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62화 (262/270)
  • 262화

    ‘모든 걸 걸고, 죽인다.’

    못 죽여도 상관없었다. 팀은 와해되었고, 붕괴했다. 서충호는 살아남을지 몰랐다. 그래도 던전을 클리어하지는 못할 것이다. 밖으로 나가면 하이에나들에게 씹어 삼켜질 것이었다.

    기반이 없는 자가 한번 휘청거리면 어떤 꼴을 마주하는지 이시은은 잘 알고 있었다. 이미 그녀가 배신한 것만으로도 태산박의 모든 기반은 무너질 위기에 처했으며 공격당해서 물어뜯길 처지에 놓였다.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한다면 큰 오산이었다. 사회는 정글이고, 언제나 어디에서나 뒤통수를 당할 수 있었다. 1억짜리 사업으로도 사람 여럿 피 보고 인생 망가지기 쉽다.

    하물며 태산박과 얽혀있는 것들은 하나같이 무시무시한 권세를 지닌 세력들이었다. 한번 넘어진 산박의 머리채를 잡고 노예로 삼으려고 할 것이었다. 그게 안 된다면 평생 재기할 수 없는 상황을 몇 년이고, 몇 년이고 유지하며 그가 굴복하기를 기다릴 터였다. 그 속에서 태산박은 타협하는 수밖에 없었다.

    “하하하하하!”

    이렇게 해도 파멸, 저렇게 해도 파멸이었다. 그녀의 계획은 완벽했다.

    이시은은 손에 물병 하나를 들고 내용물을 들이켜며 이글거리는 화염과 얼음이 부딪치며 상쇄되어 가는 대지를 달려 나갔다. 60 스캠퍼(Scamper)라 불리는 물약이었다. 가격은 199만 원. 지나칠 정도로 비싼 소비 아이템이었다. 하지만 그 효과는 막강했다. 전투가 주류를 이루는 던전에서 가장 강력한 효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던전 사용자들에게 60 스캠퍼는 데드 스캠퍼로 불렸다. 먹으면 부작용으로 죽을 확률이 높아서였다. 물론 죽을 위기 속에서는 그런 확률 싸움에 뛰어들어야 하지만 어찌 되었건 부작용이 큰 것은 사실이었다.

    부작용은 심각한 근육 경련이다. 잘못하면 심장이 멈출 수도 있었고, 목에 핏대가 서고 피멍이 들 정도로 근육이 조여 와서 질식할 수도 있었다.

    효력은 단 5분. 그 전에 모든 걸 끝내야 했다. 이시은은 실로 그렇게 할 생각이었다. 단숨에 60 스캠퍼를 들이켰다. 그녀가 지닌 스펙이 단번에 향상되었다. 정신마저도 또렷해지고, 상쾌해졌다.

    중거리 전투는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여기서 이시은은 최소한의 피해로 산박에게 도달해야 했다. 네크로맨서는 주문 사용자라고 하기에는 조금 미흡한 점이 많았다.

    ‘마녀 또한 마법 전투와는 잘 안 어울리지.’

    마녀는 보조 주문 사용자에 가깝다. 반면 드루이드는 가히 만능에 가까웠다. 변신을 통해서 전방에 확실하게 인력을 보강해줄 수 있고, 다양한 소환 마법이 존재했다. 이건 다른 드루이드들에게는 없는 태산박만의 고유한 능력이기도 했다.

    ‘보통은 소환수를 다루지 못해.’

    카리스마가 없으면 말을 듣지 않는다. 소환수는 지성과 본성을 가지고 있기에 조련이든 언변이든 모든 걸 동원해서 잘 꼬드겨 전투에 써야 했다. 그런데 산박은 그런 과정을 건너뛰고 단번에 소환수들을 휘어잡았다.

    그에게는 쉬운 일이지만 산박을 ‘죽일 생각’을 오랫동안 가지고 계속 상상하며 수천 번이나 산박과의 전투를 상정해온 이시은은 그게 어려운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

    당장 맹목적인 충성을 보이는 언데드 덕분에 ‘인천 네크로맨서’라는 집단이 만들어진 것만 봐도 그렇다. 그만큼 본능이 있는 놈, 지성이 있는 놈은 제어하기 힘들다.

    죽음에서 건져져 올라와 은혜를 가지고 맹목적인 충성심을 보이도록 만들어진 언데드가 지닌 강점. 그걸 산박은 드루이드인데도 가지고 있다고 해도 무방했다.

