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5살, 한국을 떠나다
그날 한강과 미화는 한없이 울었다. 홍라혜는 두 모자가 어느 정도 진정이 되기를 기다려, 한강의 두 번째 부탁을 언급하였다.
당연히 미화는 무슨 이야기인가 싶어 눈을 깜박이다, 이해를 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바뀌기로 마음을 먹은 순간, 고민할 건 없었다.
이러한 이야기는 늦게 돌아온 덕화에게 전해졌고, 집안의 재산과 한강의 돈을 전부 자산관리사 김광석 팀장에게 맡기기로 하였다.
“일산 땅을 매입해주시고, 부모님 집은 분당으로 잡아주세요.”
일산과 분당은 신도시로 개발되어 크게 성장할 지역이다.
한강은 주식에서 틀어 부동산에 투자하기로 마음을 정했다.
“그리고 추후 받게 될 제 출연료는 육성, 엔지에 꾸준히 투자를 해주시고, 그밖에 다른 곳은 가능하다면 통신과 인터넷 관련된 곳이면 좋을 거 같아요.”
앞으로 뜨게 될 사업군에 투자를 주문하는 걸로 모든 이야기가 종료됐다.
남자는 한강을 귀신을 보듯 멍때리며 보다, 자리를 떴다.
“역시 재벌이 좋아. 진즉 이랬다면 그동안 고민조차 하지 않았을 터인데. 다행이야. 다행.”
다시 재벌이 된 기분에 빠지며 하루 일과를 끝냈다.
제법 피곤한 하루가 되었다.
“이제 가는 건가.”
한강의 시선은 보따리로 향했다. 2년간 입게 될 봄 여름 가을 겨울옷들이 전부 들어가 있었다.
“2년만 참자. 참으면 된다.”
그래, 2년만 참고 한국으로 복귀한다면 많은 부분이 바뀌어 있을 거다.
***
“선생님, 그동안 고마웠어요.”
미국으로 떠나기 전, 유치원에 방문했다.
“한강아, 덕분에 너무 즐거웠어. 미국 가서도 아프지 말고, 건강하고 씩씩하게 잘 지내야 해. 알았지?”
하나의 눈가가 촉촉하게 젖었다.
늘 눈길을 끌게 만들던 아이 유한강. 이제는 그 자리가 비게 되었다. 허전하게 다가올 거 같았다.
“네, 돌아오면 꼭 찾아뵐게요.”
뒤꿈치를 들어 이하나의 눈에 작은 손을 가져갔다. 검지를 구부려 눈가에 묻은 물기를 닦아주었다. 한강은 해맑게 웃었다.
“한강아, 정말 가는 고야? 나 싫은데. 흑흑.”
보조개가 귀엽던 미나가 달려와 안겼다. 연인을 떠나보내는 여자가 되어 구슬프게 울었다.
“돌아와서 보자. 그때까지 나 잊지 말고.”
“나, 나 있지. 절대 안 잊을 고야. 절대로. 히잉.”
“그래, 잊지 마. 편지도 할게. 그림을 그립시다 절대 빼놓지 말고 보고.”
한강은 미나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등을 토닥여 주었다.
미나는 매일 빼놓지 않고 볼 거라며 약속을 하였다.
“나도 안 잊을 거야.”
“나도!”
“너도 우리 잊으면 안 돼.”
다른 아이들도 밖으로 나와 한강과 약속을 하였다. 다음에 꼭 다시 만나자고.
“모두 안녕.”
한강은 육성에서 준비한 차량에 올랐다.
이제 정말 참뜻 유치원과는 안녕이었다.
2년 뒤, 아이들은 모두 떠날 터다.
오로지 그네가 달린 저 느티나무만이 자리를 지키고 있겠지.
쉬이이이이이.
한국이여, 잠시만 안녕이다.
“한강!”
공항에 발이 닿자, 손을 흔들며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작가님. PD님.”
PBS PD와 밥 로스가 손을 흔들고 있었다.
한강은 게이트에서 달려 둘에게 이동했다.
