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돈 버는 게 예술이다-69화 (69/237)
  • 69화. 18살, 쇼팽의 겨울을 알리다

    “이번 방송에 가장 적임자로 생각했습니다.”

    어떻게 말할까 하다 솔직하게 털어냈다.

    숨기고 예쁘게 포장한다고 좋게 들릴 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음? 제가 어딜 봐서 적임자죠?”

    한강의 두 눈에 짙은 호기심이 일었다.

    “굳이 노래를 부르지 않으셔도 되십니다. 대표님께서 잘하는 피아노를 치시는 것만으로 사람들은 큰 관심을 보일 겁니다.”

    꼭 붙잡겠단 결의가 느껴졌다.

    “저보고 피아노를 쳐달라, 이건가요?”

    “그렇습니다. 잘하시는 악기가 있다면 실력을 보이셔도 좋으리라 보입니다. 이번 방송을 타면 대표님과 회사에도 큰 도움이 되리라 봅니다.”

    짧게 던지는 질문과 길게 늘어지는 답변.

    서경욱은 긴장한 티를 내색하지 않으려 애를 썼지만, 말에서 전해지는 감정은 숨길 수 없었다.

    “그림에 이어 음악에까지 방송을 타게 될 줄 몰랐네요.”

    전생과 달리 찾아오는 경험들 속에 새로운 감정을 느꼈다. 한강은 잠시 생각하다 이윽고 입가에 미소를 걸쳤다.

    “좋아요. 섭외에 응하도록 하죠.”

    그리고 섭외를 수락하였다.

    “아, 감사합니다. 대표님.”

    “바쁜 시간 내주셔서 감사해요!”

    과연 될까? 싶었던 생각들.

    안 되면 몇 번 더 제안을 해보고 포기하려 하였는데, 단번에 섭외에 성공을 하였다.

    둘은 감격한 얼굴이 되어 연신 감사한 마음을 전하고 각자의 길로 떠났다.

    [KBC 윤지현의 러브레터 끝판왕이 새벽을 채운다. 감미로운 음색을 전해줄 이 시대 최고의 얼짱 유한강!! 그가 윤지현의 러브레터에 상륙한다!!]

    “와! 대박!!”

    “나 꼭 가고 싶다. 진짜 짱 좋아하는데.”

    한강의 섭외 소식이 세상에 뿌려졌다. 사람들은 TV에서 나오는 광고를 보며 기사 밑으로 댓글을 올려 관심을 표현하였다.

    “이번에 러브레터 나간다매?”

    윤희가 찾아왔다.

    “그리됐네. 왜, 싫어?”

    “아니, 내 남자의 피아노 실력을 영상으로만 보다 직접 볼 수 있다 생각하니 너무 기. 뻐. 서.”

    단 한 번도 앞에서 피아노를 연주한 적 없던 애인인 유한강.

    그 부분에 악센트를 강하게 주고 옥타를 올렸다.

    “하하. 그게 그렇게 섭섭했어?”

    “어머? 당연한 거 아냐?! 어떻게 여자친구인 내가 그걸 못 들을 수 있어?”

    자존심 때문에 숨기려다, 영영 듣지 못할 거 같아 솔직히 털어냈다.

    “그렇네. 미안. 생각 못 했다. 일로 와 봐.”

    한강은 윤희의 손을 잡아끌어 피아노방으로 데려갔다.

    “와... 세상에. 회사에 피아노가 있는 곳은 여기가 유일할 거야.”

    20평 남짓 공간에 배치된 검은색 피아노를 보며 윤희는 어이없는 시선을 한강에게 던졌다.

    “여기가 내 작업실이기도 해.”

    “대단하네. 누가 알면 한리버가 인터넷 회사가 아니라 음악회산 줄.”

    이런 곳이 있었으면서 부르지 않은 것에 삐짐을 제대로 표현하였다.

    “하하, 여기 앉아봐.”

    한강은 의자를 가져와 윤희를 앉혔다.

    피아노에서 한걸음 다섯 걸음 정도 떨어져 있었다.

    “이 노래를 제가 사랑하는 여자에게 바칩니다.”

    한강은 윤희를 보며 싱긋 웃었다. 삐져있던 윤희의 얼굴에 기대가 서려갔다.

    딴.

    건반이 눌러졌다.

    곧 익숙한 음이 방 안을 채웠다.

    “나 항상 그대를 보고파 하는데 맘처럼 가까울 수 없어. 오늘도 빛바랜 낡은 사진 속에 그대 모습 그리워하네.”

    이선희의 나 항상 그대를.

    한강의 중저음의 목소리에서 감미로운 소리가 방 안을 채웠다.

    “......”

    단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던 한강의 노래.

    프로 가수만큼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못 부르지도 않았다.

    오히려 잘 부르는 쪽.

    정말 못하는 게 없는 남자란 생각을 하며 심술궂던 얼굴에 봄꽃이 피어났다.

