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56화 (256/270)
  • 256화

    ―지금 찾아가도 되겠습니까?

    “많이 급한가 보구먼. 내가 언제 자네 방문을 뒤로 미룬 적이 있는가?”

    ―어르신이 바쁘시지 않아서 그런 게 아닙니까?

    “무슨 소리를! 사회 활동이라는 게 아무리 해도 바닥이 안 보이는 법이야.”

    ―바쁘시면 내일 찾아뵙겠습니다.

    “자네가 급한 것 같은데, 무슨! 기다리고 있겠네. 천천히 오게.”

    장 노인은 태산박을 크게 대우해 줬다. 그도 이제 늙어서 이렇게 밖을 잘 안 나가지, 10년만 젊었어도 자주 태산박을 찾아갔을 것이었다. ‘시간’만큼 평등한 게 없었다. 함께 이것저것 한다면 관계는 증진될 수 있었다.

    ‘젊음이 이렇게 무상할 줄이야.’

    최근에는 안 하던 운동도 하고 있었다. 더 오래 현역에서 뛰고 싶어서였다.

    한 시간도 되지 않아서 산박이 도착했다. 곧바로 독대가 이루어졌다. 술은 당연히 올라왔다. 바로 본론으로는 들어가지 않았다.

    “요즘은 어려운 것 없고?”

    “쉬운 게 어딨습니까. 그저 열심히 할 뿐입니다. 양산시에서는 크게 도움받아서 감사드립니다.”

    “지난 일인데 또 뭐 하러 감사를 표해? 흐흐, 양산시는 공무원 숫자도 적어서 연기 가문의 입김이 강하긴 강하지.”

    보통 한 달도 넘게 걸리고 때로는 ‘성의 표시’를 원해서 반년도 질질 끄는 게 도로 건설 허가였다. 그걸 하루 만에 해줬다. 그것만 봐도 장 노인이 얼마나 태산박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는 건지 알 수 있었다.

    이로 인하여 태산박은 연기 가문을 조심할 수밖에 없었다. 무역 흑자국의 눈치를 보는 건 당연한 일이다. 상대에게 이득을 주기에 대우받을 수 있었다. 남들에게는 호구라고 여겨질 수 있겠지만 자본가에게 있어서는 아무것도 아니다. 돈으로 좋은 관계를 구매하는 것이기에 오히려 상품이나 다름없었다.

    돈으로 안 되는 게 있다면 돈이 적은 것이라서 그렇다. 더 많은 돈을 쏟아부으면 가볍게 해결될 문제였다.

    연기 장가(家)의 가문원들이 사원을 중심으로 결집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수천 명에 달하는 공무원이 가족이라는 테두리 안에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이는 권력이 된다.

    가벼운 것도 모이면 무겁다. 그걸 가장 잘 보여주는 게 연기 가문이었다. 불가촉천민으로까지 여겨지는 게 공무원이다. 민원인 앞에서 찍소리도 못 내는 쥐 새끼나 다름없는 대우를 받는다. 하지만 그것도 개인일 때만 그렇다. 떼로 몰리면 시민에게 공포스러운 권력을 휘두를 수 있었다.

    “양봉 사업은 내년부터는 할 거 아냐?”

    “예.”

    “꽃가루 있는 고급 꿀은 참 보기 힘든데……. 유통은 생각해둔 사람 있고? 배 사장한테 몰아주는 건 리스크가 크지. 레이드 공략 때도 쓸 사람이라며?”

    “예. 그때 가서 봐야죠.”

    이에 장 노인이 웃어 보였다. 결정되지 않았다는 건 그만큼 툭 튀어나온 사람이 없다는 뜻이었다. 누구든지 주워 먹기 좋았다. 그게 연기 가문일 확률은 제법 높았다.

    서로 술을 입에 털어 넣었다. 이제 본론을 꺼냈다.

    ‘이제는 장 노인을 믿을 때가 됐다.’

    그는 몇 번이나 연기 가문의 영향력을 소비하여 산박을 도왔다. 그것만으로도 이미 장 노인은 산박의 시험을 통과했다고 볼 수 있었다. 사람을 쓰고, 돈을 쓰고, 쌓아둔 인맥과 영향력을 소비한다. 그것도 남을 위해서! 그건 보통 일이 아니었다.

