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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버는 게 예술이다-47화 (47/237)

47화. 13살, 슬기로운 외환위기 생활 (3)

“윤희야, 나 좀 보자꾸나.”

딸 방에는 잘 들어가지 않던 이건호가 조심히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엇, 네.”

깜짝 방문에 윤희도 놀란 눈치였다.

“시험준비는 잘되어가?”

“과외 선생님들이 잘 알려주셔서 큰 무리는 없을 거 같아요.”

윤희는 이제 고3. 수능반이었다.

성적은 나쁘지 않은 수준.

윤희로서 만족하고 있었다.

“그거 다행이구나. 내 너에게 할 말 있어 왔다.”

무뚝뚝한 음성이지만, 안에는 애정이 담겨 있었다.

“네, 말씀하세요.”

조금은 삐딱한 자세를 고쳐 바로 앉아 귀를 기울였다.

“한강이를 어떻게 생각하느냐? 동생이 아닌 남자로서 말이다.”

비록 열세 살 어린 나이지만, 남녀 사이에 그건 큰 장애가 되지 않았다.

“설마...?”

무언가 떠오른 단어에 윤희의 얼굴 위로 붉은빛이 떠올랐다.

“난 네가 한강이와 결혼했으면 하는구나. 너의 마음도 중요하겠지만, 난 그 아이를 내 사위로 받아들이고 싶다.”

이건호는 분명하게 자신의 뜻을 밝혔다.

답을 정해 놓고 묻는 꼴.

재벌의 핏줄로 태어난 자녀들의 미래는 가문의 주인에 의하여 결정됐다

윤희라고 그걸 피해갈 수 없었다.

하지만, 이건호는 막내딸의 생각을 들어보고자 하였다.

“...저야 괜찮지만, 한강이는 아직 어리기도 하고... 예 그러니까 걔 생각도 들어봐야 하고...”

갑작스럽게 날아든 질문에 윤희는 횡설수설하며 고개를 제대로 들지 못했다.

늘 활기차고 당당하던 딸의 모습.

‘녀석하고는’ 이건호는 슬며시 미소를 지어 작게 안도했다.

자신의 생각이 맞았음을 윤희의 말 속에서 찾아냈다.

“너도 한강이만 좋다면 하겠다는 말이겠지?”

“아, 네. 음. 네...”

“당장 결혼을 하라는 건 아니다. 그 아이가 성인이 되는 시기에 맞춰 할 뿐, 약혼으로 미리 약속을 하잔 의미니 부담을 가질 필요 없다.”

한강의 나이 열세 살, 스무 살까지 약 6년 2개월가량 남았다.

아무리 재벌이라 하더라도 성인과 미성년자의 결혼은 사회적으로 눈치가 보였다.

윤희가 미성년자일 때 한강과 약혼을 시켜 육성의 사람으로 만들고 이후 성인이 되는 시점에 한강과 결혼을 시켜 완벽한 ‘내사람’으로 거두기로 계획을 잡았다.

“네...”

“그래, 고맙구나.”

이건호는 막내딸의 어깨를 가볍게 토닥이고 밖으로 나갔다.

“......”

책상으로 돌아가 앉은 윤희는.

“거절하면 어쩌지...”

문제집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

미래 자동차 그룹.

“육성에서 그 아이를 품을 생각인가 봅니다. 알아본바 이건호 회장이 한강 군과 자주 자리를 가진답니다.”

미래그룹 전략실장 양호영은 지금까지 조사한 모든 내용을 미래그룹 정지섭 회장에게 보고했다.

“그 그림을 육성이 가져갔을 확률은?”

“100%입니다. 나올 땐 빈손이었습니다.”

미래 전략팀은 모든 정보를 육성에 집중해 이번 인수한 경성 자동차와의 경쟁을 대비했다.

그러던 차 앞으로 향하게 될 미래 목표가 그려진 그림이 공모전에 나왔다. 그것도 모두가 익히 잘 아는 아이에게서.

어떻게든 그림의 소유권을 얻으려 하였는데, 보기 좋게 날아갔다.

“그렇다면, 그 아이라도 우리가 채용해야 해. 이번에 육성에 신차를 디자인했다지? 우리도 그 아이에게 디자인을 받게. 육성이 그랬다면 그만한 디자인을 냈을 터. 우리가 꼭 잡아야 할 아이야.”

“...알겠습니다. 바로 나서겠습니다.”

미래그룹 정지섭 회장의 지시가 떨어졌다.

앞으로 미래 자동차의 위협이 될 육성 자동차와의 경쟁의 키를 한강이라 결론 내렸다.

***

[나다. 오늘 너를 봤으면 하는구나. 네 아빠에겐 말해뒀단다.]

