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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버는 게 예술이다-23화 (23/237)
  • 23화. 5살, 들어오는 복은 더욱 크게

    쉬이이이.

    활주로를 긁으며 미국행 비행기가 떠올랐다.

    떴다 떴다 비행기 날아라 날아라.

    높이 높이 날아라 우리 비행기.

    방 안에 동요가 울려 퍼진다. 귀를 간질간질하게 만드는 이 노래.

    “으... 제발. 누나...”

    윤희가 틀어 놓은 노래에 귀가 멍들고 있었다.

    한강은 고통을 호소했다.

    “이거 입어...”

    하나, 깔끔히 무시.

    그리고 인형이 되었다.

    “왜 자꾸 내 옷을...”

    “싫어...?!”

    글썽글썽.

    커다란 눈이 흔들리며 젖어간다.

    한강은 깊게 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아래로 내렸다.

    “주세요.”

    이번에도 누구나 아주 잘 아는 버버리다. 아이와 드잡이질해 뭐할까?

    너그러운 마음으로 패배를 인정했다.

    그런데 왜 또 버버리지?

    “누나 버버리 좋아해요?”

    보이는 옷들이 전부 버버리다.

    ‘본인은 샤넬이고... 뭘까?!’

    딱히 버버리 빠순이는 아닌 거 같은데.

    의아했다.

    “어떤 사람이 아래서 주고 갔대. 입으라고.”

    배시시.

    “...네.”

    믿지 않았다.

    그저 어린아이가 마음을 쓴다고, 어설프게 거짓말을 하고 있다 생각했다.

    한강은 보이는 현실 외에 다른 건 믿지 않았다.

    “와, 예쁘다. 잘 어울려.”

    “고마워요.”

    그래도 좋아해 주니 나쁘지 않았다. 조금 부끄러운 감도 있었지만, 좋아해 주니 이것도 나쁘지 않다 생각했다.

    귀찮게 구는 것만 빼면 더 좋을 것을.

    “저 다녀올게요.”

    “응, 다녀와.”

    다섯 살 먹고 출근하는 기분은 늘 새롭다.

    뒤뚱뒤뚱.

    짧은 다리로 걷고자 엉덩이를 흔들었다.

    최동욱 실장의 손을 잡은 채.

    “키가 좀 큰 것도 같고.”

    자동차 높이가 무척 낮아진 기분이 들었다. 한강은 허리를 쭉 펴고 높이를 측정했다.

    “음 1센티? 2센티? 정도인가. 나쁘지 않네.”

    키가 크고 있다는 건 기쁜 일이다. 이번 생은 180cm를 넘기길 바랐다.

    꼭, 신의 영역에 들어서기를...

    “수고하세요.”

    “예, 감사합니다.”

    저런 모습들이 익숙해서인지 한강은 본인에게 ‘도련님’ 호칭을 사용하고, 존칭으로 대하더라도 큰 거부감을 보이지 않았다.

    “참 신기한 아이야. 어떻게 저리 태연할 수 있는 거지?”

    PBS 건물로 들어가는 한강의 모습은 예전부터 그래왔다는 듯, 너무도 당연시하게 받아들였다.

    어떤 거부감도 내보이지 않았다.

    볼수록 신기한 아이였다.

    “위에서 관심을 가지는 아이야. 신경 쓰지 말자.”

    그것도 잠시 남자는 한강의 행동에서 관심을 끄기로 하였다.

    맡겨진 임무에 충실하자.

    ***

    컷!

    오늘의 방송도 무사히 끝났다.

    “오늘도 고생했어. 요즘 옷이 점점 고급져진다?”

    제임스 에단은 한강에게 다가와 슬며시 웃으며 옷을 만졌다.

    대놓고 드러나는 브랜드 옷, 베이지색 체크 무늬.

    고가의 옷을 입고 있는 모습이 꽤나 잘 어울렸다.

    “하하, 그게 같이 지내는 사람들이 챙겨줘서... 그림 그릴 때 불편하다고 몇 번을 말했는데. 안 통하더라고요.”

