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돈 버는 게 예술이다-37화 (37/237)

37화. 13살, 1997년 외환위기를 맞이하다

“어떤 거 같나?”

이건호는 한강이 떠나면서 남긴 말을 곱씹었다.

[선물은 결과가 나왔을 때, 그때 가져갈게요.]

와인이 든 잔을 입에 가져갔다.

생각할수록 무척 당돌한 아이였다.

“그저 아이의 말입니다. 회장님.”

옆에 대기한 김종식 실장은 무덤덤이 흘렸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는가?”

지금껏 어떤 임원들도 자신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했다.

반대를 하더라도 ‘무조건 안 된다’였다.

하지만 한강은 ‘무조건’이 아닌, 정확한 기간을 제시하며 충분한 이유를 가져왔다.

‘그게 고작 아이의 말이라고?’

이건호는 김종식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자네 자식의 나이가 몇이지?”

“24살입니다.”

“그 아이가 내 앞에 서면 그렇게 말할 수 있을 거 같은가?”

“......”

“힘들겠지. 다 그래왔으니까.”

말을 잇지 못하는 김종식을 보며 씁쓸히 웃었다.

“임원진들에게 알리게. 자동차 설립 다음으로 미룬다고. 그때까지 확실하게 준비하라고.”

고심을 많이 했다. 숙원 사업의 시작을 또 뒤로 미뤄야 하는가에 대하여.

고민 끝에 내린 답은 ‘한낱 아이’의 말 한마디에 바뀌었다.

“유한강이라... 유한강...”

아무래도 오늘 밤을 그 아이의 이름을 되새기느라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할 거 같았다.

하나, 입가엔.

“만약 그 아이의 말이 맞다면 어떤 보상을 줘야 할까?”

미소가 한가득 번졌다.

그리고 한강에게 들어갈 보상에 대해 생각을 하였다.

***

“이건 뭔가요?”

“육성에서 도련님을 3년간 전속 모델로 발탁했습니다. 백화점, 호텔, 전자 등에 출연하시게 될 겁니다.”

“네?”

모든 일을 마치고 돌아가기 전, 김광석은 서류봉투를 내밀었다.

부모가 아닌 아이에게 주는 게 우습지만, 김광석은 이를 당연히 받아들였다.

보호자 대리로 최동욱이 있기에 가능한 부분도 있었지만, 한강은 매우 특별했다.

결코 어린이로 치부할 수 없는 존재로 한강의 생각을 우선으로 대하였다.

“모델료는 총 20억입니다.”

SA(특급) 모델료 이상의 값으로 책정됐다.

“감사합니다.”

어이없던 얼굴이 빠르게 지워졌다.

대신 자리한 건.

“열심히 하겠습니다.”

흔히 볼 법한 자본주의 미소가 한강에게서 발현됐다.

[육성그룹 )유한강(9) 군, 3년 전속 모델 발탁. 모델료 역대 최고 대우!]

한강의 전속 모델 소식은 9시 뉴스에 다뤄질 정도로 뜨거운 감자에 올랐다.

한강은 다시 한번 더 유명인이 되어 사람들 입에 오르내렸다.

1997년이 코앞으로 다가온 날.

“일산과 분당 부동산 주식 등 모두 처분하고 전부 달러로 바꿔주세요. 제 돈 한 푼 남기지 말고 모두 달러로요. 꼭이요!”

한강의 입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꼭 그래야 하는 이유가 있습니까?”

“이유는 묻지 말아 주세요. 한시가 급해요. 모든 달러를 은행이 아닌 금고에 보관해 주세요.”

위험한 발상이었지만, 한강은 거침없었다.

자금을 관리하는 김광석은 알 수 없는 눈길을 보내다 이내 고개를 끄덕여 행동에 나섰다.

“다행이야. 내게 있어 육성을 만난 건 최고의 행운이었어.”

한강의 시선은 하늘로 옮겨졌다.

저 푸른 하늘이 암흑으로 바뀐다는 사실을 아는 이가 몇이나 될까.

한강의 표정은 매우 어두웠다.