    장 노인은 충분히 깊은 이야기를 나눌 상대가 될 수 있었다. 그리고 그걸 장 노인도 원하고 있었다. 더욱 깊은 파트너십이 구축되어야 태산박과의 관계에서 동래 가문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었다. 객관적인 지표에서 후달리니 주관적인 지표를 높이려고 애를 쓰는 장 노인의 방향성은 대단히 뛰어났다.

    그리고 그는 아무에게나 자원을 쓰지 않는다. 그렇기에 더욱 빛이 났다. 모든 사람에게 사랑을 주는 사람보다 모든 사람을 싫어하는 놈이 주는 사랑이 더욱 가치 있어 보이는 법이었다.

    “실은 3레벨 레이드 던전 공략에 있어서 갑자기 불안 요소가 생겼습니다.”

    “으음? 불안 요소?”

    “예. 자세히 말씀드릴 수는 없어서 죄송합니다.”

    “아니야! 그것만 말해줘도 고맙지.”

    갑자기 튀어나온 불안 요소. 말할 것도 없었다.

    ‘인간이지.’

    다른 건 없다. 대답하지 않았기에 오히려 대답을 알 수 있었다.

    “안심사의 스님을 더 원하나?”

    “인력을 원하지는 않습니다. 지금으로도 충분하고, 제가 두 명을 더 끌어와서 보완했습니다.”

    “역시 실력이 좋구만. 그럼 나한테 원하는 건… 돈이겠군. 장비를 구매하려고?”

    “예. 과잉 투자지만, 필요할 것 같습니다.”

    이에 장 노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바빠지겠군. 3레벨 방어 장비는 물량이 적어.”

    구매하려는 사람이 적기 때문이다. 그리고 비싸다.

    “그래도 우리나라에서는 구하려면 금방 구할 수 있지 않습니까?”

    “흠, 그거야 그럴지도 모르지. 개성 놈들이 있으니까.”

    상인 가문이 크게 번성한 것이 개성 이(李)씨였다. 고려 때부터 귀족이었기에 그 성세는 조선을 지나 지금에 와서는 결코 무시할 수 없었는데도 장 노인은 그들을 좋아하는 것 같지 않아 보였다. 시기심도 있었으나, 그 천박함 때문이었다. 한반도의 양반은 청렴을 제1원칙으로 삼는데 개성 이씨 가문은 청렴과는 거리가 먼 집안이었다.

    “잘 아시는 것 같은데, 소개해줄 사람이 있습니까?”

    “음……. 만약 당진 국제 시장에서 못 찾는다면 이 사람을 찾아가.”

    장 노인이 명함을 하나 건네줬다. 두께가 제법 두껍고 플라스틱으로 된 고급 명함이었다. 명함에는 동양적인 문양이 테두리를 만들고 있었는데 글씨 색이 황금색이라서 굉장히 화려했다.

    “이규전(李圭塡).”

    직함은 상응 물산 사장이고, 번호는 휴대폰 번호만 딱 하나 있을 뿐이었다.

    “자네 항렬은 좀 아나?”

    “…개성 이씨가 항렬이 많긴 합니다.”

    “뭐, 요즘 세상에 항렬까지 보지는 않지만, 바다와 관련된 말은 하지 말게나.”

    “예.”

    장 노인은 카드를 하나 건넸다.

    “긁어. 비싼 거 가져가.”

    “괜찮습니까?”

    “지금 줄 때 받아. 대신, 받은 만큼 토해 놓아야 할 걸세. 물론 돈으로는 안 받네.”

    산박이 고개를 숙여 양손으로 이를 받았다. 급할 때 빌려주는 친구가 진짜 친구였다.

    장 노인 또한 감사를 표했다.

    “고맙네. 내 자주 도와줄 테니 부산 은행한테 빚을 지지는 말게. 그놈들은 천성이 금융 하는 놈들이야. 조심해.”

    “예.”

    산박이 가볍게 대답했다. 장 노인도 덧붙여서 동래 가문을 욕하지는 않았다. 그 이상은 불필요했다.

    ‘일이 잘 풀렸다.’

