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17살, 사업개시
할인된 금액으로 정리할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한강의 입장에서 봤을 때, 엄청난 손해를 감수하고 매도하는 거였으니까.
“그 웃음은 해주신다는 의미로 받아들여도 되겠죠?”
“그걸 전부 현금으로 받을 생각은 아니겠고. 어떻게 정리를 할 참이냐?”
“일단 3조2천억은 현금으로 받고, 나머지는 생명, 자동차, SDI, SDS, 물산 등에 나눠서 넣어 놓을게요. 정확한 숫자는 과장님과 협의하면 되겠죠?”
“허허, 시원해서 좋구나. 그런데 말이다.”
“어, 깎는 건 없습니다. 아버님.”
한강은 즉시 차단하고 나섰다.
“말한 건 지키니. 걱정 말거라. 그게 아니라 궁금한 게 있어서다.”
“그럼 다행이네요. 말씀하세요.”
“... 왜 버디버디에 관심을 가지는지 알 수 있을까? 난 이게 궁금해서 말이다. 이유를 듣고 싶은데.”
“음, 아주 간단해요. PC 보급률은 계속 증가하고 있어요. 덕분에 인터넷과 게임 시장은 큰 호재를 만끽하고 있죠.”
“그리고?”
“전 그 부분을 생각해서 다른 건 또 뭐가 있을까 생각을 해봤어요. 그리고 찾아낸 게 바로 소통이에요.”
“소통...”
“핸드폰으로 문자로 주고받는 건, 한계가 명확해요. 전화도 마찬가지죠. 다 돈이거든요. 그럼 사람들은 이걸 해소하기 위해 무엇을 찾을까요? 바로 채팅 사이트와 메신저예요. 그래서 전 이 메신저에 제 인생을 바치기로 했어요. 그 시작은 버디버디가 될 거예요.”
2000년 화려한 데뷔를 한 버디버디는 2012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추억의 메신저가 된다.
“버디버디에 인생을 걸겠다는 건, 육성 자동차에 들어가지 않겠다 이 말로 들리는데 맞느냐?”
한강은 졸업하는 순간 육성 자동차 기획팀 자리에 앉게 되어 있었다.
적당히 경력과 실적을 쌓는 과정을 거쳐, 대표 자리까지 약속이 되어 있는 지금.
그 자리에 관심이 없음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저 아직 열일곱 살이에요. 하고 싶은 게 많은 나이죠. 그게 사업이 되었을 뿐이고요.”
고집이 깃든 눈이 이건호에게 향하고.
“흠......”
이건호는 못마땅한 시선으로 방어모드에 들어갔다.
“아버님의 숙원을 이뤄드렸어요. 외환위기도 슬기롭게 이겨냈고, 육성은 다시 없을 황금기를 누리고 있어요. 2위 그룹인 미래와의 격차도 엄청 벌어졌죠.”
한강의 강한 어택!
“......”
컨트롤의 귀재로 떠오른 입담은 이건호의 디펜스를 와장창 깨트렸다.
마지막은 전략이고 뭐고 없었다. 모든 물량을 토해내 방어기지가 뚫릴 때까지 화력을 쏟아냈다.
“정당한 거래를 통해 달러를 거래했지만, 제가 나쁜 마음을 먹고 미래나 엔지에 줬다면 또 얘기는 달라졌을 거예요.”
1997년 당시 달러의 파괴력은 일당백이었다.
부르는 게 값이라 할 정도로 모든 기업과 은행들은 달러를 원했다.
그것을 어떤 경쟁도 없이 ‘가족’이라 생각해 육성과 거래를 하게 되었다.
“에잉, 정말이지. 맘에 안 들어. 단 한 번을 안 지려 하는구나.”
끝내 이건호는 짜증을 냈다.
머리가 커질수록 다루기가 점점 어려워졌다.
“네 좋을 대로 하거라.”
“너무 섭섭해하지 마세요. 제 사업은 언제고 육성 자동차에 큰 도움이 될 거예요.”
삐뚤어질 테다 모드로 들어간 이건호의 모습에 한강은 슬며시 웃었다.
“도움을? 버디버디가?”
“네, 당장은 보잘것없는 메신저에 지나지 않지만, 곧 깜짝 놀랄 일이 벌어질 거예요.”
“이해가 안 되는군.”
“3년이면 됩니다. 그 정도면 왜 버디버디가 최고가 될 수밖에 없는지 보여드릴게요.”
자신만만, 위풍당당.
단 한 번도 비굴한 모습을 보이지 않고, 논리와 확실한 계획을 가지고 앞으로 전진했다.
“......”
