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69화 (269/270)
  • 269화

    * * *

    새벽 4시경을 넘어서 수술이 끝났다. 모두의 시선이 수술실을 나온 의사에게로 향했다. 그때 장 노인의 그림자가 떼어져서 천장에 들러붙어 환풍구로 사라졌지만, 그 누구도 깨닫지 못했다.

    그만큼 음흉하고, 조용했다. 환풍구 속에서 쥐 소리가 났지만, 누구도 신경을 쓰지 않았다.

    “수술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서충호가 가장 기민하게 움직였다. 송서아는 많은 업무를 담당하고 있어서 꾸벅꾸벅 졸다가 화들짝 놀라서 고개를 들고 있었다.

    “잘 마무리했습니다. 하지만 던전 공략은 아마 1년은 무리일 겁니다. ‘힘’이 난잡하게 들어가 있는 것이라 그게 진정될 때까지는 무조건 안정해야 합니다. 내상도 심해서 3개월은 집중치료실에 들어가셔야 합니다.”

    독에 당했기에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장 노인은 덧붙여서 물었다.

    “가장 주의해야 할 건 뭡니까?”

    “폐입니다. 최대한 약물과 던전 아이템을 써야 할 겁니다. 장기간 독한 가스를 들이마셔서 그런지 기능이 아주 안 좋은 상태입니다. 그다음에는 심장과 신장 그리고 간의 기능이 전체적으로…….”

    의사는 최대한 말을 풀어서 대충 설명했다.

    자세히 설명해봤자 알아듣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냥 모든 생체 기관이 부상을 입고 있었다. 살아있다는 것 자체가 기적이다.

    대장삵, 우월한 대한민국의 의료 시스템, 던전 아이템과 선지급된 돈이 비보험 상품을 닥치는 대로 사용하게 한 덕분이었다.

    집중치료실로 옮겨진 산박은 하루 뒤에 금방 깨어났다.

    그때는 장 노인 대신 장굉려와 부산 은행의 인물들로 개인실과 복도가 그득할 정도였다. 병원 쪽에서도 돈을 받아먹었는지 아니면 사업이나 다양한 이득을 봤는지 상관하지 않았다.

    민원이 들어왔지만 묵살되었다.

    커뮤니티에 짤이 돌아다니기도 했지만 금방 삭제되었다. 민사소송이 걸렸다는 종이쪼가리 하나 자기 집에 들어가면 꼬리를 내빼는 하층민들은 자유로운 인터넷 세계에서 가장 속박된 존재에 불과했다.

    눈을 뜬 태산박은 인상을 찌푸렸다. 자신의 가슴 위에 턱 올라가서 세상모르게 잠자고 있는 대장삵을 봤기 때문이다.

    쉬익. 쉬이이익…….

    산소통에서 산소가 코로 들어왔다. 이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면서 산박은 창문을 열고 커튼을 치고 있는 송서아의 모습이 들어왔다. 병원으로부터 5분 거리에 있는 곳에 방을 얻어서 지내고 있는 그녀는 생각보다 상태가 좋았다.

    남들보다 3배가 넘는 워커홀릭을 걷던 여성이 갑자기 병간호를 하게 되었으니 다크서클도 사라졌다. 따로 간호인을 쓰고 있어서 그녀가 할 건 그냥 산박의 곁을 지키는 것뿐이었다.

    그래도 대단한 일이었다.

    동래 송가(家) 내부에서는 남자 하나에게 제대로 묶여버렸다는 소문이 무성했다. 그것도 근본 없는 고아 새끼의 사타구니에 중독되어서 정신 못 차린다는 소문이 많았다.

    끝도 없이 치솟았던 서아의 좋은 평판을 어떻게든 이번 기회에 깎아내리려고 노력하고 있었지만, 단순히 평판뿐만 아니라 가문을 빛내고 대외활동도 멋지게 해낸 송서아를 웃어른들은 싫어할 수가 없었다.

    다만 그들 혈족들을 생각해서 입을 꾹 다물고 가만히 지켜보기만 했다.

    어디까지 지랄을 해대는지 알기 위해서였다. 그 덕에 가문 내부의 상황은 개판이 나 있는 상태였다. 오랜만에 떠들 껀덕지가 나왔는데,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엄마 친구 아들이 몰락한 순간인데, 그걸 떠들지 않고서는 못 배긴다.

