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5살, 오일 파스텔을 잡다
짹짹.
달이 지고 해가 떠올랐다.
참새가 전깃줄에 옹기종기 모여 합창을 하는 오후.
아빠가 출근했다 뽀뽀뽀.
엄마가 안아줘도 뽀뽀뽀.
아이들의 인기 프로그램 뽀뽀뽀 노래가 유치원에 퍼졌다.
점심시간이 되었음을 알리는 시간이었다.
“한강아, 잠시 볼까.”
식사가 끝나고 하나가 한강을 불러냈다.
“넵.”
한강은 달려나가, 하나 앞에 섰다.
“요즘 한강일 보고 싶어 하는 사람이 많네.”
요즘 하나의 얼굴은 말이 아니었다. 피곤함으로 가득한 얼굴.
유명한 사람들이 쉴 틈 없이 방문을 하니, 마음 편히 쉬는 날이 드물었다.
알게 모르게 정신적 피로감이 쌓여갔다.
“저를요?”
손가락을 자신을 가리키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응. 지금 한강일 보고 싶어 하는 분이 계셔.”
“누구요?”
‘분?!’
끝자리에 붙은 ‘분’이 신경 쓰인다.
왜 높임말을 사용했을까? 의문이 드는 시점.
“남 교수님은 한 번 봐서 알지? 그분하고 한 분은...”
하나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와 시선을 가져갔다.
다음 말을 기다렸다.
“우리나라에서 엄청나신 분이야. 아마 한강이에게 큰 도움이 되어주실 분이지 싶어.”
우측으로 꺾어 복도로 이동했다.
“음...”
그때 복도 창 너머로 보이는 무수한 차들과 검정 옷을 입은 남정네들이 주변에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대체 누군데 저리 철통같이 서 있는 건데?’
제법 높은 사람으로 짐작이 되었다. 그러지 않고서 저리 많은 사람을 대동한 채 유치원을 방문하지는 않았을 터다.
‘누가 알면 대통령이라도 온 줄 알겠네.’
개인적인 감성을 남기며 문 앞에 멈췄다.
“왔네요. 저 아이가 바로 그 아이예요. 여사님.”
방에 들어서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남수영 교수였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한강은 먼저 시야로 보이는 남수영 교수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고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저 할머니가 여기는 왜...’
한강은 남수영 교수의 옆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중년여성을 본 즉시 굳어버렸다.
“반갑구나. 아가.”
그곳에 육성그룹 회장의 안부인, 홍라혜 여사가 자리에 앉아 웃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뭐라고 불러야 하나 고민하다, 호칭은 생략했다.
“아주 영특한 아이라 다르다 그렇게 말씀을 하시더니, 남 교수님의 말이 맞네요.”
홍라혜는 깊은 관심을 보였다. 눈동자에 욕심이 깃들었다.
소유하고 싶은 감정이 똬리를 틀었다.
“그렇지요. 호호. 엄청난 자질과 미래가 기대되는 아이예요.”
남수영 교수는 가볍게 웃으며 한강을 추켜세웠다.
“나는 네 그림을 보고 큰 감명을 받았단다.”
홍라혜, 서울대 미대를 졸업해 고(故)이병진 초대회장의 눈에 들어 육성가문에 들어온 인물로 미술에 지대한 관심을 가졌다.
육성 미술재단을 운영하고 있으며, 고(故)이병진 초대회장의 유지를 이어 미술품을 모았다.
곧 들어설 미술관을 운영하기 위한 준비였다.
그런 상황에 들려온 소식은 홍라혜를 가만히 있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최연소 천재 화가 유한강.
처음 남수영 교수의 말을 듣고 믿지 않았는데, 가져온 비디오를 확인한 순간, 크게 충격을 받았다.
이어서 가져온 남수영의 선물.
한강으로부터 3백만 원에 구입한 그림은 홍라혜에게 전해졌다.
홍라혜는 가져온 그림을 펼쳐 한강에게 보였다.
“그게 어떻게 거기에...?”
자연히 시선은 남수영에게 향했다.
한강은 눈으로 물었다. 어떻게 된 일인지.
“저 보세요. 저 눈. 저게 어딜 봐서 다섯 살이에요. 호호. 그 그림은 여기 홍 여사님께 선물로 드렸단다.”
한강의 반응에 남수영은 역시나 싶은 얼굴로 설명을 해주었다.
한강의 시선은 자연히 그림으로 향했다.
“감사합니다. 제 그림을 좋게 봐주셔서요.”
어쨌거나 공모전에 냈던 그림은 현생에 태어나, 혼을 실어 그려낸 첫 작품이었다. 비록 팔이 짧고 손이 작아 예전만큼 실력이 나오지 않아 그림의 퀄리티는 대폭 떨어졌지만, 눈이 높기로 유명한 홍 여사의 관심을 끌었다는 것에 뿌듯함이 가슴으로 밀려왔다.
