴샤......”
2만 볼트 전기가 머릿속을 관통한 기분.
장기 연재, 장기 방송으로 손꼽히는 만화 중의 하나인 명탐정 코난이 설마 고덴샤 측의 작품이었고 그걸 파츠넷이 들고 있단 사실에 크게 놀랐다.
“전화위복이 이걸 두고 하는 모양이네요. 파츠넷 우리가 품도록 하지요.”
고민할 이유 따위 없다. 명탐정 코난의 효과는 매출뿐 아니라 회원을 끌어들이는 데 상당한 도움이 될 터다.
“이번 일이 완료되는 대로 파라다이스로 모든 사업을 넘기도록 하겠습니다.”
“고생해주세요.”
일이 어느 정도 마무리된 기분이다.
후련하다.
“정말 얼마 남지 않았다.”
설레는 심장은 폴란드 바르샤바로 향했다.
***
2005년 3월도 얼마 남지 않은 날.
소망 보육원이 시끌시끌하다.
웅성거림의 중심에는 어시스트 대표 김지환이 서 있었다.
“애들아, 우리가 여기서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이유가 누구 덕분인지 아니?”
아이들을 불러 모아 묘한 분위기를 만들었다.
아이들의 얼굴이 제법 진지했다.
“한강이 삼촌이요!”
“한강 형아요.”
아이들이 너나 할 거 없이 하늘 위로 손을 번쩍 들어 말했다.
“그치. 맞아. 우리 모두 회장님 덕분에 좋은 집에서 굶주리지 않고 지금처럼 웃으며 지내고 있어. 그런데 우리는 회장님께 해준 게 없네. 그래서 이 형이 너희들에게 아주 중요한 임무를 줄까 해.”
아이들의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바로 5일 뒤면 회장님 생일이야. 회장님을 위하여 멋진 걸 준비해보자.”
보육원 아이들은 매달 일정한 용돈을 받고 미래를 위해 저금을 한다.
“이거 보탤게요.”
아이들이 가방에 꽁꽁 감춰둔 통장을 앞으로 내밀었다.
“매일 받기만 해서 너무 미안했는데, 이참에 형에게 어울리는 명품 옷으로 준비해주고 싶어요.”
귀티가 흐르는 모습, 한강은 아이들의 선망의 대상이기도 하였다.
늘 웃음으로 받아주고 필요한 게 있으며 즉각 챙겨 단 한 번의 불편함 없이 지낼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다.
[인간이란 늘 행복할 수 없어. 한 번은 크든 작든 슬픔과 고통이 찾아와. 만약 그걸 너희가 미리 경험을 한다면 그다음에 찾아올 어려움 따위 일도 아닐 거야.]
[잘하는 걸 키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때론 못하는 것도 해봐. 너희들에게 큰 자산이 되어 줄 거야.]
언제고 한강이 아이들에게 건넨 말이다.
그때를 떠올리며 거리낌 없이 자신들의 전 재산을 내밀었다.
“야, 벼룩의 벼룩도 안 되는 너희들 돈을 쓰자는 게 아냐. 회장님도 그건 원하지 않을 거야. 그보단 너희가 얼마나 잘 자라주었는지 보여주는 게 가장 큰 선물이지 싶다.”
김지환은 코 묻은 통장을 건네는 아이들의 모습에 가슴이 찡해졌다.
참으로 순수하고 착한 아이들이다.
“꼭 해주고 싶은데...”
아이들이 크게 실망했다.
아마도 서로 돈을 모으면 아주 좋은 선물 하나 정도는 준비할 수 있으리라 봤는지 모르겠다.
“형이 아주 좋은 생각이 있는데, 형 말대로 해볼래?”
“그게 있어요?!”
“알려 주세요!”
“할게요. 무조건!”
아이들이 의기투합하여 주먹을 불끈 쥐었다.
“좋아, 하자. 대신 힘들다고 징징대기 없기다?”
“넵!”
대체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 건지. 그건 지환만이 알고 있는 일일 터다.
***
2005년 3월 25일 금요일, 13시 24분.
똑똑.
“김지환 대표님, 갑자기 어쩐 일이에요?”
방 안으로 들어온 김지환을 보고 의아해 물었다.
지금껏 호출하지 않은 이상 갑자기 찾아온 적 없던 이의 등장은 고개를 갸웃거리게 만들었다.
“회장님, 잠시 시간을 내어 주실 수 있으신가요.”
심지어 눈빛마저 이상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지금요?”
