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돈 버는 게 예술이다-102화 (102/237)

102화. 20살, 열두 달, Twelve Months

2004년 12월.

폭설이 대한민국을 덮쳤다. 기상청은 3월에 내린 폭설만큼이나, 많은 눈이 내릴 거라고 예보했다.

“참 대단한 거 같아.”

승합차를 지지대 삼아 만든 천막 안. 윤희는 담요를 몸에 두른 상태로 한강의 열정에 박수를 보냈다.

“내가 이날을 얼마나 기다렸는데. 벌써 12월이란 게 아직도 믿기지 않는다.”

전보다 더욱 여유로워진 손은 검은 세상 안에 하얀 겨울을 그려나갔다.

발자국을 따라 코트를 입은 여성이 눈을 맞으며 겨울 바다를 감상하고 있었다.

새로운 해를 준비하는 듯한 분위기가 여성에게서 느껴졌다.

“시간 참 빠르다. 우리 희망이도 고생이네. 아빠의 열정을 너무 닮으면 안 될 건데.”

윤희는 배를 살살 만졌다. 처음보다 조금 부른 배는 안에 새로운 생명이 자라고 있음을 확인시켜 주었다.

“미안해, 나 때문에.”

“그런 사람이 매달 이렇게 오지?”

“이거 끝나면 여행 가자.”

“진짜?”

결혼하고 나서 매달 들르는 바다 외에 제대로 된 여행을 다녀와 본 적이 없었다.

“응.”

“그럼, 우리 따뜻한 나라로 가자.”

윤희가 기다렸다는 듯, 신난 얼굴로 속사포처럼 뱉어냈다.

보라카이, 괌, 세부, 하와이 등등 많은 여행지가 머릿속에 떠다녔다.

“그래. 다 가보자.”

“옙스!”

목적을 달성한 윤희의 얼굴은 뜨겁게 달아올랐다. 생각만 해도 좋은지 입꼬리가 귀까지 길게 찢어졌다.

“좀만 기다려.”

“응.”

윤희는 난로 위에 손을 가져갔다. 뒤에서 조용히 한강의 그림을 감상했다.

“정말 멋지다.”

윤희의 동공에 보이는 캔버스에 어느덧 해변은 눈으로 가득하게 채워졌다.

“끝났다.”

2004년 1월부터 시작된 12개월간의 대장정의 막이 내려졌다.

***

육성 미술관 리움.

“1년간 매달 바다를 가더니, 엄청난 걸 가져왔구나.”

열두 가지의 그림이 하나로 이어져 벽면에 한 줄로 채워졌다.

홍라혜는 하나로 연결된 그림의 향연에 흠뻑 취해 빠져나오지 못했다.

“해당 작품의 이름은 Twelve Months입니다.”

1월부터 12월까지 나열된 모든 그림이 있어야 완성이 되는 작품 Twelve Months는 한강이 준비한 역작이라 할 수 있었다. 윤희와 함께한 시간이 그림에 고스란히 녹았다.

함께 달리는 시간, 바다는 늘 그 자리에 있지만, 계절은 변화를 맞았다.

“정말 남에게 주기 아까운 작품이야.”

사위라서 하는 말이 아니었다. 여기서 더욱 놀라운 사실은 바다와 해변이 모두 하나의 그림이라도 되는 것처럼 매끄럽게 연결돼 있었다.

여기서 높은 점수를 주고 싶었다.

“장모님께서 흡족해하셔서 다행이에요. 이걸 그린다고 윤희가 많이 고생했거든요.”

“고생한 사람치고 아주 행복해 죽으려 하는데?”

한강의 팔을 꼭 붙잡고 있는 딸이 오늘따라 참으로 부럽게 다가왔다.

그러면서 딸을 늘 따스한 미소로 감싸주는 한강에게 고마움을 느꼈다.

“이 모습을 보는 게 제 낙이에요. 장모님.”

“호호. 회사에 출근하는 양반도 자네처럼만 했음 참 좋을 텐데..”

“장인어른에게 말씀드릴까요? 장모님이 원하고 있다고.”

“예끼! 하지도 마.”

한강의 장난에 홍라혜는 후다닥 나서 뜯어말렸다.

눈빛은 절대 용서하지 않겠다는 날 선 시선을 보냈다.

‘그런데 왜일까. 마치 바라는 듯한 저 눈빛은. 후후.’

이번 일에 대해 조용히 넘어가기로 하였다.

“그보다 이제 이 정도면 오픈을 해도 될 거 같은데, 자네 생각은 어떤가?”

작품은 몇 개 되지 않지만 1년간 준비한 작품은 그걸 채우고도 남았다.

“저도 장모님과 같은 생각이에요. 이제 오픈해도 될 거 같아요.”

그동안 한강이 원하지 않았기에 길을 통제하고 검은 천으로 막았었다.

