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화. 7살, 로얄로 올라서다
저벅저벅.
“이곳은 아직 바뀌지 않았구나.”
한강은 천천히 걸으며 주변을 둘러봤다. 2년 전과 크게 달라진 건 보이지 않았다.
나무 아래 그네도 여전하였고, 화단에 꽃들도 잘 자라고 있었다.
“선생님은 잘 계시려나.”
처음 선생님이 원장의 딸이라던 사실이 밝혀진 날, 그날의 놀라움은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
“후후, 그랬지. 설마 은수저일 줄은.”
아이의 이름은 유한강. 미국에서 그림을 그립시다 방송을 끝내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한강은 예전에 다니던 참뜻 유치원 주변을 둘러보며, 옛 감성에 사로잡히여 문앞에 섰다.
“잘 계시려나.”
이하나 선생의 귀엽던 얼굴이 떠오른다.
단 2년이지만, 나이로 치면 중반에서 후반으로 넘어갈 시점이다.
노크를 할까 하다, 조심스레 문을 열었다.
“응? 어, 아! 너 한강이, 한강이 맞지?!”
문을 열자 입에 빵을 한움큼 물고 있는 이하나 선생과 마주했다.
“선생님, 안녕하세요.”
이제는 다섯 살의 모습은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많이 컸다.
하나, 한강의 어린 모습은 지워지지 않았다.
“이제 돌아온 거야?”
“하하, 네.”
“정말 멋지게 컸구나.”
고작 2년이지만, 한강의 키는 135cm.
아이의 몸에서 2년이면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니었다.
“선생님은 그대로시네요.”
“호호, 얘는.”
한강의 아부성 칭찬에 하나는 좋아했다.
“아이들은 이제 없죠?”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물었다.
“그렇네. 다들 이사 간다고 작년에 모두 떠났어. 미나가 많이 울었는데. 미나 기억하니?”
“미나, 기억하죠. 귀여웠는데.”
2년 전 떠나던 날, 누구보다 구슬프게 울었던 미나.
그날의 장면이 머릿속으로 떠오른다.
“한강이 미나 좋아했구나? 호호.”
“귀여웠잖아요.”
“여전하네. 그 늙은이 같은 말투는, 호호.”
신기한 듯 바라보다, 손으로 입을 가려 웃었다.
천상 여자다.
“근데, 여기는 뭐 타고 왔어? 듣기로 분당으로 이사를 갔다 들은 거 같은데?! 혼자... 왔을 리는 없고?”
하나는 문쪽으로 시선을 가져갔다.
하나,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커피 타고, 가르마 타고 왔죠. 하하.”
“......”
하나는 급 당황했다.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방금 들은 게 뭔가 싶어 한강을 한참 바라봤다.
“그거 설마 개그니?”
황당함에 젖은 하나의 의심스러운 눈빛.
어른도 쉽게 하질 않을 이상한 개그를 미국 가서 배워왔다.
“큼, 재미없었나요.”
하나의 모습에 어색하게 헛기침을 하였다.
“응. 너무 비호감이었어. 어디 가서 절대 하지 마. 알았지?”
“네..., 실은 아빠에게 부탁해 잠시 들렀어요. 마침 아빠도 이곳에 일이 있다 하셔서요.”
“아, 그래.”
“그리고 혹시나, 아는 얼굴이 있나 싶기도 했고.”
“아, 내 정신 좀 봐. 한강아. 잠시만.”
후다닥.
별안간 하나는 교사실로 뛰어갔다. 무언가 잊고 있었다는 듯, 이에 한강은 두 눈동자에 물음표를 띄웠다.
“미나, 얘기를 하고서 이걸 깜박 잊었지 뭐니. 이거 가져가렴.”
돌아온 하나의 손에 하얀 종이가 담긴 봉투가 들려 있었다.
“아이들이 한강이 너에게 쓴 편지란다.”
“...녀석들. 감사해요.”
한강의 눈에 아련함이 깃들었다.
입가에는 행복한 미소가 피어났다.
“저 이제 가봐야겠네요. 밖에 차 소리가 들리는 걸 보니, 아빠가 오신 모양이에요.”
“그래, 담에도 또 놀러 오렴.”
밖에서 익숙한 코란도 디럭스 엔진소리가 들려왔다.
‘한강아’ 아빠 목소리가 들렸다.
“다음에 또 뵈어요.”
한강은 추억으로 남게 될, 유치원을 시야에 담고 코란도에 몸을 실었다.
“이번에 한강 군이 PBS와 계약을 끝내고 한국으로 귀국했다는데, 그 아이를 우리가 캐스팅을 해보는 건 어떻습니까?”
한강의 한국 복귀 소식은 방송계를 바쁘게 만들었다.
세계적으로 얼굴을 알린 국내 유일한 아이, 아동 패션복의 대표주자로 떠오른 샛별.
국내에 어느 연예인도 해내지 못한 걸, 당시 다섯 살 아이가 해내고 돌아왔다.
“연기를 해본 적 없는 아이를 말인가요? 너무 위험한 발상 아닙니까?”
그에 남자는 미간을 좁혀 되물었다.