    ‘서충호를 미끼로 소환수가 죄다 빠졌다. 지금, 모든 걸 끝내야 해!’

    산박은 연달아서 주문을 사용했다. 이시은과 언데드가 접근하기 전에 승부를 볼 생각이었다.

    “에스컬레이터 아이스 스피어(Escalator Ice Spear).”

    산박의 위로 열두 개의 얼음 점이 생기고 아이스 스피어가 빠르게 모습을 드러냈다. 그 모습은 열두 개의 얼음 점 각각 다르게 드러났다. 하나는 빠르게 생성되어 화살 정도의 크기에 발사되었고, 그다음은 조금 더 길게 만들어지고 뻗어 나갔다.

    아이스 스피어는 순차적으로 발사되었으며, 늦게 발사되는 아이스 스피어일수록 더 길고 굵었다. 에스컬레이터가 올라가듯이 하나씩 발사되면서 주문 사용자에게 시간을 벌어주고 마지막에 가서는 제법 강한 놈이 발사되기에 상대도 까다롭게 대처해야 했다.

    ‘주문을 피하는 건 어려운 일이니까.’

    그 자체만으로도 동선이 꼬인다. 어찌 되었건 저쪽은 두 명, 이쪽은 한 명이다. 대장삵이나 수호 정령이 올 때까지 버텨야 했다.

    ‘그렇게는 안 되겠지.’

    산박은 실로 아쉬움을 느꼈다. 불과 얼음의 만남으로 수증기가 잔뜩 피어올라 연막이 퍼진 곳으로 달려오고 있는 이시은은 아무래도 자신을 죽일 생각인 듯했다. 그리고 그녀는 엘리트다.

    ‘몇 번이고 시뮬레이션을 돌려봤을 테지.’

    확신이 있기에 덤볐다. 그렇게 볼 수 있었다. 야수와 야수가 싸우면 한쪽만 죽는 게 아니다. 다른 쪽도 큰 상처를 회복하지 못해 죽기는 마찬가지다. 그걸 알고도 이런 짓을 한다는 것은 초월자가 개입했다는 뜻과 다를 바 없었다.

    어찌 되었건 산박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해야 했다.

    ‘야만신이라는 놈은 가벼워 보이면서도 역량이 가늠이 안 되니까.’

    쏟아붓는 자원을 대충 본 것만으로도 보통 신이 아니었다. 그런 신이 자신을 도와준다는 건 썩 내키지 않았다. 실력이 있기에 그렇게 펑펑 쓸 수 있는 것임을 알고 있어서였다.

    사람들은 유비를 병신 호구 보따리장사라고 깎아내리지만 난세에서 실력도 없는 놈이 이름을 떨칠 수는 없었다. 실력이 있어야 역사에 이름 석 자를 올릴 수 있다. 혹은 그만큼 무능하거나. 적어도 유비는 평범한 사람이 낄낄거릴 정도로 하찮은 사내가 아니었다.

    야만신 또한 그와 비슷하게 접근해야 했다. 그렇게 호구였다면 벌써 전부 다 털리고 내장도 남기지 않고 사라졌을 것인데, 멀쩡히 활동하고 있었다.

    ‘내가 모르는 무언가가 있다는 뜻이지.’

    뒤숭숭한 놈과 관계를 오래 이어 나가고 싶지 않았다.

    산박은 최대한 많은 주문을 사용했다. 하지만 이시은 또한 그와 같은 3레벨이었다. 거기에 대부분 장비에 의존된 장거리 마법 전투가 이어졌다. 상쇄는 쉽게 이어졌고, 이시은의 피해는 크지 않았다. 값은 달랐지만 빅점보 프로스트 완드와 트리플 엘리멘탈 로브는 그럭저럭 맞붙을 만했다.

    “집중성탄.”

    근거리에 들어서자마자 산박은 기습적으로 관통력이 강한 것을 날렸다. 아차 하는 순간에 중위 언데드의 팔이 하나 날아갔다. 언데드치고는 경상이었지만, 달리기 속도가 눈에 띄게 떨어졌다. 팔 하나를 잃으면 보통은 걷지도 못한다. 언데드였기에 경보라도 뛰기는 뛸 수 있었다.

