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화. 7살, 새해 소망을 빌다
“진짜 인상이 딱 배우다. 지금 나이가?”
“일곱 살이요.”
“와, 일곱 살인데 키가...와?!”
또래 아이들보다 큰 키에 우월한 피지컬.
이영화는 순수하게 감탄했다.
“하하.”
한강은 처음으로 느껴보는 신체적 우월감에 도취되었다.
“연기는 해본 적 없다지?”
“네, 있다면 광고모델로 해본 게 다예요.”
“아, 그렇지. 그게 있었구나.”
한강의 뛰어난 신체적 조건에 어제 확인했던 장면들을 잊고 있었다.
‘정말 놀랍네. 관련 업계 사람들 말로는 카메라를 부담스러워하지 않는다던데.’
실수조차 겁내지 않고, 과감하게 나가는 모습은 군계일학(群鷄一鶴)이라 하였다.
가장 튀는 아이.
그곳에서 말한 한강의 평이었다.
“음...”
이영화는 한강을 좀 더 유심히 살피기 위하여 동공을 확장했다.
‘세상 참 불공평하네. 이런 외모에 폭넓은 지식 하며, 사기적인 그림 실력으로 발생한 인지도... 그냥 이걸 위해 태어난 아이야.’
너무도 잘 어우러지는 능력, 예술계의 선구자가 될 자질을 타고났다.
“이건 네가 찍게 될 시나리오랑 대본이야. 시나리오랑 대본이 뭔진 알지?”
“네, 선생님.”
“그래, ...그럼 그걸 보고 연기를 해볼래?”
앞서 연기를 가르치기 전에 한강의 실력을 확인하기로 하였다.
“음...”
이미 영화에 대한 내용을 알고 있는 까닭에 읽는 둥 마는 둥 대강 훑어 내려가던 한강의 눈동자가 동그랗게 떠졌다.
‘뭐야? 이거 내용이 왜 이래. 내가 알던 것과 좀 다르잖아. 이건 거의 나홀로 집에 급인데...’
전체적인 시나리오는 그대로다. 한데, 기억 속에 있던 한 인물의 캐릭터가 바뀌어 있었다.
‘허허, 날 위한 건가? 아니지, 나를 확실하게 홍보용으로 쓰겠다 뭐 그건가?’
아이들 영화에 지루하질 않을 그림을 그려야 한다?
머리가 아파왔다.
“다 봤어요. 시작해 볼게요.”
놀란 눈동자가 잔잔하게 변했다.
이 아이의 자신에게 맞춰진 캐릭터, 더 꾸밀 필요는 없었다. 그저 ‘나를’ 보여주면 되었다.
한강은 평소의 모습에서 조금은 어린아이로 변신했다.
[오늘 육성백화점에서 사인회 있대!]
아이들이 한데 섞여 인기그룹 팬사인회 이야기를 나누었다.
자리를 정리하던 [준호]가 자리에서 일어나 말했다.
“난 못가. 오늘까지 학원 미술 선생님이 내준 숙제 해야 돼.”
아쉬움이 깃든 목소리, 그러면서 그림에 대한 애정을 안에 담았다.
[됐어. 짜샤. 그놈의 그림이 뭐 대수라고.]
[준호야, 너도 같이 가면 좋을 텐데...]
매사에 적극적인 [형우]가 지나치고, [준호]를 짝사랑하는 [은수]가 아쉬워한다.
“나도 아쉽다. 잘 다녀와. 잼 사인 꼭 받고.”
[준호]도 [은수]를 마음에 품고 있다. 하나 부끄러운 마음은 그걸 드러내지 못하고 [은수]를 지나쳐 나갔다.
“거기까지...”
이영화가 손을 들어 연기를 멈췄다.
‘아니, 대체 무슨 아이가 이래? 연기 진짜 배운 적 없는 거 맞아?’
연기에도 사람 따라 다른데, 한강은 누군가를 흉내를 내는 것이 아닌, 생활에서 보일 법한 자연스러운 연기를 선보였다.
보통은 멋을 살리고자, 과장된 표현을 하기 나름인데.
마치 그걸 알고 있기라도 한다는 듯이 연기를 하였다.
호흡도 나쁘지 않았다.
절대...
‘초보가 아니야.’