    알고도 못 막는 셈이다.

    그만큼 안팎으로 자신을 드높였던 송서아였다. 동래 가문의 로열로더나 다름없었다.

    “서아 씨.”

    산박의 목소리는 쩍쩍 갈라져 있었고, 대단히 낮았다. 오랜만에 목소리를 내는 것이라 말하기 전에 침을 몇 번이나 삼켜야 했다. 혀를 굴려서 입천장을 만지다 보면 침이 왈칵 나온다.

    “흐으… 읏…….”

    서아가 말을 하려다가 울먹거렸다.

    인생 살면서 크게 울어본 적이 처음이라서 한 번 이후로는 계속 흘러내렸다. 단단히 막혀 있던 그녀의 여성성이 산박의 큰 부상으로 터져 나왔다.

    사회에서, 가문에서 우뚝 선다는 건 그만큼 고된 일이었다. 재밌지만 힘든 정글을 헤쳐 나가며 경쟁자를 밟고 올라서야 하기 때문에 더더욱 그러했다. 또 적을 처치한다고 해도 죽이는 게 아니었다.

    현대의 삶은 그러기에 어려웠다.

    “이리 와 봐요. 한번 안아보게.”

    서아가 대장삵을 들어 올렸다. 대장삵의 혀가 삐쭉 튀어나왔다. 마취된 고양이처럼 잠에 빠져있었다.

    바닥에 내려놓자 그제야 눈이 떠진 대장삵이 하품을 쩍 했다. 그러든 말든 서아는 산박의 품에 안겼다.

    “아으흐…….”

    산박이 고통에 인상을 찌푸렸다. 척추에 고통이 있었다. 낮은 저음의 신음소리가 서아도 움찔했다.

    “괜찮아요?”

    “괜찮아요.”

    산박이 그녀를 당겨서 그대로 누웠다. 달콤한 향기가 나왔고, 아침 봄바람이 창문을 지나서 산박의 머리를 지나갔다.

    ‘봄이다.’

    그가 더욱 서아를 강하게 껴안았다. 거친 남성의 팔뚝을 만진 서아가 침을 꿀꺽 삼켰다. 사진과는 다르게 진짜 근육을 만지면 괜히 웃음이 터져 나온다던데 진짜였다.

    아름다움과는 별개로 근육은 항상 옳았다. 유전자 자체가 남성성의 시각화라고 해도 부족하지 않은 근육을 원하고 있었다.

    “이대로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어요.”

    “흐흐흐.”

    산박이 웃으며 말했다.

    “그렇게 되면 전 영영 아픈 상태인데요?”

    “그래도 이런 기분은 처음이거든요.”

    “저도요.”

    그 모습을 의자 위에 올라온 대장삵이 무심하게 쳐다봤다.

    “지랄병났네.”

    “꼭 그런 말을 해야겠어?”

    “보니까 대장삵은 멋진데, 입이 좀 험한 것 같아요.”

    “중고 태블릿을 줬거든. 거기서 이상한 것만 보니까…….”

    “교육에 안 좋아요. 요즘 커뮤니티 질 나쁜 곳이 얼마나 많은데요? 말은 사람의 얼굴이에요.”

    “난 사람이 아닌데…….”

    진지한 서아의 태도에 대장삵이 변명했다. 하지만 자유인이 될 게 아니라면 사회에 걸맞은 가면 하나는 맞춰놓고 사는 게 편하다.

    두 사람이 떨어졌다. 산박은 대장삵을 들어 올렸다. 털이 나부꼈다. 삵이라서 그런지 보통 고양이보다 3배는 털이 많은 듯했다.

    “서충호는?”

    “한쪽 팔을 잃었었잖아. 그것 때문에 사이토카인 폭풍 (cytokine storm)으로 입원한 상태야.”

    “그건 독감에 걸렸을 때 종종 나오는 거 아닌가?”

    “온종일 우두커니 서서 널 지키는데 감기 안 걸리는데 신기하지.”

    산박이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우직하게 해달라고 했더니 진짜 우직하게 하다가 골로 간 듯했다.