***

국민학교는 95년 중순에 초등학교로 바뀌며 1997년으로 접어들었다.

한강의 나이 13살이 되었다.

[한보 부도로 쓰러져...]

[부도설이 나돌던 한보그룹은 주식 포기 각서의 제출 거부와 동시에 부도처리.]

[제일은행 등 19개 은행 어음 막지 못해, 어음은 수백억대로 달할 것으로 전망...]

[부실 대출 규모 3조 원, 계속 늘어나...]

[사망자 35명...]

1997년 1월, 국내에 거센 바람이 불어 닥쳤다.

그간 말이 많던 한보그룹 부도가 현실화되며 수많은 기업들과 투자자들이 손실을 겪고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사람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갔다.

“그게 진짠가요?”

홍라혜는 들려온 보고에 깜짝 놀라 되묻지 않을 수 없었다.

전속 모델과 여러 사건들이 맞물려 한강이 엄청난 자산을 축적하고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렇습니다. 육성 엔지 부동산 등 모두 처분하고 달러로 바꿨습니다.”

“얼마나 바꿨죠?”

“먼저 부동산 시세차익만 3배를 챙겼고, 주식에서 225%의 수익을 냈습니다. 현금만 100억이 넘었습니다. 1276만 달러로 바꿔 보관하고 있습니다.”

이건 정도가 지나친 수치였다.

“정말 입에서 대단하단 말만 나오네요.”

“제가 직접 관리하고 있지만, 매번 놀랍니다.”

“그래, 한강이가 모두 달러로 바꾼 이유는 물어봤나요?”

“그것이 앞으로 달러가 매우 중요해질 거란 말 외에 다른 말은 하지 않았습니다.”

“앞으로 달러가 중요해진다?”

“그렇습니다.”

이건 우연일까? 운일까? 그도 아니면 모두 계산된 행동일까?

한보그룹이 무너지며 국내에 이름 높던 대기업들이 부도를 내고 있었다.

힘든 건 육성도 마찬가지.

동시에 달러화가 급격히 치솟고 있었다.

‘게다가 그 아이의 말대로 자동차 설립을 뒤로 미루게 되면서 육성의 재정은 좋은 편이야...’

모든 것이 미스터리다.

그러면서 크게 안도했다.

“지금 환율이 얼마죠?”

“지금 890원으로 곧 900원을 넘을 걸로 전망하고 있습니다.”

“천 원까지 간다는 소리인데... 우리 사정은 어때요?”

“달러가 부족합니다. 원 달러 930원에서 950원을 기준으로 사업계획을 짰으나, 1천 원 돌파를 점쳐 전면 중단하고 사태를 지켜보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런 현상은 미래, 엔지 등 대표 그룹들은 모두 계획안을 접고 상황을 주시하면서 기준환율제시를 의뢰해놓았다.

“어쩌면... 우리가 그 아이에게 도움을 구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홍라혜는 앞으로 흘러갈 육성의 미래가 어쩌면 한강으로 인해 크게 변화를 맞이할 거라 생각이 들었다.

모든 과정을 지켜보고 결과를 만들고 있는 어린아이의 판단력과 추진력.

육성에 꼭 필요한 부분이었다.

“우리도 달러를 구할 수 있을 만큼 구해 보세요.”

[앞으로 시장은 금과 달러에 투자하는 게 가장 좋다 봐요.]

몇 년 전 한강을 알게 된 시절, 한강이 말했던 이야기가 머릿속을 스쳐 갔다.

“그리고 절대 그 아이에 대해 외부로 노출시키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이세요. 절대 다른 기업이 알아선 안 돼요.”

머릿속으로 경고음이 들렸다.

홍라혜는 최대한 한강을 숨기기로 하였다.

***

1997년 2월 14일.

빛나는 졸업장을 타신 언니께 꽃다발을 한아름 선사합니다.

물려받은 책으로 공부 잘하며 우리는 언니 뒤를 따르렵니다♬

운동장에 모인 아이들의 입에서 졸업식 노래가 울려 퍼졌다.

경기 초등학교의 아이들은 예전보다 많이 줄어 있었다.

