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5살, 증명하다
“그림은 따로 배운 적 없다고 들었는데, 맞나요?”
“네, 배운 적은 없어요.”
연서의 물음에 간단히 답을 주었다.
“간단히 테스트를 해보고 싶은데, 괜찮을까요? 한강이 어머님.”
‘그래 봤자 다섯 살 중에서 좀 더 잘 그리는 수준이겠지. 다섯 살이 얼마나 잘 그리겠어... 에휴, 내가 지금 뭐 하는 거람. 내 신세야...’
친구인 하나에게서 미술계 천재가 나타났다며 하루 종일 시달린 때를 떠올렸다.
-야, 우리 유치원에 완전 미술천재가 있었지 뭐야. 배운 적도 없다는데, 완전 미대 졸업작품 저리 가라야. 크레파스가 명품으로 보이더라니까.
믿지 않았다. 제자를 자랑하고픈 친구의 지나친 허풍이라 생각했다.
그럼에도 이 자리에 오게 된 건.
-진짜라고! 우리 내기해. 당장! 만약 내 말이 맞으면 너네 학원 공짜로 다니게 하는 걸로! 알았지? 네가 전액 다 지원하는 거다. 무조건!
이렇게 된 이유였다.
“한강아, 여기 스케치북에 자신 있는 그림 아무거나 하나만 그려보자. 주변에 보이는 걸 그려도 좋고. 엄마나 여기 있는 선생님도 괜찮고.”
귓구멍이 뚫리도록 들었던 한강의 그림 실력의 대부분은 인물화에 있었다.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상당한 실력을 보유하고 있다는 친구의 증언에, 인물화를 그려볼 걸 슬쩍 주문했다.
“꼭 그려야 하나요? 전 그림에 관심이 없는데요?”
곤란함을 품은 눈빛은 연서의 두 눈동자에 맺히다, 쓱 돌려 미화에게 향했다.
정말정말 이런 건 진짜로 싫었다.
“한강아, 한번 그려봐. 어제처럼 간단히 그려도 되잖아.”
하지만, 미화의 기대 어린 시선은.
휴...
한강의 마음을 흔들다, 돌려놔 버렸다.
다른 누구도 아닌, 엄마의 따스한 눈빛은 한강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래, 별일이야 있겠어?! 내가 하기 싫다고 하면 그만일 거고. 시간 끌지 말고 바로 시작하자. 그런데 뭘 그린다?’
스케치북 옆으로 색연필, 크레파스, 연필이 보였다. 그중에 4B연필에 꽂혔다.
‘저것도 오랜만이네. 붓에 맛들여 연필은 뒷전으로 했었는데. 그래 소묘를 해보자.’
4B연필을 들어 자세를 잡았다. 고개를 올리고 빤히 바라보는 시선들을 느끼며 정면에 앉은 이하나 선생님을 바라봤다.
‘참 귀여운 선생이야. 구도도 좋고 빛도 적당해.’
창문을 통해 쏟아지는 빛에 노출된 이하나 선생의 모습에 잊었던 감각이 깨어났다. 연필을 들어 이하나 선생의 얼굴을 찬찬히 살폈다.
동글한 작은 얼굴에 쌍꺼풀이 짙은 동그란 눈.
머리는 포니테일.
눈을 감고 심호흡을 하고는 자세를 잡았다.
스스슥─
작은 손의 쥐어진 연필은 거침없이 선을 그었다. 얇은 선과 굵은 선들이 어우러져 춤을 추기 시작했다. 손에 이끌려 막힘없이 이어지는 선들은 도화지에 빠르게 형태를 만들어나갔다.
‘말도 안 돼! 이게 다섯 살 아이의 실력이라고...’
빠르게 형태가 갖춰지는 그림을 보며 연서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입을 쩍 벌렸다.
아직 대학 입시반도 해내지 못하는 걸, 한강은 너무도 쉽게 해냈다.
저건 누가 보더라도 친구인 이하나.
전체적으로 중간 톤을 이용해 묘사를 하였고, 어두운 부분에 묻힐 수 있는 톤 부분을 세밀하게 조절하는 기술까지 선보였다. 톤끼리 뭉치지 않고 얼굴의 묘사가 부분적으로 떨어져 보이도록 하였다.
왼쪽 얼굴과 머리카락 부분은 과감하게 밝음을 남겨 대비가 강하게 느껴지도록 만들었는데, 그 또한 무척 자연스럽고 빠르게 진행됐다.
‘이건 사기야... 저게 정말로 따로 교육도 받지 않은 다섯 살의 실력이라고... 진짜로?! 어떻게!? 이건 아무도 믿지 않을 거야...’
과에서 제법 성적을 내고 미술 학원을 개업한 연서로서 한강의 실력은 말도 안 되는 것이었다.
지금 그려지는 그림은 최소 몇 달, 아니 몇 년을 반복적으로 그리지 않으면 하기 힘든 실력이었다.
