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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7화 (257/270)

257화

<배신>

배둔국. 세상에 한번 짓눌려 봤기에 현실을 잘 아는 사람이다. 그런 그에게 산박은 때가 되면 자신의 기업에 소속하여 일하게 해준다고 입을 턴 적이 있었다. 실제로 그렇게 되겠지만, 당장은 아니었다.

‘장 노인이 싫어하니까.’

단순한 이유다. 하지만 속속들이 생각하고 곱씹어 본다면 그 하나의 생각에 많은 걸 고민하게 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장 노인. 연기 가문. 산박에게 많은 자원을 쏟아붓고 있는 가문이었다. 거기에 사원을 보유하고 있어서 혈족들을 동원할 수 있었다. 돈도 많았기에 다양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데 부족함이 없었다. 산박은 그들을 생각하고 행동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에 배둔국이 옥시모론 기업에 협력사 혹은 그 안으로 들어오기란 당장은 어려웠다.

“한번 해보시는 게 어떻습니까. 레이드 보급.”

“…….”

배둔국은 그 말에 대답하지 못했다. 서류를 보기 바빴다. 정확히는 물품 명단이었다. 수량이 상당했다. 단순히 먹고 마시는 것만으로도 한 달 치는 되어 보였다.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해서였다. 그 식량 보급량만 보더라도 산박의 치밀한 준비성을 볼 수 있었다. 여기에는 이시은 탓이 컸다.

‘욕이 나오지만 참는다.’

그녀가 지닌 가치 때문이었다. 그녀가 전투력을 숨겼기에 장기전을 도모하는 것은 산박으로서는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 무슨 이유인지 묻지도 못했기에 어쩔 수 없었다. 다만, 신이 관여되어 있다고 짐작할 뿐이었다. 헛다리를 짚은 것이지만 그렇게 하지 않는 것보다는 하는 게 나았다.

“이걸 전부 다 준비하면 됩니까?”

“예산 내로요. 해보실 생각 있습니까?”

“그야 당연히 하고 싶습니다. 하지만 괜찮습니까?”

그 질문은 많은 걸 내포하고 있었다. 장 노인 눈치는 안 보냐? 내가 지금 옥시모론 기업에 소속되어도 괜찮은 거냐? 날 위해서 쇼부를 본 거냐? 물량 생각하면 큰 이권인데 내가 그걸 쥐고 멀쩡하게 살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있나?

그런 다양한 질문들에 산박은 하나하나 답해줬다. 묻지 않아도 이를 입에 담았다. 배둔국 또한 세상 풍파 좀 맞아본 사람이다. 자기 앞가림은 할 줄 알았고, 거침없이 달릴 때는 열정을 다하여 달릴 수 있었다.

‘값진 경험이지.’

사람 중에 살면서 진짜 이를 악물고 사회 속을 질주한 사람은 적다. 남들은 쉽게 쥐었던 걸 얻으려고 밤잠 줄이며 고생해본 사람은 똑같은 결과지만 다른 과정을 경험한다. 자신마저도 불태울 줄 아는 사람은 위기 속에서 더욱 빛나기 마련이었다.

한 번 해봤기에 두 번도 할 수 있다. 자주 할 수는 없지만, 그 경험은 분명 도움이 된다. 그래서 이렇게 턱 무거운 걸 짊어지게 하고 싶었다.

‘삐끗해도 발에 땀나도록 다닐 사람이니까.’

“뭐, 장 어르신께 한번 찾아가시는 걸 추천해 드립니다. 양쪽에 손을 비벼야 나름 모양새가 살지 않겠습니까? 제가 특별히 배 사장을 언급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래도 장 어르신께서 미리 저한테 말씀하신 유통업자는 없었습니다.”

“아……. 예. 그럼 한번 해보겠습니다.”

“창고 임대는 제가 해둔 곳이 있습니다. 서울 외곽이라 트럭 장사 하는 사람을 제법 쓰셔야 할 겁니다.”

“예. 일당으로 좀 까지겠지만 괜찮습니다.”