    “돌아와 그대 내게 돌아와 난 온통 그대 생각뿐이야.”

    한강의 시선이 윤희에게 향했다.

    드르륵, 의자가 뒤로 끌리며 윤희가 일어났다.

    “불같은 나의 사랑 피할 수 없어.”

    다가오는 윤희를 보며 한강은 미소를 지었다.

    바로 옆까지 이동한 윤희의 얼굴 보며.

    “오오 돌아와요.”

    마지막 가사를 뱉었다.

    “정말 사기야.”

    “그래서 별로였어?”

    “아니, 좋았어.”

    기분이 풀어진 얼굴은 세상에 모든 걸 다 가진 행복함을 품고 있었다.

    ***

    KBC 방송국 안으로 차량이 들어가 입구에 멈췄다.

    “KBC는 또 첨이네.”

    미국에선 몇몇 방송국을 구경해 본 적은 있었다.

    하지만, 국내에선 스튜디오 외에 어느 방송국과 인연이 닿지 않았다.

    “피디님 안녕하세요.”

    “좀 늦게 오셔도 되는데. 일찍 오셨네요.”

    “미리 와서 얘기도 듣고 무대를 둘러보고 싶어서요. 그래야 실수 없이 잘 끝나지 않겠어요.”

    “하하, 다른 유명 가수들도 대표님처럼 해주면 감사하겠네요.”

    신인 땐 자리 하나라도 가지기 위해 갖은 노력을 하는 가수들.

    하지만, 인지도가 오르고 몸값이 비싸지면 몇몇을 제외하고 본색을 드러냈다.

    게으르고 거만하고 버릇없는 싸가지.

    연예계에 있다 보면 별 X친놈들을 다 본다.

    한데, 그보다 훨씬 위에 있는 한리버 대표 유한강은 무척 겸손하고 예의가 반듯했다.

    “좋게 봐주셔서 감사해요.”

    “대표님께선 윤지현 씨가 소개하면 저곳에 배치된 피아노에 올라 연주를 하시면 됩니다. 그다음부터는 윤지현 씨 안내에 따라 저쪽으로 이동해서 자리에 앉으시면 됩니다.”

    서경욱은 한강을 무대로 안내하며 하나하나 상세하게 설명해 주었다.

    한강은 그 모든 걸 빠짐없이 머릿속에 넣었다.

    “실수하면 망신도 없겠네.”

    콩쿠르에 도전하기로 마음을 먹으면서 옛 감각을 찾기 위한 도전 무대로 정했다.

    짝짝짝.

    1시가 넘어가는 시간.

    박수 소리가 홀을 메운다.

    “예, 모두 기다리셨을 겁니다. 새벽의 감성을 흠뻑 적셔줄 분이죠. 세계에 미술로 이름을 알리고 사업도 승승장구하는 대한민국이 낳은 신의 아들. 유한강 씨 무댑니다.”

    한팀이 끝나고 윤지현이 다음 차례를 소개했다.

    꿀꺽, 사람들의 침 넘어가는 소리.

    기대로 가득한 시선이 한 장소로 향했다.

    사위가 어두워지고 하얀빛 한줄기가 피아노를 가리켰다.

    딴 따 따 딴 딴.

    천천히 띄엄띄엄 건반을 눌렀다.

    사람들은 숨을 참고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누군가는 피곤한지 하품을 하기도 하였는데.

    따라라라란!

    하품한 사람의 입이 급격히 닫히며, 두 눈이 크게 열렸다.

    급격히 빨라지는 선율에 놀란 마음도 잠시 귀를 활짝 열어 도망치는 선율을 쫓았다.

    쇼팽의 겨울바람.

    오른손은 쉬지 않고 움직이는 잔인하기 이를 데 없는 곡.

    실수가 있을 법하건만, 한강의 손은 건반 위에서 자유로이 춤을 추었다.

    프로 피아니스트들조차 힘겨워 연주회에서 기피하는 곡을 한강은 거리낌 없이 연주를 하였다.

    모두는 한강을 경악 어린 시선으로 바라봤다.

    그 안엔 윤지현의 놀라운 표정도 카메라에 실렸다.

    경쾌한 터치는 사람들의 심장을 훑고 지나갔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로테이션.

    호흡조차 조절하며 손은 쉼 없이 건반을 두들겼다.

    약 3분 50초.

    딴!

    곡이 끝났다.

    “후우.”

    한강의 작은 숨소리까지 음율이 되어 홀 안에 울릴 때.

    “와아아아아!”

    숨죽이고 지켜보던 사람들의 입에서 우레와 같은 함성이 쏟아졌다.

    “유한강 씨였습니다.”

    윤지현은 그 틈 사이에 목소리를 끼워 넣었다.

    “정말 멋진 곡이었어요. 어떤 곡인지 소개 부탁드려도 될까요?”

    마이크를 넘겼다.