“언제는 연기 잘하는 아이를 섭외했다고. 우린 돈만 벌면 되는 거예요. 지금 아이들한테 가장 인기 있는 아이가 누구인지 생각해 보세요.”
사실 국내에서 그만한 인지도를 가진 아이도 없었다.
올해 나이 7살, 어리긴 해도 아이들 프로.
크게 문제 될 건 없다고 봤다.
방송으로 보는 아이의 모습은 무척 성숙했다.
심지어 말도 참 잘했다.
“그럼 출연료는 어떻게 하시려고요? 지금 그 아이 SA급 대우를 해주고 있어요. 모델료만 따져도 국내 탑이라고요.”
2년간 한강은 정말 많은 경험을 하였고, 무수한 일들을 경험했다.
버버리에서 무료로 옷을 주거나, 미술 관련 업계에서 초대를 받아 탄탄한 인맥을 쌓았다.
심지어 간접광고를 통해 얻어낸 수익과 한국에서의 아동복 러브콜은 몸값을 급격하게 높이는 데 일조했다.
“최소가 1억이었어요, 모델료가. 그건 아시죠?”
제작비는 최대한 저렴할수록 좋았다. 그것이 남자의 생각이었다.
“주면 되지요. 큰 화제가 될 겁니다.”
반면 건너편에 앉아 있는 중년인은 돈이 얼마가 들어가도 화제에 집중했다.
“겨우 아이에게 그런 돈을 주면 반발이 있을 겁니다.”
“어허, 반발이 왜 일어난다 보세요? 지금 우리가 캐스팅하는 아이들이나 성인 배우들 중 이 아이보다 인지도가 탄탄한 사람이 있나요?”
“......”
“없죠? 다른 배우들 출연료는 적당히 주고, 우리는 이 아이에 집중하면 되는 거예요. 거 이상한 아이들 낙하산 태우려 하지 말고, 우리 영화의 성공에만 초점을 맞춰요.”
일단 한강은 방송 경험이 풍부하다는 점이다.
거기에 광고까지 여럿 찍었다.
심지어 마지막에는 단독으로 방송을 진행하며 입담을 털어놓는 모습은 기똥차게 다가왔다.
‘표정도 일품이었지.’
모르기는 해도 당장 캐스팅된 아이들보다 연기력 면에서는 훨씬 위일 거란 것이 중년인의 생각이었다.
“이만 하고 전 아이를 만나러 갑니다.”
중년인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신이 목표로 한 주인공을 만나러.
***
“미국 생활은 선생님 덕분에 편안하게 잘 보냈습니다. 윤희 누나도 도움을 많이 줬고. 정말 감사드려요.”
다음 날, 한강은 미국에서 보호자 대리로 있던 최동욱 실장의 도움을 받아 육성문화재단 홍라혜 대표이사를 만났다.
“윤희에게 얘기 많이 들었단다. 윤희가 많이 보고파 하더라.”
“하, 하하...”
[이거 입어 봐. 이것도. 이것도.]
[나랑 백화점 가자. 예쁘다. 헤헤.]
[저기 있는 거 다 주세요. 이거 다 네 거야.]
당시 있던 일들이 떠올랐다.
어마무시하던 순간도 있었고, 즐겁던 기억도 있었다.
‘하루에 옷만 몇 번은 갈아입었지...’
덕분에 코디에 대한 감각을 키울 수 있었고, 집에 있는 옷들은 전부 명품으로 도배됐다.
“윤희 누나는 미국에서 지내나요?”
“왜? 한강이도 우리 윤희가 보고 싶은 거야?”
“보고 싶...죠.”
“호호, 그렇지. 이제 앞으로 뭐 할지 물어볼까?”
일곱 살한테 물어보는 난이도가 성인과 동수를 이룬다.
하나, 라혜는 이를 크게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저 아직 일곱 살입니다만.”
“왜, 그러니. 우리 사이에.”
자칫 오해의 소지가 있는 말, 한강의 시선은 천천히 위로 올라갔다.
‘대체 뭘 생각하는 거지?’
무언가 노리는 저 눈빛.
홍라혜의 눈을 유심히 살피며 그녀의 생각을 유추했다.
‘막내딸과 같이 지내게 했다는 건, 날 가까이 두겠다는 거고. 무엇을 할 거냐는 물음은 설마 나를 육성의 사람으로 키워보겠다 뭐 그런 의민가?’
그 밖에 많은 생각들이 오갔지만, 요점은 이거였다.
키우겠다.
생각은 여기서 멈췄다.
“평범하게 학교를 다니며, 돈 벌까 해요.”
이게 평범한 생각이 맞을지 모르지만, 당장 한강에게 있어 ‘학교’와 ‘돈’은 평범에 속했다.
“돈을? 아주 재밌는 소리를 하는구나. 어떻게 벌지 듣고 싶어지는데?”
라혜는 기대 어린 눈으로 응시했다. 과연, 저 작은 입에서 어떤 말이 나올지 심히 기대가 되었다.
“투자하면서 학교를 다니면 그게 최고 아닐까요? 김광석 아저씨도 있고 말이죠.”