    쥐뿔도 없었다면 한 푼도 못 얻었을 터였다. 장 노인은 태산박의 거대함을 알고 있었기에 거침없이 내어줬다. 힘을 가진다는 것은 갈등이 없다는 뜻이었다. 영주 앞에서 행패 부리는 가게 주인은 없다. 강자가 이리저리 돌부리에 휘청거리는 일은 없었다.

    늦은 시간이었지만 산박은 당진 국제 던전 시장으로 향했다. 국제도시인 당진에는 수많은 해외 기업들도 진출한 대한민국 최대 던전 시장이 있었다. 하루 25시간 영업은 당연한 일이다. 불이 꺼지지 않는 도시였다.

    유료 주차장에 차를 주차한 산박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미행이 있을 수 있으니까.’

    그는 근처에 있는 카페에 들어가서 커피를 마시면서 조용히 주변을 살피고, 15분 뒤에 다시 움직였다. 2층 카페를 나가지 않고 계단을 올라가서 옥상으로 향했다. 자물쇠는 있지도 않았다. 허술하기 짝이 없었다.

    옥상에서 시간을 보낸 산박은 미행이 없다는 걸 확신하고 미리 점찍어 뒀던 곳으로 움직였다. 군산 던전 산업의 물건을 파는 대형 매장이었다. 군산 던전 산업은 방어구 전문 기업으로 저레벨 던전부터 고레벨 던전까지 모든 방어 장비에서 두각을 드러내는 생산 기업이었다.

    ‘방어구 하면 군산이지.’

    물론 회사가 군산에 있지는 않았다. 공장도 군산에 없었다. 그냥 오너 일가가 군산이 고향일 뿐이었다.

    “어서 오십시오. 찾으시는 물건이 있으십니까?”

    입구에서부터 직원이 달라붙었다. 고객을 전담하면 그 고객이 구매한 돈의 일정 금액이 자신의 성과금으로 들어오기 때문이었다.

    “3레벨 방어 장비요.”

    “4층으로 가셔야 합니다. 제가 안내를 해드려도 괜찮을까요?”

    “아니요. 혼자서 보려고요.”

    “예.”

    직원은 결코 얼굴을 찌푸리거나 말을 줄이지 않았다. 차분히 대답할 뿐이었다. 교육이 제대로 되어 있었는데, 그만큼 월급을 받고 두 달마다 교육 기간을 가지고 있어서였다. 던전 사용자는 하나하나가 돈 쓰는 놈들이었다. 그것도 큰돈 쓰는 놈들이다. 레벨 업 하면 그 구매력은 단번에 높아진다. 직원 관리에 힘을 쏟아부을 수밖에 없었다.

    에스컬레이터를 타며 산박은 군산 던전 매장을 구경했다. 조명이 많았고 화려했으며 청소하는 아줌마들도 많았다. 그들의 표정에는 오로지 피곤함만이 가득했다.

    4층에는 고객이 거의 없었다. 저녁 열 시는 그렇게 늦은 시간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쇼핑하는 사람이 적었다. 3레벨 장비는 하나를 구매하려고 해도 수천만 원이 들기 때문이다.

    돈지랄의 진짜 시작. 그게 바로 레이드 던전 장비였다. 당연히 그런 걸 구매하는 시기는 늦을 수밖에 없었다. 열다섯 명이 달려들어서 올리는 수익이다. 이것저것 싹 다 제외하고 단순 매출로만 열다섯 번을 돌아야 최소 천만 원이 개인에게 돌아간다. 몇 개월을 모으고 모아도 시원찮다. 그러니 3레벨 던전 장비를 파는 곳에 사람이 많을 수가 없었다.

    “안녕하십니까, 고객님. 어떤 걸 찾으시나요?”

    짧은 스커트에 코르셋과 비슷한 검은색 조끼를 입고 붉은색 리본을 칼라에 묶은 여직원이 다가와서 깊이 고개를 숙였다. 유니폼과는 다르게 머리는 승무원처럼 잘 정돈되어 있었다.

    “구사일생(九死一生) 복대요.”

    “군산 던전표 구사일생 복대를 찾으시는 게 맞으십니까?”

    “예.”

