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47화 (247/270)

247화

* * *

산박은 부산으로 향했다. 그곳에 있는 수많은 부산 은행 중 한 곳에 섰다. 당연히 부산 은행 서면 지점이었다. 송서아 지점장이 있어야만 하는 곳은 아니다. 하지만 잔잔벼락의 사업 가치는 대단히 높았고, 개척이나 다름없었다. 그렇기에 그녀는 서면 지점의 지점장이 되었다.

그 덕에 동래 송가(家)는 발등에 불이 떨어진 것처럼 열심히 가문을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젊은 여자가 만들어낸 새로운 사업 도구 덕에 가문 내부의 구도가 완전히 바뀌었다. 거기서 살아남으려면 버둥거려야만 했다.

양반에게 중요한 것은 입신양명이며 수신제가였다. 그런 의미에서 세상에 발자국을 찍고 큰 문제 없이 자신을 다스리고 있는 서아는 둘 모두를 잡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런 그녀가 부산의 가장 번화한 곳의 은행 지점장이 안 될 이유가 없었다. 여기서 1년을 보내고, 곧 다른 곳으로 적을 옮길 것이었다. 커리어는 계속 뻗어 나가야 했다.

‘부산 금융으로 가게 되겠지.’

또각. 또각.

하이힐 소리가 났다. 은행의 계단을 내려오고 있는 송서아가 보였다. 경호원을 대동하고 있었는데, 동래 가문의 돈 때문이었다. 수백 년을 쌓아온 재물은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많았다. 졸부는 경호원 하나 데리고 다니지 않지만 양반 가문은 다르다. 과거 저 왜놈들의 해적질을 가문 혼자서 감당한 적도 있을 정도로 부흥했던 것이 동래 송가였다. 쌓인 재물은 세월과 함께 무섭도록 불어난 상태였다.

새하얀 구두에 짙은 검은색 스타킹, 이어지는 순백의 H라인 스커트는 무릎 바로 위에서 팔랑거렸다. 가볍게 걸친 라이트핑크색의 재킷은 약간 정장 느낌도 났다. 커리어 우먼이면서도 봄 향기를 집어넣은 패션이었다. 검은색 생머리에 피부가 하얀 송서아에게 봄옷은 너무나도 잘 어울렸다. 봄은 그녀의 계절이나 다름없었다.

“구두 새로 사셨어요?”

“선물받았어요. 어때요? 저희 사촌 언니가 여성 의류 브랜드를 하거든요.”

“동래 가문이 밀어주면 유명하겠는데요?”

그 말에 서아가 웃었다. 아무래도 이 사랑스러운 남자는 의류 시장에 대해서 자세히 모르는 듯했다.

“그렇게 해서는 브랜드 파워를 오랫동안 유지할 수 없죠. 의류 브랜드는 더더욱 이름값이 있어야 하거든요. 단순히 자본으로는 한계가 있어요.”

“그럼? 천천히 사업을 확장하시는 건가요?”

산박은 흥미를 느꼈다. 하이힐 이야기의 연장선이었기에 서아 또한 말을 이어 나갔다. 그래야 이 하이힐의 제대로 된 가치를 알 수 있을 테니까.

“먼저 입소문이 퍼져야죠.”

“싸게 팔아야겠네요.”

“동시에, 품질은 높아야 해요.”

손해를 보는 장사였다. 특히 의류 브랜드는 겨울옷 빼고는 끔찍할 정도로 돈이 안 됐다. 그렇기에 겨울은 의류 시장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였다.

“자본으로 버틸 수 있으니 쉽게 하셨겠네요.”

“맞아요. 그리고 잘 모르시겠지만, 대한민국의 직공(織工)은 대단한 수준이에요.”

“설마 수작업입니까?”

“그럴 리가요.”

송서아가 웃었다. 그리고 말을 이어 나갔다. 걸으면서 들려오는 하이힐의 소리가 산박의 귀를 콩콩 두드렸다.

“그래도 마무리 작업은 수작업으로 최대한 바꾸려는 중이에요. 다듬는 거만 잘해도 제품이 훨씬 달라져 보이거든요. 사이즈도 점점 세분화시킨다면, 단골을 만들 수 있겠죠.”

여자의 구매력은 대단히 높다. 남성의 몇 배에 달한다. 돈 잘 쓰는 남자도 분명 있지만 남녀 전체를 두고 보면 여자가 압도적으로 구매력이 높았다.

