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5살, 패러다임을 선도하다
미국에 온 지 이제 한 달, 혼자 지낸 지도 한 달이 되었다.
육성에서 뽑은 사람들이 봐주고 있어 편하게 생활할 수 있다.
“그나저나 언제 오려나?”
시선을 돌려 벽에 걸린 시계를 바라봤다.
시간은 오후 3시. 올 때가 됐는데, 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선생님도 너무해. 그냥 살던 곳 살게 하지. 왜 구태여 이곳에서 나랑 머물게 하려는 건지. 휴...”
조용하게 지내고 싶었다. 퇴근하면 집으로 돌아와 조용히 여가생활을 보내며 평화로이 지내는 것.
이것이 한강이 꿈꾸던 자유로운 생활이었다.
한데, 그걸 홍라혜의 한마디에 와장창 무너졌다.
올해 나이 11세.
비운의 여주인공 격인 이윤희.
그녀가 한강과 2년간 함께 지내게 되었다.
거처를 옮기는 수고까지 하며.
웅성웅성.
밖에서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들려왔다.
한강의 시선이 현관문으로 향했다.
“아가씨, 여깁니다. 오늘부터 여기서 한강 도련님과 함께 머무시면 됩니다.”
문이 열리고 두 명의 남녀가 들어왔다. 남자는 들어서는 여자아이에게 상황을 설명하고 멍하니 서 있는 한강을 응시하며 끝에 ‘도련님’ 호칭을 사용하였다.
“정말이지, 양반 되기 글렀네. 저 누님도.”
한강은 혀를 쯧쯧 차고는 뒷짐을 지고 앞으로 걸어갔다.
“안녕하세요. 누나. 아저씨.”
뒤에서 늙은이처럼 있던 모습은 사라지고 천진난만한 아이의 얼굴로 해맑게 인사를 하였다.
“너구나. 한강이가. 반가워. 난 윤희야.”
“미투.”
짧고 간단한 대답.
한강은 싱긋 웃어 보였다.
“......”
윤희는 너무 황당해 잠깐 말문이 막혔다.
“그래, 뭐, 틀린 건 아니니. 엄마 말씀도 있고, 잘 지내보자. 천재.”
윤희도 오면서 듣고 본 정보들이 꽤 있었다. 비록 자라온 환경과 가문의 차이는 있지만, 윤희는 그러한 부분에는 일절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성격은 어릴 때부터 타고났구나. 말괄량이가 아니라 다행이야. 이런 사람이 극단적 선택이라... 앞으로 그런 일은 없을 거야. 나를 만난 것부터가 누나의 운명이 바뀐 거니까.’
전생의 기억을 떠올려 윤희를 불쌍히 바라보다, 시선이 마주쳐 표정을 고쳤다.
“그래요. 누나.”
“큼, 음. 자, 이건 그냥 준비한 거니까 잘 써.”
윤희는 고급스럽게 잘 포장된 선물상자를 한강에게 건넸다.
“이게 뭐예요?”
“방에 들어가서 풀어봐. 내 방이 어디예요?”
“저쪽입니다. 이리로.”
윤희는 한강과 눈을 마주한 순간,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무슨 남자애가 저리 예뻐. 완전 사기야. 불공평해.’
매료될 거 같은 어린아이의 눈빛에 그만 심장이 쿵 하고 울렸다.
하마터면 귀여움에 반해 안을 뻔하였다.
“고마워요. 누나.”
멀어지는 윤희를 보며 한강은 씩 웃었다.
“그런데, 이건 뭘까?”
받아든 선물을 한참을 바라보다 포장지를 뜯어 안에 내용물을 확인했다.
“모자? 어랍쇼. 버버리네.”
그리 비싼 브랜드는 아니네라고 생각한 순간, ‘지금 내 입장에서 고가품이지’ 현실을 깨닫고 머리를 긁적였다.
“몸에 밴 전생의 기억을 아직 다 버리지를 못했네. 참 어려운 일이야. 어디 써볼까.”