뚜뚜.

“음...”

이건호의 전화였다.

한강은 끊어진 수화기를 한동안 바라봤다.

“한강아, 무슨 일인데 그래?”

“이건호 선생님이 보자고 하시는데, 분위기가 묘해서요.”

사람은 어떠한 큰 결정을 내릴 때, 목소리에 힘이 들어간다. 자연히 따라오는 무거운 분위기.

거기서 한강은 알 수 없는 묘한 기분을 느꼈다.

“얘는. 회장님이 잡아먹기라도 하실까. 지금 나가?”

“네. 바로 보자고 하시네요.”

“그래, 잘 다녀오고.”

미화의 얼굴에 알 수 없는 감정이 눈동자에 잡혔다.

하나, 한강은 그것을 보지 못하고.

“네.”

밖으로 나갔다.

“아저씨, 오늘은 무슨 일이에요?”

“이번엔 땡깡을 부려도 말해줄 수 없습니다.”

“......”

전에 당한 게 있어 그런지 최동욱은 초반부터 강하게 나갔다.

그에 한강은 한 방 당했단 표정을 지었다.

“궁금증은 잠시 뒤로 미뤄보도록 하죠.”

쿨하게 포기했다.

여기서 더하면 스스로에게도 마이너스기에.

차량은 어느덧 육성그룹 사옥으로 접어들었다.

딩동. 드르륵.

엘리베이터 문이 좌우로 열렸다.

“혼자 들어가시면 됩니다. 저는 여기서 대기하겠습니다.”

최동욱은 깍듯한 자세를 취하고 뒤로 물러났다.

주변에 자리한 직원들도 그런 모습을 당연시 여겼다.

똑똑.

“선생님, 한강입니다.”

그들의 시선을 담담히 받아내고 문을 두들겨 안으로 들어갔다.

“잘 왔다. 이리 오거라.”

티타임을 가지며 휴식을 취하고 있던 이건호는 손짓으로 자리에 앉을 걸 권했다.

“보리차네요.”

“구수하니 좋구나. 한 잔 주련?”

“집에서 많이 마시는 거라, 전 이거면 될 거 같아요.”

테이블 위에 음료수가 놓여 있었다. 한강은 그걸 끌어와 뚜껑을 땄다.

“허허.”

한강을 보노라면 본래부터 재벌 가문의 핏줄처럼 보였다.

어리숙해 보이지만 모든 행동에 여유가 넘쳤다.

더욱이 자신과 독대를 하면서도 조금도 떨지 않았다.

너무 태연해 대통령 손주라도 온 것처럼 여겨졌다.

“맛있느냐?”

“맛으로 먹나요. 심심해서 먹죠.”

“...넌 내가 불편하지 않으냐?”

“선생님은 제가 불편하세요?”

되묻는 화법.

한강의 전매특허가 발현됐다.

“에잉, 됐다. 내 무슨 말을 못 하겠구나.”

“선생님이 절 불편해하시지 않는 만큼, 저도 선생님을 불편해할 이유가 없다는 거예요. 그걸 말씀드리고 싶었어요.”

은은한 미소를 흘려, 엄숙해지려는 분위기에 활력을 넣었다.

“그만 웃거라. 그러다 나까지 네 녀석에게 반할라. 난 남자는 취미 없다.”

머쓱한지 이건호는 시선을 쓱 옆으로 돌렸다.

‘무슨 남자가 저리 예쁜지’ 작게 중얼거렸다.

어림에도 이 정도인데, 나중에 큰다면...

충분히 막내딸이 반할 만하였다.

“그런데 오늘따라 선생님 표정이 좋아 보이세요. 어떤 기대를 하고 있는 것도 같고. 저와 관련된 뭔가 있나 보네요.”

“눈치 하난 빨라. 물론, 네 대답 여하에 따라 내 기분은 180도 달라질지 모르겠다만.”

돌렸던 시선을 가져와 한강을 쳐다봤다.

겉과 달리 속은 매우 긴장하고 있었다.

한강의 성격에 비추어 볼 때, 한 번 아닌 건 절대 받아줄 리 없었기 때문이다.

“말씀해 주세요.”

“큼... 거절하면 보복이 있을지 모른다.”

“그럴 마음이 계셨다면 저보단 아빠에게 압박을 주셨으리라 봐요.”

열세 살이 받을 압박이라 해봐야, 학교에 관련된 게 다였다.

그리고 나쁜 생각을 가졌다면 이미 아빠로부터 이상함을 발견했을지 모를 일이나, 아직까지 그런 건 느끼지 못했다.

유난히 기분이 들떠, 만취 상태로 들어왔던 것만 빼면 달라진 건 없었다.