    “겨울이 찾아와 준비한 쇼팽의 겨울바람이란 곡입니다.”

    “캬아, 정말 멋졌어요. 많은 분들이 피아노 치는 걸 봐왔지만, 어떻게 오른손과 왼손이 그렇게 따로 놀 수 있나요?”

    “연습하면 됩니다.”

    “하하, 기만은 나쁜 거 아시죠?”

    “하하.”

    한강의 대답에 윤지현은 재치있게 받아치고 넘겼다.

    “피아노는 언제부터 치게 되었나요?”

    “방송 때문에 미국으로 넘어간 적이 있는데, 그곳에서 피아노를 접하게 되었어요.”

    “다섯 살부터면 그림을 그립시다를 방송하면서 피아노를 쳤다는 거네요?”

    “네.”

    “어쩌다 두 가지를 같이 하게 되었는지, 이유라도 있나요?”

    윤지현의 질문에 한강은 잠시 눈을 감았다.

    예술을 찾아 헤매던 시절이 있었다. 남자가 아름다운 여자를 좋아하듯, 예술이란 미를 찾기 위해 많은 걸 도전했다.

    시작은 그림이었고, 그림은 음악으로 바뀌었다.

    그건 돈이란 형태로 변화를 거쳐, 지금에 이르러 소비가 되었다.

    ‘그 모든 걸 말할 순 없겠지.’

    정리를 마친 한강은 눈을 떴다.

    “예술이란 이름 자체에 매력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제 자신이 예술이 되어보자는 생각에 두 가지를 동시에 하게 됐어요.”

    “의외의 답이네요. 어린 나이에 무게 있는 답이었어요.”

    “애늙은이란 말 많이 들어요.”

    하하하.

    애늙은이란 말에 사람들은 크게 공감하며 웃었다.

    ---잘생겨서 괜찮아요!!!

    어느 여성의 목소리에 다시 홀 안은 웃음바다로 변했다.

    윤지현의 인터뷰에 성실하게 답하던 때, 어느새 시간은 2시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시간 정말 빠르죠?”

    아!

    사람들의 아쉬운 목소리가 홀 안을 흔들었다.

    하지만.

    “유한강 씨의 마지막 곡을 듣고 물러나겠습니다.”

    윤지현은 끝나지 않기를 바라는 사람들의 마음을 배신했다.

    ***

    [KBC 윤지현의 러브레터에 쇼팽이 찾아오다. 유한강 한리버 대표의 실력에 유명 피아니스트들도 박수를 보냈다.]

    [“교과서를 넘어선 선곡에 깊게 감탄했어요” “정말 강심장이네요” “제가 그 자리에 없었다는 것이 크게 후회로 남습니다.”]

    “정말 굉장해. 얘는 천재야.”

    미로슬라브 꿀띠쉐프는 올라온 동영상에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당장이라도 튀어나갈 거 같은 표정이었다.

    “네가 말한 아이가 얘냐?”

    그때 뒤에서 들려오는 또 다른 목소리.

    미로슬라브 꿀띠쉐프는 시선을 돌려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향했다.

    “네, 선생님. 얘가 바로 제가 말한 천재예요.”

    선생님이라 불린 중년 남성의 시선이 화면으로 향했다.

    “호오.”

    쇼팽의 겨울바람을 너무도 쉽게 연주하는 모습에 크게 감탄했다.

    “정말 대단하죠? 실수가 하나도 없었어요.”

    미로슬라브 꿀띠쉐프는 마치 자신이 치고 있기라도 한 듯,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대단하구나.”

    ‘너도 저만큼 치잖느냐.’라고 말하려던 걸 참고 영상에 집중했다.

    미로슬라브 꿀띠쉐프만 보더라도 다시 없을 천재라 생각했는데, 영상 속의 주인공 또한 천재라 부르기 아깝지 않았다.

    테크닉도 그렇고, 기교도 그렇고 나무랄 데 없는 완벽한 실력이었다.

    “15회 쇼팽 콩쿠르에서 보자 했어요.”

    “라이벌이 있다는 건 아주 좋은 일이지. 잘해 보거라.”

    “네, 선생님.”

    중년 남성은 잠시 미로슬라브 꿀띠쉐프를 보다 자리를 떴다.

    ‘유한강이라...’ 중년 남성은 자리를 뜨며 조용히 유한강의 이름을 되뇌었다.

    한편.

    미로슬라브 꿀띠쉐프: 안녕하세요. 미로슬라브 꿀띠쉐프입니다. 겨울바람 감명 깊게 잘 들었습니다. 제 편지를 받으셨을지 모르지만, 전 15회 쇼팽 콩쿠르에서 당신을 만날 날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미로슬라브 꿀띠쉐프는 오션월드 홈페이지에 들어가 해당 영상 밑에 댓글을 등록했다.

    자신의 이름을 기억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꼭 함께 콩쿠르에서 연주를 하자는 메시지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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