걸음을 옮겨 거실에 있는 전신 거울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모자를 쓰고 자신의 모습을 감상했다.
“이러니 딱 화가 느낌이네. 크크.”
모자는 베레모로, 버버리의 감성이 깃든 베이지 톤에 체크 무늬를 두르고 있었다.
“패션의 완성은 외모라더니, 그 말이 딱 맞네. 맞아.”
한강은 모자를 쓰고는 매우 만족한 웃음을 흘렸다.
전생에는 가져보지 못한 완벽한 외모에 몹시 뿌듯했다.
“잘 쓰고 다닐게. 누님.”
문틈으로 보이는 눈동자를 보며, 한강은 히죽 웃었다.
참으로 귀여운 아가씨다.
그냥 나와서 직접 보면 될 걸, 문 뒤에서 숨어 훔쳐보고 있었다.
한강은 알면서 모른 척, 천천히 한 바퀴 빙글 돌아주고는 방으로 들어갔다.
“...귀여워.”
그러한 사실을 모르는 윤희는 뒤에서 입을 헤 벌려 황홀한 표정을 지었다.
아주 귀여운 동생이 생겼다는 사실이 윤희를 기쁘게 만들었다.
***
“정말 한강이가 모자를 쓰고 방송에 나갔나요?”
“네, 아가씨. 그렇게 좋으세요?”
“뭐, 그야. 물론. 음.”
다음 날 한강은 선물 받은 베레모를 쓰고 PBS로 출근을 하였다.
“그럼 TV에도 베레모 쓴 모습으로 나오겠죠?”
“그럼요.”
“흐흐.”
윤희의 입에서 음침한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또 뵙게 되어 반갑네요. 오늘 날씨가 매우 좋은데, 여러분이 살고 계신 곳은 어떤지 모르겠네요. 날씨가 더우니 우리 한번 계곡으로 떠납시다. 여기 있는 한리버와 같이 말이죠.”
방송이 시작되고 간단한 소개를 통해 오늘의 작품을 소개하였다.
“마침 아주 예쁜 베레모를 쓰고 와 놀러 가기 딱 좋은 패션이에요. 누나가 사줬다고 많이 자랑하던데, 오늘 그림도 자랑할 수 있었음 좋겠네요.”
“하하. 열심히 해보겠습니다.”
“좋아요. 그럼 떠나 볼까요. 먼저 인디안 엘로우, 브라이트 레드를 조금만 섞어주면 빛나는 색이 나옵니다. 자, 하늘을 그립시다.”
순서는 늘 같았다. 하늘을 먼저 그리고 다음으로 물을 그렸다.
“하늘과 섞이지 않게 잘 문질러 주세요. 한쪽으로 쓱쓱.”
“이곳에 물고기가 살아도 되겠네요.”
“굿, 아주 좋은 발상이에요. 그럼 분위기 있게 나무와 바위를 올려 쉼터로 만들어 볼까요? 풍성한 붓을 들어 툭툭 쳐주세요.”
“여성분들은 잘하겠네요. 우리 엄마도 화장을 할 때 이렇게 툭툭 치며 화장을 하시는데 말이죠.”
“하하, 한리버의 그림 실력은 엄마에게서 나왔나 보네요.”
밥 로스는 한강과 재밌는 이야기를 나누며 빠르게 그림을 완성해 나갔다.
“전 세계 여성분들은 모두 뛰어난 화가시죠.”
“오우, 지나가다 물감 폭탄이 날아와도 억울하지 않을 말이네요. 하하. 여기에 물결 표면은 대충 그려주세요. 네, 이 정도면 됐어요. 붓을 씻어주세요. 전 붓을 씻는 걸 아주 좋아해요. 싸우면 여기에 화풀이를 하죠.”
“......”
한강은 밥 로스의 말에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아직도 믿어지지 않아서다.
늘 영상으로 봐오던 밥 로스의 명언들을 옆에서 직접 듣게 되니, 진한 감동이 밀려왔다.
