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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버는 게 예술이다-32화 (32/237)

32화. 8살, 실력을 보이다

경기 국민학교 교실 안.

한강의 시선은 칠판이 아닌, 밖으로 향해 있었다.

“스포츠... 스포츠라... 어떤 느낌이 좋을까.”

얼굴에 진한 고민이 깃들어 있었다.

아직 주제를 정하지 못한 모습이다.

딱딱.

손가락은 연신 책상을 두들겼다.

옆자리에 앉은 아이가 불안한 눈으로 힐끗힐끗 쳐다봤다.

“확 와닿는 게 없네.”

88년 당시, 완전 아기아기하여 제대로 구경조차 하지 못했다.

대한민국이 4위를 한 역대 올림픽.

떠오르지 않는다.

사람들에게 감동을 줄 수 있는 그림을 그리고 싶다.

“한강, 여기에 집중해야죠.”

다른 곳을 향해 있던 정신 속으로 타인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한강아.”

툭툭.

짝꿍인 박호경이 한강의 옆구리를 살살 쳤다.

“아, 네.”

뒤늦게 정신을 차린 한강은 민망한 얼굴이 되어 시선을 정면으로 가져갔다.

“다른 일에 집중하는 것도 좋지만, 내 수업에도 집중했음 하는데. 해줄 수 있죠?”

타이르듯 말하는 목소리.

“죄송합니다. 선생님.”

잘못을 깨달은 한강은 즉시 고개를 숙였다.

“굿, 좋아요.”

휴.

한강은 짧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마터면 사랑의 매가 엉덩이와 접촉하는 일이 벌어질 뻔하였다.

“자, 다시 말할게요. 악기를 한 가지 이상 다룰 줄 아는 사람 손들어 보세요.”

담임인 김문숙은 한강으로 인하여 뺏긴 시선을 다시 가져와 질문을 던졌다.

“저요!”

“저요!”

아이들이 하나같이 하늘 위로 손을 번쩍 들었다.

몇 명을 빼고는 대부분이 악기를 다룰 줄 알았다.

“오, 모두 대단하네요. 어떤 악기들을 다루는지 1분단 앞줄부터 이야기를 해보자. 먼저 나영이부터.”

1분단에서 가장 앞줄을 차지하고 있는 단발머리 여자아이를 지목했다.

“저는 플롯을 할 줄 알아요.”

“좋아요. 다음은?”

“전 바이올린이요!”

“저는 피아노요!”

......

아이들은 순서대로 자신들이 다룰 줄 아는 악기들을 발표했다. 순서는 빠르게 한강에게 이어졌다.

“자, 그럼 마지막은 한강이네.”

뛰어난 미술 실력에 이어 악기까지 다룰 줄 안다?

이건 의외였다.

김문숙은 호기심 짙은 눈으로 바라봤다.

“악기는 종류별로 다룰 줄 알아요. 피아노, 바이올린, 오보에, 기타, 하모니카, 트럼펫, 색소폰 뭐 기본적인 건 다 합니다.”

한강은 전생 시절 배울 수 있는 건, 시간을 투자해 집요하게 배웠다.

어린 시절부터 시작해 죽음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예술의 미친 사람 그 자체였다.

[우리에게 공평하게 주어진 건 시간뿐이다. 정해진 시간을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 나의 위치가 바뀐다.]

[할 줄 아는 건 너무나 쉽다. 그 시간에 모르는 걸 배워 나의 단점을 강점으로 만들어라.]

[세상에 안 되는 건 없다. 안 되는 이유는 미리 선을 그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에게 늘 하던 말이었다.

이건 그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사람들 입에서 입으로 전달돼 유명해진 명언이기도 하였다.

그밖에 다른 명언들도 상당했다.

“정말 그걸 다 할 줄 안다고?”

그러한 속사정도 모르는 김문숙 입장에서 한강의 말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하나를 배우더라도 시간이 제법 오래 걸린다.

그런데 한 두가지도 아니고 수 어가지를 터득했다?

쉽사리 믿을 수 없었다.

“네, 그중에서 피아노와 바이올린을 가장 잘합니다.”

청소년 콩쿠르에 입상해 대상을 받은 전적이 있었다.

한때 수시로 기사에 오르내리기도 할 정도로 음악천재로 통했었다.

“음, 마침 여기에 피아노가 있는데, 한번 쳐볼래?”

김문숙은 직접 확인하고 싶은 욕심에 다른 아이들과 달리 한강에게 연주를 권했다.

“네.”

한강 입장에서 딱히 피할 이유는 없었기에 부담 없이 앞으로 나갔다.

