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돈 버는 게 예술이다-105화 (105/237)
  • 105화. 21살, 쇼팽 콩쿠르

    “회장님, 이번 쇼팽 콩쿠르 참가에 대한 각오 한마디 부탁드립니다.”

    기자회견이 열렸다. 쇼팽 콩쿠르 응모는 기자들의 이목을 모으기에 충분한 대사건이었다.

    “몇 년 전부터 저를 기다려온 친구가 있습니다. 전 그 친구가 실망하지 않을 멋진 연주를 선보이고 싶습니다.”

    미로슬라브 꿀띠쉐프.

    한때 한강도 음악에 대한 조예가 깊다 칭송을 받긴 했지만, 미로슬라브 꿀띠쉐프에 비하면 많이 부족했다.

    지금은 전생의 도움으로 사기적인 능력을 선보인 정도.

    ‘아냐, 그때완 또 다른 느낌이기도 해. 뭐랄까 음의 전달을 더욱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게 된 기분이랄까...’

    어떻게 되었든, 전생보다 실력이 월등히 늘었음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혹시 친구분이 러시아 천재 피아니스트로 알려진 미로슬라브 꿀띠쉐프인가요?”

    워낙 유명하기에 즉시 주인공의 이름이 흘러나왔다.

    “네, 맞습니다. 미로슬라브 꿀띠쉐프입니다.”

    “회장님은 미로슬라브 꿀띠쉐프가 본선에 올라가리라 확신하시는군요.”

    “당연하죠. 그는 진짜 천재니까요.”

    “회장님도 본선에 나갈 수 있으리라 자신하시나요?”

    “그건 말씀드리기 조심스럽지만, 꼭 본선에 올라 많은 분들께 저의 곡을 들려드리고 싶습니다.”

    ‘자신합니다’라고 말했다 몰매 맞을 거 같아 조심스럽게 돌려 말했다.

    퀸 엘리자베스 피아노 국제 대회에서의 우승은 운이 아닌 실력이었다.

    이번에도 본선에 올라 실력을 뽐낼 수 있으리라 자신했다.

    “쇼팽의 화신이란 소리가 들립니다. 이번 대회에서 우승할 자신 있으신가요?”

    기자들은 자극적인 대답을 유도했다.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우승을 목표로 열심히 해보겠습니다.”

    그러나 도가 튼 한강은 기자들의 질문을 피하는 대신, 목표를 어디에 두고 있는지 보여주었다.

    “인터뷰는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 많은 관심을 가져주셔서 감사합니다.”

    장시간 이어진 인터뷰를 종료했다.

    더 했다 실수하면 무척 곤란하다.

    “수고하셨습니다.”

    김동진이 음료를 건넸다.

    “기자들을 상대하는 건 여러모로 힘드네요. 체력을 갉아먹어요.”

    농담이 아니라 정말이다. 어떻게든 기사를 뽑겠다고 던지는 질문들이 하나같이 말하기 애매한 것들뿐이다.

    “그래도 회장님 덕분에 기업 홍보가 제대로 되고 있습니다. 이참에 광고 모델로 나가보심이 어떠세요?”

    옮기던 걸음을 뚝 멈췄다.

    “네?”

    너무 황당한 말에 정신에 혼선이 온 탓.

    시선을 돌렸다.

    “지금 한리버는 회장의 이미지로 성장하는 회사입니다. 마치 대통령 후보로 거론되면 관련된 기업 주가가 오르는 것처럼 한리버는 다른 기업에 비해 회장님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있습니다.”

    한강의 영향이 어느 정도냐면 작년 12월 당시 판매된 ‘대자연의 즉흥곡’이 63억 원에 판매됐다는 기사에 더움과 네이컴의 주가가 소폭 상승했다.

    이유는 아주 간단하다.

    ‘그림만 꾸준히 그려도 기업이 망할 일은 없을 것’이란 사실이었다.

    누군가의 우스갯소리였을 뿐인데, 기업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그...래서요?”

    “광고에 회장님의 모습을 비춘다면 한리버에 있어 긍정적으로 작용하리라 봅니다.”

    한강의 출신은 어쨌건 방송인으로 시작했다. 그림을 그렸고 CF모델로 나오기도 했으며 아이들 영화를 촬영했다.

    학교를 다니면서 패션모델로도 활동을 했었고.

    사람들에게 가장 익숙한 모습은 기업인보다 예술인이었다.

    “음......”

    “그렇지 않아도 각 계열사에서 회장님을 광고로 내보내는 건 어떻겠느냐 얘기가 나돌고 있습니다.”

    “음......”

    한강은 고민이 되었다. 예전이야 기업인을 떠나 학생 신분을 가지고 있었기에 자유로이 활동을 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기획서를 검토해 보시고 결정해 보심이 어떻습니까?”

    “좋아요. 올라오는 걸 보고 생각해보도록 하죠. 당장 결정하기엔 솔직히 조심스럽네요. 가장이기도 하고 곧 아이 아빠이기도 해서.”

