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5화
“서 팀장님.”
산박이 정중히 충호를 불렀다. 충호가 이토록 자신에게 감사함을 느끼고 있을 줄은 몰랐다. 그것도 자기 팔 하나 날아가고도 산박에 대한 태도가 달라지지 않았다.
‘진짜 대나무 같은 자다.’
그가 자신에게 왔다는 것이 감사했다. 만약 눈물을 흘릴 정도로 감수성이 많았다면 운다고 말조차 못했을 터였다.
“사장님, 편하게 부르세요. 제가 부끄럽습니다.”
“알았어요, 서 팀장. 정말로 나한테 모든 걸 걸었다면, 그 믿음 정말 끝까지 가져갈 수 있겠습니까?”
“예.”
그가 즉답했다. 그 눈동자를 본 산박이 말을 시작했다. 애초에 예상했기에 기뻐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시원하게 웃어 보였다.
그 웃음에 충호 또한 미소로 답했다. 남자들끼리의 의리가 끈끈하게 전해졌다.
“던전이 무너지기 전까지 며칠 안 남았습니다. 아마 하이에나들이 너도나도 달려들 겁니다.”
산박이 서서히 이야기를 시작했다. 시간은 넘쳐났다.
“예.”
충호가 가볍게 대답하자 산박이 웃었다.
‘저런 게 전사지.’
이것저것 재지 않고, 일단 고개를 끄덕인다.
쓰기 좋았다. 그렇기에 써먹고 버려지는 이들도 많았다. 능력이 아무리 뛰어나도 쥐뿔도 없으면 잘 해봤자 장군에 오르는 게 전부다. 그렇기에 그 꿈을 이루지 못하고 죽는 게 대다수였다.
그게 없는 것들의 날갯짓이다.
산박 또한 다를 바 없었다. 대신 그는 한 도시의 지배자가 되고 싶어 했다. 이제 그 대가를 치러야 할 시간이었다.
“절 지키려면 저한테 올 세력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한 곳은 연기 장가(家)라고, 3급 이하의 공무원 혈족입니다. 전국 곳곳에 있어서 약자들 때려잡는 데는 그만한 가문도 없고, 나라를 등에 업었기에 못하는 게 없습니다. 실제로 청렴한 혈족도 많습니다.”
그렇기에 유사시에 그런 이들을 ‘가족의 정’을 통해서 움직일 수 있었다.
할 것 없이 웅크리고 시간을 보내고 있었기에 산박은 그 모든 걸 충호에게 이야기할 수 있었다.
“그들만 조심하면 됩니까? 결국 그래도 공무원 아닙니까?”
“부산 은행과 금융 쪽에서도 제 신병을 확보하려고 할 겁니다. 왕을 지키는 퀸도, 비숍도 아무것도 없는 상황에 왕을 잡지 않는 체스판이 있습니까?”
“그건 아니죠. 근데 부산 은행이라니…….”
거물 중의 거물이다.
오죽하면 던전 기업에 손을 안 댈 정도였다. 그런 곳이 던전 기업을 운영하는 산박과 교류하고 있었다.
‘대체 이 사람은…….’
대단해도 너무 대단해서 질투조차도 나지 않았다. 오히려 이런 자와 함께한다는 것에 자부심이 무럭무럭 샘솟았다.
“그게 끝입니까?”
“왜 끝이겠습니까? 인천 네크로맨서들도 있죠. 그놈들은 더 적극적으로 나설 겁니다. 실력행사를 할지도 모릅니다.”
“우리나라에서요?”
“그럴 놈들입니다. 특히 제 신변을 가져가려고 할 겁니다.”
“그런데 그놈들이 왜 사장님 신변을 가져가려고 합니까?”
“드루이드를 고위 언데드로 만들면 얼마나 큰 이득을 취하겠습니까. 그것도 난 놈이라 소문이 난 놈을요.”
“빌어먹을 새끼들… 이시은이 아무리 개 같은 배신자라고 해도 손익밖에 모르다니…….”
