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5살, 어버이 은혜
서프라이즈─
무슨 일이 생겼나 싶어 급하게 나간 현관문 앞은 만물상을 방불케 하였다. 저게 다 뭔가 싶었다.
브이를 그리며 웃고 있는 엄마를 봤다.
“이게 대체... 다 뭐예요?”
너무도 익숙한 물건이라 잠시 놀랐지만, 놀란 마음을 간신히 누르고 왜 이러한 물건들이 여기에 있는지 물었다.
“엄마가 우리 아들을 위해 선물을 사왔지! 우리 한강이가 좋아할 만한 엄마의 선물!”
“......”
‘그런 건가...’
일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알만했다.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한강은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고민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젤, 스케치북, 연필, 물감, 팔레트 등등.
미대라도 보내고 싶으신지 중간중간 전문가용도 보였다.
“하, 하하...”
솔직히 이걸 어떻게 받아들이고 반응해야 할지 모르겠다. 한강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머릿속으로는 물품 비용을 하나하나 따져봤다.
‘너무 무리했어. 그냥 연습장과 연필만 있어도 될 일을...’
한강은 여기에 들어간 돈들이 몹시도 아까웠다. 미술에 뜻이 없음을 그렇게 밝혔는데.
“그 표정, 뭐야? 아들.”
[이럴 땐 엄마에게 감사합니다 말하는 거야. 그리고 아들을 챙겨 주는 건 엄마의 마음이야. 한 번만 더 엄마한테 그런 말 하면 혼낼 거야...]
얼마 전 혼났던 말이 떠올랐다.
마음 같아서 모두 환불하자 하고 싶었지만.
“감사합니다. 엄마. 정말 좋아요!”
역시 이게 최선의 선택이었다.
어떤 마음으로 잘 알지도 못하는 미술용품들을 사오셨을지, 충분히 짐작이 되었다.
“아구구, 우리 아들. 그림 그리다 부족한 거 있으면 엄마한테 말해. 필요한 건 엄마가 다 사줄게. 알았지. 아들.”
미화는 아들에게 늘 미안했다. 아이 집이라면 있을 법한 장난감은 집에서 찾아보기 힘들었다. 한강이 원하지도 않았지만, 철이 든 아들을 보면 늘 가슴이 아렸다.
그러다 발견한 아들의 특기.
아들의 관심사를 알게 되었다는 사실에 무척 기뻤다.
‘미술에 관심 없어요. 학원은 다니지 않을래요.’
말했지만, 믿지 않았다.
늘 그래왔으니까. 이번만큼은 부모로서 꼭 해주고 싶었다.
부모 된 입장에서 어떻게 가만히 있을 수 있을까. 세상에 그런 부모는 없었다.
“한강이가 좋아하니까, 엄마도 좋다. 헤헤.”
아들의 활짝 핀 미소는 누적된 피로를 시원히 풀어주기 충분했다.
“...정말 잘할게요.”
아직은 앳된 20대.
엄마라는 막중한 책임감, 젊은 시절도 제대로 누려보지 못하고 고생만 하는 모습에 시야가 뿌예진다.
오늘만큼은 순수한 다섯 살의 마음으로 다가가 엄마에게 안겼다.
“정말로 잘할 거예요.”
“그래, 엄마는 믿어. 우리 아들이 정말 잘하고 잘될 거라는 거.”
엄마의 품속, 너무 따뜻하다.
한동안 엄마의 따스한 온기를 느끼며 이를 악물며 눈물을 삼켰다.
재벌 가문에서 느껴보지 못한 익숙하지 않은 감정이나, 이보다 행복하다 느껴본 적은 없었다.
“음, 어쩐다.”
방 안으로 가져온 미술용품들을 보며 고민에 빠졌다.
“이걸 그냥 놀리기도 그렇고, 그렇다고 매일 그림을 그리기도 그렇고. 휴...”
고민이 깊어진다. 그냥 놀리자니, 엄마의 마음을 무시하는 것이고.