이건호는 지긋한 시선으로 한강의 얼굴을 바라봤다.
‘정말 모를 일이야.’
속을 읽을 수 없었다.
어디서 이런 건 또 배워와서는, 골이 당겨오게 만들었다.
“그래서 부탁이 있어요.”
“......?!”
요구하는 모든 걸 차버리고, 부탁이 있다는 말에 황당함이 눈동자에 서렸다.
“SDS가 가진 네이컴 지분 10% 저에게 주세요.”
“뭐라? 그걸 네 녀석에게 달라?”
세상에 양아치도 이런 양아치가 없었다.
“저 육성전자 주식 너무 아깝습니다.”
얼굴에 억울한 표정이 역력하다.
“그건 이미 끝난 얘기 아니더냐.”
“끝났지만, 계획에도 없던 걸 매도하니 참...”
“안 된다.”
이건호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정말요?”
‘역시 안 되나. 쩝’ 입맛을 다셨다.
“안 돼.”
‘안 될 걸 알면서 찔러 본 거니, 다른 걸로 가보자’ 계획을 틀었다.
“그럼 나중에 그 지분을 이용할 수 있게 해주세요.”
“왜 갑자기 네이컴 지분을 원하는 거지? 버디버디로 사업해 네 실력을 증명하겠다 하지 않았나?”
“네, 그렇긴 한데, 제 계획 안에 네이컴도 있어서 그렇습니다.”
계획을 솔직히 털어냈다.
큰 비밀도 아니었고.
쉬운 길을 머리를 써가며 어렵게 갈 생각은 없었다.
“당최 알 수 없어. 대체 뭘 생각하고 있는 건지.”
버디버디와 네이컴 두 회사의 연결고리를 찾지 못하겠다.
무슨 이유로 저리 집착을 하는지.
이건호는 다시 생각에 빠졌다.
“전화 한 통만 해주세요. 이 정도만 해주시면 아까 말씀드렸던 건들은 두 번 다시 꺼내지 않을게요.”
“정말이냐?”
감았던 눈을 떴다.
‘이 전쟁을 끝낼 기세’가 눈에 담겼다.
“네. 남자가 한 번 뱉은 말을 번복할까요?”
지금껏 단 한 번도 한 입으로 두말한 적은 없었다.
약속은 반드시 지키자.
이것은 사업이든, 인간관계든 반드시 가져야 할 마음가짐이다.
“좋다. 내 그 정도는 해주도록 하지. 다시 그 얘기를 꺼낸다면...?”
“육성 자동차로 입사하겠습니다.”
“...... 좋다.”
참으로 영악한 놈이다. 이건호는 고개를 끄덕여 도와주기로 하였다.
“나머진...”
“김 과장님과 끝내겠습니다.”
“... 그래. 나가보거라.”
축객령을 내렸다. 한강은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고는 밖으로 나갔다.
“휴... 또 당했어.”
방에 남은 이건호는 매번 한강의 흐름에 말려드는 자신을 책망했다.
그것도 잠시.
“나 육성 이 회장이오...”
이건호는 수화기를 들어 네이컴 대표에게 전화를 하였다.
사위에 대한 애정을 증명했다.
***
저벅저벅.
“이쪽으로...”
육성그룹 회장실을 벗어난 한강은 김광석의 안내를 받아 그룹 소회의실로 걸음을 옮겼다.
“생각은 해보셨습니까?”
한강이 자리를 잡자, 김광석은 종이와 펜을 내밀며 물었다.
“네, 대화를 하면서 생각을 해봤는데, SDS 3%, 자동차 10% 물산 1% 모직 1% 나머지 생명, 에버랜드, SDS, 석유화학, 백화점, 호텔 등은 알아서 쪼개 매수해 주세요.”
한강은 특정 기업은 직접 언급하고 나머지는 김광석 과장에게 맡겼다.
‘회장님 죄송합니다. 네이컴 대신 가져갈게요.’
말을 번복하지 않겠다 그랬을 뿐.
최소한의 보험은 필요하다 여겨, SDS 지분을 좀 챙기기로 하였다.
‘이것 또한 보고를 통해 아시겠지만, 이 정돈 해주시겠지. 지분 조정하라고 한다면 조정을 해야겠지만...’
SDS 지분 3%는 이건호에게 보내는 한강의 메시지였다.
네이컴 지분을 꼭 가져가겠다는 무언의 시위(?).
뭐 그런 의미가 담겼다.
“이대로 진행하겠습니다.”
“네, 나머진 부탁할게요.”
어쨌거나 원하는 바를 이뤘다.
다음 행선지는.
“버디버디다.”
그 후 네이컴이 되리라.
