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58화 (258/270)
  • 258화

    후두두둑…….

    쏴아아아!

    소리는 서서히 커졌다. 울렁거림이 사라지고 모호했던 감각이 단번에 되살아나자 산박은 그것이 빗소리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주변은 칠흑처럼 어두웠다.

    2레벨 주문 ‘껍질 수호 반딧불이(Shell guard Firefly)’!

    산박의 몸에서 반딧불이 꼬무락거리며 모습을 드러냈다. 피부 곳곳에서 만들어진 반딧불이는 새끼손톱만 한 날개를 활짝 펼치고 늠름하게 날아올랐다. 그 숫자는 천(千)에 달했고, 자연스럽게 빛이 쏟아졌다.

    “와.”

    정신을 차린 이들이 어둠 속에서 빛나는 반딧불의 모습을 보며 감탄사를 내뱉었다. 산박이 꾸준히 2레벨 던전을 돌면서 획득한 주문 중 하나였다.

    ‘특징이 발광체일 뿐, 실제로는 시전자를 방어해 주지.’

    평범한 반딧불이와 다르게 딱딱한 덕분이다. 하지만 개체로 나누어져 있었기에 관통 타입의 공격에 취약하다는 단점이 있었다. 대신 유지력이 높다.

    화르르.

    작은 빛에 의존하여 몇몇 이들이 횃불을 지피려고 했지만 비가 계속 내리고 있어서 그게 쉬울 리 없었다. 결국 산박이 나섰다. 네크로맨서도 발광체를 만들어 내기에는 직업이 좋지 않았다.

    ‘스님 중에도 없지.’

    인천 네크로맨서 세 명에 이시은과 태산박이 후방이었다. 그걸로만 다섯 명이 채워진다. 나머지 일곱 명은 전방 직업이어야만 했다. 산박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주문을 읊으려는 산박의 목에서 밝은 연두색의 나뭇잎이 삐져나왔다. 정원사 카멜이었다. 모습을 드러내지는 않고 나뭇잎을 키워서 산박의 머리 위를 우산처럼 씌워줬다.

    “고맙습니다.”

    대답은 없었다. 산박은 불꽃두더지 파수병을 소환했다. 강철 갑옷으로 단단히 무장했으며 ‘매듭의 전사’라는 이명을 지닌 두더지 인간 카누토였다. 야만신의 신도나 다름없는 놈이었고, 현실 세계에서 지내는 걸 달갑지 않아 하는 강철의 전사였다.

    “적이 없잖아?”

    코를 벌름거리며 주위를 살핀 카누토가 신경질을 부렸다.

    “불이 좀 필요해서.”

    “하악!”

    두더지의 입에서 불꽃이 쏟아졌다. 축축한 횃불에 있는 습기가 날아가고 단번에 불이 지펴졌다.

    “오.”

    스님이 그 모습에 절로 감탄했다. 상당한 화력을 지니고 있음을 체감한 것이다. 다른 이들의 횃불에도 불을 붙인 카누토가 불을 내뿜으며 말했다.

    “돌아가도 될까? 지금 한창 이기고 있었는데.”

    “대련이라도 하고 있었어?”

    “카드놀이. 이번에 토너먼트를…….”

    산박이 손사래를 쳤다.

    “던전에 왔으니까, 활동해.”

    “네가 그렇게 말한다면야.”

    카누토가 합류했다. 대장삵도 소환했다. 그 또한 신경질을 부렸다.

    “아, 뭐야? 비 내리잖아. 어제 샴푸했는데.”

    지능과 이성을 지닌 소환수는 정말 개같다. 이유는 말할 것도 없었다. 생각하고 말한다는 것 자체가 스트레스였다.

    특히 최근의 대장삵은 ‘샴푸’와 ‘린스’라는 것에 대단한 관심이 있었다. 현대의 소비는 실로 아름다운 무지개를 손으로 탁 잡는 것과도 같아서 현대에 많이 노출된 대장삵의 소비는 나날이 늘어가고 있는 형편이었다.

    “시끄럽고, 맡아지는 건 있어?”

    “비 냄새뿐이야. 이런 날에는 콕 박혀있는 게 최곤데.”

    비 내리는 상황에서 사냥하는 야생 동물은 잘 없었다. 어지간히 배고픈 게 아니라면 추적하기 좋은 날 사냥하기 마련이었다.