    그리고 가장 걸리는 부분이 바로 이것이었다.

    “괜찮을 겁니다. 올라오는 대로 보고드리겠습니다.”

    김동진은 묘한 미소를 지었다.

    부르르르.

    ‘이거 왜 이리 불안하지.’

    알 수 없는 불길함이 몸을 떨게 만들었다.

    ***

    청담동 고급빌라 단지.

    한강을 태운 차량이 단지로 들어갔다.

    “수고하셨어요.”

    한강은 차에서 내려 집으로 걸어갔다.

    “흠, 광고 모델이라... 모델...”

    집으로 걸어가는 동안 오늘 들었던 일을 상기했다.

    “윤희랑 얘기해 보자. 혹시 싫어할 수 있으니까.”

    회사를 떠나 광고는 가족과도 연관된 일. 상의를 해볼 필요가 있었다.

    아직 확정된 일이 아니더라도.

    “왔엉. 옷 줘.”

    문을 열고 들어가지 윤희가 맞이해 준다.

    자켓을 벗어 윤희에게 건넸다.

    “이러지도 않아도 된대도.”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이니까, 됐습니다. 회장님.”

    “하여튼간.”

    “내가 수발 잘 들을 때, 잘 받아두셔. 하고 싶어도 하지 못하니까.”

    그제야 시선이 아래로 내려갔다.

    하루가 다르게 배는 점점 거대해져 갔다.

    “그땐 내가 잘할게.”

    무릎을 꿇어 윤희의 배와 시선을 마주했다. 배 쪽으로 천천히 얼굴을 가져가 귀를 댔다.

    두근두근.

    배 속에 있는 아이의 소리가 들려왔다. 그렇게 느껴졌다.

    한강은 행복한 미소를 입에 걸치고 잠시간 가만히 자세를 유지했다.

    “좋아?”

    “응, 좋아.”

    “우리 희망이 잘 키우자.”

    “그래, 잘 키우자.”

    1분간 유지했던 자세를 풀고 몸을 일으켰다.

    “씻고 와. 어머님이 김치 보내주셨어요. 당신이 할머니 김치를 무지 좋아한다고, 잔뜩 주셨어.”

    압구정에서 살지만, 며느리가 불편할 수 있다는 생각에 미화는 김치를 택배로 부쳤다. 연락은 간단히 문자로.

    “그 무거운 걸, 혼자 옮긴 거야?”

    “배려 깊은 어머니께서 수레로 보내주셨어. 그거 끌고 가서 저기에 뒀지.”

    “엄마가 신경 많이 쓰셨네.”

    “나 어머니한테 사랑받는 기분이 들어 너무 좋은 거 있지. 그래서 어머니께 우리 여행 같이 가자 했어.”

    “어? 진짜?!”

    “어머님과 가족 여행 간 적 없잖아. 우리 아이가 더 사랑받는 아들로 크려면 내가 더 잘해야 하고.”

    “불편하지 않겠어?”

    “잊었어? 나 어머님과 고무줄 바지 입고 비빔밥도 먹는 사이야.”

    “하하, 그랬지.... 고마워.”

    “당연한걸. 그만 안고 빨랑 씻어. 희망이가 배고프대.”

    “알았어. 다녀올게.”

    참으로 마음이 깊은 여자다. 그리고 엄마에게도 참으로 감사했다.

    한강은 중심을 잘 잡아주는 윤희에게, 윤희를 생각해 주는 엄마에게 감사함을 느꼈다.

    샤아아아아.

    샤워기에서 물줄기가 쏟아져 몸을 적셨다.

    하얀 거품이 몸 구석구석 파고들어 피로로 물든 노폐물을 뽑아냈다.

    “후, 시원하다.”

    미지근한 물로 거품을 씻겨내고 수건으로 물기를 닦아냈다.

    “크아, 맛있는 냄새. 김치찜?”

    “후후, 할머님께 전화해서 레시피 물어서 만들어봤지.”

    윤희가 두 손가락을 쭉 펼쳐 브이를 그렸다.

    입가엔 자신감으로 충만했다.

    “뭘 이런 걸 다 했어. 저녁은 대충 먹자니까.”

    “어허, 남편을 소홀히 챙길 수 없지. 그리고 나 배부르면 해주고 싶어도 못해. 먹을 수 있을 때 잘 먹어둬. 나도 내가 해준 만큼 부려 먹을 거니까.”

    윤희는 그날을 벼르고 있다는 투로 말했다.

    “이거 점점 무서워지는걸.”

    “그러니 나의 접대를 잘 받도록.”

    “갑자기 목이 타는데. 물을 내오겠느냐?”

    “여기 대령하였습니다.”

    “크크.”

    “풋.”

    죽이 척척 맞는 서로의 모습을 보자, 웃음보가 터졌다. 둘은 한참 그렇게 웃다 식사에 들어갔다.

