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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버는 게 예술이다-46화 (46/237)
  • 46화. 13살, 슬기로운 외환위기 생활 (2)

    “...누나 이제 좀.”

    떨어질 줄 모르는 윤희로 인해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2차 성징을 마치고 어엿한 여자가 된 윤희와의 스킨십은 예전과 달리 상당한 부담으로 다가왔다.

    “헤헤.”

    6년 차.

    초등학생과 고등학생의 위치.

    하지만 키는 176cm와 162cm.

    10cm 정도의 차이를 보인다.

    ‘날 남자로 보는 건 아니겠지. 학교에 멋진 녀석들도 많을 건데.’

    한강은 윤희로부터 떨어졌다.

    윤희는 조금은 붉게 달아오른 얼굴에 쑥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오늘 뭐 할 거야?”

    “미술공부 하기로 했으니, 미술공부를 해야죠.”

    천진난만하게 묻는 모습에 얼이 살짝 빠졌지만.

    ‘아직도 순수하네. 어릴 때보다 지금이 더 좋달까.’

    어릴 땐...

    [이거 입자.]

    [저거 입어 봐.]

    [안 입을 거야?(글썽글썽)]

    [...귀여워.]

    [음헤헤헤.]

    인형극단 주인공이었던 당시를 떠올리자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오늘 첫날인데, 얘기하자.”

    “수능반일 텐데, 이렇게 여유 부려도 되나요?”

    “잠깐이면 괜찮아. 공부만 하다 죽은 귀신은 억울해서 눈도 못 감는다고.”

    “......”

    묘한 설득력을 장착했다.

    “누나가 그렇다면야. 좋아요.”

    “땡스.”

    고등학생임에도 깨끗해 보이는 순수한 모습에 백기를 들었다.

    “혹시, 지금 만나는 여자친구 있어?”

    “...?!”

    대화를 하자면서 들려온 어택.

    ‘그러고 보니... 나 이번 생에서 얼굴만 잘났지 여자친구 사귀지를 못했잖아.’

    이런저런 일들로 바빠 생각해 본 적 없던 진실에 마주했다.

    조금 억울한 마음이 들었다.

    “안타깝게도 없네요.”

    “와, 진짜?! 너처럼 잘났고 능력도 좋은 애가?”

    “하하. 웃프게도 그렇네요.”

    “웃...프?!”

    “웃기면서 슬프다 뭐 그런 줄임말이에요.”

    “아... 나 나이 먹었나 봐. 그런 거 첨 알았어.”

    “아 그렇게 타격받으실 건 아닌데...”

    당연히 모르는 게 맞는 일. 이건 21세기에서 사용하기 시작한 말이었으니까.

    좌절하는 윤희의 얼굴에 한강이 나서서 마음을 달래어 주었다.

    “두 번째 질문.”

    “...?!”

    이렇게 갑자기 또?

    “마음에 두고 있는 여자가 있다 없다?!”

    유독 여자와 관련된 질문을 많이 하는 윤희였다.

    “음, 그런 건 없고, 눈길이 가는 여자는 있어요.”

    질문의 의도를 알지 못하겠지만, 솔직하게 답했다.

    “누구? 민정이? 아니면 같이 촬영하는 여자아이?!”

    “......”

    뭔가 묘하다. 이상하다. 뭘까?

    ‘영화촬영 이후 본 적도 없던 애 이름이 왜?!’ 물음표와 느낌표가 섞여 궁금증이 일게 만들었다.

    “아뇨. 누나요.”

    “뭐. 뭐... 너 누나 가지고 장난치면 못써.”

    “저 누나랑 불알친... 큼. 소꿉친구라고요. 다섯 살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벌써 8년 찬 거 알아요?”

    ‘////’윤희 얼굴이 홍당무로 변했다.

    ‘얘 지금 내게 고백? 갑자기?!!’란 생각이 머릿속에서 헤엄쳐 다녔다.

    “그, 그래서...?”

    두근두근, 알 수 없는 기대감.

    부끄럽게 두들기는 심장 소리를 들으며 입을 주시했다.

    “앞으로도 잘 부탁한다고요. 쭉.”

    ‘......’ 맥 빠지는 소리가 윤희에게서 들려왔다.

    한강은 가볍게 웃어넘기고 다음으로 넘어갔다.

    “이제 제 질문 차례죠? 누나는 어때요? 이성 문제는. 남친 있어요?”

    “없어. 그딴 거,”

    “대시한 남잔요?”

    “있었지만 거절.”

    “왜요?”

    “좋아하지 않으니까.”

    “그럼 좋아하는 사람이 있단 말?”

    “야, 우리 그만하자. 공부하자.”

    반대로 받기 시작한 질문세례에 당황한 윤희는 후다닥 자리를 피하고 캔버스 앞에 앉았다.