    날도 밤이었기에 일행은 주변에 야영지를 꾸렸다. 나뭇잎과 나뭇가지를 모아서 비를 피할 수 있도록 노력했다.

    “으, 빌어먹을!”

    곳곳에서 욕지거리가 나왔다. 비가 오는 날 삽질을 해본 사람만 알 수 있는 끔찍함이 몸 곳곳에 스며들어 왔다. 물은 낮은 온도를 지닌 물질이었고 유기체는 높은 온도를 지닌 단백질 덩어리였다. 서로 맞지 않았다. 억지로 몸을 놀렸지만 손끝과 발끝에서부터 시작되는 오한이 서서히 그들을 좀먹었다. 한 시간 노동이 세 시간 노동을 한 것과 다를 바 없었다.

    근근이 비를 피할 곳과 바람막이를 만들고 그곳으로 들어갔다. 카누토의 불꽃이 중앙에 자리 잡았다. 종종 물방울이 천장에서 떨어졌지만 참을 만했다.

    “아……. 따뜻하다.”

    “이 맛에 야영하는 거죠.”

    고생하고 쉬는 것만큼 휴식을 즐겁게 만드는 것이 없었다. 추위 끝에 몸을 녹이는 온기는 황금보다도 더 값진 안락함을 내려줬다.

    밖을 바라보는 산박의 눈에 언데드들이 들어왔다. 이들은 5~15m의 짧은 거리를 오고 가며 순찰을 돌고 있었다.

    네크로맨서 덕분에 불침번을 설 필요가 없었다. 그런데도 대장삵은 밖을 보기 좋은 곳에 머리를 내밀고 몸만 바람막이에 걸쳤다. 모든 온기를 얻을 수 없는 곳이었고 얼굴에 빗물이 가끔 튀기도 했지만 개의치 않아 했다. 완전히 몸을 숨길 수 있는 곳보다는 반엄폐를 좋아하는 게 야생 동물의 특징이었다.

    그걸 하지 못하면 불안하고 마음이 편치 못했기에 대장삵은 그렇게 한 반면 지하 종족인 카누토는 오히려 꽉 막힌 곳을 좋아했다. 그런 까닭에 그는 누구보다 안쪽 깊은 곳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젖은 장작을 바짝 태워서 모닥불로 쓰는 데 카누토가 혁혁한 공을 세웠기에 모두 그를 자연스럽게 대우해 줬다.

    “거지 같은 던전인 것 같은데요, 사장님. 그렇게 생각 안 하세요?”

    “동의합니다. 정말 거지 같은 곳에 걸렸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산박이 바닥을 손으로 가리켰다. 시은의 시선이 자연 그쪽으로 향했다. 흙이 있었고, 조금 파여 있었다. 하지만 빗물이 전혀 고이지 않았다. 기괴하기 짝이 없었다.

    “왜 물이 고이지 않는 거죠?”

    “그러니까 까다로운 곳입니다. 골렘을 상대해야 할 겁니다.”

    적으로 만날 때 무서운 것이 골렘이었다.

    “머드 골렘인가요?”

    “화강암도 뒤섞인 놈입니다. 지금은 자고 있지만 자극하면 일어날 겁니다.”

    “그럼 굳이 공격 안 해도 되는 거 아닌가요?”

    “마법적인 놈이라, 있는 걸 알았을 때 공격하는 게 낫습니다.”

    그런 던전이었다.

    “무슨 던전인데요?”

    “빗물 골렘 계곡(Rain Golem Valley) 던전 같습니다.”

    “계곡요? 여기는 산인 것 같은데…….”

    “예. 그래서 같다고요. 지형은 날이 밝으면 확인할 수 있겠죠.”

    두 사람의 대화를 들으며 일행은 눈을 감았다. 잠이 안 와도 잠을 청해야 했다. 한 시간 넘게 야영지를 만들었기에 금방 곯아떨어졌다. 비 오는 날 열심히 작업하고 오침을 하는 기분이 그들을 잠식하며 눈꺼풀을 무겁게 만들었다.

    산박 또한 입을 다물었다. 들려오는 빗소리, 숯이 태워지며 퍼져 나가는 온기. 그 속에서 쪽잠을 잤다.

    비가 서서히 그치고 안개가 자욱하게 피어올랐다. 아침 해가 떠올랐지만 햇빛이 보이지는 않았다. 산이 막고 있어서였다.

    ‘빗물 골렘 계곡이 맞다. 골치 아프게 되었군.’