손을 대자니 돈도 안 되는 일에 시간을 뺏기는 비생산적인 부분도 썩 내키지 않았다.
“히유, 별수 없겠지. 하루 1시간 정도 시간을 들여 그려보는 수밖에.”
저녁에 공부하는 시간을 쪼개보기로 하였다.
이렇게 시간을 쪼개 취미를 가져보기는 이번 생에 태어나 처음으로 있는 일이다.
“뭘 그려본담.”
앙반다리 자세로 연필을 입에 문 채, 생각에 잠겼다.
“음, 그러고 보니... 주말이 할아버지 환갑이라 북한산에 가신댔지. 그래, 그거면 되겠다.”
머릿속으로 불쑥 튀어나온 기억에 양손을 짝 치며 굿아이디어를 떠올렸다.
그것은.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모습을 수채화로 담아보자.”
수채화는 소묘보다 난이도가 있는 작업이다. 그만큼 손도 많이 가고 집중력을 요한다.
작은 실수조차 용납하지 않을뿐더러, 색감의 센스가 무척 중요하다.
스케치북을 뒤로 밀고 8절지 도화지를 꺼내 이젤에 걸었다.
“두 분을 직접 모시고 그리는 게 더 좋겠지만, 당장 그러긴 힘드니... 이 사진을 보고 그려보자.”
책상에 올려둔 액자를 가져와 상자 위에 올렸다. 사진에는 산 배경으로 집 앞에서 한강을 안고 찍은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잘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잘해야만 한다. 이건 이번 생에 처음으로 소중한 사람에게 주는 첫 선물이니까.
어린 몸이 얼마나 버텨줄지 모를 일이나, 힘을 꽉 주고 연필을 들어 드로잉을 시작했다.
***
“한강이는?”
일을 마치고 돌아온 덕화가 웬일로 밖으로 나와 반기지 않는 아들을 찾았다.
늘 먼저 반겨주던 아들이 반겨주지 않으니,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지금 방에 있을 텐데? 한강아, 아빠 왔다. 나와서 인사해야지.”
거실로 나오지 않고 방에 박혀 있는 한강을 부르러 작은 방으로 들어갔다.
“한강... 아?!”
방으로 들어간 미화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앞을 멍한 눈으로 바라봤다.
“뭔 일인데, 그리 멍하니 있어... 한강아... 어?! 허...”
당황하는 아내의 모습에 이상함을 느껴 덕화가 방문을 활짝 열어젖혀 안을 들여다봤다.
“세상에...”
덕화도 당황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덕화도 말없이 두 눈으로 비치는 아들과 아들의 손에 완성되어 가는 그림에 넋을 놓았다.
“한강이 아빠...”
집중력이 얼마나 높은 건지...
부르는 소리도 듣지 못하고, 심지어 방문을 열고 들어온 것조차 모르고 있었다.
“하하, 내 아들이지만. 대체 저건...”
말을 다 잇지 못했다. 어떻게 저리 여리고 작은 몸으로 저런 멋진 그림을 그릴 수 있는지, 놀랍지 않을 수 없었다. 심장이 쿵쾅쿵쾅 뛰었다.
“어, 엄마. 아빠. 언제 오셨어요.”
붓을 놓고서야 인기척을 느낀 한강이 고개를 돌려 깜짝 놀란 눈으로 바라봤다.
“하하... 녀석도.”
“... 한강아.”
두 사람은 너무 황당함에 더는 말을 하지 못했다.
‘역시 이 길로 가야 돼. 한강이는.’
‘다행이야. 무리한 보람이 있어서.’
한강의 미래를 다시 한번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한강을 최고의 화가로 키우기로 의지를 불태웠다.
***
“한강아, 밥 먹자.”
저녁 시간, 구수한 된장찌개의 냄새와 동시에 거실에 밥상이 차려졌다.
놀람을 잠시 진정하기 위하여 30분이 지나서야 늦은 저녁을 할 수 있었다.
“이야, 된장찌개네. 크.”
없던 입맛도 돌아오게 만드는 된장찌개 향에 취해 숟가락을 들었다.