“그게 자본주의 사회 아닙니까. 돈 때문에 부모 유해도 포기하는 이들이 수두룩한데요.”
“예? 아니, 아무리 그래도 우리는 선진국 아닙니까?”
“화장터 가보세요. 그런 곳이 마련되어있으니까.”
진짜 사회의 밑바닥은 상상 이상으로 야만적이고, 가난했다. 충호는 이를 잘 몰랐다. 인간이란 원래 비슷한 계급끼리 만나기 때문이다. 애초에 젊을 때는 화장터에 갈 일도 잘 없었고, 간다고 해도 주의 깊게 화장터에 대해서 알려고 하지 않는다.
스마트폰 켜서 딴짓하기 바쁘고, 친구들과 ‘멋’에 대해서 논하는 게 인생에서 가장 중요했다.
“어쨌든 놈들이 가장 적극적일 겁니다. 손해를 봤으니까요. 이시은은 거기서도 연구자로서 상당한 가치를 내보였다고 하더군요. 원한을 빌미로 개입하기 좋습니다.”
명분까지 확실했다. 어찌 되었든 이시은은 앞뒤 사정 다 자르고 옥시모론 기업의 던전 공략 도중 죽었으니까.
책임을 지라고 할 것이다.
“그래도 죽이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최악의 경우를 얘기한 겁니다. 설마 죽이겠습니까? 다만, 시체를 다루는 놈들이라, 얼마나 막 나갈지 저와 서 팀장은 모르니 조심하자는 겁니다.”
“아, 젠장.”
충호가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산박을 욕한 건 아니다. 그저 세상이 정말 개 같았다. 말도 안 되는 소리였지만 충분히 현실에서 일어날 수 있었다.
펫샵에 데려온 고양이도 한순간에 유기묘로 탈바꿈해서 돈장사 하는 것이 현실이다.
조회 수를 위해서라면 참전용사도 벌레 같은 인간으로 묘사할 수 있는 것이 현실이었다.
그런 걸 생각한다면 도리어 인천 네크로맨서가 득달같이 안 달려드는 게 이상할 지경이었다.
“욕하는 건 뒤로 미루세요. 냉정해야 합니다.”
“예, 사장님. 하면 그놈들이 끝입니까?”
“아니요. 그 외에도 곳곳에서 덤벼올 겁니다. 제가 대출을 좀 했거든요. 돈 생각만 하는 놈들, 이 기회를 놓칠 리가 없습니다.”
아마 제대로 활개를 칠 것이다.
“돈 좀 빌려줬다고 무슨 그렇게까지 합니까?”
개입할 이유는 충분했다. 현재 산박의 상태만 보면 던전 공략을 다시 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들기에 목소리를 낼 명분이 될 수 있었다.
“그 채권을 다른 놈들에게 거래하고 그놈들이 저한테 올 겁니다. 처음 보는 회사도 있을 것이고, 자주 들어본 기업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 정도까지 하겠습니까?”
“서 팀장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제가 가치가 있어요. 황금알을 낳는 거위거든요.”
“…알겠습니다.”
조금 생각이 많아졌지만 충호는 그냥 걷어차 버렸다. 답답해서 깊게 고민하지 않고, 산박에게 받은 걸 되돌려주는데 남자답게 단단히 나아갈 생각을 했다.
“좋습니다. 잘 지켜줄 거라 믿습니다.”
탈력감에 옴짝달싹도 하지 못하는 산박이 그렇게 대답했다.
“그래서 제가 어떻게 하면 됩니까?”
“먼저 포스코 타워와는 끝까지 부딪쳐야 합니다. 한 번 눌리면 안 됩니다. 강하게 나오시고, 항상 이시은의 배신을 언급하고 부산이나 다른 곳을 이야기하며 제가 뒷배가 든든하다는 걸 말하십시오.”
“물론 부산 은행이나 연기 가문이랑 이야기할 때는 그들이 저의 뒷배라서 어쩌라는 식으로 답변하며 우직하게 구십시오. 제 오른팔이라는 걸 언급하며 저에게서 떨어지지 않으면…….”