    이시은은 전혀 속도를 맞추지 않고 단독으로 뛰어들어 왔다. 이제는 서로 거리가 그렇게 멀지 않았다.

    주문을 읊는 산박을 향해 시은이 달려가면서 허릿심을 이용해 단번에 석궁을 정확하게 발사했다. 그 뒤에 약간 균형을 잃고 휘청거렸지만 속력을 잃지는 않았다. 쏜 석궁도 그냥 버려 버렸다.

    퍽!

    산박은 석궁을 피하지 않았다. 겹겹으로 두른 방어 장비를 믿었다. 맞은 부분을 두들기고 석궁의 볼트가 떨어져 내렸다. 빅 오버슈트 때문에 촉이 박히지 못하고 튕겨졌다. 타격은 몸에 전해졌지만 버틸 만했다.

    그 모습에 이시은의 표정이 싹 달라졌다. 보통은 박혀야 정상이다. ‘그런 석궁 볼트’니까. 하지만 박히지 못하고 튕겨져 나갔다.

    하지만 이 또한 나쁘지 않았다. 마지막에 마지막까지 모든 걸 받아줄 수 있다는 뜻이었다.

    ‘떠오르는 별(Rising star)’.

    산박의 주변 곳곳에 구체가 모여들었다. 장기간 유지 가능하며 다수를 타격함과 동시에 때에 따라서는 한 놈에게 집중할 수도 있는 3레벨 주문이었다. 이걸로 산박은 모든 마력을 다 쏟아부었다.

    ‘할 수 있는 건 두 가지.’

    언데드가 올 때까지 기다린 뒤에 육탄 돌격. 똑같은 수준의 주문을 사용하여 상쇄.

    이시은은 둘 다 사용하지 않았다. 산박의 마력 보유량은 시은과 같았지만 주문의 강도는 격이 다를 정도로 차이가 났다. 이 때문에 이시은은 이미 모든 마력을 소비해 버린 상태였다.

    산박이 그녀를 너무 과대평가한 것이 컸다. 듀얼 클래스였고, 던전 훈련소에서 제대로 측정을 하지 않았던 것도 있었다. 능력치에 대한 변수가 컸기에 그로서는 위험하게 그녀를 낮잡아볼 수 없었다.

    촤아악!

    이시은이 화염 텁 뭉게 가루를 뿌렸다. 삽시간에 화염이 번져가며 검은 연기가 피어올랐다. 상당히 넓은 범위를 덮었고, 떠오르는 별 주문이 제대로 된 효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아무렇게나 뚝 떨어지고 솟아오르거나 핑 날아가 버렸다.

    매캐한 독 연기 속으로 이시은이 그대로 들어갔다. 산박은 그사이에 해독 물약을 마시고 있었다. 그는 시은이 뿌린 가루가 어떤 것인지 잘 알고 있었다.

    오래 있을 수 없었기에 뒤로 빠지고 싶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너무 가까웠다. 서로의 발소리가 서로의 귀로 들어오고 있었다.

    대화는 없다. 오직 살의만 가득했다. 지금이라도 끊어질 것처럼 보이는 고무줄처럼 모든 신경이 바짝 당겨졌다. 산박이 먼저 비싼 스태프를 투척했다.

    탁!

    스태프는 단번에 내쳐졌다. 시은은 어둠 속에서도 용케도 그것을 쳐냈다.

    산박이 잔잔벼락의 환도를 뽑아 들었고, 벼락이 쏟아졌다.

    파자자작!

    소리가 들렸던 곳에서는 그 어떤 조짐도 없었다. 연기 옆으로 시은의 인기척이 느껴졌고, 산박은 환도를 들어 올렸다.

    캉!

    검과 검이 부딪치며 불똥이 튀었다. 산박이 준비했던 흙을 뿌렸지만 시은은 눈을 감고 한 걸음 뒤로 갔다가 다시 들이닥쳤다.

    보통 상태에서도 근력으로 밀리는 것이 산박이다. 그의 근력 수치는 6. 이시은의 근력 수치는 7이었다. 체급 차이가 있었지만 근력량은 이시은이 더 많았다. 거기에 도핑까지 한 그녀는 일순 산박을 압도했다.

    “큭!”

    산박이 이를 악물었다. 순식간에 팔뚝을 베였다.

