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70화 (270/270)
  • 270화

    산박이 오두막을 나왔다. 밖에 보이는 개인 낚시터의 모습은 을씨년스러웠다. 사람 손을 안 타면서 자연의 것처럼 난잡해지고 있었다.

    ‘너무 오래 병원 신세를 졌다.’

    그만큼 실력 있는 자의 배신은 맹독으로 작용했다. 산박의 모든 것을 훑고 지나갔다.

    음주 운전으로 차에 치인 가장의 피가 만들어내는 느릿느릿한 한 가정의 파괴처럼, 병원 신세를 진다는 것은 한 사람의 인생을 고정시킨다.

    붕대로, 깁스로, 철심으로 박아두고 시간은 조용히 흘러간다.

    당해본 사람만 안다.

    모든 것은 흘러가는데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내 몸 하나 건사하기 힘들 때 느끼는 절망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거대했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말끔하게 차려입고 나온 산박에게 경호원이 고개를 숙였다.

    “공항으로 안내하겠습니다. 태산박 사장님.”

    “잘 부탁합니다.”

    산박은 말은 공손히 하고, 고개는 묵례를 하는 것으로 그를 대우해줬다. 개발되지 않은 부동 지구를 지나 자동차는 인천 공항으로 향했다. 전세기는 이미 준비되어있었기에 바로 탈 수 있었다.

    부산 공항에 착륙하여 동래 가문의 본가에 차를 타고 이동했다.

    빵빵!

    상남자의 도시. 산 위에 무식하게 도로를 깐 부산의 교통은 끔찍하기 그지없었다. 신부님조차도 개쉐이야 소리가 나올 정도로 위험천만한 칼치기들이 난무하는 정글이었다.

    “도착했습니다. 바로 안내해드리겠습니다.”

    동래 송가(家)의 본가는 담벼락이 그냥 성벽처럼 높았다.

    ‘중세시대도 아니고…….’

    부자동네 가면 가장 놀라는 것이 담벼락의 높이였다. 어지간한 도둑은 꿈도 못 꿀 정도의 돈이 발라진 거대한 성벽! 돈 없는 자들은 하기도 힘들어 보였다. 그럴 생각을 할 여유도 집도 없었다.

    턱이 높은 계단을 올라갔다. 넓은 마당이 크게 들어왔다.

    웅장함이 남달랐다.

    기와집들을 지날 때마다 사람들의 시선이 느껴졌다. 눈이 마주쳤지만, 그 누구도 눈을 돌리지 않고, 그를 바라보았다. 가는 길을 멈추고 노려보기도 했다.

    혈족이 많아서 동래 가문 내의 알력싸움도 피곤한데, 굴러들어온 돌이 나타났으니 더 말할 것도 없었다.

    시비를 걸지 않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인내심이었다.

    ‘생각 있는 놈들이 많네.’

    그곳에서 우뚝 선 송서아가 대단해 보였다. 곳곳에 문화유적처럼 보이는 것들도 보였다. 큰 종도 있었고, 석탑에는 자연스럽게 눈이 갔다.

    과시하기 위한 것들로는 보이지 않았는데, 세월이 크게 흘러간 것이 딱 봐도 알 수 있었다.

    대형 누각(樓閣)이 있는 곳에 올라섰다. 곳곳에 다양한 종류의 나무가 심어져 있었고, 맞은편에 있는 공원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었다. 공원 뒤로는 부산의 전경이 보였다.

    부동산에 미쳐버린 놈들이 세운 아파트가 득실거렸다.

    30년 퇴직금을 집어넣고, 아파트에서 못 벗어나는 지박령들이 살아가는 아파트들이 많았다. 노후대비의 첫 번째는 현금 확보인데, 부동산의 꼬드김에 넘어가 현금을 탕진한 말로는 하우스푸어라 불리는 최하급 계층이 되는 길뿐이다.

    그곳에는 서아가 기다리고 있었다.

    “빨리 와요!”

    손을 크게 흔들었다. 얼굴에는 생기가 발랄했다. 의외로 서아는 애교가 많은 스타일이었다. 처음 볼 때는 단아하고 우아했는데, 속내는 애교가 뚝뚝 묻어나는 편이다.

    자리에 앉으면서 산박이 서아의 손을 자연스럽게 잡았다.