    ‘아, 미쳤나 봐. 쟨 고작 13살인데...’

    머릿속이 복잡한 윤희였다. 어릴 땐 아무렇지 않게 다가왔던 것이 지금에 와 장애가 되었다.

    윤희의 시선이 힐끔 뒤로 옮겨졌다. 동시에 귓가로 환청이 들려왔다.

    ‘철컹철컹.’

    ***

    한 달이 지난 10월.

    수많은 기업들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다는 기사들과 TV 방송과는 별개로 육성그룹 직원들은 다른 의미로 떠들썩했다.

    ╔육성 자동자 디자인 공모전 종료

    당첨자: 유한강(13)

    부문: 외관/내부 부분 공동 수상

    상금: 1억 원, 취업 시 우선권 제시(면접 없이 프리패스)╝

    “뭐야? 회사 직원뿐 아니라 관련 없는 사람까지 참여가 가능한 거였어?”

    “왜 쟤가 여기에...”

    그룹 본사에서 내려온 게시물에 직원들은 패닉에 빠졌다.

    “난 과장님 디자인 진짜 괜찮던데, 대체 어떻게 그렸기에 그런 거야?”

    “맞아, 그리고 저 조건은 뭐냐고?! 면접 없이 패스라니. 완전 우릴 무시하는 처사잖아.”

    게시물에는 수상자만 나와 있었지, 어떤 디자인인지는 공개하지 않았다.

    덕분에 사람들은 불만이 가득하면서도 해당 디자인에 대해 큰 관심을 드러냈다.

    [육성그룹 대 역습을 위한 프로젝트?! 육성그룹에서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공모전을 개최했다. 총 1억 원 상당의 공모전으로 수상자는 천재 화가로 알려져 모델로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는 13살 경기초 유한강 군이 영광을 거머쥐었다.]

    [관계자는 “98년도에 선보일 신차 프로젝트명 육성E를 기대해 주세요. 어떤 자동차보다 우수한 품질과 디자인으로 고객들의 감동을 이끌겠습니다.” 자신감을 내비쳤다.]

    “6학년 1반 유한강. 위 학생은 학교의 위상을 올리고 타인의 모범이 되어 이 상을 수여합니다. 1997년 10월 13일 월요일 이사장 한주영.”

    짝짝짝.

    강당에 모인 사람들이 박수갈채를 보냈다.

    아이들의 열렬한 환호를 받으며 상을 받았다.

    “장학금 100만 원을 수여합니다.”

    상장을 이어 장학금이 지급됐다.

    선생들은 뿌듯한 시선으로 아이들은 부러운 시선으로 무대를 바라봤다.

    “고맙구나. 네가 있어 우리 학교가 빛날 수 있었단다.”

    “감사합니다.”

    와아아아아.

    전교생의 축하 속에 상장과 장학금을 받았다.

    “한강아, 축하해.”

    무대에서 내려오는 한강에게 미화와 덕화가 축하 말을 건넸다.

    “고마워요. 엄마. 아빠.”

    꽃다발을 받아들었다. 손은 두 개인데 품 안에 든 건 참으로 많았다.

    “저 엄마, 아빠. 부탁 좀 드리고 싶은 게 있는데요...”

    한강은 상장 꽃다발 장학금 등등 중 장학금 봉투를 내밀었다.

    “이건 왜?”

    “저 부탁할 게 있어요.”

    “이걸 왜?”

    미화는 이해할 수 없는 행동에 의아한 시선을 보냈다.

    “요즘 어려운 학생들이 많아요. 지금 우리 학교만도 외환위기를 겪는 학생들이 있는데, 이보다 못한 삶 속에 살아가는 학생들은 얼마나 힘들겠어요.”

    “아들...”

    “......”

    덕화와 미화는 크게 놀랐다.

    한강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육성에서 준 상금과 이번 장학금 전액을 그런 학생들을 위해 쓰고 싶어요. 모두가 돈 걱정 없도록 무상으로 우유 급식을 해주고 새 학년으로 접어드는 아이들에게 도움이 됐음 해요.”

    한강은 이번에 받은 모든 상금과 장학금 모두 기부하기로 결정했다.

    “...네가 나보다 낫다. 알았다. 그렇게 해줄게.”

    “고마워요.”

    “아니다. 정말 아들에게 배우는 부모는 우리 집이 유일할 게다.”

    덕화는 한강의 어깨를 토닥여주었다.

    손에 한아름 든 선물을 모두 받아 집으로 복귀했다.

    [유한강(13) 군의 마음 씀씀이가 화제다. “외환위기 시기를 맞아 어려운 후배들을 돕고 싶어요.” 육성에서 받은 상금과 장학금 전액 후배들에게 기부 결정.]

    [해당 기부금은 초등학교 우유 급식에 사용될 예정이다.]

    “크하하하, 정말 장한 아드님을 두셨습니다.”

