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돈 버는 게 예술이다-19화 (19/237)
  • 19화. 5살, 각성 그리고 결정하다

    연필을 들었다. 온 신경을 연필 흑색 심에 집중했다.

    캔버스에 닿는 연필이 천천히 움직여 얼굴을 그려나갔다. 많이 접해보지 않아 어느 때보다 힘든 작업이 되리라 봤다.

    ‘해낸다.’

    이를 악물고 그림에 집중했다.

    너무 선명해지지 않도록 손에 힘을 빼고 연필을 살살 스케치를 하였다.

    삐뚤어지지 않도록 위치를 잡고 조심스럽게 선을 그었다.

    ‘신기해. 유치원에서 그림을 접했을 때보다, 손에 부담이 덜 가. 거기다...’

    사람의 모습을 머릿속에 떠올리면 손은 프린트기가 되어 미세한 부분까지 잡아내 도화지에 표현을 해낸다.

    ‘내게 있어 그림이 이리도 쉬운 학문이었나?’

    참으로 신기한 감각이었다.

    다른 건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손은 자연히 그림을 그려갔고, 불필요한 움직임이 줄어들었다.

    ‘재밌어.’

    떨리던 가슴은 어느새 조용한 호숫가로 변해, 마음에 휴식을 가져왔다.

    입가에 맺히는 미소, 오늘만큼 그림을 그리는 게 즐겁고 재밌다고 느껴본 적이 언제인지 모르겠다.

    시선을 캔버스에 고정한 채, 책상에 자리한 지우개를 가져와 스케치한 면을 아기를 달래듯 톡톡 치며 흐리게 지워갔다.

    파스텔 위로 흑연이 올라오지 않게 하기 위한 작업이었다.

    ‘파스텔은 다른 색이 묻어 더럽혀지기 쉬워. 어느 때보다 조심해야 해.’

    파스텔에 묻은 색들을 휴지로 닦아냈다. 본연의 색을 찾은 파스텔을 과감하게 스케치 면에 칠했다. 피부를 먼저 칠하고 어두운 면을 검은색이 아닌 회색과 푸른색을 이용해 음영을 넣었다.

    “허... 정말 놀라워.”

    한강의 그림을 뒤에서 지켜보던 남수영은 순수하게 감탄했다.

    모델로 앉아 있는 홍라혜 여사가 이를 직접 보지 못해 아쉬울 정도였다.

    자신이 즐겨 쓰는 파스텔로는 과연 어떤 그림을 그릴까 궁금해 테스트 삼아 가져왔는데, 이건 결코 파스텔을 처음으로 사용을 해본 솜씨가 아니었다.

    파스텔이 가진 특징을 아주 잘 살리고 있었다.

    흔하게 하는 실수 중 하나가 음영을 무조건 검은색을 사용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힌다는 점이다.

    하지만 한강은 그 부분을 알기라도 한다는 듯, 전혀 다른 색으로 표현을 하였다.

    “이 아이는 정말 천재야.”

    남수영은 인정을 해야 하였다. 지금 대학에 자리한 어떠한 학생보다 한강이가 훨씬 뛰어남을.

    ‘이제 마무리...’

    남수영이 감탄을 하며 넋을 놓은 시각. 한강은 칠을 마치고 파스텔을 내려놓았다. 곧바로 손가락을 펼쳐 파스텔로 칠해진 피부를 살살 문질렀다.

    거칠게 느껴졌던 피부가 빠른 속도로 부드럽게 변해갔다.

    다섯 손가락을 이용해 슉슉 문질렀다.

    이제 남은 건, 머리카락!

    한강은 지저분하게 묻은 손가락을 휴지로 깨끗하게 닦고, 짙은 갈색 톤 파스텔을 들어 머리를 채색했다.

    거칠고 부드럽게.

    가늘고 굵게.

    강약을 조절해 머리카락이 흘러내리는 방향대로 시원하게 긋고 지나갔다.

    “다 됐습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모를 정도로 정신없이 움직이던 손이 멈췄다.

    한강은 만족스러운 얼굴로 완성을 알렸다.

    “남수영 교수님 표정이 심상치 않은데요.”

    한 자세로 가만히 앉아 있던 홍라혜는 찌뿌둥한 몸을 풀며, 일으켜 발을 움직였다.

    “여사님께서 직접 보세요.”

    한강을 바라보는 그녀의 얼굴엔 소름이 잔뜩 돋아 있었다.

    “그러니 더욱 기대가 되네요.”