    곧 간단한 먹을거리가 나오고, 증조부이자 가주인 송공명이 모습을 드러냈다. 두 명 모두 일어섰다.

    “서아가 얼굴에 꽃이 피었구나. 허허허.”

    “아니에요…….”

    그녀의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속내를 들킨 기분이었고, 부끄러웠다.

    훈훈한 인사치레가 오고 나서 가주는 약혼을 축하했다.

    “아직 약혼반지 안 했지?”

    “네. 급한 대로 신고만 했어요. 근데 부모님이 해준다고 하시던데요.”

    “내가 해줘야지!”

    공명이 콧김을 내뿜었다. 내친김에 품에서 반지함을 꺼냈다. 돌로 된 반지함이었는데 척 봐도 고급져 보였고, 동양스러운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돌로 깎은 거다. 조금 크지? 여기에 폐물들을 모아놔라.”

    겨우 돌함이라서 서아의 리액션은 그렇게 크지 않았다. 증조부에게 마음을 크게 열어놓아서 무리해서 리액션을 하지 않았다.

    ‘흐흐.’

    가주가 속으로 웃었다. 돌함에는 트릭이 숨겨져 있었다.

    “와!”

    돌 내부에는 우주를 담은 것 같은 오팔이 통으로 들어가 있었다. 돌 속의 보석인 셈이다. 돌의 투박함과 오팔의 화려함이 극명한 대조를 일으켜 세웠다.

    “마음에 들지? 요즘은 그렇게 대비가 되어야 좋아한다고 하더라.”

    “정말 소중히 쓸게요.”

    척 봐도 사람 손바닥보다 큰 돌함이었다. 보석의 가격을 매긴다면 10억을 호가할 것이 분명했다. 문제는 그런 값어치를 지닌 건 파는 것도 힘들다는 점이라, 훔쳐봤자 의미가 없었다.

    약혼반지를 서아가 건넸다. 산박이 이를 서아에게 끼워주려고 했다.

    “아! 그거는 산박 씨 꺼…….”

    “아하하.”

    서둘러 두 사람이 반지를 다시 교환하고, 차분하게 끼워줬다.

    짝짝짝.

    “앞으로도 좋은 관계가 유지되길 바란다.”

    “감사합니다.”

    간단하게 대답한 산박과는 달리 서아는 진심으로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고마워요. 정말 소중히 할게요. 감사합니다.”

    “그래, 우리 예비 사위 몸 상태는 어떤가?”

    “아직 요양하고 있고 던전 공략은 다니지 않고 쉬고 있습니다.”

    “퇴근한 게 어제였어요.”

    근황을 물은 뒤에는 본론으로 들어갔다. 가주였기에 할 일이 많았다.

    “옥시모론 기업을 좀 키워야 하지 않겠는가? 나중을 위해서라도 지금처럼 소규모면 안 돼.”

    산박의 회사에 부산의 입김을 집어넣으려는 수작질이었다. 그러나 그걸 막을 명분이 없었다. 약혼했다는 건 곧 빠른 시일 내에 결혼한다는 의미였다. 그러려면 산박의 덩치가 커야 한다.

    옥시모론 기업은 너무 작았다.

    “본사는 부산으로 옮겨야 하지 않겠는가? 부산에도 던전이 있고, 많지.”

    “예, 그래야지요.”

    산박은 그것 또한 받아들였다. 토착 귀족이나 다름없는 게 동래 가문이었다. 그들은 자신의 땅에서 사는 걸 굉장히 중요시하고, 유학을 떠나지도 않는다. 부산의 국립대의 수준이 좋은 이유도 이 때문이다.

    반면 송공명은 속으로 놀랐다.

    ‘고집이 대단할 것 같았는데…….’

    그가 걸어온 길은 평범하지 않았다. 뚝심 또한 대단했다. 연기 가문과의 관계에서 똑 부러지게 행동한 것만으로도 고집이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는데…….

    ‘이렇게 쉽게 받아들이다니. 혹시 겁을 먹은 건가?’

    표정은 겁먹은 것처럼은 보이지 않았다. 또 가주인 자신에게 맞추려는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되려 당당했다.

    그 정도는 받아들인다는 겸허한 태도였다.

    “대학도 안 다녔더군.”

    “고등학교도 안 나왔습니다.”