일주일 뒤, 둘은 한강이 부모님의 허락을 받고 미국으로 온다는 소식에 한달음에 달려와 기다리고 있었다.
“난 네가 올 줄 알았단다. 미국에 온 걸 환영한다. 천재.”
밥 로스는 한강을 천재라 불렀다.
“한데, 뒤에는?”
“제 보호자이고, 미국에 있는 동안 같이 지낼 사람이에요.”
“그래, 좋구나. 그럼 가자.”
밥 로스는 한강을 친손주처럼 대하였다.
에단이 앞장서 공항 밖으로 나갔고, 뒤를 따르는 사람들은 준비된 차량에 탑승했다.
“먼저 들를 데가 있단다.”
“들를 곳이요?”
“네가 오면 꼭 같이 가고 싶었단다.”
제임스 에단은 무언가 아는 눈치인지, 고개를 가로저어 절레절레 흔들었다.
“......”
한편, 함께 동승한 남자는 한강의 영어 실력에 놀라 자세 그대로 굳었다.
정말 무서운 어린 천재였다.
“어디에요?”
그의 마음도 몰라주는 한강은 밥 로스와 대화를 하기 바빴다.
“체서피크 베이 브릿지.”
체서피크 베이 브릿지.
버지니아주 체서피크만을 횡단하는 다리이다. 길이는 37Km에 이르며 델마바 반도와 버지니아 비치를 연결한다.
“와우, 거기서 뭐 하죠?”
정식 명칭은 도로 건설 공로자의 이름을 따서, 루시어스 J 켈렘 주니어다.
그곳에 가게 될 줄 몰랐던 한강은 진한 흥분감에 빠져들었다.
“그림을 그릴 거다. 다리에서 내려보는 멋진 그림을.”
“...하, 하하.”
설마 했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기에 물었던 질문이었는데. 늘 좋지 않은 건 맞아떨어졌다.
긴 비행으로 피곤한 이때...
‘아니야. 이건 좋은 기회야. 다시 그때 감각을 떠올릴 수 있을지 몰라.’
아직도 그때의 감각은 머릿속에 생생하다.
나이되 내가 아닌 그런 기분에 빠져들며 나만의 공간에서 자유로이 유영하던 감각은 아직도 잊히지 않았다.
“좋아요. 작가, 아니. 선생님!”
앞으로 밥 로스는 한강의 스승 겸 동료가 될 터다. 한강은 밥 로스를 앞으로 선생님이라 부르기로 하였다.
“허허, 가자.”
호칭이 제법 마음에 든 것일까, 밥 로스는 가벼이 웃었다.
“에단, 여기서 멈춰줘.”
한참을 달려 다리 초입에 다다를 즈음 차를 세웠다.
밥 로스는 문을 열어 밖으로 나갔다.
“어때, 여기.”
“이야, 좋은데요.”
1990년 6월.
다리를 넘어 보이는 바다, 그 위를 차지하는 푸른 하늘.
하늘과 바다 사이에 뭉게구름이 하얗게 떠다녔다.
“아주 멋진 그림이 나오겠어요.”
“그치, 역시. 후후. 우리는 여기서 느낀 점을 이 캔버스에 담을 거란다. 할 수 있지?”
“당연하죠.”
“굿, 그 자세 마음에 들어. 그럼 준비할까.”
밥 로스는 트렁크에서 이젤을 꺼내 바닥에 설치해 돌로 고정했다.
바닷바람이 강하게 불어 그림을 그릴 수 있을까 싶던 차, 곧 바람을 막아줄 만한 벽이 생겼다.
봉고차들이 양쪽에 주차해, 천막을 올려 바람을 막았다.
“어떠냐, 멋지지?”
“정말 완벽하네요.”
이런 환경 속에서 그림을 그리게 될 줄 상상도 못 했는데.
전생에서도 해보지 못한 경험이었다.
그래서인지, 몹시 기대되고 어떤 그림이 그려질지 흥분감에 심장이 두근두근 뛰었다.