    “크아, 진짜 맛난다. 요리 솜씨가 일취월장이야.”

    “피, 됐습니다요. 그런데 나한테 할 말 있는 눈치다.”

    밥 한 숟가락을 뜬 윤희가 툭 던졌다.

    “쿨럭, 그게 보였어?”

    매서운 한방에 깜짝 놀라 사레가 들렸다.

    여자의 촉이란 참 무섭다.

    “뭔데, 그래?”

    “별건 아니고, 네 생각을 듣고 싶어서. 밥 다 먹고 얘기하려 했는데, 말이 나왔으니 얘기할게.”

    입에 있는 음식물을 물로 목 안으로 넘겼다.

    “회사에서 나보고 광고를 찍어볼 생각 없냐고 그러더라.”

    “광고? 회사 누구?”

    “내게 잘 어울리는 컨셉이라고. 김 실장님이.”

    “그럼 찍어봐.”

    “응? 뭔 광곤지도 모르잖아?”

    “김 실장님이 막 생각 없는 분으로 보이지 않아. 그리고 자기가 내게 말했단 건, 참 기특해. 그만큼 나랑 희망이를 생각하고 있단 뜻이잖아. 그거면 됐어. 어떤 광고든.”

    “윤희야.”

    “아, 누군 참 좋겠다. 이해심 만빵인 어여쁜 여자 데리고 살아서.”

    윤희는 눈을 흘기며 먹다 만 밥공기를 싹 비우고 휴지로 입을 쭈욱 닦았다.

    “그래, 맞아. 난 참 행운아네. 우리 예쁜이를 만나서. 장모님께 더 잘해야겠다.”

    “그럼 고맙지.”

    “아, 잠만. 그건 진짜 아니다. 밥 먹던 입으로 뽀뽀하기 없기. 아무리 내가 예뻐도 밥 먹었음 이 닦고 그러고서 해.”

    다가서려는 한강과 거리를 벌렸다.

    다가오면 꿀밤을 먹여줄 테야 눈빛을 보냈다.

    “크크, 알았습니다. 잘 먹었어. 다녀올게.”

    한강은 먹은 밥그릇을 싱크대 위에 올려두고 다시 욕실로 들어갔다.

    ***

    한리버 본사 기획부서.

    “이보다 더 좋은 그림도 없어요. 전 찬성이에요. 이건 우리 회장님밖에 소화하지 못한다고요.”

    30대로 보이는 여성은 자신 있게 기획서에 적힌 모델을 한리버의 주인 유한강을 강하게 밀었다.

    “그렇지? 게다가 콩쿠르까지 겹쳐서 더 강한 시너지를 낳을 거고.”

    남성은 여성의 말에 고개를 흔들었다.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회사의 회장인 한강 외에 다른 사람은 생각할 수 없었다.

    “그런데 회장님이 승낙할까요? 아무리 봐도 이건 하극상 같기도...”

    중간에 부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목소리 주인공은 단숨에 쏠리는 이목에 말끝을 흐렸다.

    “아, 그건 걱정하지 마세요. 그게 하극상일 리 없지요. 우리 회장님이 얼마나 통이 크신 분인지 아직 모르시나 봅니다.”

    회의 테이블로 김동진이 웃으며 걸어왔다.

    “실장님, 안녕하세요.”

    “오셨습니까. 이리 앉으시죠.”

    걸어들어오는 동진을 보고 회의를 하던 사람들은 잠시 멈추고 동진을 응시했다.

    그중 중심에 있는 서인구가 몸을 일으켜 자리를 양보했다.

    “아니에요. 전 회장님 전언만 드리러 왔어요. 회장님께서 광고를 찍겠다 하셨어도 기획서 완성되면 올려주세요.”

    “아, 그게 참말입니까?”

    그렇지 않아도 어떻게 제안을 할지 고민이었던 차인데.

    “팀장님 부탁도 있고, 저도 회장님이 딱이라 생각 들어 권해봤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아주 큰 도움을 받았습니다. 어떻게 오늘 한잔하시겠습니까? 제가 한잔 사야 할 거 같은데 말입니다.”

    “좋죠. 모두 함께하시죠.”

    “오!!”

    “우리 참치 먹어요!”

    오늘 같은 날은 역시 비싼 게 최고였다.

    모여있던 직원들은 너도나도 참치를 외쳤다.

    “아주 팀장 통장 거덜 낼 생각이구만.”

    달려드는 직원들의 모습에 서인구는 기 빨린 기분을 경험했다.

    “에이 왜 그러세요. 후후.”

    “좋아. 까짓거 가자. 참지 먹자.”

    피유!

    김동진이 가져온 소식에 기획부서의 회식이 결정됐다.

    그에 김동진은 말했다.

    “팀장님만 내게 할 수 있나요. 제가 50만 원 내겠습니다.”

    오랜만에 지갑을 여는 김동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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