“자, 모두 한강을 향해 박수를 쳐주자. 박수.”

짝짝짝.

피아노에 자리를 잡자, 아이들이 열광했다.

몇몇은 자신들도 장기를 뽐내고 싶은 욕구를 내보이기도 하였다.

‘확실히 학교가 좋아 피아노도 좋단 말이지. 음, 뭘 쳐볼까?’

고민이 되었다.

‘음, 손가락이 얼마나 따라와 줄지 모르겠는걸.’

영혼은 기억하고 있다지만, 신체적 조건이 그때와 달랐다.

“선생님 잠시 손 좀 풀어도 될까요. 오랜만이라.”

손가락이 얼마나 생각대로 따라와 주는지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결코 대충 칠 생각은 없었다.

“음, 그렇게 해요.”

‘무슨 아이 눈빛이...’ 작게 속삭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딴.

건반이 아래로 내려가 잔잔한 소리를 냈다.

도레미파솔라시도.

따르르르 손으로 훑고 지나갔다.

딴딴.

느리게 움직이던 손가락은 점차 빨라졌다.

소리도 빨라졌다.

현란한 손가락의 움직임에 맞춰 건반은 내려갔다 올라오길 반복하며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었다.

‘역시 예전 같지 않네. 그래도 이 정도면... 괜찮겠지.’

테스트는 끝냈다.

손가락 감각은 만족했다.

싱크로율 95%.

“됐어요. 선생님.”

“어, 아. 그래.”

김문숙은 멍때린 얼굴로 고정하던 두 동공이 크게 흔들렸다.

10초간 들려오는 소리, 범상치 않았다.

“......”

떠들썩한 아이들의 목소리도 조용하다. 작은 숨소리만이 교실에 퍼졌다.

1, 2, 3. 딴.

심호흡을 작게 내뱉은 직후, 멈췄던 소리가 공기를 타고 사람들에게 전달됐다.

“이 곡은 여름날의 소야곡.”

김문숙은 작게 속삭였다.

그녀는 눈을 감고 교탁을 손가락으로 치며 박자를 탔다.

따라라, 딴딴.

여름날의 소야곡.

폴 모리아 악단이 1969년에 낸 음반.

사람들은 이 노래를 일컫길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연주곡’ 중 하나라 말했다.

“시원해.”

더운 여름날, 한강은 교실에 시원한 바람을 선물했다.

아름다운 선율에 맞춰 바람은 황홀한 세레나데(Serenade)를 연주했다.

“멋있다.”

마침 열린 창틈으로 바람이 불어와 연주를 하고 있는 한강의 머리카락 매만지고 지나갔다.

그 모습은 마치 동화 속에 나오는 왕자님을 떠오르게 하였다.

아이들은 한강을 선망 어린 눈으로 바라봤다.

뚠!

해가 저물어 가는 노을이 찾아왔다.

김문숙은 멍한 눈으로 한강을 응시했다.

“들어가도 되나요.”

연주가 끝나고 한강이 뒤돌아섰다.

“한강아.”

발걸음을 옮기는 한강의 발을 잡았다.

“네?”

“피아노를 친 지 얼마나 됐지?”

김문숙의 눈빛이 진지하다.

‘아무 천재라지만, 연륜에서 나오는 기술과 감성까지 커버할 수 없어. 한데, 이 아이는... 그 모든 걸 가능하게 만들었어.’

동시에 의문점도 들었다.

한강의 실력은 어린아이가 냈다고 보기 어려울 정도로 강과 약이 잘 어우러져 마음을 녹이고 지나갔다.

“미국에서 배웠으니, 2년도 안 됐어요.”

물론, 거짓말.

집에까지 전달될 수 있는 문제기에 한강은 배움의 장소를 미국으로 옮겨 나름 완벽한 알리바이를 만들었다.

‘실제로 쳐보기도 했으니까. 윤희 누나 옆에서.’

완전 거짓은 아니기에, 스스로를 합리화를 하였다.

“뭐? 아니 그럼 다른 악기들은?”

“전부 다 거기서 시간 내서 배웠어요.”

이것도 거짓말이지만.

가볍게 넘어갔다.

“...그저 놀랍구나. 놀라워.”

한강은 그 말을 끝으로 자리로 돌아갔다.

“...모두 한강에게 박수 쳐주자.”

짝짝짝.

아이들의 함성과 박수 소리가 오갔다.

한강은 피식 웃고는 시선을 손에 가져갔다.

“오랜만이지만, 나쁘지 않았어. 이 느낌. 이 감각.”