“한번 자유로이 그려 보거라. 물감은 내 걸 빌려주마.”
밥 로스는 물감을 중앙에 두었다. 유화 물감이었다.
“붓도 많으니 자유로이 사용하고 싶은 걸 쓰렴.”
물통과 붓도 중앙에 놓았다.
물통 안을 보니, 물이 아니었다.
유화 물감은 기름과 섞어 사용한다. 당연히 붓은 기름에 노출되어 일반 물로는 기름을 제거하지 못한다.
그래서 사용되는 것이 기름 분해 성분이 있는 브러쉬클리너였다. 푹 담가 기름을 분해한 후 휴지나 걸레를 이용해 붓을 깨끗하게 닦아 사용해야 그림을 그릴 때 다른 색과 섞이지 않았다.
“감사합니다.”
‘이건 날 테스트를 해보겠다는 의미야.’
한강에게 유화 물감은 없었다.
지금껏 보여준 건 소묘와 파스텔, 일반 물감으로 사용된 수채화가 다였다.
‘사용법은 알아.’
경험을 해보기는 했지만, 얼마 되지 않았다.
눈길을 돌려 밥 로스를 쳐다봤다.
벌써 푸르른 하늘이 캔버스 위로 채워지고 있었다.
‘하늘이 되었죠? 쉬워요. 쉽게 하늘이 완성이 됐어요’ 멘트가 떠오른다.
‘참, 쉽죠?’
정말 아주 쉽게쉽게 색과 붓을 가지고 놀며 그림을 완성해 갔다.
“나도 질 수 없지.”
밥 로스처럼 모든 걸 표현할 능력은 없지만, 잔머리는 좋은 편.
한강은 캔버스를 노려보던 시선을 돌려 작은 가방을 뒤적였다.
사람들은 한강에게 시선을 가져갔다.
“이거면 될 거야.”
안에서 꺼내 든 건 굵은 실이었다.
혹시 모른다며 엄마가 챙겨 준 실. 그 실을 길게 풀어 두 겹으로 겹쳐 양쪽을 묶었다.
사람들은 한강이 무엇을 하려는지 빤히 지켜봤다.
“저 혹시 테이프가 있을까요?”
시선을 뒤로 돌려 도움을 구했다.
“어, 여기에 있긴 한데, 어디에 사용하려는 거지?”
에단이 용품 가방을 뒤적여 테이프를 꺼냈다.
“이 실을 양쪽에 고정을 시키려고요. 죄송하지만, 좀만 도와주시겠어요.”
“물론. 어떻게 하면 될까?”
제임스 에단은 자세를 낮게 잡아 한강과 키를 맞췄다.
“실을 이 정도 높이에 맞춰 당긴 후 뒤에다 테이프로 붙여 고정할 거예요.”
작업지시를 내렸다.
“음, 오케이.”
한강의 요청대로 제임스 에단은 실을 단단히 고정을 하였다.
“이 정도면 될까?”
손을 가져가 실을 튕겨봤다.
탁! 실이 캔버스 면을 강하게 때렸다.
“네! 감사합니다.”
“천만에. 또 도움이 필요하면 말하렴.”
제임스 에단은 뒤로 퇴장했다.
“...됐어.”
그림을 그릴 준비는 오케이.
시선은 캔버스에 집중됐다.
사람들은 모여들어 그림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조용히 입을 다물고 지켜봤다.
‘흐음, 후우...’
길게 심호흡을 하였다. 눈을 감고 바람을 느꼈다.
펄럭거리는 천막 소리를 들으며 눈으로 봤던 세상을 검은 세상으로 옮겨와 바다와 하늘을 그렸다.
찌릿, 그 순간 전기에 감전된 듯한 감각이 정신을 깨웠다.
“이거다. 이 느낌이야.”
눈을 떠 캔버스를 응시했다.
찾아 헤매던 감각이 손끝으로 흘렀다.
“이제부터 넌 이 그림의 주인공이 될 거야.”
실에게 주문을 걸었다.
불어오는 바람에 흩날리는 머리카락.