    한강은 난감한 얼굴로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아무리 철판을 둘렀다 하더라도 이건 좀 민망한 생각이 들었다.

    자신의 집안 환경은 대충 아는 사람들이다. 그런 아이가 몸에 명품을 걸치고 다니니, 분명 이상하게 다가올 터.

    “역시 인기인은 달라. 그렇지 않아요?”

    “맞아요. 요즘 한강이가 아주 잘 나가죠.”

    ‘어라?!’

    한데, 반응이 이상했다.

    예상한 반응과 다른 말들이 흘러나왔다.

    “오늘도 전화가 왔어요. 한강이를 만나고 싶다고.”

    제임스 에단이 의미심장한 말을 꺼냈다.

    “패션업계에서 요즘 난리예요. 그걸 말리는 데 아주 진땀을 뺐어요.”

    “나도 마찬가지예요. 한강일 소개시켜 달라며 성화예요.”

    제임스 에단과 밥 로스는 같은 고민을 공유를 하고 있었다.

    둘의 시선이 한강에게 쏠렸다.

    “왜들 그러세요?”

    무언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 한강은 걸음을 한 발짝 뒤로 옮겼다.

    부담스러운 시선에서 벗어나고 싶어졌다.

    “그게 말이지, 한강아 나와 함께 그린 그림 말이다. 구입하고 싶다는 사람들이 나타났단다. 난 거절했는데, 네 그림을 꼭 구매하고 싶다는구나.”

    밥 로스는 찝찝한 얼굴이 되어 말했다. 썩 내켜하는 모습이 아니었다.

    밥 로스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그림을 안 파는 작가로 매우 유명했다.

    “제 그림을요?”

    “그래. 그리고 지금껏 그려온 모든 그림을 넘겨 달라는데, 이거야 원...”

    어린아이에게 이러한 말을 하려니, 난감하기 그지없었다.

    “얼마예요?”

    하나 한강은 매우 달랐다.

    오히려 기쁜 얼굴이 되어 가격을 물었다.

    “...관심이 있느냐?”

    “당연하죠!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예술품이 뭔지 아세요?”

    “......?”

    “화폐에 그려진 숫자요! 그걸 가질 수 있다면 당연히 넘겨야 맞지요.”

    “허허...”

    “그래서 얼마죠? 선생님.”

    한강은 절대 무료로 그림을 그릴 생각이 없었다.

    전생에 그림은 취미라 선물로 줄 수 있었지만, 지금은 생계와 연결이 되어 있다.

    “...그건 네가 정해 보련. 그림은 다른 사람이 정하기도 하지만, 결국 자신이 정하는 거란다.”

    “감사합니다! 선생님.”

    이렇게 기쁜 일이 있을 수 있나? 어떤 소식보다 지금의 소식이 더욱 기쁘게 하였다.

    “큼, 그렇다면 내 쪽 사람도 만나 줄래? 내 지인 중에서도 너의 그림을 원하는 사람이 있어서 말이지.”

    조용히 듣고 있던 제임스 에단이 쓱 끼어들었다.

    “좋지요. 사람이 많을수록 제 그림의 가치는 오를 거니까요!”

    자고로 사람이 몰리면 경쟁심은 불타오른다.

    가지고 싶다면 사람들은 값을 부를 것이고 그림의 가치는 상승할 터.

    이보다 더 좋을 수 있을까?

    “......”

    “......”

    둘은 한강의 입에서 나온 ‘가치’와 생각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비상하다 생각은 했는데, 무슨 아이가...

    “전 언제든 환영이에요.”

    “하하, 알겠다. 내 그리 전하마.”

    밥 로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대신, 네 보호자도 데려오는 게 좋을 거야. 우리도 참여는 하겠지만, 그래도 아직 어리니 보호자와 함께 오는 게 안전할 게다.”

    제임스 에단은 고개를 끄덕이며 주의를 주었다.

    “네! 걱정 마세요.”

    한강은 기뻐 방실방실 웃었다.

    “저, PD님.”

    “응?”