    룸 안에 이건호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이건호는 들려온 소식에 입을 크게 벌려 웃었다.

    “감사합니다. 회장님. 한데, 저를 보자 하신 이유가...?”

    육성그룹 사옥으로 초대된 유덕화는 갑작스러운 호출에 크게 놀란 상태였다.

    [회장님이 보자고 하십니다. 대표님 제가 모시겠습니다.]

    비서실장의 갑작스러운 방문과 극진한 대접.

    근래 들어 대우가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급이 달라졌다.

    “회장이란 호칭은 접어 주시죠. 이 자리는 비즈니스를 위한 자리가 아닌 아이들의 부모로서 모신 겁니다.”

    “그게 무슨 의미이신지요?”

    대 육성그룹 이건호 회장과 부모 대 부모로서 만날 일이 뭐가 있을까?

    없었다.

    덕화는 의미를 알 수 없는 목소리에 되묻지 않을 수 없었다.

    “난 말입니다. 한강 군이 참 맘에 듭니다. 영특함, 예술성, 변하지 않는 꾸준함과 성실함. 게다가 우리는 타고 나지 못한 완벽한 외모까지.”

    ‘미래를 보는 투자 감각과 결단력’ 부분은 속으로 삼켰다.

    “성적은 유치원 당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1등(전교)을 놓친 적 없는 천재. 딸 있은 부모라면 절대 놓칠 수 없는 1등 사윗감일 겁니다.”

    “...사, 사위...라니요?”

    “전 한강 군을 육성의 사위로 맞고 싶습니다. 해서 아버님만 괜찮다면 올해 이브에 두 아이를 약혼시켰음 하는데 어떠십니까?”

    “야, 야... 야 약혼요?!”

    덕화는 진심으로 크게 당황했다.

    재벌들 사이 그런 일이 비일비재 일어난다는 이야기는 들은 바 있었다.

    당장 뉴스나 신문만 보더라도 그런 기사를 심심치 않게 접했다.

    한데 그런 소설 같은 일이 자신과 한강에게 벌어졌다.

    쉬이 믿을 수 없었다.

    “그, 그 아이는 아직 열셋입니다. 회..사...윽.”

    너무 당황해 호칭을 어떻게 불러야 할지 몰라 헤매던 덕화는 입을 급히 닫았다.

    “제 딸아이는 지금껏 한강 군을 제외하고 동침을 한 적도 다른 남자 얘기를 꺼낸 적이 없지요.”

    ‘도, 동침이라뇨. 그 당시 한강인 유치원생이었어요’ 덕화는 무언의 외침을 이건호에게 보냈다.

    “사돈.”

    이건호의 진지한 눈빛이 덕화의 두 눈에 닿았다.

    그리고 호칭을 확실하게 정해주었다.

    그의 눈에선 절대 놓치지 않겠단 의지가 분명하게 드러났다.

    “...... 휴. 정말 제가 꿈을 꾸고 있는 기분입니다. 설마 육성의 높으신 분께서 제 아들을 사위로 생각하고 계실 줄 상상도 못 했습니다.”

    잔뜩 얼어붙어 있던 덕화의 몸에 서서히 녹아내렸다.

    똑바로 마주 보지 못하던 두 시선이 똑바로 정면을 주시했다.

    “제 아들은 동 나이대에 찾아볼 수 없는 매우 똑똑하고 자기 의사가 분명한 아입니다.”

    덕화는 눈을 감고 잠시 생각했다. 아들의 미래를. 과연 자신이 결정할 권리가 있을까?

    ‘없겠지. 지금의 삶도 한강이 덕분인걸’ 권리는 없었다.

    덕화는 결정을 내렸다.

    “우습게 들릴지 모릅니다. 전 이 결정을 제 아들에게 넘길까 합니다. 제 아들의 행복과 미래를 제 판단으로 만들고 싶지 않습니다. 죄송합니다.”

    자신의 뜻을 분명하게 밝혔다.

    신기하다. 아들을 생각하니, 떨리던 몸이 멈췄다.

    언제보다 더욱 편한 마음이 되었다.

    “부전자전이군요. 하하. 좋습니다. 내 그 아이에게 직접 묻지요. 그럼 그 아이가 오케이 한다면...”

    “축복을 내려주고 싶습니다.”

    “알겠습니다. 내 사돈의 뜻 받아들이지요.”

    “감사합니다. 어르신.”

    이건호는 사돈이라 도장을 찍었지만, 덕화는 ‘사돈’이란 호칭을 지우고 어르신으로 호칭을 대신 불렀다.

    그럼에도 이건호의 얼굴에는 불쾌함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 성격이 어디서 나왔나 했더니. 역시 피는 못 속이는구나.’

    오히려 앞으로 있을 일로 가슴이 두근거렸다.

    과연 한강은 어떤 선택을 할지 매우 기다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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