***
육성그룹 회장실 안에서.
딱딱.
소리가 들렸다.
“...... 흠.”
이건호는 건네받은 종이에 적힌 내용을 보며 검지를 위에서 아래로 반복으로 움직여 소파 팔걸이를 두들겼다.
“따로 한 말은?”
침묵을 지킨 채, 손가락만 움직이던 이건호의 입이 열렸다.
“없었습니다.”
입이 열리기를 기다리던 김광석은 즉시 대답했다.
“참 영악하고 욕심도, 야망도 적당하고 지킬 선도 너무 잘 알아.”
자기 밥그릇은 확실히 챙기는 아이다. 한계점도 명확하게 알고 있다. 동시에 자신이 어떻게 움직여야 최소한의 방어를 할 수 있는지 방법도 아주 잘 알았다.
‘SDS야 의도가 분명한데... 모직과 물산... 이건 그냥 운일까?’
딱 지목해서 정했다는 게 무언가 찝찝했다.
‘아니야. 그럴 린 없지. 이 사실은 재진이와 나만 아는 사실인데. 녀석이 어디 가서 떠들어 댔을 놈은 아니야. 그리고 어차피 알게 될 사실... 문젠 없겠지.’
두들기던 손가락을 거두고 자세를 고쳐 잡았다.
“이대로 진행해.”
어차피 가족이 될 녀석이고 욕심을 부릴 부분에만 확실하게 표현을 하였다. 이 정도면...
“알겠습니다.”
봐줄 만했다.
***
[육성 자동차 지분 10%, 유한강(17) 군에게 가다.]
[유한강(17) 군이 육성 자동차 대주주가 되었다. 업계에선 유한강(17) 군이 가까운 미래에 육성 자동차를 책임지게 될 것이라 내다봤다.]
“이거 외엔 더는 욕심 부리지 말란 의미로 받아들이면 되겠지?”
기사엔 다른 지분은 상세하게 공개하지 않고, 오로지 육성 자동차에 포커스를 맞추었다.
증권 쪽에선 공시를 한 거 같기는 한데, 너무도 조용했다.
“확실히 무서운 분이라니까. 꽤 얻어먹었으니, 나중엔 내 쪽에서 좀 나눠주는 게 좋겠어.”
아무리 좋은 사람이라도 계속된 손해는 좋았던 정도 사라지게 만든다.
다음엔 얻은 이익만큼 돌려주는 게 앞으로를 위해서 좋았다.
“지혜야! 지연아!”
신문을 옆으로 치운 한강은 침대 위에 누워 두 여동생의 이름을 크게 불렀다.
“왜!”
지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목소리에 귀찮음이 가득했다.
“네에!”
뒤를 잇는 지연의 목소리.
발소리가 들리는 걸 보니, 방으로 들어오는 소리였다.
“무슨 일이에요. 오빠?”
지연은 문을 열고 고개를 빼꼼 내밀어 물었다.
“지혜는?”
“화장해요.”
“쯧쯧. 둘한테 할 말 있는데, 지혜 좀 데려와 주라.”
“넵!”
지혜와 달리 지연은 말을 매우 잘 들었다.
방실방실 웃으며 거실로 향했다. ‘지혜야, 오빠가 오래. 할 말 있다고, 가자.’ ‘아씨, 진짜.’ 목소리가 들렸다.
“어쭈, 내 말은 안 들어도 언니 말은 듣는다 이거지?”
흐흐흐. 한강의 입가에 잔인한 미소가 맺혔다.
“오빠, 데려왔어요.”
지연의 수줍은 미소와.
“왜!”
아주 사랑스러운 지혜의 짜증을 들으며.
“팔이 안 닿아서 그런데, 불 좀 꺼줘.”
한강은 말했다.
그것도 아주 당당하게 이불을 몸 위로 올리며.
“...짜증 나!”
지혜의 짜증과 분노가 방에 퍼지고.
불이 꺼졌다.
“...... 너무해요.”
그런 와중에 지연의 실망한 목소리가 흐릿하게 공기를 탔다.
“크크, 녀석들.”
‘앞으로 절대 불러도 안 들어가!’ ‘오빠가 이상해졌어.’ 등등의 목소리가 거실에서 들려왔다.
한강은 둘의 목소리를 들으며.
“공공의 적은 둘 사이를 더욱 돈독하게 만들어주는 법이지. 암. 앞으로도 둘이 사이좋게 잘 지내길 바란다. 귀여운 동생들.”
한강은 기분 좋게 침대 위에 몸을 눕혀 눈을 감았다.
쿠우울, 곧 숨소리가 한강의 입에서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