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화. 20살, 1월을 그리다
2004년 새해가 밝았다. 동이 트는 하늘을 비추는 바다를 보며.
“새해 복 많이 받아.”
“응, 너두 새해 복 많이 받고 건강하고 우리 더 행복하쟘.”
새해 인사로 서로를 위해 주었다.
“추운데 그릴 수 있겠어?”
“해봐야지. 그리 오래 있을 것도 아니고.”
대충 시간은 한 시간 내지 한 시간 반 정도를 잡고 있었다.
준비된 자리로 걸음을 옮겨 엉덩이를 의자에 붙였다.
붉은 노을을 눈에 담아 머릿속에 그림을 그렸다.
“오길 잘했어.”
상상 속의 노을과 너무 닮아 있었다. 아름다운 풍경 속에 사랑하는 여인.
캔버스에 지금의 마음을 표현하고 싶다.
“자기야. 여기서 열 걸음 앞에 서 있어줘. 바다를 보고.”
캔버스 속의 주인공은 윤희.
“나?”
“응.”
“오, 날 그리겠다?”
“뒷모습을.”
“아깝네. 내 섹시한 옆태가 예술인데.”
“어여 가셔.”
“매정하긴.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열. 됐어?”
“오케이. 거기서 가장 편한 자세로 바다를 봐줘. 잠깐이면 돼.”
무릎을 굽혀 허리를 살짝 옆으로 꺾으며 말없이 웃으며 두 손가락의 검지와 엄지를 동그랗게 그렸다.
“하여간, 귀엽긴.”
입가에 행복감이, 눈동자에 애정이 묻어났다.
뒤돌아선 윤희를 잠시 바라보다 펜을 들었다.
세로로 세워진 캔버스를 반으로 나눠 펜으로 연하게 그었다.
마스킹 테이프를 선을 따라 가로로 붙였다.
“윤희를 중심으로 하늘과 바다를 담자.”
시야의 우측에 자리한 윤희를 잠시 응시하며 붓을 들었다. 하얀 입김이 공기 중에 흩어졌다.
까만 석고 가루를 입혀 만든 캔버스로 색을 입혔다.
1인치 붓에 엘로우 리퀴드 화이트를 섞었다.
검은 세상은 차츰 노랗게 물들어갔다.
밝은 곳에서 시작해 바깥쪽으로 붓을 밀어 하늘을 그려갔다.
노란 세상 끝으로 붉게 물든 빛들이 감쌌다.
밖으로 밖으로.
수평선과 맞닿는 지점까지 붉게 물든 노을을 표현했다. 손길은 거침없이 붓을 엑스자 형태로 움직이며 빠르게 밀어냈다.
검게만 보이던 세상에 빛이 생겼다.
삽시간에 멋진 하늘이 되었다.
타다다다닥.
클리너에 붓을 깊숙하게 담갔다 빼내어 고정된 기둥에 힘껏 털었다.
추위를 날려버리기라도 하듯 힘차게 털어냈다.
충분히 털어낸 붓을 티타늄 화이트에 가져갔다.
바깥으로 밀며 붓에 화이트를 충분히 묻혀 노랗게 칠한 중앙 자리에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며 덧칠했다. 이번에도 엑스자로 왔다 갔다 했다.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지 않았다.
붉은 아우라 중심에 자리한 노란 하늘 중앙으로 놀랍게도 거대한 태양이 떠올랐다.
몇 번이고 클리너에 붓을 담갔다가 화이트를 묻혀 해당 자리에 반복적으로 칠했다.
붉고 노란 세상을 비추는 태양은 더욱 뚜렷하게 변해 자리를 차지했다.
“구름은 검게 칠해서 회색이면서 하얗게 표현을 하면...”
눈부신 태양을 슬며시 가리는 구름. 구름은 노을의 옷이 되었다.
“해변으로 밀려오는 파도... 그 위에 윤희를 그리면...”
노을에 비치는 해변 위에 선 윤희의 아름다운 모습은 모든 그림의 중심이 되어 주었다.
파도에 먹히지 않도록 윤희를 뚜렷하게 그렸다. 검붉은 기가 감도는 파도를 느끼는 모습에서 평온하고 행복감이 느껴졌다.
앞모습을 그리는 것보다 뒷모습을 표현하는 게 더 어렵다고 했다.
표정 없이 감정을 느끼게 해야 하는 모든 걸 한강은 너무도 쉽게 해냈다.
“됐다.”
마스킹 테이프를 떼어냈다. 미끄럽게 스으윽 떨어지는 테이프 사이에 수평선이 생겼다.
모든 작업이 끝났다.
“끝났어?”
한강의 목소리에 등을 돌려 쳐다봤다. 추울 법하건만, 윤희의 얼굴엔 온기로 가득했다.
“응.”
“나 볼래!”