    산박이 인상을 찌푸렸다. 첫 레이드 던전에 기분 나쁘기 짝이 없는 던전이 걸렸다. 많이 걸어야 하고, 많은 체력이 소비되는 던전이었다.

    ‘가랑비도 아니지.’

    폭우나 다름없었다. 밤마다 폭우가 쏟아져 내릴 것이었다.

    안개는 해가 적당히 올라가고 나서야 사라졌다.

    “하산하겠습니다. 저희는 계곡을 따라서 내려가야 합니다. 그렇게 해야 최소한의 전투를 겪습니다. 하산하기 전에 이곳에서는 대지 골렘과 자주 싸울 수 있습니다.”

    “빌어먹을.”

    스님들이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그들 모두 전방 직업이었다. 무생물체와 싸운다는 건 언제나 싫었다. 악몽으로 꿀 정도였다.

    무생물체가 지닌 무서움을 체험한 모습에 산박은 그들이 욕을 했음에도 점수를 높게 쳐줬다. 인성과 실력은 정비례하지 않는다. 그것은 선비 사상에 찌든 이들이나 생각할 법한 허황된 이상론이었다. 두려움을 알기에 실력을 키우고 실력을 키웠기에 야망이 생겨 강해졌을 것이었다. 이것이 현실이었다. 콘셉트를 호구라고 잡아도 실제로는 그러지 않은 것처럼 노련한 것처럼.

    “골렘은 ‘힘’을 통해서 붕괴를 시켜야 하는데 안심사 스님들은 방어적인 장비뿐이지요?”

    “예. 최대한 버티는 것이 전방 직업의 역할이라 생각하여서 공격력은 낮습니다……. 죄송합니다.”

    “단단히 버텨주는 것이 전방 직업 아닙니까. 당연합니다.”

    거짓말이다. 단순히 생존력을 높이기 위함이었다. 레이드 던전에서의 전방 직업의 존재 이유만 챙긴 모습이었다. 방어를 단단히 하면 일이 틀어져도 생존할 수 있고, 던전은 지정된 일수가 지나면 알아서 붕괴한다. 즉, 실패를 생각하고 생존하기 위해서 무기도 생존력을 높이기 위한 것만을 착용하고 있었다. 각자도생의 끝판왕들이었다.

    ‘어쩔 수 없지. 세속적인 불교가 되어 버렸으니까.’

    돈을 받고, 돈을 쓴다. 그 행위를 하는 순간, 결국 종교는 타락하고 변질된다. 더러운 웅덩이에서 화려한 연꽃이 피는 것처럼 드물게 반짝이는 종교인들이 모습을 드러내 세상을 정화시키지만 더러운 건 여전했다.

    억대 연봉을 받는 목사가 그 돈벌이를 버릴 수는 없었다. 돈에 종속된 순간 모든 종교는 허물어지고 계산기를 두드리는 수밖에 없었다. 세계의 공중 보건을 위해 설립된 국제기구도 예외는 없었다. 돈은 신념 위에 존재할 수 있었다. 돈은 과정이며 결과가 될 수 있었다. 수단을 위해서 돈을 갈구하고, 결과를 위해서 돈을 좇는다.

    여기에 있는 스님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가변성을 지니지 않는 진리가 바로 돈이었다. 그렇기에 산박은 굳이 문제를 일으키지 않았다. 상대는 돈에 미친 놈들이며 돈을 쓸 줄 아는 놈들이었다.

    ‘그런 놈들에게 다른 걸 기대하는 놈이 병신이지.’

    상대의 굳건한 심지를 건드리는 짓이었다. 상대는 죽어 가면서도 이를 구부릴 수 없었다. 그렇기에 말싸움을 하고 싶지 않았다.

    “저희는 가능해요. 부무장으로 얼음 철퇴(Ice Mace)를 가져왔거든요.”

    이시은까지 합쳐서 네 명의 네크로맨서가 고개를 일시에 끄덕였다. 이를 본 서충호가 감탄했다.

    “역시 돈이 최곱니다. 대기업답네요.”

    “3레벨 장비지만 그렇게 비싼 건 아니에요. 애초에 부무장이라서 대단하지도 못하고요.”

    시은의 손짓에 ‘블랙 좀비 가드’가 혁대에서 손잡이를 뽑아 들었다. 한손에 쥐기에 좋은 건 아니었다. 굵어서 부딪치면 손에서 놓칠 수 있어 보일 정도로 굵었다.