눈동자를 슬쩍 돌려 미화를 바라봤다.
‘저 표정은 진짜야. 정말로 아무것도 가르치지 않은 거라고... 어떻게 저럴 수가 있지?!’
미화의 얼굴 또한 자신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아들의 실력을 오늘에서야 알게 된 얼굴임이 확실했다.
친구인 하나도 마찬가지.
“이 정도면 됐겠죠.”
약 40분에 걸친 시간.
쥐 죽은 듯 조용한 방 안에 한강의 목소리가 퍼졌다. 한강은 스케치북을 돌려 연서에게 넘겼다.
“......”
“......”
“......”
방 안에 자리한 세 여성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미화와 하나는 생각 이상으로 뛰어난 한강의 솜씨에 놀랐고, 연서는 고작 40분 만에 그려낸 그림의 완성도에 놀랐다.
‘정말 천재가 존재했구나...’
연서의 시선이 한강의 손으로 향했다.
손가락과 손바닥 주변이 흑색으로 가득했다. 하지만, 도화지는 무척 깨끗했다.
백색 종이에는 오로지 따스한 눈망울로 수줍은 미소를 짓고 있는 친구의 모습만이 담겨 있었다.
‘시간만 더 주어졌다면...’
군데군데 부족해 보이는 부분들이 보였지만, 그건 시간이 부족해서 일터.
그럼에도 중요한 특징들은 아주 잘 잡아주었다.
약한 어둠으로 특정 부위를 강조한 부분까지, 너무도 완벽했다.
당장 학원에 나와 선생으로서 일해도 부족하지 않을 실력이었다.
“어머님, 정말로 어떤 교육도 받지 않은 게 확실한가요?”
“뭐가 잘못됐나요?”
“아뇨. 어머님도 보시면 알겠지만, 이건 미술을 전공한 사람이 그렸다 해도 믿을 정도의 작품이에요.”
연서는 그림이 아닌 ‘작품’이라 말했다.
그래, 맞았다. 세상에서 유일하며 다시 없을 다섯 살이 그려낸 작품.
침이 꼴깍 삼켜졌다.
“그 정도... 인가요...”
그림을 볼 줄 모르는 사람도 보면 안다. 얼마나 난이도가 있는 그림이며, 잘 그린 작품인지. 그 반대도 마찬가지.
미화는 어색한 미소를 입가에 걸쳤다.
“제가 가르칠 건 없는 거 같아요.”
‘교수님이시라면 또 몰라도...’
이화여대의 교수로 있는 옛 선생을 떠올렸다. 미술계에서 이름만 대면 알 법한 명성이 대단한 분.
지금의 한강을 한 단계 더 끌어올려 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자신이 아는 사람 중 교수님이 유일하다 결론을 지었다.
“그럼 교육은...”
“한강이가 원한다면 언제든 학원에 들러 그림을 그리게 해줄 수 있어요. 이런 재능... 절대 썩히시면 안 됩니다.”
연서는 주먹을 불끈 쥐고 눈에 힘을 힘껏 주며 말했다.
미술계 전설이 될지도 모를 아이를 썩힌다면, 절대 가만히 있지 않을 거란 압박을 가하였다.
“우리 아들을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니에요. 정말로 한강인 천잽니다. 어머님만 원하시면 교수님을 소개시켜 드릴 수 있어요.”
“생각 좀 해볼게요. 한강이는 제가 데려갈게요. 선생님.”
“아, 네. 아! 한강아. 혹시 여기 그림에 네 싸인을 해줄 수 있을까?”
일어서려는 한강을 하나가 급히 잡았다.
“싸인요?”
“그러니까, 혹시 한강이가 유명해지면 내가 최초로 그림을 받았다? 뭐 그런... 호호.”
민망했는지 하나의 얼굴이 붉게 타올랐다.
‘음, 사인이라... 뭐, 괜찮겠지. 이것도 추억이니까.’
“싸인이 없다면, 그냥 네 이름만 적어도 돼.”
“주세요. 해드릴게요.”
지금 자리에 있는 세 사람은 한강이 ‘사인’이란 걸 알고 있음에도 크게 놀라지 않았다.
너무 혼란스럽기도 했지만, 너무도 성숙하고 어른보다 더 어른다운 모습에서 본인들도 모르는 사이에 한강을 비슷한 또래로 대했다.
“됐어요.”
휘갈겨 쓴 사인은 전생에 보고서 결재 사인을 만들면서 얻은 사인 중 하나였다.
“고마워. 한강아. 어머니, 귀중한 시간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야말로 우리 아들을 챙겨 주셔서 감사해요. 오연서 선생님도 감사합니다.”
“아니에요. 저도 좋은 경험을 할 수 있어서 좋았어요. 그리고 이건 제 명함이니 아무 때나 부담 없이 전화를 주세요.”
“감사해요. 한강아 선생님께 인사하고.”