    어떤 그림을 그렸을까?

    아니 어떤 작품을 만들어냈을까?

    놀라움의 연속 시간, 홍라혜는 저도 모르게 또 다른 놀라움이 찾아오기를 기다렸다.

    콩닥콩닥 뛰는 가슴을 숨긴 채, 한강의 뒤로 향했다.

    “...정말 놀라워요. 내가 보고 있는 게 정말로...”

    파스텔로 잘 표현된 이목구비, 부드럽게 칠해진 파스텔.

    자칫 이목구비를 표현하다 색이 번질 수 있던 부분을 잘 피하여 색을 아주 잘 살렸다.

    “이 아이가 그린 게 맞아요?”

    눈으로 보고 머리가 인지하고 있지만, 입은 전혀 다른 말을 뱉어냈다.

    충분히 기대를 하고 봤음에도 기대 이상의 작품을 목도하니 다른 건 생각나지 않았다.

    “밥 로스 작가님은 그림을 다 그리면 마지막에 한마디 뱉으시죠. 여기 사인을 하면 끝이에요.”

    한강은 검은색 파스텔을 가져와 우측 하단에 사인을 남겼다.

    ‘참, 쉽죠.’

    마지막 한마디는 속으로 삼키며 싱긋 웃었다.

    “대단하단 말밖에 흘러나오지 않는구나.”

    시청에 요청해 보상금과 섞인 육성의 지원금이 전혀 아깝지 않았다.

    홍라혜는 지금 그림이 그것보다 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믿었다.

    저곳에 사인까지 하였으니, 한강이 어떻게 성장을 하느냐에 따라 현 그림의 가치는 배로 뛰리라.

    “마음에 드신다니 다행이네요. 오늘 처음으로 시도한 거라 어떨지 싶었는데. 다행이에요.”

    “... 하? 호호.”

    “제가 졌어요. 여사님.”

    남수영은 두 손을 들었다.

    이제 한강에게 테스트를 하는 행위는 하지 않기로 다짐을 하였다.

    “저도예요. 나도 저렇게 잘 그릴 자신은 없네요. 신이 왜 천재를 구분지어 이 땅에 내리셨는지 알 거 같아요.”

    이보다 더한 칭찬도 없었다. 홍라혜는 한강을 인정했다.

    “약속대로 네 부탁을 들어주마.”

    “감사합니다. 선생님!”

    한강은 반색했다.

    어떻게 풀지 고민이던 문제를 단번에 해결할 수 있게 되었다.

    이 방법이 먹힐지 확신은 하지 못하지만 다섯 살보다 같은 여성으로서, 부모로서 공감대가 맞아떨어지지 않을까.

    ‘그리고 자산투자도 이제 큰 걸림돌이 되지 않을 거야.’

    이 정도면 안심이다,

    그리고 미래를 좀 더 당겨볼 수 있을지 모르겠다.

    인연과 사건이 만나 행운을 가져다주었다.

    ‘그림을 그리길 잘했어.’

    처음으로 그림을 취미가 아닌, 사랑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리고...

    ‘그 묘한 감각, 다시 한번 경험을 해보고 싶어.’

    모두가 함께 있는 공간에서 오로지 자신만을 느끼던 시간. 자유로이 노닐던 감각을 다시 한번 느껴보고 싶었다.

    ‘미국에 반드시 간다.’

    미국에 가야 하는 이유가 한 가지 더 늘었다.

    ***

    “엄마!”

    유치원이 끝난 지, 한 시간 정도 지난 시점.

    퇴근을 하고 복귀하는 엄마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아들. 엄마 기다린 거야. 아고고. 예쁜 아들.”

    피곤함으로 찌든 얼굴 위로 행복이 묻어났다.

    한강이 있기에 힘들어도 웃을 수 있는 미화였다.

    “엄마. 으... 저기 손님 왔어요.”

    볼을 비비며 애정표현을 하는 엄마의 품에서 떨어져 후다닥 뒤로 후퇴한 한강은 손가락을 펼쳐 한 방향을 가리켰다.

    “누구...시죠?”

    어디선가 본 듯한 외모. 하지만 기억은 나지 않았다.

    고개가 갸웃거리다, 누군지 물었다.

    “처음 뵈어요. 한강이의 외모가 누구를 닮아 예쁜가 했는데, 어머님을 닮아 그렇군요. 전 육성 미술재단 이사 홍라혜예요.”

    “유, 유유유육성! 악!”

