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화. 13살, 새로운 시작을 위한 졸업은 2001년으로
그이를 사랑했다. 함께 있는 것만으로 너무 좋았다.
술을 마실 때면 사람이 돌변하는 단점은 있었지만, 그 정돈 충분히 감내할 수 있으리라 봤다.
하지만, 그건 바람에 지나지 않았다.
딸아이가 여섯 살이 되던 해, 남편의 사업이 망했다.
엄청난 빚더미에 오른 남편과 이혼하기로 하였다.
가지고 오기 싫은 양육권을 억지로 떠안았다.
할 일 없이 밥만 축내고 울기만 하는 딸아이가 미웠다.
인생에 도움이 안 되는 딸로 인해 돈을 벌어와도 제대로 모이지 않았다.
[혹시 몇 살이세요? 남자친구 있어요?]
그러는 와중 남자가 접근해왔다. 꽤 잘생긴 남자였다.
술을 마시자 했다. 그간 스트레스가 쌓인 상태.
몇 번 보지 않은 남자와 술을 마시고 밤을 보냈다.
우리는 급격히 가까워졌다.
그런 과정에서 새로운 사랑이 찾아왔다.
어떻게 하지?
딸아이가 걸렸다.
그이는 내게 딸 아이가 있는 줄 모른다.
걸릴까 두려웠다.
지금의 행복을 망치고 싶지 않았다.
[버리자. 누군가 데려갈 거야.]
버리기로 하였다.
날이 좀 춥지만, 누군가 데려가리라 봤다.
마침 주변에 자원봉사자들이 드문드문 보였다.
[지숙아, 여기서 기다려. 엄마가 지숙이 좋아하는 치킨 사올게.]
거짓말이었다.
잠바 주머니에 만 원을 넣어 놓고 자리를 떴다.
이제 행복만이 기다릴 줄 알았다.
“왜 나는... 나는...”
성실해 보이던 남자는 양아치였다. 결혼하고 한 달도 안 되어 본색을 드러냈다.
“왜 이딴 새끼만... 으아아아!!!”
억울하고 불행만이 가득한 삶이 저주스럽다.
가스도 끊겼다.
있는 거라고 술이 다였다.
“혜림아, 언니야. 나 오십만 원 빌려줘. 담 달에 갚을게. 응? 진짜로...”
당장 먹고사는 게 문제였다.
잔고는 곧 바닥.
어떻게든 월세라도 내야 집에서 쫓겨나지 않았다.
“됐어. 끊어!”
‘직장도 없는 게 뭔 돈’ 그 소리에 전화를 끊었다.
“아, 어떡하지...”
빌린 돈만 있지, 사실 갚은 곳은 단 한 군데도 없었다. 더는 돈을 빌릴 곳이 없었다.
똑똑.
“......?”
혼란스러운 상황에 울리는 노크 소리.
빚쟁이라도 온 건가 싶어 소리를 내던 입을 틀어막았다.
“안에 계신 거 압니다. 지숙이 어머님.”
“......?”
익숙한 이름에 화들짝 놀랐다.
어떻게 잊고 산 딸아이의 이름을...
걸리면 안 된다.
“누구세요. 사람 잘못 찾아오셨어요.”
이제 지숙은 딸이 아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딸은 없었다.
그렇게 되어야 했다.
***
“......”
안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덕화는 황당함을 감출 수 없었다.
‘미X년’이란 단어가 머릿속으로 떠올랐다.
간신히 욱여넣고 나오려는 욕을 참았다.
“다 들었습니다. 저와 거래를 하신다면 이 자리에서 계약금으로 2백만 원을 드리죠. 제 말을 따라 주신다면 8백만 원를 더 드리겠습니다.”
가장 깔끔한 방법.
돈을 사용하기로 하였다.
저런 여자에게 돈을 쓴다는 것 자체가 싫었지만, 이것만큼 확실한 방법은 없다 여겼다.
끼이익.
열리는 문.
돈은 제 역할을 충분히 해냈다.
“무슨 일이죠?”
“......지숙이 어머님 맞으시죠.”
“먼저 돈부터 주시죠.”
“......”
‘세상이 대체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이렇게 뻔뻔할 수 있나 싶었다.
덕화는 수표 두 장을 꺼냈다.
“2백입니다... 그 전에 동의부터 해주셔야 합니다.”
돈을 가져가려 뻗는 손을 보고는 돈을 뒤로 뺐다.
“...뭐죠?”
“난 지숙을 내 딸로 받아들일까 합니다. 친권 양육을 포기한다는 조건입니다. 전 재판을 통해 법적인 절차를 밟을 겁니다. 거기에 동의를 해준다 약속하시면 계약금 2백에, 양육권이 온전히 넘어올 시 추가로 8백을 드리죠.”
“그 말 정말인가요?”
“네.”