“맛있게 드세요. 잘 먹겠습니다.”
하얀 두부를 숟가락 위에 올려 밥공기에 덜었다. 어린 나이라 매울 법하지만.
‘크, 좋구나.’
끝내주는 맛에 매료됐다.
마비 직전의 매운 된장 맛이 흰 쌀밥과 잘 어우러져 환상의 연주곡을 만들었다. 혀끝이 입안 구석구석을 핥고 지나가며 입안에서 맴도는 된장의 여운을 즐겼다.
“한강아, 맵지? 쿨피스 마셔.”
어린 나이임에도 매운 된장찌개와 김치를 좋아하는 어린 아들의 모습에 미화는 작게 웃으며 미리 준비한 쿨피스를 따라서 입에 넣어줬다.
“엄마 된장 맛이 진짜 일품이에요! 크.”
“녀석하고는. 일품이 뭔 말인지는 알고 쓰는 거고?”
“알아요! 으뜸이요.”
좀 자존심이 상하는 질문이었지만, 당연한 물음이기에 가벼이 넘어갔다.
“으뜸이 뭔데?”
아빠님 알 거 다 아는 다섯 살입니다.
“최고요.”
“허, 참.”
절레절레.
요즘 애들이 빠른 건지, 아들이 희귀종인지 여러모로 헷갈리는 덕화다.
‘이걸 천재라 하는 거겠지?’
덕화는 잠시 아들을 넋 놓고 바라보다 고개를 좌우로 젓고는 멈췄던 숟가락을 놀렸다.
그러면서 한강의 진로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했다.
응? 반지가 안 보이네.
무언가 이상한 점을 발견한 그때, 시선이 두 사람의 손가락에 꽂혔다.
늘 끼고 다니던 반지가 보이지 않았다.
‘손가락에 반지가 없어. 가장 중요한 거라며 애지중지하시던 분들이.’
이상함에 고개를 갸웃거리다, 궁금한 마음에 시선을 덕화에게 돌렸다.
“아빠, 매일 끼고 있던 반지 어디 갔어요? 엄마도 없고?!”
묻지 않고 넘기기에 걸리는 부분이 있어 묻지 않을 수 없었다.
“......”
“......”
한강의 물음에 둘은 크게 당황했다. 밥을 먹다 미화와 덕화는 눈빛을 교환하며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그건 왜 물어, 아들?”
미화가 쑥 끼어들어 덕화에게 꽂힌 한강의 시선을 돌렸다.
“엄마랑 아빠가 늘 그랬잖아요. 엄청 중요한 반지라고요. 그리고 그거 외에 다른 반지도 없잖아요.”
생활하기도 빠듯한 환경에 반지를 여러 개 들고 있을 리 만무했다.
마음 같아서는 한 달에 하나씩 금을 사 모으라 조언을 하고 싶지만, 이건 설명하기가 참 힘들다.
“아빠가 더 좋은 반지 사준다고 해서 팔았어. 아빠 대단하지? 헤헤.”
“......”
웃고 있는 얼굴 저편으로 씁쓸한 그늘이 드리워져 있다. 그걸 느끼지 못할 한강이 아니었다.
‘그랬나. 나 때문인가.’
예고도 없이 사 온 미술용품들.
딱 그림이 그려졌다.
‘티 내지 말자. 절대로...’
여기서 슬픈 표정을 짓고, 다운된 모습을 보인다면 두 분은 무척 슬퍼하리라.
한강은 올라오는 슬픔을 힘겹게 눌렀다.
“아빠, 정말이에요?”
“그, 그럼. 우리 한강이가 있고, 얼마나 일이 잘 풀리는지 모른다니까. 하하.”
“아빠 멋지다. 나도 커서 아빠랑 엄마에게 반지 해줄래요. 아주 멋진 걸로.”
‘꼭, 해드릴게요. 그 반지보다 몇십 배는 값어치 있는 반지로.’
재벌 가문에서 지낼 당시에는 느껴보지 못한 감정이 심장 깊이 각인이 되었다.