“호호, 역시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구나. 투자 좋지. 그렇다면 어디에 하는 게 좋을까?”
기대치를 뛰어넘는 대답에 만족한 홍라혜는 은근히 물었다.
방금은 단순한 호기심이라면 지금은 테스트의 성격을 띤 질문이었다.
‘음, 뭐. 육성그룹과 친해지면 좋지. 빽도 없는 지금 육성이 배경이 되어 준다면...’
앞으로 미래는 매우 순탄하게 흐를 터다.
마음을 정한 한강의 입이 열렸다.
“주식은 통신사업과 반도체, 건설이 좋겠고, 금 달러 부동산도 보고 있어요.”
이참에 확실히 실력을 보이기로 하였다. 어쭙잖게 정체를 숨기느니 그런 선택은 하지 않았다.
현실과 판타지는 엄연히 다르다.
내 편이 되어줄 사람에게 확실히 어필해 보호를 받는 게 최고의 선택.
이건 현실이다.
“정말 놀라워. 누가 알려주더냐?”
김광석 과장에게서 투자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바 있지만, 직접 듣게 되니 소름이 쫙 끼쳤다.
“아뇨. 제 머리에서 나온 생각이에요.”
“...그럼, 이유까지 설명할 수 있을까?”
설마 하는 심정으로 물었다.
왜, 통신 반도체 건설 부동산 등에 투자를 하려는지.
두근두근, 심장이 뛰었다.
“아주 간단해요. 반도체는 산업의 쌀이에요. 꼭 필요한 요소라는 거죠. 산업이 발전할수록 반도체의 수요는 증가하게 되리라 봐요. 통신은 사회의 필수품이 될 거예요. 우리가 입는 옷처럼 당연히 우리와 함께하게 될 거예요. 그리고 부동산은...”
한강은 자신이 알고 있는 지식을 총동원해 사회구조부터 시작해 앞으로 성장하게 될 산업에 대해 주야장천 설명을 하였다.
‘...이 아이 진짜야.’
그럴수록 홍라혜는 한강에게 빠져들었다.
“아주 대단하구나. 대체 그런 생각은 어떻게 하게 됐을까?”
질문은 멈추지 않았다. 알면 알수록 신기한 아이였다.
그리고 욕심이 났다.
“아침마다 신문을 봤어요. 유치원 다닐 때부터요. 덕분에 세상을 알게 됐어요.”
세상을 알게 됐다라.
홍라혜는 생각에 빠졌다.
‘이 아이는 기대 이상이야. 윤희를 보조해주길 바랐는데, 내가 너무 안일했어.’
홍라혜의 머릿속에서 여러 번 계획이 수정됐다.
한강의 그릇이 생각 이상으로 컸기에 그에 걸맞은 자리가 알맞다 보았다.
“오늘 즐거웠구나.”
“저도 좋았어요. 선생님.”
“호호, 내게 선생님이라 부르는 사람은 네가 유일할 거다.”
“싫으신가요?”
“아니다. 그 말이. 호호. 부르고 싶은 대로 부르려무나. 그보다 이걸 가져가거라.”
홍라혜가 가방에서 지갑을 꺼내 검게 칠해진 카드를 앞으로 내밀었다.
“앞으로 필요한 게 있거든 이걸 써. 카드 쓸 줄은 알지?”
“......”
‘고작 일곱 살 아이한테 아맥스 블랙카드를 주시는 건가요? 선생님...’
“분실하면 어쩌려고 이런 걸, 저에게...”
“그 카드가 어떤 카드인지 아니?”
도리도리.
“난 또 안다고. 그건 걱정 마라. 분실하면 김 과장에게 말하면 알아서 처리해 줄 거니. 앞으로 커가면서 필요한 게 많을 거란다. 이건 그때를 위해 사용해라. 네가 번 돈은, 네가 계획한 대로 사용을 하고.”
홍라혜는 인자한 얼굴로 한강의 손을 꼭 잡았다.
“감사합니다. 선생님.”
“그래, 그럼 가보렴.”
오늘 대화는 생각 이상으로 잘 이뤄졌다.
큰 이득을 취한 날이 되었다.
“...!”
멈칫.
등을 돌려 방을 나가려는 순간, 한강의 발걸음이 우뚝 멈췄다.
눈동자는 한 지점에 고정됐다.
“저게 왜 여기에?”
그곳에서 2억 원에 판매됐던 작품이 버젓이 문 쪽 벽면에 걸려 있었다.
놀란 마음에 등을 돌렸던 몸을 다시 돌려 뒤로 향했다.
“늘 응원하고 있으니, 앞으로도 좋은 그림 부탁한다. 한강아.”
은은한 미소를 품고 있는 홍라혜와 눈을 마주했다.
그리고 그제서야, 사건의 전말을 알게 된 한강이었다.
“멋진 그림도 좋은 투자라 생각합니다. 차익실현을 볼 수 있도록 해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한강은 짧게 말하고는 방을 나섰다.
“역시, 대단한 아이야.”
방을 나간 지 1분여 후.
홍라혜는 수화기를 들었다.
“김 과장에게 전해. 한강 군을 로얄 패밀리로 대우하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