    “…검정고시를 치도록 하게. 내가 이런 말을 해서 기분이 나쁜가?”

    “아닙니다. 집으로 으름장 놓는 사람 있고, 자기부모가 해준 것으로도 으스대는 사람들이 있는데, 학연은 양반이지 않습니까.”

    그 말에 송공명이 크게 웃었다.

    “크하하하! 그렇지! 결국 사회에 살아갈 거면, 학연으로 이러쿵저러쿵하는 건 너무 치졸한 짓이지.”

    경쟁에서 패배한 벌레들이 아우성거리는 것으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그들이 아무리 목소리를 내어도 학연은 포기할 수 없었다. 힘들게 들어온 만큼 이를 써먹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대학 나오고, 대학원도 빨리 나와야겠지. 사람 붙여줄 터니, 걱정 말아라. 학사는 조기졸업도 잘할 수 있어.”

    그만큼 희생되는 훌륭한 학생이 있겠지만, 이 자리에서 목소리를 낼 수는 없었다. 그저 개인에 불과했고, 이 자리에 있지도 않았다.

    “예.”

    산박이 수긍했다. 그러더니 송공명이 서아에게로 눈을 돌렸다. 그녀가 배시시 웃었다.

    “서아, 너도 일하면서 대학원 간다더니, 왜 소식이 없느냐.”

    “저, 저요? 그게…….”

    그녀가 우물쭈물 거렸다. 이에 가주는 온화한 표정을 지었다.

    “일 많이 하는 거 알지. 커리어 쌓기 바쁘지?”

    “네… 헤헤…….”

    시키지도 않았는데, 일만 하는 놈들과 싸워야 했다. 그 싸움은 굉장히 힘든 일이다. 그 가려운 부분을 슥슥 긁어주니 서아가 웃었다.

    “네 예비 사위 학사 따면 너도 같이 다녀서 박사까지 가져가라.”

    자동차 하나 사도 부심 부리고 벌떡 서는 놈들이 득실거리는 세상에서 학위는 매우 중요했다.

    “자연인 될 거면 상관없고.”

    “해야죠…….”

    “그리고 연기 가문과도 연 끊어야지. 이제는 부산 사람 아니더냐.”

    “그건 좀 어려울 것 같습니다.”

    “뭐라?”

    서아가 옆구리를 쳤다. 하지만 산박은 꼿꼿했다. 그가 말을 이어나갔다.

    “관우에게 청룡언월도를 빼앗으면 그게 관우겠습니까?”

    송공명은 산박의 말꼬투리를 잡았다.

    “관우? 출신 성분이 불명확한데다가 전쟁에서 종종 패하기도 했으며, 적에게 항복도 한데다가 협작꾼이라고 부르기도 아까운 사기를 치기도 한 놈을 지금 자네와 비교하는 것인가?”

    “그러나 신념 하나만큼은 크지 않겠습니까.”

    실패해도 굴복하지 않고, 끝까지 의리를 지켰다. 그렇기에 영원불멸의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

    장비가 그저 장군에 불과한 그릇이라면, 관우는 모든 곳에 쓸 수 있는 자였다. 심지어 군주로서의 면모도 있었다. 그만큼 능력 있는 자가 활동하기 위해서는 그에 마땅한 자리가 필요했다.

    산박에게 있어서 연기 장가(家)는 그런 자리를 제공하는 곳이기도 했으며, 동시에 무기이기도 했다.

    ‘팔 하나 없는 무장(武將)을 쓸 거냐?’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흠…….”

    의외로 동래 가문의 가주는 고민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그는 쉽게 이를 받아들일 거라 여겨서였다. 되려, 부산으로 모든 것을 옮기는 것을 산박이 거부할 것으로 생각했다.

    홈그라운드를 벗어나는 건 내키지 않았다. 그런데 정반대였다.

    “그쪽 어르신이 처신을 아주 잘합니다.”

    산박이 덧붙였다. 그 말에도 가주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은 나중에 하지.”

    술자리는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서아는 한 잔을 여러 번 나눠서 마셨다.

    “저, 가주님. 시간입니다.”

    “벌써 그렇게 되었나? 미안하군. 내가 워낙 바빠야지.”

    그가 일어나자 두 사람도 서둘러 일어났다.

    “즐기다 가게. 본가에는 볼 것도 많으니까.”

