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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버는 게 예술이다-89화 (89/237)
  • 89화. 20살, 미로슬라브 꿀띠쉐프와 연주하다

    “저 사람 누군지 알아요? 핸섬하게 생긴 게 딱 내 스타일이네.”

    “호호.”

    한강과 마주 선 외국 남성을 보며 사람들은 수군거렸다. 외국에서 제법 잘 나가는 부호의 아들로 비쳤다.

    여자들은 호감 어린 시선으로 외국 남성을 주시했다.

    “가서 물어볼까요?”

    그러다 한 여인이 슬며시 끼어들었다.

    눈매가 초승달을 그렸다.

    “그럼 예의에 어긋난 거 아닐까요.”

    “아쉽네요. 딱 내 취향인데.”

    관심은 가지만 접근하지 못하겠다. 범상치 않은 모습은 걸음을 조심스럽게 하였다.

    더욱이 함께 있는 남자가 육성그룹의 막내딸과 결혼하는 그 유한강이 아니던가.

    “인사해요. 이분이 제 아빠고 저분이 엄마입니다. 제가 얘기했던 미로슬라브 꿀띠쉐프예요.”

    사람들의 따끔한 시선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한강은 미로슬라브 꿀띠쉐프를 옆에 자리한 부모님께 소개를 하였다.

    “아, 그분!”

    미화가 크게 반색했다. 아들에게서 들었는지 아는 눈치였다.

    미화의 두 눈에 깊은 호감이 드리워졌다.

    “안녕하세요. 러시아에서 온 피아니스트 미로슬라브 꿀띠쉐프입니다. 유한강 씨가 누굴 닮아 외모가 출중한가 했더니, 모두 어머님 덕이네요. 매우 아름다우십니다.”

    정중한 자세 속에 우아한 멋이 깃들었다.

    한강의 입을 통해 통역되어 둘에게 전달됐다.

    통역하는 입매가 살살 떨렸다.

    “.....커험. 우리 핏줄이 좀 그렇지.”

    통역을 들은 덕화의 눈에 불만이 서렸다. 목소리가 살짝 뒤틀렸다.

    질투이리라.

    “......먼 타국에서 우리 아들을 축하해 주기 위해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타국에서 경조사를 챙기는 사람들이 몇이나 될는지. 하나 둘 셋 넷 다섯 명이나 되었지만,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덕화는 섭섭한 마음을 숨기고 기쁜 마음으로 미로슬라브 꿀띠쉐프를 반겼다.

    “눈이 참 좋네요. 고마워요. 호호. 이렇게 와주셔서. 이야기는 많이 들었어요.”

    심지어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을 챙긴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둘은 진심으로 고마운 마음을 전했다.

    그러면서 양 볼을 붉게 물들였다.

    “미로슬라브 씨, 이 타이밍에 부탁하기 뭣하지만... 제가 한 가지 부탁드려도 될까요?”

    인사를 끝낸 시점, 약간 미안한 얼굴이 되어 그를 바라봤다.

    “무엇이죠?”

    “처음 본 분께 이런 부탁을 드리기 정말 죄송하네요.”

    “편히 말하세요.”

    미로슬라브 꿀띠쉐프는 가볍게 웃었다.

    말만 하면 무엇이든 들어줄 눈치였다.

    “오늘부터 내 아내가 될 여자를 위해 작은 이벤트를 마련해 주고 싶어요. 저와 함께 피아노를 쳐주실 수 있을까요. 대신이라 말하기 뭣하지만, 대한민국 최고의 호텔인 이곳에서 머무실 수 있도록 도움을 드리겠습니다.”

    보상이란 말보다 도움이란 말을 사용하였다.

    부담스럽지 않게 하기 위한 조심스러운 접근이었다.

    “정말 저랑 치고 싶으신 건가요?”

    그런데 반응이 이상하다. 미로슬라브 꿀띠쉐프의 두 눈동자가 반짝반짝 빛을 뿌렸다.

    “......아, 네.”

    부탁은 자신이 했는데, 눈빛이 무척 부담스럽다.

    “그 영광을 저와 나눠주셔서 감사합니다.”

    통쾌한 승낙이었다. 미로슬라브 꿀띠쉐프는 두 손을 내밀어 하얀 장갑을 낀 한강의 손을 맞잡고 감사함을 전했다.

    “하하...”

    생각도 못 한 요상한 캐릭터.

    아무래도 피아노 귀신이 그의 몸에 빙의라도 했나 보다.

    ---잠시 후 신랑 유한강 군과 신부 이윤희 양의 예식이 진행될 예정이오니 하객 여러분께서는 자리에 착석하여 주시길 바랍니다.

    예식장 홀에서 안내 멘트가 들려왔다.