    “중환자실에 있어. 빠르게 진정된 것으로 보니까, 피로가 쌓여서 그렇게 된 것 같던데.”

    “넌 어때?”

    “키메라 독을 빼내기 전까지는 나도 힘들었지만, 이제는 아냐. 잠도 잘 잤고. 물론 나한테 앞으로 더 잘 해야 할 거다.”

    “알고 있다. 물의 마법사의 힘을 톡톡히 봤으니까.”

    산박의 얼굴이 자리에 다소곳하게 앉은 서아에게로 갔다. 그녀는 책을 꺼냈다.

    “앞으로 오랫동안 병원신세를 져야 할 텐데, 책이라도 같이 읽어요. 똑같은 걸 사 왔거든요. 요즘 SNS에 연인이랑 독서 토론하는 게 큰 인기거든요.”

    “좋아요.”

    산박이 책을 받아들였다. [대한민국의 전기공의 삶]. 책 뒷면을 산박이 소리 내 읽었다.

    “정전 없는 대한민국 전기공의 죽음에 대한 책임은 전기를 사용하는 우리 모두가 짊어져야한다...당신이 저지른 죄를 깨닫고 더 나은 삶을 함께...”

    “너무 진지한 건가요?”

    “갑작스럽기는 하네요. 아, 혹시 부산 전기 사업도 그 때문에 하는 건가요?”

    “설마요. 물론 관심은 있어요. 민원 무서워서 절전도 안 하고 작업하는 사람들을 생각하면 기분이 이상하거든요.”

    서아가 새하얀 손으로 책을 만지작거렸다. 그 손을 산박은 자신도 모르게 잡았다.

    “아!”

    서아가 놀랐고, 산박이 주춤했다. 그다음에 서로 눈이 맞았고, 이내 정신없이 웃었다. 알 수 없는 만족감이 두 사람 사이에 가득 꽃이 피듯이 번져나갔다.

    ‘지랄났네.’

    대장삵은 그걸 보면서 뒹굴었다. 병원에서 애완동물은 와서는 안 되지만, 물의 마법사인만큼 같이 있어야 한다는 걸 어필했다. 그 덕에 하루 세 번 방역을 진행하고 있었다.

    그 정도 수고는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 산박은 귀한 손님이기 때문이다.

    대학병원의 법은 결코 돈과 권력 있는 사람에게 악독한 짓을 하지 않는다. 그들의 법을 뛰어넘을 수 있어서였다. 정치를 잘 해야 위에 올라설 수 있는 것과 같은 이치였다.

    권력을 탐하고, 위로 향하는 계단을 올라가기 위해서는 그곳에 있는 이들과 깊은 관계를 맺어야 한다. 적어도 자신의 편을 만들고, 무리에 속해야 했다.

    “…….”

    조용히 책을 읽다가 산박이 고개를 돌렸다. 따사로운 오전이었다. 얼마 만에 맛보는 조용한 시간인지…….

    감상에 빠져있는 그의 옆모습을 보며 서아가 입을 열었다.

    “봄에, 바다라도 갈래요?”

    “좋아요. 어디든지 좋을 것 같아요.”

    “…그전에 저희 가주님을 만나야 할 것 같아요. 괜찮아요?”

    서아의 표정이 조금 안 좋아졌다. 시간을 둬야 했는데 그럴 수 없어서였다.

    “네, 괜찮아요. 제 실수로 벌어진 일인데, 누구를 탓하겠어요.”

    산박은 확답을 줬다. 서아는 급했는지, 밖으로 나가서 곧장 전화를 걸었다. 그 뒷모습을 보며 산박이 웃었다. 그녀 다름대로 자신을 배려해준 것임을 알았다.

    병원 생활은 조용하게 흘러갔다.

    태산박은 전리품으로 부산의 것이 되었지만, 서아와의 관계 때문인지 연기 장가(家)와의 만남을 막지는 않았다. 그건 산박에게 큰 위안이 되었다.

    이를 잘 알고 있었기에 장 노인과 장굉려가 틈틈이 방문했다.

    그들 또한 어떻게든 부산에게 자신과 산박의 끈끈한 관계를 과시하려고 애를 써야만 했다. 행동으로, 시간을 투자해서 보여줘야 했다. 종종 사업을 대신 처리하기도 하며, 세무처리 또한 대리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그 일련의 과정은 반드시 필요했다.