그림과는 또 다른 감각, 이건 재능에 일부.

오랜만에 느껴본 피아노 건반의 감촉이 너무도 좋았다.

‘집에 피아노와 바이올린을 사놓자. 어차피 필요하게 될 거 같으니까.’

한강은 가벼이 웃었다.

***

“한강이 그 아이 완전 천재예요. 미술이 아니라 음악가로 키워야 돼요.”

교무실로 이동한 김문숙은 음악실에서 있었던 일들을 소상히 고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그 아이가 그 정도라고요? 하지만, 그 아이는 미술 특기생으로...”

“선생님 그 아이의 연주를 들어보면 알 거예요. 우리 학교를 빛낼 아이란 거에 제 모든 걸 걸 수 있어요.”

“으. 이걸 어째야 하나. 일단 아이의 생각도 중요하니, 그건 그때 가서 생각을 해봅시다.”

남성은 머리를 긁적이며 김문숙을 자리로 돌려보냈다.

‘유한강이라...’

참으로 말이 많은 아이였다.

***

“뭐가 좋을까. 뭐가...”

조건은 8절지 도화지에 스포츠에 관한 그림을 그릴 것.

딱 좋은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1988년 서울 올림픽]

자료를 찾았다.

관련 자료들을 끄집어 모아 세심하게 살폈다.

“아주 좋은 게 있을 거야. 아주 좋은 게...”

한 장, 두 장, 세 장째 종이를 넘기던 때 시야로 하나의 기사가 들어왔다.

[손기정은 1위로 메인스타디움에 들어선 황영조 선수가 “태극기를 단 황영조가 부럽다. 더 이상 죽어도 여한 없다”면서 눈시울을 붉혔...]

“LP 음반을 복원해 전 국민에게 알릴...”

일장기를 걸치고 달려야 하였던, 손기정 선수.

“......”

한강의 심장이 강하게 요동쳤다.

“정했다.”

이유는 떠오르지 않았다. 떨리는 심장이 그것을 강요했다.

“가슴 아팠었지.”

당시의 역사를 떠올렸다.

슬프고 분하고 열받는.

이번에 그리는 그림이 손기정 선수에게 힘이 되었음 한다.

“최고의 그림이 될진 모르겠지만, 메시지만큼은 확실하게 전하자.”

결정을 내렸다.

IOC(International Olympic Committee)

국제 올림픽 위원회 그림대회 공모전에 제출할 그림을.

***

도화지를 캔버스에 붙였다.

펜을 들어 도화지에 가져갔다.

스스슥.

연한 얇은 선이 손에 이끌려 형태를 만들어갔다. 봉화를 향해 활활 타오르는 성화봉을 들고 뛰는 남자가 달렸다.

가슴과 배 사이에 커다란 태극기를 그렸다.

도화지 가장 위에 문구를 만들었다.

[손기정 선수의 소망을 이뤄드립니다.]

그에게 보내는 메시지를 도화지에 담았다.

스케치가 완성이 되고 장장 세 시간 정도가 지나서야, 그림은 완성이 되었다.

“다 됐다.”

이번 생에 태어나, 처음으로 가슴을 울리는 그림을 그렸다.

한강은 기지개를 켜, 완성된 그림을 잠시 감상하다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선생님.”

***

“...한강아?! 이게 뭐니?”

공모전에 제출할 그림을 받은 김가영 눈에 어이없는 표정이 자리했다.

“공모전에 제출할 그림이요.”

“아니, 그게 아니고...”

“88올림픽 기념 공모전이에요. 선생님. 전 손기정 할아버지가 올림픽 주인공이라 생각해요.”

“그, 그래. 들어가 봐.”

김가영은 얼떨떨했다.

받아든 그림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이게 한리버... 인가?”

한강의 별명이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난다 긴다 하는 아이들도, 미대생도 한강은 따라오지 못하리라 확신했다.

“김문숙 선생님의 생각은 틀렸어. 한강은 그림을 그려야 돼.”

한강을 피아니스트로 키워야 한다는 김문숙의 말을 머릿속에서 지워버렸다.

그녀가 보기에 한강은 참된 화가였다.

[IOC(국제올림픽위원회)에서 주최하는 스포츠 그림대회 명단 공개, 천재 화가 경기 국민학교 유한강(8)도 명단에 자리했다.]

[이번엔 어떤 그림으로 우리를 놀라게 할지 귀추가 주목된다.]

[이억수 기자.]

며칠이 지난 날, 이억수 기자가 써낸 기사가 세상에 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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