이제는 그 모든 걸 치우고 사람들에게 작품을 알리고자 하였다.

“그래, 이건 내게 맡기게. 아주 잘 포장해서 소개를 해 보일 테니 말이야.”

세상 어디를 가도 자신의 사위만큼 뛰어난 남자도 없으리라.

홍라혜는 모든 일을 마치고 나가는 한강을 쳐다보며 흐뭇한 미소를 입가에 걸쳤다.

***

[육성 미술관 라움에서 그동안 숨겨왔던 새로운 공간을 개방하기로 하였다. 베일에 감춰진 한리버 유한강 대표의 작품이 돌아오는 12월 24일 크리스마스이브에 공개된다.]

하얀 여운이 세상에 감돌며 찬 바람이 가시지 않은 때, 한강의 작품 소식이 전파를 탔다.

“이건 보지 않고 그냥 넘길 수 없는 일 아니겠소.”

50대로 보이는 남자의 손에 초대장이 들렸다. 남자는 초대장에 적힌 글귀를 보던 시선을 옆으로 던졌다.

“당연하죠. 요즘 사업하느라 그림을 그리지 않는 줄 알았는데, 허허 무척 기대됩니다.”

다섯 살의 나이로 미술계에 등장한 신인 화가 유한강. 당시의 그림은 희소성을 띠고 사람들 사이에 거래가 이뤄지며 값을 더해갔다.

덕분에 한리버란 이름값은 자연히 상승선을 탔다.

“맞아요. 저도 그래요. 이번엔 어떤 작품으로 나를 놀라게 해줄지 내심 기대하고 있습니다.”

자리한 사람들은 모두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인사들.

그들은 곧 열릴 한강의 작품에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

“내 마음에 들길 바랄 뿐입니다.”

어느덧 둘의 시선은 한국에 자리한 육성 미술관 라움으로 향했다.

***

우글우글.

육성 미술관 라움 앞으로 사람들이 장사진을 이루고 있었다. 기자들은 한 장소에 모여 있었고 현관문 앞으로는 수많은 행렬이 이어졌다.

전 세계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이곳에 모여 있었다.

---문 개방합니다. 문 개방합니다.

문 앞에 대기하고 있던 직원들 귀에 착용한 이어폰으로 지시가 떨어졌다.

---초대장을 받으신 분들부터 입장, 기자들은 옆문으로 이동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문 개방합니다. 초대장을 가지고 계신 분부터 안으로 들이겠습니다.”

홍라혜는 미술관으로 진입하는 사람들의 장벽을 낮추는 데 크게 신경을 썼다.

누구나 마음 편히 드나들 수 있는 장소로 두었다.

오늘은 아주 특별한 날인만큼, 통제에 힘을 썼다.

“와! 유한강이다!”

누군가의 외침이 공기를 두들겼다.

사람들의 시선은 목소리의 주인공이 아닌, 다가오는 무리로 이어졌다.

“꺄아! 회장님 멋져요!”

“잘생겼어요!”

경호원들 사이에 끼어 현관문으로 이동하던 한강은 사람들 목소리에 고개를 숙여 보였다.

그러고선 손을 뻗어 좌우로 흔들었다.

와아아!

여자들이 두 손 들어 환호했다.

“좋겠다?”

가자미 눈으로 변한 윤희의 두 눈이 한강을 노렸다.

“질투는 하지 마. 난 네 옆이 아니면 안 되니까.”

“말은...”

그러면서 한강의 팔에 걸친 손에 힘을 주어 꼭 끌어안았다. 여자는 바로 옆에 남자가 있음에도 불안한가 보다.

“장인어른 오셨습니까.”

출입문을 지나자, 이건호 회장이 있었다.

“커험. 한강아, 이리 오거라. 미래 정 회장님이시다.”

인사를 받은 이건호는 옆에 붙어 있는 미래그룹 정지섭을 소개했다.

“유한강입니다.”

인사를 하는 데 크게 과장된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굵고 짧게 끊었다.

“우리 미래 자동차가 회장님 덕분에 참 힘듭니다. 다음번엔 우리를 위해 좋은 디자인을 뽑아 주셨음 합니다.”

정지섭은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그를 못마땅한 눈으로 슬쩍 쳐다보던 이건호는 한강에게 눈치를 주었다.

“기회 되면 미래를 위한 디자인을 드리겠습니다. 돈만 잘 쳐주신다면.”

“하하, 당당해서 좋습니다. 당연히 드려야지요. 육성과 같은 조건이면 얼마든지 드리겠습니다.”

이건호를 통해 그 밖의 재계인사들과 정치계 거인들을 만나 인사하는 시간을 가졌다.

“정말 부럽습니다. 이 회장님. 이럴 줄 알았으면 우리도 미술로 진출해 유 회장님과 안면을 트는건데 말입니다.”