그는 연신 고개를 움직이며 산박의 말을 경청하고 반대 없이 받아들였다. 산박이 굳이 서울 외곽에 창고를 임대한 건 폐허가 되었음에도 재건이 이루어지고 있는 게 서울이었고, 아직도 서울의 땅값은 비싸기 때문이었다.

‘애초에 팔지도 않는다.’

한강은 대한민국에서 매우 중요한 땅이었다. 그곳에 숨 쉬고 있는 역사는 가볍지 않았다.

거기에 대한민국은 지하철이 있는 도시가 적다. 애초에 중앙 집권적 발전을 이룩했기 때문이다. 그 덕에 지방에 있는 던전을 도는 경우는 잘 없었다. 있어도 터줏대감처럼 오래된 기업만 있을 뿐이고 그 기업에 소속된 이들 또한 자주 바뀌어서 리스크가 큰 편이었다. 자본 또한 던전을 클리어한 것만큼 투자되지 않아서 수준이 저질이었다.

“잘해 보겠습니다.”

“한 번만 잘하면 두 번, 세 번도 맡길 수 있습니다. 안 그렇겠습니까?”

“예!”

배둔국이 냉큼 소리를 내질렀다.

드루이드 사과 과수원은 언젠가 빼앗길 사업이었다. 연기 가문은 그 유통 사업을 외부인에게 맡길 정도로 멍청하지 않았다. 취직은 시켜줘도 사업을 줄 수는 없었다.

어찌 되었건 갈아타야 한다. 그렇기에 배둔국은 그냥 태산박 코인을 내질렀다. 삼을 팔면서 레이드 보급도 해야 했지만 해볼 만했다.

‘난 준비가 되어 있다.’

옥시모론 기업에 속한다면 던전 공략에 필요한 장비를 보급해야 했고, 이에 관한 공부는 꼭 해야 했다. 장기간은 아니지만 그런 이야기 뒤에 이렇게 만났다. 공부가 미흡할 수는 있어도 안 했다고 할 순 없었다.

배둔국은 계약서에 단번에 인감을 찍었다.

“잘 부탁합니다.”

“곧 있을 3레벨 공략, 꼭 성공하시길 바랍니다.”

두 명 모두 빙그레 웃었다.

산박은 안심사의 스님 네 명과도 만났다. 그들은 하나같이 합장하며 고개를 허리까지 숙여 보였다. 연기 가문의 끈끈한 애정을 받는 산박은 그들에게 있어서는 범(虎)과 다를 바 없었다.

“잘 부탁합니다, 사장님.”

이들은 산박을 시주라고 부르지도 않고 직함으로 불렀다. 굴복하고 있는 게 절로 보일 지경이라 오히려 더욱 의심스러웠다.

“믿을 만한 분들인데 거기에 실력까지 좋다고 들었습니다.”

산박은 서둘러 그들의 잔을 채웠다. 비싼 한우집에서 대접했다. 외부인인 데다가 아예 다른 세력에 속한 이들이었다. 이 정도는 해줘야 했다. 적어도 밥값은 하기를 기대하는 만큼 제법 돈을 썼다.

“저희는 해야 될 만큼은 합니다. 그러니 전혀! 걱정을! 안 하스도 드으습니다……. 후우우우……!”

제법 취기가 오르자 이들은 본성을 드러냈는데, 전혀 나쁘지 않았다.

“술이 약해서…….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술에 취해서도 저런 말을 하는 것을 보니 걱정을 크게 덜었습니다.”

“도감 스님으로부터 단단히 이야기를 들어서 그런 걱정은 일절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사장님께서 죽어서 던전 나오시면 저희들은 안심사에 들어가지도 못합니다. 팔 하나둘 버려서라도 사장님은 살릴 생각이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런 말씀 마십시오. 좋게 웃으며 공략해서 나오면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산박은 실로 걱정스러워하는 표정을 지으며 바쁘게 손사래를 쳤다. 물론 속마음은 달랐다.

‘최여발, 그 돌중이 사람 하나는 제대로 움켜쥐고 있구나.’

목줄 쥐고 사람을 부리는 놈이다. 잔혹하지만, 인간에게 가장 효과적인 통솔 수단이 공포였다. 싸움을 앞두고 죄인을 단칼에 죽이면 잡졸도 대놓고 도망은 못 친다. 그게 인간이었다.