한강은 눈빛을 빛내며 장장 10분 만에 붓을 들었다.
곧 한강의 손은 조물주가 되어 하얀 면에 검은 세상 속에서 떠올린 세상을 담았다.
“와...”
“이게 말로만 듣던 최연소 천재 화가 한리버(Han river)...”
한강의 이름을 따 지어낸 별명인 한리버. 일부 사람들이 한강을 그리 불렀다. 만약, 한강이 들었다면 불만을 드러냈을 일이나, 지금 한강의 귀로는 누구의 목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빠르고 유려하게 움직이는 손놀림에 모든 걸 건 모습이었다.
사람들이 숨죽여 지켜봤다.
“이곳에 싸인을 하면, 끝.”
밥 로스의 그림이 완성됐다.
밥 로스는 만족한 미소를 품고 일어났지만, 썩 마음에 들지 않은 눈치였다.
하지만 사람들은.
“역시 밥이야.”
“23분 걸렸어.”
“역시 대단해.”
밥 로스의 그림을 찬양했다.
“오!”
“와!”
그때 귓가로 들려오는 목소리.
“무슨 일이지?”
밥 로스는 한강의 주변에 모여 감탄사를 내뱉는 사람들을 바라봤다.
호기심이 동했다.
또 저 어린 천재가 어떤 대단한 사고를 쳤을지 기대가 되었다.
걸음이 옮겨졌다.
“이, 이건...”
한강의 뒤편까지 이동한 밥 로스는 보고 말았다. 자신과 같으면서도 다른 또 다른 하나의 세상을.
“허허, 이건 기대 이상이야... 한데 저 실은 왜 저기에 달아놨지?”
그림에 놀라던 밥 로스는 캔버스 중간에서 좀 더 위에 고정된 실로 눈길이 갔다.
하늘과 바다의 경계선에 자리한 실.
유심히 살피던 중.
“설마...”
두근두근.
어떠한 생각이 뇌리를 스치자 밥 로스는 입을 쩍 벌렸다.
생각도 해본 적 없는 새로운 기법.
당장 저 실을 걷어내어 뒤에 숨겨진 녀석을 보고 싶었다.
“어떻게 저런 생각을...”
밥 로스는 그림에서 시선을 떼어 내어, 다섯 살의 작은 몸을 바라봤다. 하지만 밥 로스에게는 한강이 결코 작아 보이지 않았다.
‘곧 세계는 놀랄 거야. 너로 인해서.’
밥 로스의 시야로 보이는 한강은 미술계를 움직일 거인으로 다가왔다.
“휴, 끝났다.”
10분 정도 지난 시점, 한강이 기지개를 켜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강의 시선은 실로 옮겨졌다.
“생각보다 난이도가 있었어. 실 뒤로 물감이 가지 않게 하기 위해 신경을 쓰다 보니 시간도 예상보다 많이 지체됐고.”
처음으로 시도한 만큼 꽤 고된 작업이었다.
하나, 그만큼 뿌듯함이 폐부 깊숙이 밀려오는 것도 사실.
한강은 슬며시 웃으며 실로 손을 가져갔다.
“이것을 떼어내면... 완성이다.”
한강은 준비된 가위를 이용해 테이프를 자르고 물감에 붙어 있는 실을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천천히 떼어냈다.
“헙!”
“언블리버블.”
“믿을 수 없어.”
캔버스에는 한강의 세상이 담겨 있었다. 어린아이의 감성이라고 느껴지기 힘든 멋진 세상이, 세상에 공개됐다.
명확하게 보이는 하얀 수평선이 사람들의 마음을 흔들어 놓았다.
“정말 천재야. 한강, 너란 아이는...”
그 틈에는 밥 로스도 포함되어 있었다.
“모든 카메라로 찍기 잘했어. 이건 대박이야. 분명히 큰 화제가 될 거야. 크크.”
뒤로는 제임스 에단이 욕망에 사로잡힌 웃음을 흘렸다.
한강의 화려한 데뷔가 될 그림을 보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