JK그룹 이용범 회장의 목소리다. 이용범은 일찍이 한강과 인연이 닿지 않은 것에 아쉬움을 드러냈다.

“그래도 우리 딸의 남자가 되었을 겁니다.”

“하하하.”

이건호는 은근히 자신의 딸을 자랑하는 동시에 한강에 대한 신뢰를 보냈다.

“이쪽부터 저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는 방입니다.”

대화를 하며 걷는 사이 목적지에 도착했다. 한강은 대화를 자연스럽게 끊고 손을 뻗어 방을 가리켰다.

“호오......”

“허어......”

입장하는 통로 바로 앞에 윤희의 그림이 앞에 걸려 있었고 조금 더 지나 가장 넓은 벽면에 열두 개의 작품이 붙어 있는 그림이 걸려 있었다.

“1년간 준비한 Twelve Months입니다.”

한강은 바로 설명을 이었다.

“12개월이라... 왜 12개월인지 알겠군.”

“유 회장의 실력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만, 이건 엄청나.”

그림에 눈이 어두운 사람일지라도 지금의 그림을 본다면 누구나 엄지를 세워 극찬을 아끼지 않을 터다.

그 정도로 눈앞에 보이는 그림은 디테일을 시작으로 바다와 여인을 완벽하게 표현을 해냈다. 그리고 각 달로 이어지는 색상이 신기하게 잘 이어졌다. 검은색과 하얀색을 시작으로 파란 세상을 거쳐 울긋불긋한 가을에 이르기까지.

분명 작품마다 색이 다름에도 약간의 거부감없이 캔버스를 길게 펼쳐 이어붙여 그린 것처럼 느껴졌다.

“과찬이십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감상을 남기며 1월부터 시작해 12월까지 눈여겨봤다.

“우리 집에 두면 아주 잘 어울리겠어.”

“어허, 왜 이러십니까. 먼저 찜한 사람은 접니다. 이용범 회장님.”

정지섭은 양보할 수 없음을 확실하게 밝혔다.

“유 회장, 이거 얼맙니까. 내 좋은 값에 쳐 드리리다.”

뺏길 수 없던 이용범이 급히 나섰다.

자신이 보더라도 해당 그림은 작품성과 투자가치를 지니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전 이 작품을 당분간 아무에게 팔 생각이 없습니다.”

하지만 한강은 허리를 굽혀 거절 의사를 밝혔다.

“......”

이건호는 입을 다물고 지켜봤다. 함께 있는 윤희도 조용히 기다렸다.

“이유가 뭡니까?”

이용범이 물었다.

“제가 처음으로 아내와 함께 공유했던 시간을 그린 겁니다. 곧 태어날 우리 아이에게도 엄마와 함께했던 시간을 보여주고 싶습니다. 아마 이 그림은 그 뒤에 판매를 결정할 수 있을 거 같습니다.”

아빠로서, 가장으로서 아이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허허, 그런 깊은 뜻이... 더 고집을 부릴 수 없게 만드는구려.”

정지섭은 먼저 입을 열지 않기를 잘했다는 심정으로.

“팔 생각이 있다면 그때 미래로 연락 주세요. 2백억이든 3백억이든 후하게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기회를 노리지 않고 적극적으로 어필을 하였다.

“감사합니다.”

더는 한강에게 그림을 팔아달라는 사람은 자리에 없었다. 모두 입을 다물고 조용히 그림을 감상했다.

“......”

이건호는 아무 말 하지 않고 있었지만, 입가엔 작은 미소가 맺혀 있었다.

딸과 가족을 아끼는 모습이 그렇게 좋지 않을 수 없었다.

더욱이 막내딸이 얼마나 사랑을 받고 있는지 직접 볼 수 있는 계기가 되어 좋았다.

“쓸데없이 멋지단 말야.”

윤희는 옆에서 작게 속삭였다.

“후후.”

아내의 목소리를 들었지만, 한강은 모른 척 쓱 지나갔다.

오오오!

그때 조금 떨어진 장소에서 또다시 감탄이 터졌다. 한강의 시선은 해당 장소로 옮겨졌다.

‘대자연의 즉흥곡이 있는 곳.’

보성에서 쇼팽의 즉흥곡을 그림으로 표현한 작품이 있는 장소였다.

그곳으로 재계 회장들의 걸음이 옮겨지고 있었다.

“......!!”

“......!!”

한강의 걸음도 그곳으로 향했다.

“크흠.”

잠시 목을 가다듬던 한강은.

“이건 보성에서 한국인의 감성으로 표현한 대자연의 즉흥곡입니다. 안에는 제가 직접 친 쇼팽의 즉흥 환상곡이 담겨 있습니다. 원하시는 분께 판매하도록 하겠습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