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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버는 게 예술이다-52화 (52/237)

52화. 17살, 이건호의 부름

[Y그룹에서 시공한 골프장 잔디가...]

“이 기사 어떻게 된 거지?”

이건호는 아래쪽 끝단에 작게 실린 기사를 보며 미간을 모았다.

“지금 조사 중에 있습니다.”

공사비만 1천억이 넘게 들어갔다. 일반 잔디 품종보다 단가도 1제곱미터당 1, 2천 원 정도 더 비쌌다.

겨울에도 강한 잔디로 유명한 품종이 녹색 빛을 잃고 흙바닥이 고스란히 보였다.

[...관계자들은 “한지형 잔디치고 상태가 좋지 못하다.” 말해...]

기사에서 언급한 관계자의 태도는 무척 조심스럽다.

“그걸 묻는 게 아니야. 내 회사에서 벌어진 이 일이 자연적인 현상으로 보이느냐, 그걸 묻는 거야.”

이건호의 눈에 의심이 깃들었다.

다른 곳은 멀쩡한데, 왜 유독 저곳만 그럴까?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지 않은가?

바보가 아니고서야,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당장 말씀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김종식 비서실장은 말을 아꼈다. 아직 제대로 확인된 건 없었다.

그런 상황에 자신의 생각을 꺼내는 건, 무척 조심스러운 일이었다.

자신의 한마디에 애꿎은 사람에게 피해가 갈 수 있었고, 생각 이상으로 일이 크게 부풀려질 소지가 있어 고개를 숙이는 걸로 대답을 대신했다.

“조심스러운 겐가?”

“확인되는 대로 보고 올리겠습니다.”

“쯧... 오늘 윤희가 한강이를 만난다고 했던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혀를 쯧 차고는, 주제를 막내딸과 한강에게 맞췄다.

“...그렇습니다.”

“알았네. 이만 나가보게.”

축객령을 내렸다.

이건호는 수화기를 들어 번호를 눌렀다.

“나다, 오늘 사위 만난다고. 만나면 내게 들르거라. 잠시 얘기 좀 할 게 있어 그러니. 기다리마.”

수화기가 내려졌다

이건호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손으로 기댄 채 눈을 감았다.

***

4월의 봄바람이 따스하게 부는 때, ‘딩동댕동’ 모든 수업 종료를 알리는 종소리가 전 학년에 퍼졌다.

와아아아.

아이들은 저마다 가방을 챙겨 교실을 떠났다.

길고 지루하고 피곤한 시간에서 해방감을 느꼈다.

저벅저벅.

“한강아 숙제 같이 할래?”

미나와 한강이 일정한 거리를 두고 하굣길에 올랐다. 미나는 미술 시간에 내준 숙제를 떠올려 손가락을 꼼지락대며 조심스럽게 한강에게 물었다.

“그건 좀 힘들 거 같아. 선약이 있어서.”

“선약? 그래, 어쩔 수 없지.”

미나는 아쉬운 얼굴을 감춘 채, 애써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한강에게 좋아하는 감정을 들키지 않기 위한 행동이었다.

입학하자마자 선화예고 신입생 중 5대 얼짱으로 떠오른 것 치고 무척 소극적인 자세를 취했다.

끼리릭.

정문을 막 벗어날 무렵, 학교 정문 앞으로 잘 빠진 외제 승용차가 멈춰 섰다.

하굣길에 오른 아이들은 가던 길을 멈추고 시선을 차량에 고정됐다.

“......?!”

미나는 무슨 일인가 싶어 걸음을 멈춰 차를 바라봤다.

“야, 타.”

유리창을 아래로 내려갔다. 차량 안으로 잘 차려입은 세련된 미모의 여성이 얼굴을 비쳤다.

“어, 누나. 왔어? 미나야. 나 먼저 갈게. 낼 보자.”

“...어, 어.”

뒤도 돌아보지 않고 차량에 오르는 한강을 보며 미나는 얼빠진 눈으로 지나가는 차를 바라봤다.

“미나야, 미나야. 방금 저 차 뭐야?”

뒤에서 눈치를 보며 뒤를 따르던 여학생들이 달려와 물었다.

“나도 모르겠어. 누나라던데... 한강에게 누나가 있던가?”

미나의 두 눈에 불안한 감정이 스며들었다.

아이들은 저마다 한강과 여자와의 관계에 관심을 가지며 떠들기 바빴다.

“갑자기 무슨 일? 늘 주말에만 봤으면서.”

“흥, 옆에 예쁘더라?”

한강이 질문을 던졌지만, 날아오는 건 답변이 아닌 비꼬는 말투의 말이 돌아왔다.