부자들의 몰락으로 학비를 감당하지 못해 전학을 가야만 하였다.

“이제 6학년인가.”

반면 한강의 집안은 외환위기 역풍에 영향을 받지 않고 자리를 지켰다.

한강은 떠나는 선배들을 바라보며 암흑의 때가 도래하였음을 체감하였다.

“이 또한 내겐 기회겠지.”

떠나는 사람, 몰락한 기업은 어쩔 수 없이 벌어질 미래였다. 그걸 막는 건 무리.

안타깝지만 그런 이들이 있기에 새로운 이가 등장하여 기회를 얻어 신흥부자로 올라서게 된다.

이득을 취하는 자가 있다면 당연히 손해를 보는 이가 있어야 한다. 시장은 너무도 당연하게 그렇게 흘러갔다.

한강은 여기서 기회를 찾아보기로 하였다.

“야, 셔틀 나 여기 음료수 한 개. 난 단팥빵.”

졸업식이 끝난 3개월이 지난 봄.

머리가 큰 아이들 세상에 새로운 문화가 자리를 잡았다.

“좀 있음 수업시간이라고. 그때까지 갔다 와.”

그건 왕따와 셔틀.

일명 일진이란 그룹이었다.

“돈은?”

“이게 확 뒈지려고. 네 돈으로 사와.”

“그치만...”

“뭐 해, 안 가고.”

“알았어...”

안경을 쓴 아이는 울먹이는 얼굴로 걸음을 옮겼다.

“크크, 병신.”

“찐따 새끼.”

어디서 배워온 말인지 모를 욕을 아이들은 서슴지 않고 뱉었다.

“동작 그만.”

셔틀이 된 아이가 막 교실 밖으로 발을 뻗을 때, 한강이 몸을 일으켰다.

“조금 조용히 지내려 했는데, 모델 촬영으로 잠깐 자리를 비운 틈에 이런 게 생겼네. 어이 친구들.”

한강은 황당한 얼굴로 일진 무리를 불렀다.

“우리 부른 거야?”

대장 격을 보이는 아이가 눈에 힘을 주었다.

“야, 말조심해. 그러다 너네 집도 작살 날 수 있어.”

그때 옆에 있던 아이가 주의를 주었다.

“혹시 쟤가 걔야?”

끄덕.

“너네 얘랑 같은 무리 아니었냐? 언제부터 친구가 이런 어이없는 사이가 되었냐?”

한강이 기억하기로 작년까지 서로 하하호호 웃으며 떠들던 아이들이었다.

그런 아이들의 관계가 1년 사이 많이 달라져 있었다.

“얘가? 우리랑? 야 농담도 심하다. 어떻게 거지랑 우리랑 친구냐.”

아이가 말도 안 된다며 손사래를 쳤다. 얼굴에는 불쾌함이 가득 실렸다.

“거지...?”

반면 한강은 의아한 눈으로 바라봤다.

“음... 그런가?”

그제야 일이 어떻게 된 건지 이해가 갔다.

이미 옷차림에서 아이의 환경이 많이 달라졌음을 알게 됐다.

‘전에는 꽤 그럴싸하게 다닌 아이의 옷이...’

형색으로 보아, 한보 사태 여파로 집안이 크게 기울었음을 짐작 들게 하였다.

그럼에도 무리해서 이곳에 다니는 이유는.

‘인맥 때문이겠지.’

그리고 아이의 부모와 저쪽 패거리들과 깊은 연관이 있을 거다.

“너희들이 뭔 삼류 건달 깡패냐. 그 형님들도 심부름시키면 부하에게 심부름값은 준다. 아가들아. 나 얘랑 잠깐 할 말 있으니까, 잠시 데려간다. 야 가자.”

한강은 아이를 데리고 복도로 나갔다.

발걸음은 교무실 옆 빈 창고로 향했다.

“이제 말해봐.”

“뭐, 뭘?”

“너네집 어떻게 됐는지.”

어둡던 방 안에 불이 켜지며 둘의 모습이 들어왔다.

한강은 바로 본론으로 넘어갔다.