서민들이 살아가는 법을 직접 눈으로 보고 경험을 하면서 새로운 개념들이 머릿속에 자리를 잡았다.
“아고고, 우리 아들 멋지다. 누굴 닮아 이리 예쁠까.”
“기특하긴. 이 아빠도 우리 한강이가 하고 싶은 거 다 할 수 있게 열심히 일할게.”
‘두 분에게 있어서 나는 미래다. 미래가 흔들리지 않게, 안정감을 드리자. 우선 이것부터.’
마음속으로 깊이 다짐했다. 아직 먼 미래라 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그리 먼 미래가 되지는 않을 터다.
한강은 몇 번이고 다짐했다. 최단기로 돈을 벌어 가문을 일으키겠다고.
그 시각.
건물 3층에 위치한 참한 미술학원.
그곳에 불빛이 환하게 밝혀 있었다.
“무슨 일인데, 갑자기 여기로 오래.”
학생들이 다 빠져나간 교실로 이하나가 들어왔다. 교실에는 하나의 친구이자 학원장인 오연서가 있었다.
“하나야, 나 그 그림 좀 빌리자.”
“그 그림? 갑자기 뭔 그림?!”
대뜸 불러놓고 알아듣지 못할 소리를 하는 친구의 모습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그 왜 있잖아. 한강이랬나?! 그 아이가 그린 그림 좀 빌리자고.”
“그거 내게 선물로 준 거란 말야.”
하나의 몸이 흠칫 떨렸다. 아주 마음에 드는 한강의 선물이기에 아무리 친구라도 빌려주는 데 거부감이 들었다.
“아니, 그거 말고. 다른 그림도 있을 거 아냐.”
“아, 없는데.”
“뭐?!”
“아니, 한강이가 유치원에 들어온 지도 얼마 안 됐고, 미술 시간은 한 번밖에 없었거든.”
“으으음...”
연서의 얼굴에 곤란함이 깃들었다. 이건 생각도 못 해본 문제였다.
“시에서 어린이날 기념으로 미술 대회를 열 거야. 거기에 한강이의 그림을 공모전에 낼까 했는데... 음.”
“공모전?!”
“그래. 한강이가 그림을 그리는 데 도움을 주고 싶어. 그 천재적 실력을 썩히기는 아깝잖아.”
“확실히 한강이라면... 그런데 그걸 멋대로 해도 돼?”
“어쩌겠어. 기다려도 연락이 오지를 않는데. 난 그 아까운 재능을 썩히는 건 절대 반대야.”
연서의 두 주먹이 불끈 쥐어졌다.
절대 포기하지 않겠다는 열망이 그녀의 눈에서 뿜어져 나왔다.
“하지만...”
“하나야, 그럼 우리 이렇게 하자. 너네 유치원에서 아이들에게 그림을 그리게 해. 물감이든, 파스텔이든 아무거나. 8절지 도화지에 그린 후, 그걸 우리가 시에 제출하자.”
“꼭 그렇게 해야 해?”
“그쪽에서 관심이 없다면, 우리가 관심을 가지게 만들어야 하지 않겠어? 아마 이번 대회에 한강이의 작품을 내면 대상은 따놓은 거나 마찬가지라고.”
“......”
“하나야, 우리가 한강이의 길을 이끌어 주자. 우린 선생이잖아. 이 정도 자격은 충분히 있다고 보는데, 나는?”
부담스럽도록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바라보는 친구의 모습에 하나의 표정이 달라졌다.
‘선생’이란 단어가 주는 무게감과 책임감이 불길이 되어 활활 타올랐다.
결심이 선 눈빛이 하나의 두 눈가에 맺혔다.
“좋아, 알았어. 내게 맡겨둬!”
선생이라는 말에 강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하나는 친구의 부탁을 들어주기로 하였다.
두 사람의 모종의 거래가 이뤄졌다.
“으, 갑자기 오한이. 갑자기 왜 이리 떨리지.”
이러한 사실을 모르는 한강은 밥을 먹다 말고 몸을 부르르 떨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