“... 2천을 채워주면 그렇게 하죠.”
“좋아요. 그러죠. 대신 계약금은 50만 원으로 하도록 하죠.”
“그게 뭔 말이에요!”
“중간에 말을 바꾼다면, 저만 손해니까요.”
여자는 딸보다 돈에 집착했다. 그녀의 모습에 덕화는 이를 악물었다.
“언제죠?”
“이쪽에서 연락을 드리죠. 차량도 지원할 테니 그걸 타고 오면 될 겁니다.”
“좋아요. 그 말 지켜요.”
“...정말 당신이란 인간... 아닙니다. 그때 봅시다.”
덕화는 말을 더 잇는 것도 아깝다 여겨 등을 돌렸다.
‘벌 받을 X’이라 욕하며 걸음을 옮겼다.
“......1998년 2월 2일 월요일, 부모 권리를 박탈한다.”
지숙은 본 부모로부터 자유로운 몸이 되었다.
재판은 덕화와 미화의 뜻을 받아들여, 양육권을 넘겼다.
“우리 다시는 보지 맙시다.”
약속대로 지숙의 친모였던 여성에게 1950만 원을 주고 더는 지숙의 앞에 나타나지 말라 일렀다.
이후 김지숙은 유지연이 되어 등본에 올랐다.
호구처럼 돈은 잃었지만.
“오늘부터 넌 우리의 딸이고 가족이란다. 지연아.”
“내 동생이 되어줘서 고맙다.”
예쁜 새 딸이 생겼다. 그리고 동생이 생기고 언니가 생겼다.
모두 새로운 이름을 얻어 식구가 된 지연을 따스하게 안아주었다.
***
“잘 있거라 아우들아 정든 교실아. 선생님 저희들은 물러갑니다. 부지런히 더 배우고 얼른 자라서 새 나라의 새 일꾼이 되겠습니다.”
며칠 뒤, 한강의 초등학교 생활이 끝났다.
“오빠 축하해요!”
“오빠 이거!”
지숙과 지혜가 꽃다발을 한강에게 건넸다.
“고맙다. 둘 다.”
한강은 기쁘게 받아들었다.
“선배님!”
“오빠!”
“한강아.”
그간 함께했던 친구와 후배들의 축하를 받으며 경기 초등학교의 마지막을 장식했다.
“소망 식구들 모두 새로운 보금자리로 이동했습니다.”
끝으로 소망 보육원의 이사가 마무리되었다. 교사들의 밀린 월급을 해결해주고 전문 회계사를 채용해 보육원 회계를 맡게 하였다. 모든 자금을 수시로 투명하게 공개할 것을 주문했다.
[육성그룹 보육원 아이들의 미래를 책임지다. 소망 보육원에 10억 투자...]
얼마 뒤 육성그룹의 보육원 투자 소식이 세상에 알려져 그늘진 한국에 희망의 빛줄기가 되어 주었다.
모두가 어려운 현시점에 유일하게 보육에 과감히 투자한 육성에 박수를 보냈다.
비리, 이득, 장사꾼 집단으로 인식되던 육성의 이미지가 한 꺼풀 벗겨졌다.
시간은 흘러.
1998년 11월 겨울.
[육성 자동차 신차 YS5 출시, 경성 자동차 이미지 옷을 벗어 던지다. 외제 차를 떠올리게 만드는 자동차 디자인은 세련미와 고급스러움을 더해준다. 세계로 뻗어 나가겠다는 포부가 자동차에서 느껴져...]
[YS5 디자이너는 유한강(14) 군으로...]
[한 달 만에 판매 대수 1만 대 넘어서다. 미래 자동차 소나타 넘어서다!]
내수에서 연 11만대를 판매고를 올리던 소나타가 YS5에 밀려났다. 사람들은 파격적인 디자인에 전율을 느끼며 육성 자동차 영업소를 찾았다.
1999년 육성 자동차 YS5는 국내 동급 자동차 중 올해 가장 많이 팔린 차로 기록됐다.
[올해 자동차 YS5가 1999년 IDEA 금상 수상...]
육성그룹은 외환위기를 기회로 삼아 자동차를 인수하고 성공적인 데뷔를 이어 황금기를 맞이했다.
이 효과는.
“통장에 돈이 불어나네... 좋구나.”
[잔액 360억 원.]
자동차 디자인 로열티 1.5%는 한강의 부를 확 늘려주었다.
쌓여가는 부를 즐겁게 바라보며 공부에 매진하던 한강의 나이는 어느덧 17살이 되었다.
모든 방송 활동을 잠시 접고 공부에 전념해 청운 중학교에 전설을 남겼다.
청운 중학교에 입학해 2000년에 이르기까지 모든 시험을 단 한 문제도 틀리지 않고 평균 올백 타이틀을 거머쥐고.
2001년 3월 5일.