그렇기에 인간을 가장 손쉽게 통솔하는 방법은 공포로 통솔하는 방법이었다. 그걸 싫어하는 인간은 지배받는 인간들뿐이었다. 영향력 있는 이들은 공포로 다른 인격체를 지배했을 때 엄청난 쾌락을 느낀다.

‘신경 안 써도 되겠다.’

산박은 공손히 술을 따라줬다. 오늘 이 자리에서만큼은 확실히 을을 자처하며 대접해 줬다. 가는 길에는 돈 봉투도 끼워 넣었다.

“이번 공략 이후에도 자주 봅시다.”

“그럼요! 그럼요! 그래야지요! 언제든지 저희 안심사를 찾아와 주십시오! 도감 스님 또한 좋아하실 겁니다! 우헤헤헤헤헤!”

술 취한 스님은 하나같이 산박이 보는 앞에서 봉투에 든 액수를 확인했다. 백만 원이다. 이들에게는 큰돈이었다. 아무리 안심사가 돈이 많아도 이런 보통 스님에게까지 많은 돈을 주지는 않았다.

돈은 권력이다. 돈이 부족한 이에게 돈은 더욱 무서운 영향력을 지닌다. 50만 원은 물론이고 30만 원만 줘도 싱글벙글하며 간이고 쓸개고 내줄 것처럼 굴었을 터다. 산박은 거기에 만족하지 않고 무려 백만 원을 제공했다. 다음에도 같이 던전 공략을 하고 싶어서 난리를 피울 터였다.

‘안심사 스님들이 하나같이 던전 사용자라니.’

괴물 죽이는 스님이다. 의외로 그걸로 많은 돈벌이를 하는 듯했고, 실제로 안심사는 고아들을 매년 가장 많이 받아들이고 있었다. 고아원도 직접 운영하고 있을 정도였다.

그 의도가 너무 뻔했다. 알게 모르게 다른 법인까지 써서 에스컬레이터 형식으로 던전 공략을 위한 인력을 키우고 있을 터였다.

어두컴컴하기 짝이 없는 과정을 거쳐서 안심사의 스님이 된 고아들은 어떻게 소비될까? 분명 상상 이상으로 부품처럼 쓰일 것이었다. 그러나 산박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종교와 싸우는 병신은 없지.’

세속적인 이들은 그들이 지닌 돈에 고개를 조아리고 표를 원하는 이들은 그들을 따르는 신도들 때문에 고개를 조아리고 종교적인 이들은 그들이 지닌 상징성에 고개를 조아리기 때문이다. 그 속성을 모르고 종교를 건드렸다간 박살 나기 일쑤였다. 용서하라는 주님의 말을 따르기보단 사악한 악도를 쳐 죽였을 때 오는 달성감이 크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증오이며, 인간의 원죄였다. 혐오로부터 오는 재미난 감정은 사람을 여럿 죽여도 전혀 사그라지지 않고 질리지도 않았다.

‘이제 공략에 들어간다.’

산박은 3레벨 레이드 던전으로 들어설 모든 준비를 마쳤다.

* * *

미신. 보통은 비과학적이며, 그 어떤 근거도 없다. 하지만 대한민국의 3레벨 던전에는 미신이 하나 존재했다. 마장역에서 돼지머리를 태우며 제사를 지내면 3레벨 레이드 던전 첫 트라이에서 사망자가 나오지 않는다는 미신이었다.

공교롭게도 적중률이 높아서 그건 사실이라고 여겨질 정도였다. 첫 번째 시도가 아닌 자들은 죽어도 첫 도전이면 죽지 않았다. 심하게 다쳐서 차라리 죽는 게 낫다고 여겨질 상처를 입고도 생환한 던전 사용자도 있었다.

그 덕에 마장역에서는 언제나 돼지머리를 태우는 냄새가 맡아졌다. 여기서 제를 지내고 던전에 들어가는 팀이 많았다. 누구나 들어가면 공간 이동이 되기에 북적일 일도 없었다.

당연히 태산박 또한 그 미신에 매달렸다.