    “바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여직원이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걸음으로 산박을 안내했다. 틈틈이 고개만 살짝 돌려서 곁눈질로 산박이 잘 따라오는지 살폈다. 곧 휑한 곳에 딱 하나 전시되어 있는 복대가 산박의 눈에 들어왔다. 복대는 유리 관 안에 들어 있었다.

    ‘억 소리가 나니까.’

    단단히 관리를 해야 하고, CCTV에 사람 얼굴도 잘 나와야 한다. 그렇기에 주변 10평 공간이 휑했다. 억 소리 나는 놈이라 취급이 다른 장비와 다를 수밖에 없었다.

    가격표는 바로 보였다. 그것도 유리 관 아래에 있는 검은색 대리석에 금속 푯말로 박혀 있었다.

    ‘1억 5천.’

    미치도록 비싼 가격이었다. 보통 던전 사용자는 만지기도 어렵다. 산박 또한 야만신이 아니었다면 BRC사(社)의 물건을 손에 쥐지도 못했을 것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군산표 구사일생 복대는 진짜 비싼 놈이었다. 기반 없는 이들에게는 신의 코인 떡상을 노려야지만 얻을 수 있는 물건과 다를 바 없었다. 부모덕이라도 있어야 구매할 수 있는 물건이었다.

    “구사일생 복대는 군산 산업의 가장 큰 프로젝트에서 만들어진 3레벨 장비입니다. 이 프로젝트에서 만들어진 던전 장비는 전 세계로 수출되고 있으며 대한민국의 국격을 높이는 데…….”

    여직원이 설명을 시작했다.

    카테고리 구사일생. 외국에서는 NEFD(Narrow Escape From Death)로 분류되며 방어 장비에 대해서 논할 때 항상 거론되는 편이었다. ‘군산 던전 산업은 던전 방어구 생산 기업’이라는 인식을 심게 해준 알짜배기 프로젝트였다. 군산 던전 산업체가 ‘브랜드’를 가지게 되는 순간이었다.

    여기에 대한민국 사람 특유의 국뽕을 집어넣는 것도 잊지 않았다. 우리나라 생각하는 애국심이 대단한 대한민국 국민들이 지갑을 열기 좋았다. 국제적으로 흥하면 국격 상승이고 그걸 마치 자기 일인 양 생각하는 이들이 많았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분연히 떨치고 일어날 정도로 애국심이 강한 게 대한민국의 국민들이었다.

    “단점은 물리적 타격에 약하다는 겁니다. 그래서 보통은 내복으로 껴입는 것을 추천해 드립니다.”

    1억 5천이라고 모든 면에서 뛰어나지는 않았다. 한 분야에 특출난 것이 구사일생 복대였다.

    “마법과 독의 보호는 3레벨 장비 중 순위권 50위 안에 들어가는 거 맞습니까?”

    “예. 이번 연도 순위는 29위입니다. 자꾸 새로운 장비들이 쏟아져 나오지만, 무려 29위입니다. 전 세계와의 싸움에서 그 정도면 대단한 것이죠.”

    미묘한 순위였다. 실로 미묘했다. 하지만 그래도 상위권임에는 틀림없었다. 빅 오버슈트의 안에 입기 좋았다.

    산박은 곧바로 결제했다. 큰돈이었다. 보통 던전 장비보다 다섯 배에서 열다섯 배는 비싼 놈이다. 허나 손발이 떨리지는 않았다.

    ‘남의 돈이니까.’

    거기에 돈으로 갚는 것도 아니다.

    ‘이미 출혈을 감수해야 한다. 내 스스로 나에게 상처를 줘야 한다.’

    경제적인 상처다. 어쩔 수 없는 출혈이며, 산박 스스로의 결정으로 만들어 내는 손실이었다. 그것으로 탄탄하게 걸어 나갈 수 있다면 지불해야만 했다. 오히려 그동안 너무 그러지 않았다. 바닥부터 기어 올라가는 놈이 허리에 로프도 묶지 않고 거침없이 올라갔다.

    ‘운이 좋았지.’

    그저 운이 좋았다. 위기에 몰려도 어떻게든 몸을 고쳐 잡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번 경우에는 아니었다. 이시은이라는 변수는 커도 너무 크기 때문이었다.

    “일시불로 해드릴까요?”

    “예.”

    한 방에 카드가 긁어졌다. 단 한 번의 결정에 1억 5천이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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