그들은 자신의 것만 사지 않고 내 남편, 딸과 아들, 아빠, 엄마는 물론이고 시아버지, 시어머니 등에게도 선물을 한다. 그 선물을 구매하는 건 여자고, 그렇기에 여자의 구매력은 높을 수밖에 없었다. 의류 시장 또한 마찬가지였다.

“부산은 안 하는 사업이 없네요.”

“모두 자본주의 때문에 일어난 촌극이에요. 저희 가문이라고 하고 싶어서 하는 게 아니죠.”

“그게 무슨……?”

“대한민국은 너무 발전하고 있죠. 거기에서 도태되는 이들도 많아요. 그들은 제 눈에 보이지 않죠. 하지만 확실하게 통계에 잡히고 있어요.”

“그건 너무 대단한 일 같아 보이는데요.”

“대단한 일은 아니죠. 의류 브랜드 하나 만드는 건데요. 그냥 내수 시장용이라고 생각하시면 편해요.”

서아는 그렇게 말해도 산박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공장 하나가 작은 도시 하나를 먹여 살릴 수 있었다. 그렇게 생각했을 때 동래 송가(家)가 의류 브랜드를 하나 만드는 건 썩 나쁜 일이 아니었다.

“오늘 입은 옷은 그 브랜드를 싹 빼입으신 건가요?”

“구두만요. 사촌 언니가 패션 보는 눈은 있어도 사업하는 손은 느리거든요. 어찌나 천천히 진행하는지, 구두 선물 받고 이게 왜 온 것인지도 처음에는 몰랐어요. 잊고 있었거든요.”

산박이 시원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미움받는 사촌 누나는 아니네. 그러니까 의류 브랜드로 살길을 마련해 주는 거구나.’

그것도 가문 차원에서.

놀라운 일이었다. 중세 시대에 차남으로 태어나면 군대에 가서 겨우 입에 풀칠하는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현대의 풍요로움은 능히 가문의 도태된 이들과 나라에서 도태된 이들을 한데 묶어 먹고살 만하게 할 수 있었다.

사촌이 옷을 만들 수는 없는 노릇이니 다른 이가 이를 대체해야 했다. 아름다운 아메리칸드림의 수혜를 받은 중산층처럼 지배자에게 고용되어 엘리트로 살아가는 셈이다. 물론 지금의 경우에는 엘리트라고 할 수는 없었다. 그저 의류 종사자였다.

‘큰 문제가 없으면 종신직이겠지만.’

동래 가문이 그 정도 돈이 없는 건 아닐 터다. 도박과 마약 같은 양반의 마음가짐에 어긋난 일만 안 한다면 사업 유지를 위한 자본금을 매년 꾸준히 대줄 터였다.

‘사실 돈을 줄 필요도 없지.’

동래 가문의 입김이 들어가는 사업체에 옷만 납품해도 너끈하다.

‘하지만 그것뿐.’

그렇기에 산박은 그 사촌에 대해서 더 질문하지 않았다. 주제를 능숙하게 돌렸다. 구두를 넘어 그녀의 봄 향기가 잔뜩 들어간 옷을 건넸다.

“서아 씨를 보니까 봄나들이 가고 싶네요.”

“그럼 제가 에스코트를 해야겠네요. 부산은 제가 더 잘 아니까요.”

“지금요?”

“네.”

서아가 짧게 대답하며 웃었다. 새하얀 이가 드러났다. 미소가 예쁜 여자였다. 저 미소에 자신의 입술을 포개고 싶은 마음을 참으며 산박은 그 대신에 성큼 걸어가 서아의 손을 잡았다.

“운전은 제가 할게요.”

그 말에 서아가 차 키를 건넸다. 뒤에 검은 차가 따라왔지만 서아가 무신경했기에 산박도 굳이 그 주제를 꺼내지는 않았다.

“목적지는 어디로 할까요?”

“송도요.”

서아가 스마트폰을 턱 거치대에 걸었다. 내비게이션이 켜져 있었다. 안내에 따라 산박이 우측 깜빡이를 걸자 빵 소리를 내며 차가 그대로 지나갔다. 이에 서아가 말했다.

“원래 우측으로 돌고 나서 깜빡이를 켜야 해요. 안 그러면 빵거리고 양보를 안 해줘요.”

미친 동네였다. 정말 미친 동네였다.

산박은 차가 지나다니지 않을 때 나섰다. 남들이 다 그렇게 한다고 해도 그는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다. 물론 그 말은 금방 전복되었다.