어느 커플이 바닷가까지 와서 그림을 그릴까마는 색다른 경험에 윤희는 마냥 좋았다.
어느 커플이 이런 남자친구를 두고, 이런 행운을 누릴 수 있을지. 세상에 있는 모든 남자를 합쳐도 그리 많지 않을 터다.
“우와!”
검게 칠해진 캔버스 판이 어떻게 변할지 무척 궁금했는데. 생각도 못 한 세상을 마주한 윤희의 얼굴 위로 놀라움이 떠올랐다.
“어때?”
윤희의 놀란 얼굴을 감상하며 잔잔한 미소를 걸쳐 물었다.
“정말 끝내준다. 특히 내 뒤태가 넘 예뻐.”
바람에 흩날리는 머리카락과 긴 원피스가 바람이 흐르는 방향대로 펄럭였다.
그림 속에 담긴 자신의 모습은 매우 아름답고 예뻤다.
잘빠진 아름다운 선 아래로 살짝 보이는 발목.
수줍고 부끄러워하는 모습도 얼핏 느껴졌다.
“뒷모습만으로 이런 게 느껴지는구나.”
몰랐다. 그런 걸 생각해 본 적도 없고.
그런데 한강이 그린 그림에선 그 모든 것들이 전달됐다.
“다행이다. 잘 전달된 거 같아서.”
윤희의 감상에 만족했다. 자신이 진정으로 담고자 했던 걸 정확히 캐치했다.
이 정도면 성공했다 볼 수 있으리라.
“응응. 넘 좋아. 그런데 이런 걸 열두 개나 그린다고?”
추운 것도 잊고 어질러진 주변을 정리하며 물었다.
“응, 뭐랄까. 우리가 매년 바다를 보지만, 늘 같은 바다만 봐왔잖아. 그걸 매달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고 싶단 생각을 해봤어.”
11월부터 2월까진 겨울 바다라 부르지만, 달마다 바라보는 바다의 감성은 달랐다.
3월부터 5월도 그렇고, 6월부터 8월. 끝으로 9월에서 10월의 가을까지.
같은 계절의 이름을 품고 있지만, 달이 바뀌는 시기마다 하늘과 바다는 미세하게 변한다.
그런 모든 장면들을 각 달과 계절에 맞게 표현하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
“천재 천재 하던데. 역시 천재 예술가는 다르구나. 바라보는 시점과 생각하는 것이.”
옆에서 듣는 남자친구의 생각과 감성을 공유하는 것만으로 좋았다. 하지만 더 좋은 건, 그 모든 걸 옆에서 듣고 볼 수 있다는 사실이다.
열정적으로 목표를 향해 달리는 폭주 기관차의 모습은 믿음이 갔고 신뢰가 갔다.
멋졌다.
“일도 끝냈고, 휴가도 냈으니 이제 우리만의 시간을 가져보자.”
아침이 밝았다.
2004년 1월 1일 첫해가 하늘 위로 떠올랐다.
***
한강이 윤희와 동해에서 시간을 보내는 날.
“이제 아이들 결혼식 날짜를 잡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사돈.”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아직 식도 올리지 않은 두 아이들이 함께 지내고 있기도 하고. 하루빨리 날을 잡았음 합니다.”
두 가문이 자리를 가졌다.
“저와 같은 생각이십니다. 저는 푸른 숲이 우거진 5월이 좋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건호의 배려 아닌 배려였다. 성장하는 기업으로 바쁜 요즘, 체제를 잡을 시간을 주기로 하였다.
“5월 좋네요.”
결혼 시기가 가장 많은 달 중 하나다. 식장은 이미 정해진 터라, 날만 잡으면 되었다.
“사부인은 어떻습니까?”
이건호의 시선은 옆으로 옮겨졌다.
약 20년 나이 차가 있지만, 예를 갖춰 물었다.
첫째 아들과 나이 차는 고작 네 살 차.
역대급이지 싶다.
“저도 좋아요.”
날이 좋은 날, 자식을 보낼 수 있다는 건 아주 큰 행운.
김미화는 매우 흡족한 얼굴로 대답했다.
“가만 보자, 일자는 언제가 좋을까.”
이건호는 품속에서 핸드폰을 꺼내 달력을 확인했다.
“22일 토요일로 하는 걸로 하지요. 식은 이쪽에서 준비를 할 테니, 사돈과 사부인은 편히 있으세요.”
한강은 60억이 넘는 고급빌라에 살림을 차렸다.
그렇다면 혼수와 결혼비용은 자신들이 맡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
또한 육성가로서 자존심이 달린 문제기도 하였다.
“편의를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덕화와 미화는 고개를 숙여 감사의 뜻을 전했다.
그렇게 한강과 미화도 모르는 사이, 결혼 일자가 정해졌다.