    “감사합니다.”

    “조심히 들어가세요.”

    “나중에 보자꾸나, 서아야.”

    그가 떠나자 서아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 모습에 산박이 그녀의 등을 손으로 쓸어주었다.

    “괜찮아요?”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요? 어쩜 그렇게 대범하게…….”

    “그런 거 좋아하실 거로 생각합니다. 산책이라도 할까요?”

    “그래요. 여긴 알아서 고용인들이 치워줄 거예요.”

    산책길에 들어섰다. 잘 꾸며진 산책로 사이로 햇빛이 들어왔다. 산박은 이를 받아들이며 코를 깊게 들이마셨다.

    “좋네요. 산책은 자주 못하죠?”

    “보통 회사, 집만 반복했죠. 이렇게 오래 쉰 적은 처음이에요.”

    남들보다 늦게 출발했다. 병치레가 많은 어린 시절 탓에 검정고시로 고등학교를 퉁 쳤다. 산박이 조금 뜸을 들이더니 이내 코를 비비며 말했다.

    “음. 저도 이런 산책길 자주 못 다녀봤어요. 보통은 아파트에서 살잖아요.”

    “요즘 아파트도 산책로 있어요. 이용객이 많아서 이런 분위기는 못 풍기지만요.”

    “서아 씨는 저택이 좋아요? 아파트가 좋아요?”

    “깊게 생각해본 적은 없네요. 항상 본가에서 살아서… 아마 결혼해도 본가에서 살아야 할 걸요. 아!”

    그 말을 내뱉은 서아가 입으로 손을 가져갔다. 산박은 그런 반응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신혼인데도 본가에서요?”

    “기와집이 많으니까요. 신혼집이나 다름없죠. …그래도 다른 가문 사람들 하는 거 보면 보통 반년에서 일 년은 신혼여행으로 보내더라고요. 저는 미국 일주 하는 걸 가장 부러워했어요.”

    ‘신혼여행으로 미국일주…….’

    꿈만 같은 일이었다.

    “재밌겠네요.”

    “네? 네, 그렇죠? 뜻깊고, 나중에 기억도 되고요.”

    산박은 서아에게서 눈을 돌려서 산책길을 바라보았다. 구불구불 이어지는 산책길에 햇빛과 그림자가 다양하게 내려와 있었다.

    사아아아.

    나뭇잎을 부드럽게 쓸며 바람이 지나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평화롭기 그지없는 날이었다.

    물론 매일 반복된다면 지겨워 죽겠지만, 이런 날은 드물 것이다. 서아도 욕심이 있었고, 산박 또한 욕심이 있었다.

    산박은 도시의 지배자가 되어 고아가 먹고 살기 위해서 사람을 죽이는 일이 없도록 만들고 싶었다. 그 길은 멀고 험난했다.

    “여기서 사진 찍어요.”

    “여기서요?”

    “네. 가까이 다가와 봐요. 셀카로 찍어요.”

    산박의 말에 서아가 바짝 다가왔다. 산박은 스마트폰으로 두 사람의 얼굴이 나오도록 했다. 그가 일부로 얼굴을 뒤로 뺐다.

    “아! 그럼 제가 너무 크게 나오잖아요.”

    서아가 뒷걸음질 쳤다. 자연스럽게 산박이 동영상으로 전환하며 녹화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뒷걸음질 치는 그녀의 앞으로 반걸음 나서며 뒤로 스쳐 지나가는 서아의 어깨에 왼손을 올려 고정하고 키스를 했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서아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갑자기 이러기에요?”

    “왜요? 이러면 안 돼요?”

    “안 되죠! 조금 더 의미 있게…….”

    말하려던 서아가 입을 닫고, 눈이 스마트폰으로 향했다. 녹음되고 있는 것이 한눈에 보였다.

    “이러면 의미 있죠? 하하하.”

    산박이 웃으며 스마트폰을 빼앗으려는 서아를 피해서 폰을 들어 올리며 서아의 허리를 감쌌다. 서로의 몸이 밀착되자 서아가 침을 삼켰다.

    “서아 씨는 항상 좋은 향기가 나네요.”

    “산책이나 해요.”

    서아가 앞장서가자 산박이 따라오며 그 손을 잡았다. 그녀는 그 손을 놓지 않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