‘확률 100%니까.’

거기에 그는 야만신이라는 놈의 의뢰까지 받아봤다. 여기에도 그런 작용이 일어나고 있을 거라 여겼다.

예복을 입고 제사를 도와주는 사람도 있었는데 여기저기 푯말 하나 끼고 고객을 기다리고 있었다. 시장 바닥이 따로 없었다. 그중에서 산박은 가장 싼 곳을 찾았다.

“5만 원 맞습니까?”

“예! 지금 하시려고요?”

“사람 모이면요.”

“예!”

산박은 곧 위치를 적고 사진도 하나 첨부해서 메신저에 올렸다. 대답이 금방금방 올라왔다. 옥시모론 기업 소속이 아닌 이들은 굳이 참석하지 않았다. 그들 모두 첫 번째 3레벨 던전도 아니었다.

인천 네크로맨서… 포스코 타워는 틈틈이 논문을 내는 이시은을 지키기 위해서 3레벨에 정체되어 만족하면서도 실력이 있는 이들을 세 명 보냈다. 돈으로 그들의 향상심을 빼앗았다. 그들은 돈 앞에 타협했다. 거부하기에는 제법 든든한 액수였을 터였다.

가장 먼저 도착한 이시은이 툴툴거렸다.

“사장님! 여기 왜 이렇게 난잡해요? 무슨 생선 냄새도 나고…….”

“서로 경쟁하잖아요. 활어를 바로 구워서 제사상에 올리면 효험이 더 좋다는 둥…….”

그 말에 시은이 산박을 이상해하는 눈으로 쳐다봤다.

“전 가장 싼 곳으로 했습니다. 일단 공식적으로는 100%잖아요?”

“그렇긴 그렇죠. 왜 그런지는 모르지만요.”

다섯 명이 한곳에 모였다.

“일 배애애애, 으!”

제사는 당연히 진중하게 이루어졌다. 일 배, 이 배, 삼배를 하고 매번 술을 따르고 교체해야 했다. 한 명씩 나와서 진지하게 큰절을 했다.

독특한 소리를 내며 제사를 도와주는 이들의 서포트를 받으며 빠르게 이를 해결하고 카드 결제를 했다. 어디서든지 가능한 게 카드 결제였다. 심지어 계곡에서 닭 한 마리를 10만 원에 팔아도 카드 결제가 가능한 세상이 대한민국이었다.

배둔국은 이미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3레벨 던전이 있는 곳의 특징이라면 공터가 매우 넓다는 점이었다. 당연히 주차하면 100% 세금으로 돈이 떨어져 나간다. 그렇기에 최대한 빨리 움직여야 했다.

“식량이 왜 이렇게 많아요? 다 못 들고 가겠는데요?”

“크기에 비해서 무게가 가벼워요. 식수 무게만 감당하면 된다고 생각하세요.”

가방의 덩치에 비해서 비교적 들기 편했다. 안에는 맛이 더럽게 없는 군용 식품이 가득했다. 몇 개는 던전에 들어서자마자 은폐시킬 것이었다. 비상식량에 불과했다.

시은이 앓는 소리를 냈지만 네크로맨서 세 명을 포함해 인원이 많아서 오히려 평균보다는 낮은 무게를 짊어질 수 있었다.

적패 네크로맨서에다가 알짜배기 논문을 제공하는 이시은을 위해서 중위 언데드를 4기나 투입한 것이 포스코 타워였다. 하지만 그 모습을 보면서도 산박은 즐거워하지 않았다.

‘네크로맨서 놈들, 왜 저렇게 바짝 긴장해 있지?’

경계심이 올라갈 수밖에 없었다. 베테랑인 그들이 긴장할 이유가 없었는데 긴장하고 있었다. 물론 이건 다른 이들은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만큼 포커페이스를 유지하고 있었지만 산박만은 간파했다.

‘뒤로 물릴 수는 없다.’

쓴 돈이 많았다.

서충호가 먼저 들어서고, 산박은 가장 마지막에 들어갔다. 어둠이 그들을 집어삼켰다. 붕 뜨는 느낌이 전신을 지배하며 약간의 현기증이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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