“말도 잘하고. 왜 남 교수님이 입이 마르도록 칭찬을 했는지 알겠어요. 올해 나이가 다섯 살이라 했던가요?”
홍라혜는 한강의 눈동자, 자세, 행동들을 보며 순수하게 감탄했다. 저만한 나이대 아이들을 보면 보통 낯선 환경, 낯선 사람을 보게 된다면 크게 위축되기 마련인데 한강의 모습은 매우 평온하였다.
‘재진이도 저러진 못했는데.’
한편으로 한강의 부모가 무척 부럽기까지 하였다. 모든 걸 다 갖췄음에도 천재성을 보이는 한강의 모습은 자식을 가진 부모로서 부럽지 않을 수 없었다.
“네, 여사님.”
“다섯 살이라... 다섯 살. 한강아.”
한강의 나이를 곱씹던 홍라혜는 인자한 얼굴로 한강을 불렀다.
“네.”
“나를 위해 그림을 한 장 그려줄 수 있을까?”
“...?!”
‘그림, 뭔 그림?’
갑자기 들어온 요청에 미간이 좁혀졌다.
“내 부탁을 들어주면, 아주 좋은 걸 줄게.”
“좋은 거요?”
“그래.”
“음...”
‘대체 무슨 꿍꿍이이실까? 유명 작가들의 작품만 수집하기로 유명한 분이, 제대로 등단조차 하지 못한 내게 그림을 그려달라니?!’
당최 이해를 할 수 없는 상황에 감을 잡을 수 없었다.
육성 미술재단에서 부르면 찾아올 화가들은 상당했다. 한강은 홍라혜를 이해할 수 없었다.
“왜 저에게 그림을 그려 달라고 하시는지 여쭤도 될까요? 밖에 서 있는 사람들만 봐도 매우 부유하신 분 같은데, 굳이 제 그림을 원하시는 이유를 들을 수 있을까요?”
나름 아이들의 감성을 담아 궁금한 부분에 대해 물었다.
스스로도 무척 자연스러웠다 뿌듯해하면서.
“호, 호호. 아주 물건이야.”
홍라혜의 입에서 웃음보가 터졌다. 하나 한강은 무표정을 유지하며 홍라혜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렇죠? 완전 애늙은이예요. 호호.”
남수영도 따라 웃었다.
“아주 간단하단다. 내가 직접 너의 그림 실력을 직접 보고 싶어서라고 하면 될까? 마음에 들면 선물을 주마.”
‘대체 무슨 생각인 거지?’
홍라혜의 눈동자를 가만히 들여다봤다.
‘알 수 없는 일이야. 정말. 어쩐다.’
정확한 이유를 설명해 주지 않는다. 한강은 심각하게 고민을 하였다.
그림을 그리는 게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나, 의도가 너무 궁금했다.
자신의 작품을 미술관에 전시를 할 것도 아닐 테고.
떡잎은 이미 확인을 하였으니, 단순히 직접 보기 위함은 아닐진대.
‘어라 가만. 이거 잘하면... 괜찮을 거 같은데.’
그때 번뜩하고 스치고 간 생각.
한강은 고민하던 표정을 풀어 시선을 홍라혜의 두 눈에 고정했다.
“소원, 아니 부탁이 있어요. 제 그림이 마음에 드신다면 저의 부탁을 들어주실 수 있을까요?”
“부탁?!”
홍라혜가 황당하다는 시선을 보냈다. 아주 당돌한 아이였다.
선물을 주겠다는 말을 부탁으로 바꿔 말하는 모습에 헛웃음마저 나왔다.
“네.”
하나, 한강은 약간의 표정 변화 없이 홍라혜를 똑바로 쳐다봤다.
“다른 아이들과 다르다 했는데, 아주 당차네. 그 부탁이 뭔지 들어볼 수 있을까?”
홍라혜는 묘한 기분을 느끼며 신경을 한강에게 집중했다.
역사를 뒤져도 지금과 같은 상황은 없을 것이라 생각하며 무슨 부탁을 할지 기대를 가지고 들어보기로 하였다.
“부탁은 두 가지예요.”
“두 가지라, 좋아 들어보자.”
“허락한 걸로 알고 말할게요. 어제 PBS 담당 PD와 밥 로스 작가님이 찾아와 같이 방송을 하자는 제안이 왔어요.”
“뭐?!”
홍라혜가 깜짝 놀라 되물었다.
“헙!”
남수영 교수의 입에서도 놀란 목소리가 들려왔다.
“전 미국으로 가고 싶어요. 밥 로스 작가님이 그러더군요. 절 제자로 삼아, 직접 지도해주겠다고요.”
“......”
“......”
둘은 그만 할 말을 잃었다. 설마하니 밥 로스가 한국의 어린아이 한 명을 보기 위하여 걸음을 하였다니.
상상도 못 한 일이다.
“한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문제라면 부모의 허락이 되겠구나.”
홍라혜는 무엇이 문제일지 콕 집어내었다.
재벌 가문이었다면 당장 보냈을 터이나, 일반인은 결코 쉽지 않은 선택이 되리라 봤다.