이영화는 그렇게 평가를 하였다.
“별로였죠... 하하.”
반면, 한강은 자신의 연기가 부족해 멈췄다고 받아들였다.
“...그게 아니라, 정말 넌 대단한 아이구나. 어쩜 그렇게 대사를 평소에 말하듯이 할 수 있는 거니?”
“네?”
“그건 너에게 있어 아주 큰 장점이 될 거야.”
성인 배우도 해내기 어려운 걸, 일곱 살이 해냈다.
소름이 쫙 끼쳤다.
동시에 어떤 기대가 머릿속으로 파고들었다.
“아니 전 그게, 제게 맞는 연기를 해야 한다 생각해서...”
그림이야, 전생에 아주 잘하는 것 중 하나였던 탓에 그러려니 하고 넘겼지만, 연기에 과하다 싶을 칭찬을 받으니 무척 부끄럽다.
“정말 그게 다야?”
“네.”
‘평소 아이를 연기하려던 습관이 몸에 배어 그런지도 모르겠어.’
연기를 두렵게 생각하지 않은 이유기도 한, 사기적인 환생 효과.
거기서 기인한 걸로 보였다.
“이건 네가 연기한 영상이란다.”
놀란 마음을 거두고 뒤쪽에서 촬영한 캠코더를 가져왔다.
저장된 영상을 틀어 한강에게 보여주었다.
한강의 시선은 영상으로 고정됐다.
“어때? 뭐가 부족한지 알겠어?”
“네...”
‘이걸 칭찬한 거야? 으, 쪽팔리게.’
한강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분명 말하는 건 괜찮았다. 문제는 어색한 손짓.
몸이 굳어 있었다.
연기를 할 때는 몰랐는데.
“모델 촬영을 해봤으니, 알 거라 본다. 행동이야 조정해주면 될 문제지만, 시선 처리는 쉽사리 해결되지 않지.”
끄덕.
“발성은 호흡법을 연습하면서 조금씩 조정해 나가고, 시선 처리가 어색한 부분을 조금씩 고쳐나가면 될 것 같아.”
이영화는 앞으로 한강이 해결해야 할 부분을 일목요연하게 나열하고 스케줄을 짰다.
한강의 본격적인 연기 연습이 시작됐다.
***
한강이 연기에 빠져 있는 때.
“멋있다. 진짜.”
미국에 있는 윤희는 TV 방송을 뚫어져라 바라봤다.
두 동공에 비치는 어린아이.
어린 시절에는 느껴보지 못했던 화려함이 TV 속 아이에게서 전해졌다.
“넌 참 멋진 아이야. 한강아.”
몇 번이나 돌려봤는지 모른다. 그림을 그립시다에 나와 그림을 그리는 모습을.
윤희의 눈빛이 변했다.
“나도 저런 멋진 그림을 그릴 수 있을까?”
진지하게 생각했다.
처음으로 무언가 하고 싶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똬리를 틀었다.
“해보자. 잘할 수 있을 거야. 꼭 그렇게 할 거야. 나도 한강이처럼 멋진 화가가 되겠어.”
미래가 바뀌고 있었다. 이건 한강도 예상하지 못한 전개였다.
설마, 윤희가 진로를 미술로 틀리라고는.
윤희는 미국 땅에서 조용히 꿈을 키워갔다.
***
1992년 말.
ZAM이 타이틀곡 ‘난 멈추지 않는다’로 데뷔해 10대들의 사랑 속에 1위를 차지했다.
“드뎌 데뷔를 한 건가. 추억을 맞이하니 이것도 느낌이 새롭네.”
신문을 읽던 한강은 피식 웃고 촌스러운 복장에, 이마에 손수건을 두른 멤버들을 쳐다봤다.
잊었던 추억을 떠오르게 하는 인물들이었다.
“그간 문제가 됐던, 노래도 정해져 다행이라 보는 게 맞겠지.”
한강이 끼면서 영화 제작은 역사와 다르게 빠르게 진행이 됐으나, 문제는 노래였다.
딱 꽂히는 노래가 없자, 영화 제작이 뒤로 밀렸는데, 마침 ZAM이 데뷔해 부른 곡에 꽂힌 감독은 해당 노래를 영화에 넣게 됐다.
심지어 특별출연까지 일사불란하게 처리를 하였다.