    시은은 그를 죽이기 위해서 검술에 악착같이 매달렸다. 취미 생활이 사람 죽이는 일이다. 검술은 재미가 있었다. 반면 산박은 그러지 못했다. 그저 실력을 유지하고 감각을 세우는 것에 그쳤다. 후방 직업이 되고 동물로 변신하였기에 더더욱 그러했다.

    실력 차이는 명확했고, 산박이 뒷걸음질 쳤다. 다행스러운 일이라면 방어구의 성능이 굉장히 뛰어나다는 점이었다.

    탕!

    흉악한 소리와 함께 리볼버 윈드 롱 소드에서 힘이 소모되며 힘이 증폭되었다. 바람이 산박을 거칠게 긁고 지나갔다. 충격에 산박이 비틀거렸다. 상처는 없었지만 균형이 무너졌다.

    이시은의 검이 섬뜩하게 산박의 어깨를 찔렀다. 산박은 그대로 넘어졌고, 검이 무릎을 강하게 내려쳤다. 둔탁한 소리가 났다. 산박은 이를 드러내며 고통을 참았다. 검을 휘두르지는 않았다. 초인적인 정신력으로 참아냈다.

    그사이에 시은의 언데드가 도착했다. 산박은 환도를 올려치며 몸을 일으켰다.

    캉!

    불똥이 크게 튀었다. 매캐한 독가스가 거칠게 호흡하는 산박의 입으로 들어왔다 빠져나갔다. 혀가 헐어 버리면서 피 맛이 났다.

    화염 텁 뭉게 가루는 중형 몬스터와 다수의 몬스터에게 흩뿌리는 비싼 놈이었다. 1g당 만 원이지만 실제 값은 30만 원에서 50만 원 사이다. 그 정도는 써야 권장된 효력을 발휘하기 때문이다.

    주룩.

    해독제를 마셨다고 해도 서로가 처한 상황은 똑같았다. 산박은 코피까지 흘렸고, 이시은의 눈의 흰자위 곳곳에 붉은 점이 나타났다. 세포가 파괴되고 있었다.

    “흐.”

    고통에 이시은이 웃었다. 죽음으로 가는 붉은 카펫이 펼쳐지고 있었다. 이 과정은 그녀에게 달콤하기 짝이 없었다. 왈츠를 추며 걸어가는 것과 같았다. 행복했다. 그렇기에 그녀는 평범하지 않았다.

    산박은 팔 하나를 잃은 언데드와 이시은에게 합공을 당하며 사정없이 공격당했다. 그 속에서도 의지를 잃지 않고 머리를 최대한 보호하며 버텨 나갔다. 어깨로 공격을 막고 팔로 무기를 들어 올려 뒤로 보냈다.

    퍽!

    이시은의 발이 거침없이 산박의 정강이를 내려찍었다. 정권처럼 정직하게 타격했기에 뼈가 울릴 정도로 아팠다. 그 속에서도 산박은 눈을 시퍼렇게 뜨고 최대한 자신을 지켰다.

    시은은 리볼버 윈드 롱 소드의 탄창을 갈았다. 가져온 세 개의 탄창을 모두 써서 아홉 번 넘게 산박의 몸을 두들겼음에도 산박은 크게 피해를 입은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비싼 장비를 많이 가지고 있네. 하지만 그것도 곧 한계겠지.’

    촤악!

    시은은 따로 1g 정도 남겨뒀던 화염 텁 뭉게 가루를 산박의 몸에 뿌렸다. 독가스로부터 산박을 최대한 지켜주며 그 피해를 최소한으로 막아주던 구사일생의 복대는 그 한 방에 결국 한계에 도달했다.

    “콜록! 커억! 크윽!”

    입에서 피가 쏟아져 나왔다. 검게 죽은 피였다.

    부욱!

    빅 오버슈트가 기어코 찢어지는 소리가 산박의 귀에 들려왔다. 희망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쾅!

    한순간에 ‘블랙 좀비 가드’가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검은 연기를 뚫고 파석 전갈 골렘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시은이 몸을 돌리는 사이에 산박은 자신의 양팔을 교차시키며 몸을 보호했다. 시은에게는 측면이지만 산박에게는 정면에서 나타났기에 서로 대응이 다를 수밖에 없었다.

    부웅!

    파석 전갈 골렘의 꼬리가 거세게 한 번 주위를 훑었다. 측면에서 당했음에도 이시은은 용케도 피해냈다. 반면 두들겨 맞은 산박은 그대로 얻어터져서 날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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