“18시 30분에 어떠신지... 한 시간 정도면 됩니다.”
“18시 30분? 하필 왜 그때죠??”
‘윤희랑 보기로 한 시간이 21시니까...’
공교롭게도 약속 시간과 얼추 맞아떨어졌다.
“좋아요. 그런데 무슨 일로 그러시는지 여쭤봐도 돼요?”
“그게 조금 이따 말씀드리면 안 될까요. 죄송합니다.”
“음... 그러세요.”
확실히 분위기가 이상하다.
아무래도 말하기 힘든 일이 그에게 벌어진 모양이라고 한강은 생각했다.
“시간에 맞춰 밖에서 기다리겠습니다.”
“그러세요. 그럼 이따 뵙죠.”
한강은 말을 아꼈다.
김지환을 배려한 나름의 행동이었다.
18시 20분.
“응? 다들 퇴근 했나?!”
19시가 가도 불이 켜져 있던 사무실은 소등되어 무척 어두웠다.
“묘하네.”
걸음을 옮기며 처음 보는 광경에 황당한 나머지 실소가 터지기도 하였다.
“이것도 나쁘지 않겠네. 일찍 퇴근하는 날을 만들어도.”
어둑해진 사무실을 보자, 새로운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제가 모시겠습니다.”
육성 자동차가 주차장에 대기해 있었다.
김동진은 한강을 차량으로 안내했다.
“......”
이동하는 차 안은 무척 고요했다. 어떤 누구도 먼저 입을 열지 않았다.
한강은 어떻게 말문을 열지 고민을 하였고, 김동진은 그와 별개로 다른 생각을 하느라 바빴다.
‘걸리면 안 되는데.’
오늘은 특별한 날인 만큼 말과 행동에 있어 주의를 기울였다.
“음? 여긴?!”
아무 생각 없이 창가를 바라보던 차, 익숙 건물이 시야로 들어왔다.
차량은 그곳으로 들어갔다.
“여기서부턴 걸어가셔야 합니다. 위에 공사 중이라서요.”
“네, 그러죠...”
도착한 장소는 보육원 앞이었다. 보육원에 문제가 있는 걸로 보였다.
한강의 표정이 굳어졌다.
턱!
차량 문이 닫히고 걸음을 내디뎠다.
천천히 옮겨가는 걸음은 계단에 이르렀다.
취이이이!
“깜짝아!”
그때였다. 양옆으로 불꽃을 튀기는 폭죽이 한 장소로 쭉 이어졌다.
“이게 갑자기 뭡니까? 김... 대표님.”
“이 길을 따라가시면 의자가 보일 겁니다.”
그 말을 끝내고 김지환은 한강의 뒤에 섰다.
둘은 천천히 의자 앞까지 걸어갔다. 거기선 폭죽이 아닌 랜턴이 주변에 자리해 어둠을 밝혔다.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당신의 삶 속에서 그 사랑 받고 있지요♪
“......”
한강은 멍하니 정면을 응시했다.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당신의 삶 속에서 그 사랑 받고 있지요.
“윤희야......”
그리고 어느새 옆자리를 차지한 윤희를 보고서야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이 무엇을 의미하는 알게 되었다.
---당신으로 시작된 우리의 사랑은 당신의 만남을 통해 열매를 맺고 당신이 이 세상에 존재함으로 인해 우리에게 얼마나 큰 기쁨이 되는지...
걱정으로 굳어 있던 얼굴이 그제야 활짝 펴졌다.
“회장님의 은혜에 우리는 다른 사람과 다르게 살게 되었음에도 그 누구보다 행복을 품고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무대 위로 지환이 등장했다. 아이들의 노래는 계속 이어졌지만, 지환의 목소리는 아주 또렷하게 들렸다.
“......진작 준비를 하고 싶었지만, 오늘만큼 특별한 날도 없다 여겨 우리가 할 수 있는 선물을 준비했습니다. 진정한 성인이 되신 회장님을 진심으로 환영하며 스물한 번째 생일 축하합니다.”
---......당시의 삶 속에서 그 사랑 받고 있지요♪
“고맙습니다. 제 인생 최고의 선물로 평생 기억에 남을 겁니다.”
어느새 무대 위는 퇴근한 걸로 알고 있던 직원들로 가득 들어차 있었다.
그들은 노래를 부르며 말했다.
사랑을 받고 있다고.
한강은 그들의 모습을 보며 조용히 그리고 정중하게 허리를 깊게 숙였다.
“모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