***
경제회복과 민생안정에 최선을 다하겠다는 정부의 신년사가 이어진 날, 이집트 민간 항공사 플래시 에어의 보잉 737 전세기가 홍해에 추락해 전원 사망하는 일이 발생했다.
2004년의 해의 시작은 무척 시끄럽게 시작됐다.
한편, 또 다른 장소에선.
“이걸 보시죠. 이 펜은 우리 마이크로에서 만든 혁신적인 제품이 될 겁니다. 이 펜 하나로 여기 PC에 모든 걸 그릴 수 있지요.”
“그게 무슨 혁신적인 기술인지 모르겠는데.”
총성 없는 전쟁이 벌어지려 하고 있었다.
스티브 잡스는 들려온 말에 콧방귀를 뀌었다.
갑자기 찾아와선 한다는 짓이 자랑이었다.
그것도 눈에 차지 않는 그런 물건을 가져와서는.
“오늘 이 집 스테이크가 참 연하네요.”
하지만, 남자는 아랑곳하지 않고 고기를 먹기 좋게 칼질하고 입에 넣었다. 입을 닫고 오물오물 씹었다.
“......”
그 모습이 마치 ‘네까짓 게 우리를 따라올 수 있겠어?’ 말하며 애플을 씹는 행동으로 느껴지게끔 하였다.
“식사 다 했으면 일어납시다. 서로 바쁜 거 같은데.”
스티브 잡스는 깨작깨작 먹는 남자의 모습에 더는 참지 못하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다 먹지도 않았는데, 벌써 일어나시면 어떡합니까.”
“......내 계산하겠소. 맛있게 먹고 가시오.”
더는 볼 거 없다는 듯, 등을 돌려 밖으로 나갔다.
“후후, 정말 맛있구만. 이 아까운 걸. 잘 먹겠습니다.”
남자는 나가는 스티브 잡스를 붙잡지 않고 멈췄던 칼질을 계속하였다.
비릿한 미소를 흘리며.
한편.
회사로 돌아온 스티브 잡스는.
“웃기는 자식. 감히 그깟 걸로 나를 무시해. 모두에게 전하세요. 진짜 태블릿이 무엇인지 마이크로에 보여줘야 할 겁니다. 우리는 절대 키보드나 스타일러스가 딸려 있어선 안 됩니다. 알겠습니까!”
스티브 잡스는 눈동자에 불길을 활활 태우며 마이크로 소프트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어 주리라 각오를 다졌다.
***
[인터넷 시장의 대격변이 벌어졌다. 한리버, 더움 커뮤니케이션 인수에 뛰어들다. 메신저에서 거대 포털 사이트로 진화하다.]
더움 커뮤니케이션을 인수하기 며칠 전 한리버의 소식은 업계를 넘어 세계를 충격에 빠트렸다.
아주 잠깐 사이에 두 거대 포털 사이트를 인수합병한 한리버의 저력에 두 눈을 의심했다.
[하락장이던 더움 커뮤니케이션이 합병 소식에 단숨에 10%를 돌파했다.]
주식 시작의 가격 제한 폭이 90년 이후 세 차례 변경됐다.
90년 초 6%대였던 가격 제한 폭(상한가, 하한가)은 96년 11월 24일 8%로 올랐고, 98년 3월 2일 12%를 거쳐 같은 해 12월 7일 15%에 이르렀다.
더움 커뮤니케이션의 소식은 내리닫던 네이컴의 주가에도 영향을 끼쳤다.
“쇼핑몰 수수료는 5%로 통합 운영합니다. 서비스가 미비하거나 신고가 많고 점수가 기준치에 미치지 못하면 서비스를 중단하겠습니다.”
합병 전 쇼핑몰 운영 기준을 정했다. 높게 책정된 수수료를 소폭 내려 영세사업자와의 눈높이를 맞추고.
“우수한 성적을 낸 기업 100곳을 지정해 1천만 원에서 1백만 원의 지원금을 주겠습니다. 해당 지원은 매달 이뤄질 것이고 해당 기준은 전월 대비 매출비율과 평점 만족도를 기준으로 뽑을 겁니다. 10위 이내에 든 기업은 3일간 우수기업으로 지정하는 한편, 한리버 메신저 광고가 나갈 겁니다.”
영세사업장을 위한 지원금을 약속했다.
또한,
“1000위 내 오른 모든 기업에 한 달간 수수료를 1% 감면한 4%만 받도록 하겠습니다.”
폭넓은 수수료 인하 정책을 미끼로 업체 간 경쟁심을 유도했다.
보다 폭넓은 품질과 가격경쟁을 위한 정책이었다.
“우리 한리버는 대한민국의 대표 사이트로 올라선 만큼 건강한 소비문화를 이끌어 나갈 것임을 국민들과 회원분들께 약속합니다.”
2004년 2월 13일.
더움 커뮤니케이션이 네이컴에 이어 한리버의 이름 아래 함께하게 되었다.
거대 포털 사이트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