    소개를 들은 미화는 너무도 잘 아는 단어에 화들짝 놀라 말을 더듬다 괴성을 질렀다.

    ‘아코, 엄마... 그렇게 놀랄 일은 아닌데...’

    미화의 모습에 한강은 어색하게 웃다, 쓱 고개를 돌려 홍라혜에게 가져갔다.

    “너무 갑자기 찾아와서 놀라셨죠.”

    “아, 네. 아니요. 괜찮습니다. 딸꾹.”

    미화가 태어나 재벌과 만날 기회가 얼마나 있었겠나.

    한강은 전생의 기억이 있기에 재벌에 대한 벽이 없는 반면, 미화는 입장이 완전히 달랐다.

    당장 다니는 영세기업의 대표만 봐도 대하기 어려운데, 국내 굴지의 대기업 안주인을 보게 됐으니 다가오는 부담과 압박감은 엄청날 터다.

    그러한 사실을 제대로 인지 못 하는 한강의 탓에 애꿎은 미화만 힘들게 되었다.

    “실은 아드님에 대해 깊게 의논을 드릴 일이 있어, 갑작스레 댁을 찾게 되었어요.”

    한강의 부탁으로 찾게 됐지만, 어쨌든 예에서 한참 벗어난 행동.

    라혜는 허리를 살짝 굽혀 사죄를 하였다.

    “아, 아니에요. 이러지 마세요. 사모님.”

    호칭을 어떻게 부를까 하다, 사모님이라 불렀다.

    미화는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으로 라혜를 대하였다.

    무척 정신이 없는 모습이었다.

    “너무 자세를 낮추지 말아 주세요. 전 한강이에 대해 어머님께 긴히 부탁을 드리러 왔을 뿐이에요.”

    “네? 부탁요?!”

    그제야 정신을 차린 미화였다.

    미화는 끝에 붙은 ‘부탁’이란 말에 의아함을 감추지 못했다.

    “그래요. 전 우연히 한강이의 그림을 보게 됐어요. 그것이 인연이 되어 한강이를 찾게 되었고, 장래성을 발견해 한강이에게 작은 도움을 주고자 어머님과 의견을 나누러 온 거랍니다.”

    비록 나이는 라혜가 훨씬 많았지만, 최대한 정중한 자세로 존칭을 사용했다.

    그녀는 자신의 아랫사람이 아니다.

    미래 대화가의 어머니가 될 여성이며, 대화가를 낳은 여자다.

    충분히 대우를 해주는 게 마땅했다.

    “아...”

    미화는 다섯 걸음 떨어진 거리에서 웃고 있는 아들을 보았다.

    한 번 보기도 어려운 사람을 계속 불러 모으는 아들의 능력에 이제는 놀랄 기력도 없었다.

    “여기서 대화하긴 그렇고, 안에서 대화를 나눠도 될까요?”

    “... 들어오세요.”

    집에 너무도 작고 초라해 안으로 들이기가 창피했지만, 거절할 이유를 찾지 못했다. 미화는 부끄러운 나머지 얼굴을 붉히고 집으로 안내를 하였다.

    ‘이런 곳에서 아이를 키우고 있었던가.’

    화장실 냄새가 밖에서 공기를 타고 들어왔고, 연탄 냄새가 역하게 다가왔다.

    손수건을 꺼내 코를 막고 싶었지만, 창피해 어쩔 줄 몰라 하는 미화의 모습에 잠깐 참기로 하였다.

    “보리차면 돼요.”

    냉장고에 무언가 꺼내려는 모습에 델몬트 병에 들어있는 물을 주문했다.

    어떤 형편인지 충분히 인지를 하였기에 부담을 주지 않으려 노력을 하였다.

    “여깄습니다.”

    “고마워요.”

    미화가 건네는 물을 마셔 목을 축인 라혜는 눈을 잠시 감았다 떴다.

    생각을 정리하였다.

    “어머니, 전 말이죠. 개천에서 용은 살 수 없다 생각해요.”

    개천은 현재 자리한 환경을 말했고 용은 한강을 의미하였다.

    “도롱뇽과 가재는 1급수 물에서만 살아가지요.”

    무슨 말을 하려는 걸까?

    미화는 가만히 앉아, 라혜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두 말에 공통점이 뭔지 아세요? 개천에서 용이 벗어나지 못하면 용이 될 수 없고, 1급수에서 벗어난 도롱뇽과 가재는 죽음을 면치 못해요. 무슨 말이냐면 전 한강의 능력을 용이라 생각해요.”