선생들과 대충 이야기를 끝낸 미화는 아들에게 시선을 옮겼다. 속 한 번 썩이지 않던 아들이, 오늘은 유독 더욱 거대하게 다가왔다.
“안녕히 계세요. 선생님 내일 뵙겠습니다.”
지금 자리한 사람들은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지금 가지고 있는 그림이 나중에 어떤 가치가 되어 돌아올지...
한강은 엄마의 손을 붙잡고, 집으로 돌아갔다.
“어, 엄마. 나 가방 들고 올게요!”
깜박 잊을 뻔했다. 가장 중요한 돈이 가방에 있음과 그런 가방이 교실에 홀로 있다는 사실을.
한강은 황급히 교실로 가방을 가지러 달려갔다.
***
“그게 정말이야?”
“응. 한강이가 너무 뛰어나대. 한강이 아빠도 그걸 봤어야 해. 최근에 가져온 거랑 비교도 안 되는 그런 그림이었다고. 그 미술선생이 뭐란 줄 알아? 한강이가 그린 걸 보고 작품이래. 작품.”
미화는 오후에 있던 일들을 떠올려 회상했다. 미술선생인 한강이가 그린 그림을 ‘작품’이라 칭했을 때, 그때 느꼈던 전율과 두근거림은 아직도 잊히지 않았다.
두 손을 가지런히 모아 심장이 위치한 가슴에 손을 살포시 얹었다.
“이거 정말 골 아프네. 아들이 잘나도 문제일 줄이야. 그래서 당신 생각은 뭔데?”
덕화는 당겨오는 골을 매만지며 물었다.
“나도 그걸 잘 모르겠어. 뭐가 좋은 건지. 각오하고 갔는데, 너무 허무하게 끝이 나서.”
“한강인 뭐래?”
“관심 없대. 자신은 확실한 돈이 되는 일을 하고 싶다, 뭐 그런 말을 하더라...”
“허, 하하...”
역시 보통내기가 아닌 아들이었다. 다섯 살이 뭘 안다고 그런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
이따금씩 아버지와 상대하는 기분을 느낄 때도 있었으니...
더 말해 무어 할까?
“한강인 다른 아이들과 달라. 그러니 일단 걔가 하고 싶은 걸 하게 놔두자. 우린 그때를 대비해 착실히 적금 들고.”
“응. 그게 좋을 거 같아.”
남편의 뜻에 따르기로 하였다.
두 부부는 너무도 잘난 아들로 인해 하루하루를 고통과 행복 사이를 오가며 시간을 보내었다.
***
유치원이 끝나고 집으로 복귀한 한강은 저금통을 열어 그동안 모아온 돈을 세었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열, 열하나, 열둘, 열셋, 열넷, 열다섯... 이제 간신히 2만 원 정도 모았네.”
1990년, 다섯 살 나이에 스스로의 힘으로 2만 원을 모은 건 그야말로 대단한 업적! 중간에 지갑을 주워 보너스를 탄 것까지 합친 돈이다.
중간중간 놀이터에서 5백 원, 천 원을 줍기도 하였고.
“그나마 이걸 전부 지폐로 바꿔서 모아놓길 잘했어. 동전으로 모았으면 꽤 힘들었을 거야. 그런데 이걸 어떻게 통장에 넣는다?”
양반다리로 앉아 곰곰이 생각했다. 돈을 모으는 것도 좋지만, 어디에 모으냐가 매우 중요했다.
현재 은행 적금 금리는 15%. 일반저축은 7% 수준.
돈을 밖에서 관리하기보다 계좌에 차곡차곡 쌓아두는 게 유리했다.
지금으로서 그것이 돈을 모으면서 벌 수 있는 최고의 현실적 방법이었다.
“혼자 통장 들고 은행가는 것도 웃기고. 음...”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다섯 살이 뭔 능력이 있다고 수중에 몇만 원이나 쥐고 있을 수 있을까?
길에서 돈을 주웠다는 것도 하루 이틀이다.
아직 써먹진 않았지만, 이런 방법은 최대한 아껴 쓰는 게 가장 좋았다.
“부담이 안 되는 건 역시 할머니랑 이하나 선생님인데... 담 주에 할머니 댁에 간다고 했으니까... 이건 그때 저금하는 걸로 하자. 그다음은 차차 생각해 보도록 하고.”
복주머니에 넣어 두고, 서랍 아래쪽 틈 속에 숨겨두었다. 이렇게 두면 책상을 뒤지지 않는 이상 발견되지 않으리라.
한강아─!!
퇴근하고 돌아온 엄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런데 목소리에 다급함이 서려 있었다.
“무슨 일이지?!”
목에 힘이 들어간 목소리는 심장을 두근거리게 만들었다.
한강은 다급하게 들려오는 엄마의 목소리에 놀라 주변을 제대로 정리하지 못하고 급히 밖으로 나갔다.
“엄마...”
그러던 차, 앞에 벌어진 상황에 한강은 자리에서 그대로 굳어버리고 말았다.
어떠한 말조차 하지 못한 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