    갑자기 들려오는 목소리에 제임스 에단이 고개를 돌렸다.

    “무슨 일이예요?”

    “그게 해피아이라는 곳에서 저 아일 보러 왔다는데, 어떻게 할까요?”

    “해피아이?!”

    처음 들어보는 이름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해피아이요?!”

    하나, 한강은 알아듣고는 깜짝 놀랐다.

    8, 90년대 잘 나가던 기업의 이름은 한국 사람이라면 아주 잘 아는 이름이다.

    “그래, 넌 아니?”

    “그거 한국기업이에요. 패션기업이죠. 한국에서 제법 잘 나가는 곳이에요.”

    “오, 그래.”

    “네, 그런데 왜 저를 찾죠?”

    그러다 드는 의문.

    한강의 시선이 위로 올려졌다.

    “그건 나도 모르겠네. 그쪽에서 직접 만나 대화를 하고 싶다는데.”

    “음, 알겠어요. PD님 저 만나보러 가볼게요. 저 아저씨랑.”

    한강은 세트장 구석에서 자리를 지키고 있는 남자를 가리켰다.

    한강의 보호자 대리였다.

    “그래, 그러거라. 우리도 이만 철수하죠.”

    “그러죠.”

    한강이 자리를 뜨자, 둘도 주변을 정리했다.

    ***

    “이거 괜히 떨리네.”

    다섯 살 아이를 만나는 일에 이렇게 긴장이 될 줄 몰랐다.

    “해피아이 담당자신가요?”

    긴장하던 와중, 아이의 목소리가 아래에서 들려왔다.

    동시에 검은 그림자가 머리 위에서 느껴졌다.

    “아, 한강이구나. 안녕하세요. 해피아이 김동진 과장입니다.”

    한눈에 한강이를 알아본 김동진은 준비된 명함을 남자에게 내밀었다.

    ‘아따 크다.’

    김동진의 키는 170cm.

    남자는 그보다 10~15cm는 더 컸다.

    “육성그룹 실장 최동욱입니다.”

    “아, 네. 반갑... 예?!”

    명함을 주고받던 중 김동진은 눈을 부릅떴다.

    왜, 여기서 육성그룹이 튀어나와?

    “보호자 대리입니다. 지금 부모님은 한국에 있어, 대신 맡고 있습니다.”

    무뚝뚝한 음성.

    하나, 목소리에는 상당한 힘이 실려 있었다.

    “무슨 일로 오셨는지, 말씀해 주시면 제가 대신 처리해 드리겠습니다.”

    “아... 예. 하하.”

    크게 당황한 나머지 저도 모르게 헛웃음이 나왔다.

    가벼운 마음으로 와, 무거운 마음으로 가게 생겼다.

    “죄송합니다. 제가 실수를 보였습니다. 여기 한강 군을 모델 해피아이 모델로 캐스팅하고 싶습니다.”

    정신을 수습하고 방문한 목적을 말했다.

    시선은 한강이 아닌, 최동욱에 가져갔다.

    “해피아이는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아동복으로 유명한 곳이죠.”

    “맞습니다.”

    “일단, 도련님의 의견을 묻는 게 중요하겠군요.”

    최동욱은 호칭에 힘을 줘 말했다.

    이는 계약에 상당한 유리한 고지에 서기 위한 계획적인 행동이었다.

    ‘이 사람 제법 머리 좀 쓰는데.’

    한강은 흡족한 마음에 살포시 미소를 지었다.

    ‘뭐, 도련님?! 설마... 육성 사람이었나...’

    한편, 최동욱 실장의 말을 들은 김동진 과장은 순간 뇌가 고장났다.

    재벌계 핏줄이란 사실은 정신을 아득하게 만들었다.

    물론 그의 오해였지만, 그걸 이 자리에서 말해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하하, 실례를 할 뻔했네요.”

    목소리에 힘이 빠졌다.

    “아니에요. 저를 캐스팅하고 싶다 하셨는데, 모델료는 어떻게 되죠?”

    그것과 별개로 한강은 주제를 수면 위로 올려 모델료에 대해 물었다.