    “......”

    “1급수에서 살아가야 하는 타고난 천재입니다.”

    “......”

    이야기가 진행이 될수록 미화의 고개는 아래로 내려갔다.

    무슨 말을 하려는지 조금씩 이해가 가고 있었다.

    “얼마 전 밥 로스 작가님이 한강이를 미국으로 데려가려 했다는 소식을 듣고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한 아이의 엄마로서 무척 흐뭇했어요.”

    “......”

    “저희와 다른 환경이기에 어려운 결정인 건 잘 압니다. 하지만, 그렇다 하여 아이가 꿈을 펼치기도 전에 날개를 꺾는 건 좋지 않다 봐요.”

    왜 모를까? 엄마의 마음을.

    오랜 시간 곁에 두고 성장하는 자식의 모습을 보는 걸.

    하나, 놓아줄 때는 놓아 줘야 하였다.

    어린들 어떠랴.

    더욱이 한강은 보통 아이들과 달리 무척 성숙하고 천재성을 지닌 아주 특별한 아이였다.

    라혜는 한강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고는 말했다.

    “우린 엄마예요. 그리고 부모죠. 제 자식들은 일찍부터 해외에서 교육을 받았어요. 자식을 믿는 것도 부모의 도리라 생각해요.”

    라혜는 한강의 미래와 부모의 마음을 따져 접근을 하였다.

    미화가 얼마나 받아들일지 모를 일이나, 부모란 자식이 잘되길 바란다.

    더 좋은 환경에서 키우고, 남 부럽지 않게 채워주고 싶은 게 부모였다.

    라혜는 그 부분을 건드려, 설득이 아닌 마음을 움직이게끔 하였다.

    “어머니, 한강이를 저에게 맡겨 주시면 잘 보살피겠습니다.”

    ‘엑?! 뭔 소리십니까? 선생님.’

    라혜의 말 속에서 이상함을 느낀 한강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떤 찝찝함이 머릿속으로 기어들어 왔다.

    ‘제발 이상한 게 아니길 바랍니다.’

    한강은 간절히 바랐다.

    “사모님...”

    “그곳에 제 막내딸이 지내고 있어요. 딸아이와 함께 보낸다면 한강이도 심심하지 않고, 서로에게 좋은 공부가 되리라 봐요.”

    “......”

    무언가 말하려던 미화는 입을 닫았다. 왜들 전부 아들을 해외로 보내려는지 모르겠다.

    고작 다섯 살이거늘.

    ‘내 이기심이었던 걸까?’

    최근에 만나는 사람들은 전부 자신의 생각과 달랐다.

    심지어 남편마저 하나 있는 어린 아들을 미국으로 보내자 한다.

    바닥에 몸을 지탱하고 있던 손이 부르르 떨렸다.

    금방이라도 떨어질 눈물을 참으며 한강을 바라봤다.

    “한강아, 미국에 가고 싶니?”

    중간에 조용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아들에게 질문을 던졌다.

    제발 아니라 말하기를 바라면서.

    “엄마, 밥 로스 작가님께 그림을 배우고 싶어요. 만족할 정도로 성장해 돌아올게요. 2년만... 기다려 주세요.”

    한강도 오래 있을 생각은 없었다. 그리고 2년이면 최소한의 기반을 다져 놓을 수 있으리라 확신했다.

    국민학교는 한국에서 다니고 싶었다.

    뚝... 결국 미화의 눈에서 굵은 눈물방울이 떨어졌다.

    한 방울, 두 방울.

    라혜도 그녀의 기분을 십분 이해해 감정에 동화되어 눈시울이 붉게 변했다.

    “다녀와... 우리 아들이라면 잘할 거라 엄만 믿어.”

    부들부들 떨리는 입술.

    절대 허락하지 않을 거라던 그녀의 마음에 금이 가면서 끝내 수락을 하고 말았다.

    “엄마. 큭.”

    한강은 태어나 처음으로 자진하여 미화의 품에 안겼다.

    너무 미안하였기에, 너무 감사하였기에...

    한강은 울었다.

    미화는 그런 아들을 깊이 끌어안았다.

    ‘그래, 육성이라면... 한강이가 돌아올 때까지 기반을 만들어 놓자. 다시는 이곳이 개천이라는 말은 듣지 않게... 그때까지만 참자. 한강아 엄마가 미안해.’

    이번 일로 미화는 굳게 다짐을 하였다. 그리고 변하리라 스스로에게 약속을 하며 각오를 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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