[한강아, 나 빼놓지 않고 그림을 그립시다 봤어. 앞으로도 계속 볼 거야. 우리 꼭 만나.]
[미나가.]
신문을 넣고 꺼내든 편지 더미들.
그중 미나가 쓴 편지를 읽었다.
“하여튼, 귀여운 아이야.”
색연필로 삐뚤빼뚤 쓴 글씨에서 미나의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순수함이 가득 들어차 있는 편지, 이런 순수함을 언제 느껴봤는지 모르겠다.
“그래, 우리가 인연이거든 다시 만나자.”
모르긴 해도 이번 영화가 나가면 모두 봐주리라 봤다.
한강은 편지를 잘 접어 가방에 넣었다.
“들리는 말로 절대 쟤 건들지 말라더라. 소속사에서 친하게 지내래.”
“쟤랑?”
“그래, 잘 보이라고 하더라.”
“우리가, 굳이 왜?”
영화 촬영현장에 모여든 아이들이 모여 한강을 가리켜 수군거렸다.
“야, 우리보다 한참 어리더만. 난 나랑 친군가 했는데. 키 더럽게 크네.”
중간에 끼어든 아이가 마음에 안 든다는 얼굴로 한강을 응시했다.
“에휴, 내가 이 어린놈들과. 잘 들어. 쟤 뒤에 육성이 있대. 그리고 쟤가 주연 된 게 그 배경 때문이래. 뭐, 내가 이렇게 말한다고 너네가 알아듣긴 하겠냐.”
그러다 자리의 중심에 서 있던 아이가 한심하다는 눈으로 바라보다 한마디 툭 던지고 사라졌다.
“우리 엄마가 그러던데. 쟤랑 꼭 친구 하라고. 그것도 안 되면 친하게라도 지내라고.”
또 다른 아이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또래의 말보다 더욱 신용이 가는 게 부모의 말.
이쯤 되자, 아이들 분위기가 변했다.
한강을 무시하던 분위기가 달라졌다. 한강을 씹던 아이는 인상을 찡그리며 자리를 피했다.
나이도 훨씬 많은 마당에 절대 먼저 굽히고 들어갈 생각 따위 없었다.
아이들은 각자의 환경과 성격에 맞게 정치적인 자세를 취했다.
“한강이, 준비됐지?”
“네! 감독님.”
어린이 영화 [키드캅] 촬영이 시작됐다.
교실 안에 아이들이 자리를 잡고 앉았다.
한강은 그중 중간 자리를 차지했다.
“자, 하이 하이 큐!”
이준의 큐 사인이 떨어졌다.
웅성웅성.
사인에 맞추어 한 아이가 일어나 외쳤다.
“차렷! 경례! 선생님 안녕.”
수업시간이 끝났다.
한 아이가 여자아이에게 다가가 말한다.
“이따 ZAM 사인회 있는데 같이 가자.”
아이의 한마디와 함께 아이들이 모여 춤을 추며 청소를 시작했다.
이제 모든 걸 다시 시작해.
내겐 아직도 시간이 있어.
때론 상처가 오오오.
좌절로 남아 돌이킬 수 없는 후회도 하고♬
[ZAM] 노래 반주에 맞춰 리듬을 탔다.
노래가 중반부에 접어들 때, 이준의 컷 사인.
장면이 바뀌었다.
“준호야, 너도 같이 가자.”
준호는 한강이 맡은 캐릭터 이름이다.
은수 역을 맡은 여자는 김민정.
민정은 아쉬운 얼굴로 한강을 바라봤다.
‘진짜 잘생겼다’ 속마음은 숨긴 채.
눈빛에선 꼭 같이 갔으면 하는 바람을 담았다.
“안돼, 미술 학원 숙제 때문에. 오늘까지 마무리를 지어야 해서.”
“같이 가면 좋을 텐데.”
“나도 아쉽다. 잘 다녀와. 잼 사인 꼭 받고.”
한강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자리를 떴다.
“감독님, 좋은데요? 전에 연습할 때랑은 또 다른데요. 정말 자연스러웠어요.”
한강의 연기를 본 사람들 반응은 뜨거웠다.
대체 중간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중간점검 당시보다 뛰어난 연기력을 보여줬다.