“후후, 그렇지. 이래서 너무 똑똑해도 안 좋아. 휴...”

이건호는 짧게 한숨을 내쉬고 표정을 고쳤다.

인자함을 지우고 한강의 눈을 직시했다.

“......”

달라진 분위기를 읽었다.

한강은 입을 다물고 이건호의 입을 주시했다.

“이 말을 하기까지 잡설이 길었구나. 바로 말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한 템포 쉬고.

“윤희를 어떻게 생각하느냐. 영특한 너이니 이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리라 본다.”

본론으로 들어갔다.

한강을 부른 진짜 이유를 밝혔다.

동전은 던져졌다. 앞면이냐, 뒷면이냐만이 남았다.

“그 얘기셨군요.”

“...?!”

한데, 반응이 이상하다.

또한, 원하는 답이 아닌 다른 대답이 들려왔다.

“사실 이번 일 충분히 예측하고 있었어요. 그저 이렇게 빨리 오게 될 줄 몰랐어요.”

언제부터일까?

늘 마음속에 준비하고 있었다.

“예측하고 있었다고?”

“네... 아주 오래전부터요. 정확히는 홍라혜 선생님을 만난 이후 미국으로 넘어가면서라 말씀드린다면 될까요.”

[이런 사람이 극단적인 선택이라... 앞으로 그런 일은 없을 거야. 나를 만난 것부터가 누나의 운명이 바뀐 거니까.]

당시 나이 다섯 살. 윤희의 나이는 열한 살.

무려 여섯 살의 나이 차이지만, 한 지붕 아래 2년간 같이 지냈다.

‘그때부터 난 윤희 누나의 짝으로 후보에 올랐겠지. 다른 짝이 생긴다면 옆에 두려 했을 거고.’

재벌에게 있어 그건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능력이 있는 사람은 사랑을 받는 법.

그리고 그 예상은 시간이 더해갈수록 확신으로 바뀌었다.

[윤희의 미술 교사가 되어라. 넌 윤희에게 중학 공부를 배우면 되겠지.]

적어도 고등학생이 되는 시기에 말할 줄 알았는데.

‘성인이 아닌 지금 한다는 건, 날 무조건 잡겠단 의지의 표명.’

오래전부터 예상하고 있던 일인 만큼, 답도 오래전부터 정해 놓았다.

“네. 선생님. 그 시기가 제 생각보다 많이 앞당겨져 조금 놀랐지만... 선생님께서 제게 말한 건 윤희 누나도 수락했다는 거겠죠.”

끄덕.

“앞으로 호칭을 바꿔야겠네요. 장인어른은 잠시 넣어두고... 아버님 어여쁜 누나를 저에게 주셔서 감사합니다.”

“......”

이건호는 말문이 막혀 어떤 말도 하지 못한 채, 한강을 넋 놓고 응시했다.

동그랗게 떠진 두 눈동자에 ‘빌어먹을 존심 상하게. 좀 더 기다릴 것을. 된통 당했구나’ 지금까지 애간장을 타며 기다려온 시간에 대한 억울함이 맺혔다.

싱글싱글.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한강은 해맑은 미소를 이건호에게 보냈다.

“제가 성인이 되면, 자동차를 제게 맡기실 생각이시죠?”

“......”

“그렇지 않고서 저를 면접도 보지 않고 채용하겠다고 공식적으로 밝히지 않았을 테니까요.”

“......”

이건호는 모든 수를 읽어버린 한강의 쉴 새 없이 이어지는 말에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마지막에 던져 줄 카드로 자신을 경외하고 선망하게 만들려던 계획이 무산됐다.

빠득빠득.

이건호는 주먹을 꽉 쥐고!

목에 힘을 팍 줘!

“그래, 네 녀석 다 해 먹어라. 아예, 육성 회장이 되지 그러냐.”

말했다.

“감사합니다. 아버님.”

하지만, 한강은 매우 뻔뻔했다.

1997년 10월도 끝나가는 시점.

양가 부모님의 동의하에 둘의 약혼이 결정됐다.

[천재 화가 유한강(13), 육성그룹의 식구로 발탁되다. 막내딸 이윤희(19) 양의 미래 사위로 점찍다.]

바로 다음 날, 해당 소식은 기사로 대서특필되어 세상에 뿌려졌다.

“죄송합니다. 저희가 늦었습니다.”

“......양심도 없는 도둑놈의 늙은이가...”

미래그룹을 시작으로 한강을 노리고 있던 세계 자동차 그룹은 한강을 데려오기 위한 계획을 전부 철회를 하였다.

그리고 해당 기사는.

이윤희가 재학 중인 선화예고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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