“저는 따라 하는 방법을 알려드리는 게 아니에요. 전 저만의 기술을 알려줄 뿐이죠. 자신만의 스타일을 갖추고 상상하세요. 분명 자신만의 스타일을 갖춘 멋진 그림이 탄생할 겁니다. 저 보세요. 한리버는 저와 같으면서 다른 그림을 그리지요.”
붓을 툭툭 쳐 거대한 나무를 그리던 그는 한강을 가리켰다.
자신과 같으면서 또 다른 스타일로 자신만의 그림을 완성해갔다.
보면 볼수록 아주 놀라운 아이였다.
“아주 쉬워요. 여러분도 할 수 있는 거예요. 한리버도 그림이 끝나가네요. 나무가 저보다 더 풍성합니다. 한리버 한마디 부탁해요. 지금은 나무는 어떻게 그리고 있는 건가요.”
“선생님과 다른 나무를 떠올렸어요. 전 숲을 무척 좋아해요. 뚱뚱한 나무를 사랑하죠. 그래서 이 둥근 붓을 이용해 아주 쉬운 방법으로 나무에 털옷을 입혔어요. 이렇게요. 참 쉽죠.”
“하하, 제 제자다운 발상이라 굿입니다.”
어느 순간 그림은 풀숲 사이에 호숫가가 생겨났고, 호숫가에서 좀 떨어진 장소에 오두막이 지어졌다.
이 모든 작업이 단 25분 만에 뚝딱 이뤄졌다.
“끝입니다.”
한강은 작업을 마무리 지었다.
“좋아요. 오늘도 수고했어요. 담에 봐요.”
오늘도 무사히 방송을 마쳤다.
“갈수록 실력이 빨리 늘고 있어.”
카메라가 꺼지고 밥 로스가 한강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사실 그가 직접적으로 한강에게 무언가 알려준 건 없었다.
그저 옆에서 자신이 그리는 보고 따라 그리게끔 한 것이 다였다.
한데, 그 모든 걸 눈으로 보는 것만으로 한강은 놀라운 발전을 이뤄내고 있었다.
경의롭기까지 하였다.
“이게 다 선생님 덕분이에요.”
반면, 한강에게 있어 지금의 시간은 많은 공부가 되었다.
TV에서는 느껴보지 못한 현장감부터 어떤 형태로 그림을 그리는지, 정말 많은 걸 보고 배웠다.
“오늘도 고생 많았어. 피곤할 터인데, 들어가 보거라.”
“네, 감사합니다. 먼저 가보겠습니다.”
한강은 일이 끝나면 바로 집으로 복귀했다. 아직 어려 현장에 오래 남아 있지 않았다.
실제로 피곤이 몰려오기도 하였고.
“가시죠.”
한강은 앞쪽에서 대기하고 있는 보호자 겸 경호원을 따라 집으로 복귀하였다.
***
한편, 집에서는...
“아, 귀여워. 꺄!”
이윤희가 방송을 보며 기쁨의 비명을 지르며 TV를 보고 있었다.
“이번엔 뭘 사서 입힐까?”
그리고 한강을 모델로 한 인형 옷(?)을 떠올렸다.
열한 살 소녀에게 재밌는 놀이가 생긴 순간이었다.
***
어느 가정집.
[...아주 쉬운 방법으로 나무에 털옷을 입혔어요. 이렇게요. 참 쉽죠.]
TV 속에 한강의 모습이 잡혔다.
한강은 붓을 들어 보이며 살짝 윙크를 하였다.
“어쩜 저리 귀여울까.”
뽀얀 얼굴, 쌍꺼풀이 있는 큰 눈, 오뚝한 코, 핏빛의 입술.
모든 게 완벽한 조화를 이룬 아이였다.
여성은 한참을 한강을 응시하다, 한곳에 시선이 머물렀다.
“저 모자 예쁜데? 느낌도 있고...”
한강은 여성의 아들과 동년배.