    기괴한 것은 철퇴의 손잡이 윗부분에 철퇴가 없다는 점이었다. 대신 그곳에서 검은 진액이 흘러내려 와서 언데드의 손을 휘감아 끈끈하게 만들었다.

    ‘무기를 놓치기 힘들겠군. 나쁜 선택은 아냐.’

    좋은 선택이었다. 꽉 쥘 수 있다고 해도 어차피 언데드는 결국 언데드였다. 그건 중위 언데드라도 못 벗어나는 단점이었다.

    꽈아아악!

    얼음이 꽁꽁 어는 소리가 귓가로 들려왔다. 철퇴를 구성하는 부분이 마법으로 구성된 얼음덩어리였으며 철퇴라고 부르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뾰족한 부분이 일반적인 철퇴보다도 굵었고, 5cm가 넘었다.

    정확히는 6~7cm. 중요한 길이였다. 특수 부대원이 실전 단검 대처를 훈련할 때 단검이 깊게 박히지 않도록 검신을 천으로 감싸고 남겨두는 길이가 3~5cm였다. 이보다 길게 한다는 건 확실하게 적에게 타격을 주겠다는 흉측한 의도였다. 좋은 철퇴였다.

    “이거라면 골렘에게도 타격을 줄 수 있죠.”

    “그렇겠네요.”

    돌과 흙에 둘러싸여 있는 골렘의 핵을 노리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렇기에 두들겨 패서 동력을 제거하는 게 골렘 대처법이었다. 충격을 충분히 주는 것도 나쁜 선택은 아니었다. 육체가 파손되면 그만큼 다시 쌓아 올려야 했기에 힘의 소모가 커진다. 그만큼 빨리 허물어진다.

    산박은 곧 네크로맨서들이 가져온 중위 언데드를 쳐다보았다. 하나같이 전신을 무장하고 있어서 엘리트 병사처럼 보였다.

    ‘이미 보고를 받아서 다 알고 있지만, 장비를 입고 있어서 하나같이 분위기가 살벌하군.’

    ‘블랙 좀비 가드’는 말할 것도 없이 큰 방패를 소지한 수비병이었다. 의사소통까지 되는 놈이라서 언데드 중에 가장 뛰어난 놈으로 보였다.

    ‘레드 스컬 워리어(Red Skull Warrior)’는 붉은 뼈에 흉갑을 비롯한 중갑옷을 입은 녀석이었다. 두개골의 텅 빈 눈 너머에서 보이는 블랙 바가 더욱 강화된 언데드임을 보여줬고, 무기는 다양한 걸 사용했다. 철퇴를 뽑아 든 레드 스컬 워리어는 등에 있는 원형 방패를 다른 손에 쥐었다.

    ‘드러그 빅 좀비(Drug Big Zombie)’는 쇄골이 있는 곳에 스위치 같은 것이 존재했다. 쿡 누르면 약물이 사용되는 듯했다.

    ‘스틸 언데드(Steel Undead)’는 강철로 이루어진 언데드였다. 갑옷이랄 것이 없었고, 롱 소드를 한 자루 소지하고 버클러를 혁대에 걸고 있었다. 지금은 롱 소드를 집어넣고 얼음 철퇴와 버클러를 꺼내 들고 자세를 취했다. 모두 다른 이들의 시선을 톡톡히 받고 있었다.

    ‘이게 3레벨 네크로맨서의 힘!’

    전사를 하나 더 데려온 것이나 다름없었다. 산박의 눈이 서슬 퍼렇게 빛났다.

    ‘과잉 전력이다.’

    보통은 이 정도까지 지원하지 않는다. 지원해도 중위 언데드 한둘로 충분하다. 현지에서 언데드를 일으켜 세우는 게 일반적이기 때문이다.

    ‘심상치 않아.’

    가슴 한구석이 싸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여포와 유비 중에 먼저 죽일 놈은 여포다. 조조가 그런 선택을 했다.

    그와 비슷하게 이시은과 네크로맨서들이 이곳에 들어섰다. 실력이 있기 때문이었다. 실력이 없으면 벌써 내쳐서 그런 선택의 갈림길조차도 필요 없었을 터였다. 그렇기에 ‘선택’이라는 건 골치가 아팠다. 결과는 점점 그 선택이 잘못된 것이라고 말하고 있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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