    돈 버는 일을 마다할 이유는 없었다.

    ‘이 핑계로 잠시 한국에 다녀와도 될 거고. 어차피 방송에 차질이 없다면 뭘 해도 상관은 없을 테니까. 그나저나 내가 모델을 다 하다니. 크크. 이번 생은 잘생긴 얼굴로 태어나 큰 득을 보는구나.’

    돈이 없는 대신 얼굴을 얻었다.

    한강이 이게 더 마음에 들었다.

    왜, 그런 말이 있지 않던가? 예쁘게 태어나면 명문대 4년제를 졸업한 거나 다름없다고.

    “모델료는 2천입니다.”

    실은 1천만 원 이내로 해결하라 했지만, 육성이라는 이름에 기가 눌려 그보다 높은 2천을 불렀다.

    ‘어쩌겠어. 육성인데. 잘 보여서 나쁘지 않아. 내게 위임했으니 이 정도 선은... 괜찮을 거야.’

    김동진은 여기에 자신의 인사고과를 걸었다.

    육성과 끈을 연결했다는 그 사실 자체만으로 큰 실적이라 생각했다.

    “2천이라, 좀 더 쓰시죠.”

    “죄송하지만, 이게 최선입니다. 2천도 PBS 그림을 그립시다에 출연해 인지도가 오르면서 높게 책정된 겁니다.”

    광고 업계에서 모델별로 등급을 나눈다.

    특급(SA).

    고급(A)

    중급(B)

    저급(C)

    로 구분이 되며, 국내에서 SA급은 10명 안팎으로 손꼽힌다.

    한강의 등급은 본래 저급.

    하나, 그림을 그립시다에 출연하게 됨으로써 B급으로 상향조정이 되었다.

    “계산법이 틀리셨습니다.”

    한강이 조용히 입을 닫고 상황을 주시하고 있던 때, 최동욱 실장이 입을 열었다.

    “그 조건은 국내에 한정된 조건 아닙니까? 그림을 그립시다는 미국에서만 하더라도 엄청난 인지도를 자랑합니다. 게다가 유럽, 아메리카, 아시아에 이르기까지 해당 방송을 모르는 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일 건데, 겨우 2천이라니. 납득이 가지 않네요.”

    ‘나이스, 잘한다.’

    그냥 실장을 달고 있는 게 아니라는 걸 확실히 보여주었다.

    “제가 보기에 SA급을 줘도 해피아이 입장에서 결코 나쁜 조건은 아니라 봅니다.”

    이 의미는 단 한 가지.

    최소 1억 원 이상은 지급해야 한다는 걸 은연중 밝힌 것이다.

    “... 그것도 맞는 말씀이지만, 그렇지만...”

    말이 궁해졌다.

    그림을 그립시다는 세계 탑급 시청률을 기록하고 있었다.

    심지어 미국에서 활동하며 차츰 유명세를 떨쳐가고 있는 한강.

    김동진은 고민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제 권한을 넘어선 금액이라 당장 이 자리에서 말씀드리기 힘들 거 같은데, 음...”

    정말 난감했다.

    최동욱 실장의 말대로면 분명 한강은 SA급 대우가 맞다. 하지만, 방송 경력은 매우 짧다.

    심지어 모델 경험은 무.

    그런 아이에게 1억을 준다는 건 무리가 따랐다.

    “그럼, 이렇게 하시는 건 어떠세요. 모델료 1억은 해피아이에서 제공하는 옷을 하루 지정해 입고 방송에 나가는 걸로 하고. 이게 싫다면 그냥 2천만 원짜리 광고 한 편 찍는 걸로 끝. 다른 조건은 추가하지 않기로 하는 걸로. 어떠세요?”

    조용히 지켜보고 있던 한강이 입을 열었다.

    시선은 한강에게 단번에 모아졌다.

    둘의 얼굴에서 놀라운 감정이 흘러내렸다.

    ‘이 사람아, 돈 아끼다 새 된다. 어디서 날로 먹으려 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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