“NG 한 번을 안 내요. 내가 안 예뻐할 수가 없어. 안 그래?”
자신이 직접 두 발로 뛰어 캐스팅한 아이가 빛나는 연기력을 보이니, 예쁘지 않을 수 없었다.
여기저기서 인맥들 낙하산 태워 데려온 아이나, 오랜 시간 아역을 맡아왔다는 아이보다 한강이 빛을 뽐냈다.
모두의 관심 속에 한강의 연기는 다음으로 나아갔다.
“와...저 그림 너무한 거 아냐...”
집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는 씬.
한강은 한껏 폼을 잡고 붓을 들어 캔버스에 그림을 그렸다.
앞에 어떤 물건도 없이 머릿속으로 떠오른 그림을 손쉽게 그려나가는 모습은 모세의 기적과 다름없었다.
일곱 살의 손에서 빠르게 완성해 나가는 멋진 그림.
어느새 캔버스에는 울긋불긋 단풍잎으로 휩싸인 숲이 조성되어 있었다.
“......”
“......”
감독이건 스태프건 배우건 할 거 없이 한강의 멋진 그림 실력을 입을 벌려 감상했다.
“커... 컷!”
간신히 정신을 수습하고 컷 사인을 보냈다.
“이건 진짜 대박이야...”
앞으로 영화가 어떻게 흐를지 무척 기대됐다.
‘이걸 홍보영상으로 내보내면...’ 생각을 가지며 자리를 정리했다.
***
육성문화재단 대표이사실.
“한강이는 어때요?”
방으로 들어선 최동욱에게 물었다.
“주변 평판이 좋습니다. 이영화 원장도 그렇고.”
최동욱은 들려온 보고와 현장에서 직접 본 솔직한 감상을 전했다.
“연기도 그 정도라고요?”
“만족을 모르는 성격입니다. 목표치에 이르기 전까지 멈추지 않는 독기가 어찌나 대단하던지. 당시 현장에 있던 모두 혀를 내두를 정도였습니다.”
“참 대단한 아이예요. 그림을 그립시다에서도 촬영 전에 미리 그림을 그려보고 방송 촬영에 임했다죠?”
이뿐만 아니라, 한강은 모든 방송에 열과 성을 다하는 노력형 천재로 알려졌다.
방송으로 보이는 화려함보다 드러나지 않는 그의 노력을 안다면, 절대 한강을 운 좋은 단순한 천재로만 보지 않을 터다.
“볼 때마다 저 자신을 돌아보게 됩니다.”
최동욱도 수재 소리는 지겹도록 듣고 자랐다.
공부에 대한 열정과 독기도 충분했다.
하나, 한강을 보노라면 정말 그만큼 노력을 했는지 의심이 들었다.
“역시 대단한 아이예요. 그런 독기가 있으니 지금과 같은 결과가 있는 거겠죠.”
“맞습니다.”
승복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그리고 인정하지 않을 이유 또한 없었다.
“계속 지켜보세요. 주변에 파리 떼가 꼬일 수 있으니, 확실히 차단하시고요.”
한강은 자신이 찜한 인재.
엄한 놈들에게 넘길 생각 따위 없었다. 그리고 육성의 그늘 아래 둔 아이에게 해를 끼치는 이가 있는 것 또한 용납할 수 없었다.
확실하게 한강의 뒷배경이 되어 보호해 줄 참이었다.
어느덧, 하얀 겨울이 지워지고 싹이 트는 봄이 되었다.
하얀 세상은 녹색 숲으로 변했다.
“끝났다...”
1993년 3월 봄.
키드캅 제작의 종료를 알렸다.
한강은 후련한 얼굴로 하늘을 올려봤다.
“재밌는 시간이었어.”
쉬이이이이이이.
하늘 위로 비행기가 지나갔다.
“한국이다.”
비행기 안에서 바깥을 내려보는 윤희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손으로 눌렀다.
올해부터 미국이 아닌, 한국에서 하고 싶은 미술을 배우며 학교를 다니게 되었다.
“한강이는 잘 있을까? 보고 싶다.”
친동생처럼 여기던 귀여운 아이. 동생 한강이를 떠올리자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자신의 목표가 되어 준 동생을 곧 만나게 된다 생각하니 무척 기뻤다.
비행기가 빨리 공항에 닿기를 바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