“후후, 그거 질투? 아, 여기로 입학하라 했던 예쁘고 섹시하고 귀여운 분이 누구더라.”

하나, 한강은 장난스러운 미소를 입가에 걸쳐 윤희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됐거든?”

윤희는 새침한 얼굴로 한강을 노려보다 시선을 앞으로 가져갔다.

“유치원 때 친구야. 설마, 저기서 만날 줄 몰랐네. 내 영향을 받아, 미술을 시작하게 됐대.”

“......친했어?”

“당시 나를 잘 따랐지. 내가 팔던 야쿠르트도 사서 먹던 애였어.”

“...너어?”

“어허, 나 못 믿어?”

“널 못 믿는 게 아니라, 네 외모를 못 믿는 거다. 에휴... 내가 어쩌다...”

윤희는 고운 아미를 찡그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걱정 마셔. 연하 동갑보단 연상이 더 편하고 좋으니까.”

이제 알맹이는 70대.

뭘 어떻게 따져도 한강에겐 모두 연하에 지나지 않았지만, 역시 취향은 연상이었다.

“어련하실까.”

“그래서 어디가?”

“아, 오늘 아빠 회사.”

“엥? 데이트를 아버님 회사에서 하겠다고?”

“그건 아니고 오늘 너 본다니까, 회사 들렀다 가래. 너한테 물어볼 것도 있고.”

“음, 가보면 알겠지.”

“뒤에 옷 있으니까, 옷 바꿔입어.”

“눼이.”

지금 한강의 옷은 교복, 윤희는 챙겨온 옷을 한강에게 가리키며 회장실에 들어가기 전에 갈아입길 주문했다.

쌀쌀하게 불던 차 안 공기의 온도가 상승해 봄 공기를 전해주었다.

차량은 회색 도심을 지나, 육성그룹 본사가 있는 도곡동으로 향했다.

구 공군 사격장 부지를 사들여 지상 102층, 최고 396m 높이의 마천루를 건립하여 복합 육성타운을 조성했다.

96년 초에 착공에 들어가 작년에 완공되어 본거지를 옮겼다.

띵동.

엘리베이터가 열리며 한강과 윤희가 나란히 내려 회장실로 향했다.

“사위 왔는가.”

“딸은 안 보여요?”

딸보다 한강을 먼저 맞이하는 이건호의 모습에 윤희는 퉁명스레 말을 뱉었다.

하나 어느 누구도 기분 나쁘게 생각하지 않았다.

한강의 옆에서 떨어지지 않은 채 화사하게 웃고 있는 윤희를 욕할 사람은 최소한 이곳엔 없었다.

“자, 앉지. 윤희야 커피 좀 타오겠니.”

자리에 앉기 전 이건호는 윤희를 시켜 다과실에서 커피를 타오라 일렀다.

“한강인 쌍화차?”

“나도 커피 줘요. 3.2.3으로.”

말을 편히 부르던 한강은 이건호 앞이라 존칭을 사용했다.

“달게 먹네. 알았어.”

“아비는 안 물어보냐?”

“2.0.1. 아녜요?”

“2.1.1로 해 다오.”

“...네.”

어이없는 시선을 던지다, 이내 다과실로 향했다.

“저에게 하실 말씀이 있나 보네요. 윤희 누나 눈치도 백 단이라 커피는 십 분 뒤에나 마실 수 있을 거 같으니 편히 말씀해주세요.”

갑자기 부르더니 들어오자마자 윤희를 떼어 놓았다.

그렇다는 건 할 말이 있다는 의미.

한강은 자세를 잡고 귀를 앞으로 가져갔다.

“이래서 너무 똑똑한 사람들과 대화하면 재미가 없어.”

흥이 떨어졌다.

이건호는 입맛을 다시다,

“이걸 먼저 보거라.”

하얀 종이들이 수북하게 쌓인 결재판 위에 올려진 신문을 앞으로 밀었다.

“음...”

한강은 위로 보이는 신문 기사를 살폈다.

“......?”

쭉 읽어 내려가던 눈이 한 지점에서 멈췄다.

[Y그룹 최근 시공한 골프장 잔디가 겨울이 지나자 대부분 시들었다. 참으로 볼품없는 모습이다.]

[약 1천 제곱미터에 해당하는 지역 전부가 노랗다. 업계에 따르면 겨울철 추위에도 견디는 고급 품종으로 우리나라의 기온에서는 절대 시들 수 없다고 한다.]

[그렇다면 왜 시들었을까?]

[필자는 이를 Y사의 비리를...]

“이것 때문이군요. 저를 부르신 이유가.”

작게 나 있는 기사지만, ‘Y’가 가리키는 기업은 누가 봐도 육성이었다.