산박은 몇 가지 대처를 알려줬다. 한정적인 상황에서의 처세술이었다. 그 뒤로 산박은 자신을 돌보는데 많은 시간을 보냈다.
‘어떻게든 요양하면 된다.’
모두 대장삵 덕분이다. 그리고 산박은 이시은의 대거가 무엇인지 기억났다.
‘5억짜리.’
사람 하나 죽이는 데 쓰는 물건은 아니었다. 그런 걸 자신에게 소모품처럼 사용했다.
‘세상은 정말이지 끔찍하다.’
다시 재기하는데 걸리는 시간은 굉장히 오래 걸릴 터였다.
“근데 사장님. 송서아 지점장이랑 그렇게 연인 사이면 부산 은행에 그냥 의탁하면 안 됩니까?”
“그럼 속박되겠죠.”
“찬물 더운물 가릴 데가 아닌 것 같은데...뭐, 사장님 생각이니까…….”
“이해해줘서 고맙습니다.”
송서아와는 진지하게 잘 해보고 싶었다. 부산 은행의 재력도 탐났고 그녀도 흠 하나 없는 여자였다. 그래서 산박은 욕심을 부렸다.
‘그녀는 공과 사를 구분할 줄 알아.’
던전 훈련소를 자신에게 빌려주고 명의는 주지 않은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알게 모르게 손익에 대해서는 냉정한 여자였다. 그래서 믿을 수 있었다. 감정에 휘둘려 예상치 못한 짓은 안 할 것이다.
‘그러니까 부산 은행에 의탁하면 안 된다.’
데릴사위는커녕, 잡아먹힐 것이다. 송서아의 밑이 아니라 부산의 개가 되어서 살아가는 일개 던전 사용자로 추락할 터였다. 거기서 빠져나오려면 못해도 5년에서 10년이 걸릴 터였고, 그건 산박이 원하는 것이 아니다.
35살에 1억 모은 사람과 27살에 이미 1억이 있는 사람과는 현격한 인생의 차이가 존재한다. 그 외의 모든 것이 같아도 모든 과정이 같아도 결과는 다르다.
젊고, 실패 없는 자는 끝없이 기대받고, 대우받고.
늙고, 실패를 자주 하는 자는, 실패를 할 수밖에 없는 자는, 끝없이 지탄받고, 짓밟힌다.
능력 위주의 사회가 원하는 것은 무결점의 엘리트고.
능력 위주의 사회가 원하는 것은 결점투성이의 밑바닥 노예다.
그 두 개가 모두 있어야 피라미드가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그중에 하나라도 없으면, 모든 것이 붕괴한다. 대학 졸업장도 희소성이 있어야 대우받고. 의사도 숫자가 적어야 대우를 받는다.
인간 사회는 지독할 정도로 수요와 공급의 법칙을 따라간다.
이를 잘 알아야지만, 미래에 대처할 수 있었다.
노예가 되는가. 노예가 되지 않는가. 능력으로 우대를 받는가. 그렇지 않은가. 사회가 정한 틀에서 벗어나는가. 그렇지 않은가.
선택은 수많이 존재했고, 그것은 감히 범인이 건드리기에는 너무 골치 아픈 것이었다. 그렇기에 그들은 엘리트에게 기대고, 표를 움켜쥐고 그들에게 투자한다. 자신들의 골치 아픈 문제를 대신 해결해 달라고.
그걸 부탁하는 순간 계급이 얼굴을 불쑥 내민다. 거칠게 뱃가죽을 가르고 그 안의 내장을 핥아먹을 것이다.
산박은 그걸 잘 알았다. 그는 잡아먹히는 위치에 있어 봤고, 굶어 봤다. 동시에 잡아먹어 봤고, 죽여봤다. 그리고 살아남았다.
‘강자에게 의탁하면 강자에게 자신의 목숨줄을 주는 것이나 다름없다.’