“......”

하나 아이는 말하지 못했다.

“대답하기 힘들면 고개로 말해. 맞으면 위아래로 흔들고, 아니면 좌우로 도리도리. 오케이?”

끄덕.

“좋아. 다시 물을게. 망했냐?”

끄덕.

“너네집 걔네들과 관계있지?”

끄덕.

“혹시, 빚이라도 진 거야?”

“......”

“좋아, 그 정도면 됐다. 대충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지 알만하니까.”

아이의 반응에서 원하는 바를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난 저 아이들을 어떻게 해줄 방법은 없어. 지금처럼 너를 빼는 게 전부겠지. 설령 있다 쳐도 너와 가족이 위험해질 거야.”

“......”

“그런데 좀 억울하지 않아?”

끄덕.

아이가 말없이 고개를 위아래로 움직였다.

‘예전엔 그러지 않았는데, 확실히 환경이 아이들의 성격을 바꿔 놓는구나.’

납득하고 이해는 가지만, 씁쓸한 마음은 숨길 수 없었다.

“그렇지. 그래서 내가 네게 제안을 할까 해. 널 완전 보호를 해줄 순 없어도 최소한의 도움은 줄 수 있을 거 같다.”

지금 가진 재산으로 아이를 도울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건 해결책이 되지 못한다.

그저 불쌍하다고 도움을 주면, 제2, 제3의 사람들이 등장해 손을 벌릴 것이고, 그러한 사람들로 인하여 귀찮은 일에 휘말릴 수 있었다.

어설픈 도움은 오히려 독으로 돌아올 수 있다는 의미다.

“지, 진짜?”

드디어 아이의 입이 열렸다.

기대가 가득한 눈빛이 한강을 향했다.

“난 한 입으로 두말은 안 해. 대신 네가 수고를 좀 해야 해.”

“수고?!”

“첫째 창피해하지 말 것, 둘째 당당할 것, 셋째 힘들어도 버틸 것. 이것만 네가 지켜준다면 너의 그늘 정도는 되어 줄 수 있어.”

“그게 무슨 말이야.”

“경태야, 너 사업이란 말 알지?”

“으, 응.”

잘 알겠지. 한때 잘 나가던 사업가의 집안이었으니까.

“나랑 1년간 사업 하나 하자.”

“그게 날 보호할 수 있는 거야?”

“최소한 지금보다는 나을 거다.”

“하 할게. 그럼.”

“좋아, 좋은 자세야. 앞으로 넌 저 아이들의 배달맨이 되는 거야.”

“그게 셔틀이랑 다른 게 뭐야.”

다시 경태의 얼굴이 침울해졌다.

달라진 게 없었기 때문이다.

“아니지. 달라지지. 자고로 한국말은 끝까지 듣고 결정하는 게 도리다. 넌 배달을 하면서 아이들의 편의를 봐주는 대신 정당한 대가를 받게 될 거야. 적어도 네 밥벌이는 할 수 있겠지. 그리고 너의 수익 중 보호비 명목으로 내게 10%씩 주면 돼.”

거북하게 다가올 수 있었지만, 뒤에 육성의 배경을 가진 자신이 있다면 쉽게 경태를 건들지 못할 터다.

돈을 받는 행위는 그런 의미가 담겼다. 모든 건 경태가 자진해서 하는 게 아닌 한강이 하는 것이다.

이는 한강이 책임을 지게 될 문제로 넘어가게 될 거다.

‘이 정도는 내가 감수하는 게 좋겠지.’

“돈을 받는 거야? 안 줄 텐데...”

“그건 걱정하지 말고. 넌 오케이만 해. 다시 묻자. 할래?”

“으, 응.”

같은 심부름이라도 돈을 받고 하는 게 몇 배는 나을 터.

경태는 끝내 고개를 움직였다.

“좋아, 그럼 네가 할 일이 있다. 너랑 비슷한 아이들을 모아서, 내일 점심까지 강당으로 데려와.”

한강의 얼굴에 재밌는 미소가 맺혔다.

심심한 날, 아주 재밌는 생각이 떠올랐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