    언제든지 끊어질 수 있어서였다.

    “흘흘, 생각보다 자네에게 들어간 돈이 많아.”

    “얼마 정도입니까?”

    “이시은의 몸값을 포스코타워는 200억을 요구했고, 동래 송 가문이 이를 받아들었지. 거기에 자네 치료하는 데에 비보험 상품도 많이 쓰였어. 그것도 수십억이지.”

    장 노인이 하기에는 아쉬움이 컸다. 돈을 구할 수는 있었지만, 인천의 지배 세력과 이마를 맞대기에는 몸집이 작았던 탓이다.

    일개 네크로맨서보다는 우위에 있었지만, 진짜 대등하게 붙을 수는 없었다.

    돈이 있어도 불가능했다. 돈 위에 있는 것이 권력이었다.

    “미안하네.”

    “괜찮습니다.”

    산박이 웃어 보였다.

    “어르신께서도 자기 세력이 있는데, 저 때문에 반 토막이 나면, 무슨 소용입니까?”

    “이해해줘서 고맙네. 앞으로도 잘 지내보자고.”

    “그래야지요.”

    서로가 그은 선.

    그게 기가 막히게 잘 떨어졌다. 서로 욕심을 부리지 않았다. 장 노인은 이번에 그 선을 확실하게 결정지었고, 산박 또한 그 선을 보고 타협했다. 그렇기에 분쟁 없이 장 노인과의 관계는 꾸준히 사업 파트너로 이어질 것이다.

    ‘덩치 큰 호랑이와는 못 싸우겠다, 이거지.’

    그렇다고 호랑이와 마주 보는 산박이 혼자서 볼 수는 없는 노릇이다. 왼손에 연기 가문을 움켜쥐기는 해야 했다. 산을 오르는데 지팡이는 있어야 한다.

    병원에 입원하면서 산박과 서아의 관계도 급격하게 진행되었다.

    단순히 서아가 급발진을 했기 때문이다.

    “저희 아직 만난 지 1년도 되지 않은 건 아시죠?”

    종이를 받아든 산박이 서아에게 말했다.

    “좋고 잘생긴 남자는 똑똑한 여자가 바로 채가거든요. 그래서 생각보다 빨리 잡아둬야 한다고 하더라고요. 그리고 조금만 더 있으면 1년째인데요?”

    약혼 서류였다.

    강제이행을 청구하지 못하기에 허례허식이었지만, 제법 있는 가문은 대단히 중요시한다. 돈 때문이었다. 또 정당한 이유 없이 혼인을 거절하거나 시기를 늦추는 경우에 해제를 한다면 파혼을 할 수 있다는 법적 근거가 되기에 무조건 하는 편이었다.

    산박은 거침없이 펜을 놀리고, 인감을 찍었다.

    “너무 쉽게 찍어주는 거 아니에요?”

    “그럼 조금 다툴까요? 너무 쉽게 가면 사랑이 금방 식을 수 있다고 하던데…….”

    “좋아요. 그럼 이미 찍은 산박 씨가 저한테 빨리 찍으라고 해보세요.”

    “이거 하라고 한 건 서아 씨잖아요?”

    “흐흣흐, 그러니까 재밌잖아요. 빨리요!”

    서아가 웃음을 참으면서 손으로 입을 가렸다. 그녀의 습관이었다.

    약혼까지 일단 밀어붙인 서아는 퇴원 준비를 서둘렀다.

    “다음 주에 본가로 오시면 돼요. 저희 경호원이 한 분 따라붙을 거예요.”

    “저한테요? 괜찮은데요.”

    “이제는 익숙해지셔야 해요.”

    산박이 고개를 끄덕였다.

    한번 고꾸라졌다. 그 대가는 지나칠 정도로 컸다. 결코 다시 예전으로 돌아갈 수는 없을 것이다.

    ‘최악을 생각했는데, 이 정도면 약과지.’

    오히려 동래 가문이 너무 헐렁한 건 아닌가 싶었다. 서아가 펑펑 울어서라고는 그 누구도 말해주지 않았기에 오해할 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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