    “맨 앞쪽에 자리해 있다 사회자의 신호에 불이 잠시 꺼질 겁니다. 그때 피아노에 자리를 잡고 앉아 주시면 됩니다.”

    “이럴 줄 알았음 미리 와서 같이 연습을 할 걸 그랬네요. 그래서 곡은?”

    “쇼팽의 피아노 협주곡 2번입니다. 사전에 동의를 구했어야 했는데.”

    “다행히 제가 아는 곡이네요.”

    모를 수가 없었다. 어린 시절부터 웬만한 곡은 다 소화를 하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유한강과의 경쟁을 위하여 쇼팽에 미쳐 살았다.

    ‘역시 당신은 쇼팽을 사랑하는군요. 점점 기다려집니다.’

    미로슬라브 꿀띠쉐프는 묘한 미소를 입가에 걸쳤다.

    “잘 부탁합니다.”

    갑작스러운 부탁이었지만, 그라면 크게 문제없으리라 봤다. 세상천지에 이런 경우도 없겠지만, 오늘 벌어졌다. 한강은 식장에 들어서기 위해 옷매무시를 가다듬고, 미로슬라브 꿀띠쉐프는 안으로 들어가 자리를 잡았다.

    “지금부터 신랑 유한강 군과 신부 이윤희 양의 결혼식을 시작하겠습니다. 양가 어머님들의 점화가 있겠습니다.”

    김미화와 홍라혜가 나란히 서서 붉은 바닥을 밟고 앞으로 걸어갔다. 곱게 차려입은 한복이 식장에 꽃바람을 불러왔다.

    사람들의 박수 소리와 함께 촛불 위로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불이 밝혀졌다.

    “다음은 오늘 귀중한 말씀을 전하실 주례 선생님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주례는 예술협회장 박권수가 맡았다. 주변 지인들을 총동원하였지만 마땅한 사람이 없었다.

    그때 등장한 것이 박권수였다.

    [내가 봐드리면 안 되겠습니까? 회장님의 팬으로서, 인생 선배로서 뜻깊은 자리에 함께이고 싶습니다.]

    꽤 고민 끝에 주례 선생님으로 그를 선택했다.

    대단한 사람들이 모이는 자리이니만큼, 스스로의 업적을 내보이며 얼굴을 알리고 싶었으리라.

    어린 시절 도와준 것도 있고 하여, 윤희와 상의 끝에 결정을 하였다.

    “......둘에게 예술의 혼이 깃듦과 동시에 부부가 되었음을 이 자리를 빌려 선언합니다.”

    짝짝짝.

    한강도 윤희도 예술의 길을 따르고 있었다.

    박권수는 두 부부가 예술의 길을 걷고 있는 것에 행운이 따르길 바랐고, 귀엽고 건강한 아이를 낳아 평생을 웃음 속에 살아가길 기원하였다.

    “다음 순서로 축가가 있겠습니다. 축가는... 러시아가 낳은 천재 피아니스트 미로슬라브 꿀띠쉐프와 신랑 유한강 군이 함께 하겠습니다.”

    크게 떠진 윤희의 놀란 시선이 한강에게 머무른 때, 홀의 불이 꺼졌다.

    탁! 탁! 탁!

    그 순간 하얀 조명이 양쪽에 자리한 피아노를 비췄다.

    그리고 홀로 수줍게 서 있는 윤희에게 향했다.

    잠시간의 정적, 사람들의 시선이 피아노로 모아졌다.

    윤희는 도우미의 안내를 받아 거리를 벌려 한강과 미로슬라브 꿀띠쉐프를 바라봤다.

    따라란!

    오케스트라 도입부가 예식장에 설치된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왔다.

    그 순간, 딴!

    누가 먼저라 할 거 없이 마치 약속이라도 했다는 듯, 건반을 눌렀다.

    천재들의 연주가 시작됐다.

    젊은 쇼팽의 풋풋한 마음이 자유로운 잇단음표를 따라 홀 안을 채웠다.

    아름다운 선율 안으로 두 사람의 마음이 전해졌다.

    사랑, 우정, 행복.

    모두 하나로 모아 즐거움으로 변해 옛 추억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두 사람의 연주는 단숨에 홀 안을 지배했다.

    ‘즐거워, 이런 연주는 처음이야.’

    한편, 미로슬라브 꿀띠쉐프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단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던 설레는 감정. 유한강이 있기에 지금의 연주가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이 그의 머릿속을 채웠다.

    딴! 딴!

    피아노 소리로 가득하던 홀 안이 조용해졌다.

    음악으로 마음을 표현한 두 사람의 협주곡은 자리한 모든 사람들의 심장을 강하게 두들겼다.

    짝짝짝.

    연주가 끝나자, 모두 자리에서 기립하였다. 사람들은 너 나 할 거 없이 박수를 보냈다.