하나를 건네주면 둘을 줘야 하고, 셋을 내야한다. 끝없는 굴레 속에서 서서히 모든 것을 내어주게 될 것이며 그 속에는 ‘실망’ 또한 들어가게 된다.
이건 산박이 원하는 바가 아니다.
‘이런 기회에서 날 드높이려면, 충호가 필요하다.’
그가 자신을 대신해서 자신의 가치를 드높일 것이다.
“꼭 보답하겠습니다. 서 팀장.”
“이미 많이 받았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같이 하셔야죠.”
“예.”
산박이 빙그레 웃었다. 그들은 남은 시간을 버텨냈고, 던전이 붕괴하며 새하얀 공간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던전을 클리어 했습니다.]
보스 몬스터 하나 잡지 못했음에도 클리어가 떴다. 실패해도 보상을 주는 것이 던전이었다. 얄궂은 놈들이었다. 그래서 던전 사용자들이 자신이 죽을 때까지 던전에 들어가는 것인지도 몰랐다.
‘실패를 용서해준다. 사회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지.’
폐급으로 낙인찍히면, 그걸로 끝이다. 평생 그 굴레를 벗어나지 못한다. 그 작은 사회로부터 도망쳐서 다른 회사에 가야 다시 시작할 수 있었다. 그런 면에서 실패하든 살아남기만 하면 카르마는 안 줘도 보상은 주는 던전은 대단한 곳이었다.
던전의 하얀 공간에서는 고통도 그 무엇도 느껴지지 않아서 움직일 수 있었다. 신기한 곳이다.
‘저 개 같은…….’
산박의 눈에 새하얀 공간에서 꿈틀거리는 검은 그림자 덩어리가 보였다.
척 봐도 알 수 있었다.
“야만신!”
“어, 왔어? 잘하더라. 나 놀랐잖아. 너 죽는 줄 알고.”
산박은 감히 욕을 하지는 않았다.
“왜 날 도와주지 않았지?”
“무적도전을 1화부터 다시 보고 있었거든. 오랜만에 보니까 개쩔더라. 역시 옛날 예능이 최고라니까. 내가 정말 오랜만에…….”
야만신이 신나게 떠들어대었다. 산박은 눈을 질끈 감았다.
알고 싶지 않은 면모였다.
‘신이 예능에 미친놈이라니?’
동시에 지금 야만신은 대단히 여유로워 보였다. 낄낄거리는 소리가 산박의 귀로 들려왔다. 섬뜩한 웃음소리였다. 이내 그것이 기만질이라는 걸 깨달았다. 하지만 그 경박함이 실로 능숙해서 진짜로 예능을 좋아하는 신인 줄 알았다.
“날 기만하려는 건 그만해라.”
“좋아, 본론으로 들어갈까? 이제 나가면 죽거나 죽는 것보다 못한 삶을 살게 될 텐데. 이제 그만 챔피언이 되는 게 어때?”
“뭐라고?”
“한 방에 레빌10까지 도달하자고. 대신 너도 그만큼 나에게 줘야겠지.”
“거절한다.”
산박이 즉답했다. 늑대 무서워서 호랑이 굴을 들어가는 꼴이었다.
“그럴 줄 알았다. 그럼 잘 헤쳐나가길 빈다. …근데 정말로?”
“…….”
그가 말을 하지 않자 야만신이 사라졌다.
산박은 기술을 획득하고 그대로 현실세계로 돌아왔다. 충호는 자신보다 먼저 나와 있었는데, 급히 그를 지하철 위로 옮겼다. 그리고 회복물약을 잔뜩 사서 자신이 마셨다. 팔은 낫지 않았지만 놀라운 균형감각으로 걸을 수 있었다.
급한 대로 단검을 하나 구매한 충호는 산박의 곁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애용! 애용!
구급차가 들어왔다.
곧바로 응급실로 향했다. 회복 물약이나 해독제는 더는 사용할 수 없었다. 너무 남용해서 더 쓸 수가 없었다. 몸 내부에 온갖 성분과 힘들이 뱀굴에 있는 뱀처럼 득실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