신문 기사로 향하던 시선을 위로 올렸다.

“그걸 본 네 생각은 어떠냐?”

김종식 비서실장에게 했던 질문을 한강에게 물었다.

늘 새로운 시각으로 세상을 보는 아이다.

김종식을 바라보던 시선과 달리 안에는 어떤 기대감이 담겨 있었다.

“말씀드리기에 앞서 아버님은 혹시 이걸 내부 비리로 의심하고 계신 건가요?”

신문에 실린 사진에 시선을 둔 한강에게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한강의 시선은 곧 위로 올려져 이건호에게 향했다.

“그렇다.”

이건호는 짧게 대답했다.

“그러면 이게 비리로 벌어진 일이라면, 어떻게 하실 건가요?”

취조를 하는 듯한 분위기, 유한강은 이 부분을 심도 있게 다뤘다.

“음...”

“성급한 생각은 육성의 이미지에 흠집을 만들 수 있어요.”

유한강은 여러 가지 가능성을 머리에 심어두다 하나씩 좁혀갔다.

“뭔가 찾아낸 것이냐?”

이건호가 눈을 빛냈다.

또 어떻게 자신을 놀라게 할지 기대가 되었다

“의심되는 건 몇 가지 있는데, 혹시 골프장이 어떻게 시작됐는지 아시나요?”

“그걸 내게 묻는 것이냐?”

이건호는 골프광인 만큼 그에 못지않게 꽤 해박하다.

그런 그에게 기초적인 질문을 묻는다니.

조금은 기분이 상하는 일이었다.

“말씀해주세요.”

“들판에서 하게 됐지. 그것이 발전해 지금에 이르게 됐고.”

간단하면서 명료한 답변.

“네, 맞아요. 골프는 자연에서 하는 게임인 만큼 경관을 엄청 중요하게 따지죠. 거기에 난이도라는 게 생기면서 벙커, 나무, 해저드 등 많은 부분이 발달했어요.”

한강은 부족한 답변에 살을 붙여 말을 이었다.

“거기서 해저드는 비가 오면 물을 담아두거나, 가물 때 물을 끌어다 쓰는 용도로 쓰이죠.”

끄덕. 이건호도 아는 내용이기에 고개를 가볍게 흔들어 수긍했다.

“제가 보기에 초기 공사부터 잘못된 거 같아요. 그런 역할을 하는 해저드가 없어요. 공사비를 아끼기 위해 대충 만든 것도 같고. 아니면 난이도를 낮추기 위해 그런 부분을 고려하지 못한 걸로 보여요.”

‘물론, 비리도 있겠죠. 공사에 비리가 빠지면 재미없죠’ 이 언급은 피했다.

모근 건 이건호의 판단에 달렸다.

한강은 그저 자신의 생각을 고할 뿐이다.

“음...”

전적으로 육성의 잘못이 아닌, 설계에 오류를 범한 곳의 잘못으로 떠넘겼다.

이건호의 얼굴에 드러난 고심이 깊어 보였다.

“제가 알기로 잔디만 육성이 손을 대고 나머진 다른 시공사가 맡은 걸로 알아요. 만약 맞다면 이걸 적극적으로 알려 난이도를 높이는 한이 있더라도 공사를 완벽히 끝낸다면...?”

부릅!

고심하던 이건호의 얼굴에 놀라움이 깃들었다.

이번엔 정말 놀랐다는 눈으로 한강을 응시했다.

“어떻게 그런 사실을 아는 거지?”

“저도 골프 좀 쳐보려고 공부했어요, 그 과정에서 자연히 익히게 된 것뿐이에요.”

“정말 믿을 수 없군.”

“모든 문제는 기본에서 나온다 생각했을 뿐이에요.”

기본을 지키면 문제가 없지만, 사람은 욕심에 눈이 멀어 기본을 등한시한다.

왜? 당장 눈에 보이는 건 손실이 아닌 이득이기 때문이다.

“아주 좋은 말이야. 네가 정말 많은 이들을 바보로 만드는구나.”

“제 말이 틀렸을 수 있어요. 그냥 제 생각을 얘기한 것뿐이에요.”

“아니다. 아니야. 충분한 답이 되었어.”

펴지지 않던 입가가 팽팽하게 펴졌다.

정말로 해가 거듭될수록 대단한 아이란 생각이 들었다.

“커피 드세요.”

15분 정도 지난 시점, 윤희가 커피가 들린 쟁반을 들고 테이블 앞으로 다가왔다.

“고맙다.”

“잘 마실게요.”

이건호는 가져온 커피잔을 들어 코에 가져가 향을 느꼈다.

‘이제 몇 년 남지 않았어.’

한강의 독보적인 성장을 만끽하며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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