“맞아요. 부모님을 설득하는 데 도움을 주셨음 합니다. 이것이 제 첫 번째 부탁이고.”
한강은 아무리 부모님이라도 육성그룹의 홍라혜 여사의 말은 쉽사리 무시하지 못하리라 봤다.
누가 뭐라고 하더라도 국내 최고의 기업이며, 명망 깊은 가문이지 않나.
타국에서 온 밥 로스보다 육성그룹 안주인인 홍라혜 여사의 말이 더욱 설득력이 있을 거다.
“두 번째는?”
놀란 마음도 잠시, 홍라혜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흥미를 드러냈다.
성인들도 하기 힘든 걸, 저 작은 아이가 자신과 협상을 하려는 모습이 새로이 다가왔다.
“두 번째는 자산관리사를 붙여주세요. 집의 재산과 제 개인 돈을 관리해줄 사람으로, 제 부탁을 거절 없이 전적으로 들어줄 수 있는 분이면 좋겠어요.”
“......”
“......”
홍라혜와 남수영은 그만 말문이 막혀버렸다. 생각도 못 한 제안이 들어온 탓이다.
“아가, 자산관리사, 아니 자산관리가 뭔지 알고 하는 소리니?”
정말 궁금해서 물어봤다.
두 번째 부탁은 당연히 미술용품과 관련된 말이 흘러나올 줄 알았다. 것도 아니면 통역사.
사실 이것도 아이의 입에서 나오긴 힘든 말이긴 하였다.
한데, 자산관리사를 붙여 달란다.
이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모르겠다.
“네. 재산을 관리해주는 걸 말하지요. 제 자금을 위탁하여 증권, 채권, 보험 등 금융자산에 투자하고, 관리에 대한 조언을 해주는 사람을 자산관리사라 부른다는 정도는 알고 있어요.”
더 질문을 받는 건 사양이기에, 내친김에 나올 질문까지 답을 하였다.
“...내가 귀신이라도 보고 있는 기분이야...”
살다 살다 이런 아이는 처음이었다. 이건 천재라고 말하기도 아까울 정도였다.
‘유치원 교육이 이 정도인가?’ 싶기도 하였지 말도 안 되는 일이기에 황당한 생각을 지웠다.
‘성인이 아이의 몸으로 다시 태어나지 않고서야... 차라리 이게 더 설득력이 있겠어. 설마 영어도 할 줄 안다고 하진 않겠지?’
오히려 이게 더 설득력이 있었다.
감탄은 충격으로 이어져 경악하게 만들었다.
그러다 한 가지 생각에 미쳤다.
“외국어는 할 줄 알고? 미국에 가면 영어를 사용해야 할 텐데 말이다.”
이건 정말 아닌 부분, 설마 하는 심정으로 물었다.
“아주 잘해요. 어렸을 때부터 영어를 접해, 대화를 하는 데 장애가 되지 않을 거예요.”
다섯 살에게 있어 어린 시절이 언제인지 한강은 알까? 그것도 모른 채, 한강은 방금 던진 질문에 대한 답을 영어로 답했다.
“......”
“......”
방 안은 다시 고요해졌다. 홍라희도 남수영도 더는 입을 열지 못했다.
입안으로 벌레가 들어가도 모를 정도로 둘은 큰 타격을 받았다.
원어민 수준에 유창한 영어 실력.
설마 했는데, 이건 상상 그 이상이었다.
“확인은 충분히 하셨다 생각해요. 이제 선생님의 요청이 무엇인지 알고 싶어요.”
딱히 부를 호칭이 없기에 편하게 선생님이라 칭했다. 아줌마, 할머니보다 나으리라.
그녀들의 기분도 헤아리지도 못한 채.
아주 매정한 모습이다.
“휴, 정말 네가 나를 여러 번 놀라게 하는구나. 이보다 더 놀랄 일은 없겠지 했는데, 휴... 좋아. 어려운 일도 아니니 들어주마. 대신 내가 만족할 만한 그림을 그려야 할 거야.”
“좋아요. 한데, 지금 미술용품이 없는...”
“그건 여깄단다. 이걸 사용하렴.”
그때 남수영 교수가 옆자리에 놓아둔 가방에서 용품을 꺼내 책상 위에 올려두고 이젤을 가져와 앞에 놓았다.
‘이분들 작정하고 왔구나.’
한강의 시선은 책상 위에 올려둔 용품에 닿았다.
그건 쉬이 구경할 수 없는 전문가용 오일 파스텔이었다.
‘많이 사용해 본 적은 없지만, 못할 것 없겠지. 선생님 맘에 안 들어도 다섯 살인 점은 감안하고 봐주셔야 합니다.’
소매를 걷어붙였다.
짧게 심호흡을 하고는 책상에 올려둔 오일 파스텔로 가져갔다.
“선생님께 만족할 만한 그림을 그려 보겠습니다.”
한강의 안광에 빛이 뿌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