    “저와 함께해준 미로슬라브 꿀띠쉐프에게 감사를 전합니다.”

    사람들의 박수 속에 한강은 마이크를 들어 미로슬라브 꿀띠쉐프를 사람들에게 소개하였다.

    “러시아에서 온 피아니스트 미로슬라브 꿀띠쉐프입니다. 저의 영원한 경쟁자이자 라이벌이 될 유한강 씨와 그의 사랑 이윤희 씨의 결혼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그리고 다음번에는 쇼팽 콩쿠르에서 뵙길 바랍니다.”

    한강과 윤희에게 축하 말을 전한 미로슬라브 꿀띠쉐프는 자리에서 일어나 무대에서 퇴장했다.

    ‘정말 못 말리는 친구라니까.’

    한강은 그를 보며 씩 웃고는.

    “윤희야, 우리 행복하자. 나와 결혼해줘서 고맙다.”

    마지막을 장식했다.

    “신랑 신부 행진!!”

    2004년 5월 22일 토요일 1시 35분, 사람들의 축하 속에 두 사람은 부부가 되었다.

    부웅!

    둘은 고가의 긴 리무진을 타고 해외가 아닌, 국내를 20일간 돌아다녔다.

    서해를 따라 남해로 그리고 동해로 향했다.

    └ 김미나: 우리나라에 이런 곳도 있었음?

    └ 유지연: 나도 결혼하면 저렇게 할래!

    └ 나윤희: 무지 낭만적이다.

    └ 유지혜: 오빠 맛난 건! 시누이 무서운 줄 몰라!!!!!

    오션월드에 실시간에 올린 사진은 단숨에 사람들의 댓글 공간으로 변했다.

    둘의 신혼여행지는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져, 새로운 문화공간으로 자리매김하였다.

    ***

    한강과 윤희가 한창 신혼여행에 빠져 있는 날.

    └ 김두영: 와, 이 그림 쩐다... 뭔가 무섭기도 하고, 보기 좋기도 하고...

    └ 나영석: 뭔가 정치권에 보내는 경고 메시지 같은데?! 나만 그런 생각함????

    └ 은지윤: 나도 같은 생각함.

    오션월드에 올라간 그림은 사람들을 통해 이슈를 낳기 시작했다.

    [퍼간 사람 135,432명.]

    아주 잠깐 사이에 해당 사진은 3만 명이 넘어가는 사람들을 통해 세상에 빠르게 전파를 탔다.

    그리고...

    청와대로 ‘한리버 대표 유한강이......’란 이름으로 소포가 배달됐다.

    “이게 그 그림인가요?”

    1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퍼간 것도 부족해 빠르게 증가하는 숫자만큼이나 해당 소식은 청와대에까지 닿았다.

    16대 대통령 노지호는 뜯어져 있는 소포 안에 있는 내용물을 확인했다.

    “......”

    꺼내진 내용물은 예상대로 그림이었다. 그림 한쪽으로 사인이 되어 있었고, 그 아래로 작은 글이 적혀 있었다.

    [작품명: 부러지지 말고 갈대가 되어라.]

    “......”

    무언가 암시하는 듯한 그림과 내용이었다.

    노지호는 한참을 그림을 바라봤다.

    “나무는 나일 터이고 작은 나무는 가족을 의미하는가.”

    좌측과 우측의 그림은 같으면서 달랐다.

    좌측은 다 죽어가는 나무들인 반면 우측은 생기가 넘치는 이파리를 가지에 뻗치고 있었다.

    좌측 장면에 없는 거라면 꽃들과 나비들. 그 중엔 나무를 파놓고 안에서 새끼를 키우는 새가 있었는데 나무와 상생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돈으로 무너지는 나무와 상생하는 나무라......”

    노지호의 눈이 살며시 감겼다. 이를 어떻게 받아들일지 생각했다.

    압도적인 한나라당 세력과의 마찰은 그에게도 상당한 부담인 건 사실.

    숙적임에는 분명하다.

    그렇다고 하나, 대통령 입장에서 보자면 자신의 생각만을 국정에 녹일 수 없었다.

    “그림을 그려 내게 보낸 의도는 정치에 관여하기는 싫지만, 나와 나의 가족이 잘못된 길로 가지 않길 바라는 의미가 담겼겠지.”

    어떤 면에서 한 국가의 대통령보다 거대한 권력과 영향력을 행사하는 예술가이자 사업가.

    자신을 밀어주고 있는 가문의 여식과 결혼한 아이.

    “많은 걸 포기해야 할지도 모르겠구나......”

    그림을 잠시 바라보다, 인터폰으로 손을 가져갔다.

    “내일 모든 당 의원들을 소집하게.”

    결연함이 노지호의 두 눈가로 스며들었다.

    그의 엉덩이가 의자에서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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