체격도 비슷해 보여 자신의 아들에게도 제법 잘 어울릴 거 같았다.
“알아볼까?”
여성의 눈에 고민의 기색이 일다...
“아들을 위한 건데, 알아보자.”
마음의 결정을 내렸다.
그저 윤희에게 고마움을 표현하기 위하여 방송국까지 모자를 쓰고 간 한강의 사소한 행동이 전 세계 부유한 엄마들의 마음에 불을 지폈다.
***
해피아이 사무실.
“아이고 두야, 이놈의 여편네가 갑자기 명품타령인지. 쯧.”
“왜 그러세요. 팀장님?”
머리를 부여잡고 출근하는 중년남성의 모습에 40대로 보이는 남성이 물었다.
“아, 김 과장. 자네 집은 어때? 그 버버리 베레모가 요즘 유행이라던데.”
“아, 그거요. 하하. 저희 집도 뭐 그렇죠. 요즘 한창 뜨고 있잖아요.”
“하, 진짜 남편이 패션기업 다니면 우리 회사 브랜드나 사서 입힐 일이지, 아휴. 대체 갑자기 베레모 타령이야. 타령은.”
이혁필 팀장은 막둥이에게 딱 어울릴 거 같다며 하나 구입하자는 부인의 말에 심한 스트레스를 받았다.
“요즘 아이들 부모들 사이에서 버버리 베레모가 유행이랍니다.”
“대체 왜 그런 모자가 유행이 된 거야? 조용하다가.”
“그게 말이죠. 얼마 전에 미국 PBS로 간 미술천재 유한강이라고 있잖아요.”
“그래서?”
“그 아이가 베레모를 쓰고 나왔는데, 그게 그렇게 예뻐 보이더랍니다.”
“허...”
“그게 그렇게 이어진다고?”
“요즘 아이들 사이에서 그 아이가 입고 나오는 걸 따라 입는 게 또 유행이라는데, 정말이지 패션업계에 종사하고 있지만, 소비자 심리는 아직도 잘 모르겠어요.”
김동진 과장은 머리를 긁적여,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혹 그 사진 있어?”
“그 신문에 대문짝만하게 나와 있습니다. 요즘 가장 핫한 아이지 않습니까.”
“음...”
이혁필 팀장은 테이블 위에 올려진 신문을 펼쳤다.
김 과장 말대로 신문 메인에 다섯 살 천재 화가의 패션이라며 사진이 실려 있었다.
“... 김 과장, 이거 어떻게 생각하나?”
한참을 신문을 들여다보던 이혁필은 무언가 생각하는 것 같더니,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을 뱉어내었다.
“네, 뭘 말입니까?”
“만약, 우리 브랜드를 이 아이에게 입혀 방송에 내보내면 어떨 거 같냐 뭐 이 말이야.”
“음... 지금 돌아가는 상황을 보면 나빠 보이지 않습니다. 아니, 오히려 반응이 뜨거울 거 같습니다. 더욱이 저 아이가 입고 나오면 기업의 브랜드 이미지도 꽤 오를 거라 봅니다.”
지금 미국, 유럽, 아시아 할 것 없이 어린 아이들은 천재 화가에 푹 빠져 가고 있었다.
밥 로스는 나이가 많아 존경할 대상이라면, 한강은 아이들의 목표가 되어주었다. 그 영향은 곧 패션업계로 이어져 계획을 전면 수정하게 만들었다.
“좋아, 결정했어. 내가 대표님 결재받고 올 테니까, 자네는 미국으로 갈 준비를 하게.”
“갑자기요?”
“어서, 우리가 이렇게 생각했다면 다른 기업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는 소리가 돼. 서둘러.”
“윽, 알겠습니다.”
예상치 못한 곳에서 패러다임이 바뀌고 있었다.
이혁필 팀장은 즉시 대표실로 뛰어가 김 과장과 이야기를 한 부분을 보고했다.
그날 아침, 김동진 과장의 미국행이 결정되었다.
목적지는 한강이 근무하는 PBS로 정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