“나랑 같은 학교 선후배 하면 짱 좋을 거 같은데. 울 자기는 어때?”
“것도 나쁘지 않겠네.”
윤희의 강한 추천에 의하여 선화예술고등학교로 입학을 결정했다.
“... 학생으로서 본분을 다할 것을 엄숙히 선서합니다. 2001년 3월 5일 월요일 신입생 대표 유한강.”
신입생 대표로 구령대 위에 선 한강은 결연한 의지를 담아 외쳤다.
***
“진짜 짱 잘생겼다.”
“와...”
남녀비율 9대1인 선화예고 서양화 1학년 1반 교실.
“......”
여학생들의 시선이 창가에 홀로 앉아 있는 한강에게 시선이 집중됐다.
“어떡해, 나 봤어.”
“아냐, 나 본 거야.”
교실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밖에서 모여 떠드는 여자아이들까지 한 남학생에게 사모하는 눈빛을 보냈다.
“......”
하얗고 뽀얀 피부.
오뚝한 콧날에 쌍꺼풀이 있는 매섭지만 선해 보이는 눈.
정중앙에서 양옆으로 갈라진 가르마 머리.
아이돌보다는 인기 영화배우 느낌을 풍기는 남자는 바로 유한강이었다.
어느덧 키는 182cm.
“하아...”
핏기로 물든 붉은 입술이 벌려지며 좌절의 한숨이 밖으로 뱉어졌다.
“설마... 나 혼자라고?”
[같은 학교 나오면 좋겠다.]
윤희의 이 한마디가 문제였다.
전생에 다니던 곳이 경복 고등학교였기에, 약혼녀인 윤희의 소원을 들어줄 겸 겸사겸사 선택한 곳이 선화예고였다.
“그나저나 정말 걱정이군. 내가 과연 3년을 잘 버틸 수 있을까...”
느껴지는 시선들을 느끼며 한강은 고개를 떨궜다.
그때였다.
“어, 쟤 뭐야? 뭔데 쟤한테 다가가는데.”
“어머어머.”
귓가로 여학생들의 부정적 감정이 담긴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번엔 또 무슨 일인가 싶어 궁금함에 내렸던 고개를 들어 시선을 움직였다.
저벅저벅. 갑자기 위로 그림자가 비친다.
“응, 으응?!”
한강의 시선이 위로 올라갔다.
웬 여학생이 쑥스러우면서도 반가움이 듬뿍 담긴 눈으로 내려보고 있었다.
“오랜만이야.”
여학생에게서 의미심장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한강의 두 눈동자는 멍청하게 변했다.
“저 누구...”
초등학교부터 중학교까지 통틀어 처음 보는 여학생이었다. 한데 말 속에 담긴 뜻은 자신과 아는 사이임을 담고 있었다.
“...참뜻 유치원 이미나.”
“......!!”
들려온 목소리에 한강은 깜짝 놀랐다.
동그랗게 떠진 두 눈은 자신을 미나라 소개한 여학생의 얼굴에 고정됐다.
“네가 이미나?! 정말로 이미나라고?!”
“PBS 그림을 그립시다 보라매.”
“와, 반갑다. 미나야. 완전!”
보조개가 참 예쁘던 아이가 생각난다. 미국으로 가던 날, 가장 많이 가장 서럽게 울던 친구.
그녀를 선화예고에서 그것도 같은 반 교실에서 마주했다.
“사람을 오징어로 그리던 애가 서양화 전공이라니. 정말 반갑다.”
“네 영향이 컸어. 나도 그림을 그리고 싶더라. 너처럼 되고 싶기도 했고...”
‘그림을 그리면 널 만날 수 있지 않을까 생각도 했었고’ 속마음을 조심히 감췄다.
“그랬구나. 하하.”
우연도 이런 우연이 있을까 싶었다.
한강은 거리낌 없이 예전 미나를 대하듯, 손을 잡고 크게 흔들었다.
‘/////’ 미나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하나, 한강은 그것도 모른 채 하하 웃었다.
수군수군.
주변에서 들려오는 질투 어린 시선과 목소리가 오갔지만, 둘에게 있어 그건 크게 신경 쓸 문제는 아니었다.
“모르는 거 있음 부담 없이 물어봐. 내가 알려줄 수 있는 건 알려줄게.”
“으, 응. 고마워. 나 이만 자리로 가볼게.”
후끈 달아오른 얼굴을 매만지며 미나는 급히 자리로 돌아갔다.
그러나 그녀의 얼굴엔 한강은 볼 수 없는 미소가 머물렀다.
이것과 별개로 한강은 한 가지 생각에 다른 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최소 조건 클리어. 이제 내가 하고 싶은 걸 할 수 있게 됐어.’
그간 생각만 해온 사업, 이제 할 수 있게 되었다.
그 시작은 바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