빵빵!

클랙슨이 울리는 도로에서 아웅다웅하며 검은 세단이 뻗어 나갔다. 그 뒤를 경호원들이 탄 차가 따라붙었다. 그 덕에 운전은 보다 더 수월했다. 운전으로 가오 잡는 놈들에게는 강약약강의 사무라이 깡패 심리밖에 없었다. 검은 고급차 세 대가 쭉 달리는데 자리를 안 비켜줄 놈은 없었다.

산박은 송도의 유료 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하늘을 지나가는 해상 케이블카가 보였는데, 그 길이가 길었다.

‘재미가 없을 수는 없네.’

바다로 툭 튀어나온 산책로도 보였다. 관광용으로 쓰기 위해서 제법 노력한 티가 났다.

“카페부터 가요. 전 잠깐 전화 좀 할게요. 해상 케이블카에 동래 가문도 지분이 좀 있거든요.”

그녀가 전화를 하는 사이에 산박은 길잡이 노릇을 하며 걸어갔다.

카페에서 그는 아이스아메리카노를 손에 들었고 그녀는 새하얀 크림이 내려앉은 캐러멜마키아토를 손에 쥐었다. 2층에 있는 카페는 전경이 탁 트여 지나가는 배들과 수평선이 보였다.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농원은 구매하셨어요?”

“네.”

“이걸로 자주 얼굴 볼 수 있겠네요.”

“만족할 정도로는 못 보죠.”

그 말을 들은 서아가 굵은 빨대를 빙빙 돌렸다. 너무 많이 돌리는 모습에 산박이 손으로 그녀의 컵을 잡으며 제지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왜 이렇게 많이 돌려요? 부끄러워서 그래요?”

“쿠웃…….”

그녀가 고개를 숙였다. 이에 산박도 커피에서 손을 뗄 수밖에 없었다. 서아가 순수하게 부끄러워했고, 그녀의 귀가 발갛게 달아올라서 자신도 부끄러워졌다.

“…더, 덥네요. 봄이라서 그런가?”

“채광도 잘되어 있으니까요.”

그녀가 서둘러 딴소리를 했다.

“으흠, 농원에 도로는 괜찮던가요?”

“도로요?”

“네. 도로가 잘돼 있냐 아니냐에 따라서 차이가 크게 나거든요.”

“비포장도로는 있었죠.”

“폭이 4m는 되어 보였나요?”

“아뇨. 차 한 대 겨우 지나갈 정도였어요.”

“음……. 그래도 다행이에요. 평당 6.6만이면 나쁘지 않죠.”

이에 산박이 자세하게 묻자 서아는 연기 가문에 도와 달라고 하면 알아서 해줄 것이라 말했다. 중간 관리의 최고봉에 있는 게 연기 가문이었다. 어느 도시든지 공무원은 있고, 그들은 연기 가문과 관련이 있었다. 크든, 작든.

그렇기에 서아는 더 말할 가치를 못 느꼈다. 대신 밖으로 나가서 오늘을 새길 추억거리를 만들고 싶었다.

“여기 밖에 구름 산책로가 있어요. 나무가 많아서 휴양지 느낌이 물씬 나는 곳이 송도 해수욕장이죠. 가요.”

그와 그녀는 산책로를 걷고, 사진을 찍었다. 어느 커플들이나 할 법한 일들을 이어 나갔다. 해상 케이블카를 타고 나서는 관리자가 직접 그들을 ‘소원의 용’이라 불리는 곳으로 안내했다.

23m에 달하는 긴 길이를 지닌 구조물에는 사람들의 소원이 용 비늘 모양으로 주렁주렁 달려 있었다. 연인들이 좋아할 법했다. 그 덕에 이미 비늘이 빽빽했다. 허나 딱 두 개를 달 정도의 공간이 남아 있었다. 일부러 떼어낸 것이었다.

원래는 안 되는 게 당연하지만, 두 사람은 그곳에 자신들의 소원을 달았다. 어차피 매년 새해가 다가오기 전에 갈아 치우기 때문에 큰 죄악은 아니었다.

“오빠들이 한번 보자고 하더라고요.”

“서아 씨 생각은요?”

“전 좀 더 미뤘으면 좋겠는데, 제 말을 듣지를 않더라고요. 고집이 어마어마해요.”

막내 여동생의 첫 남자 친구였다. 삼엄한 경비병처럼 굴 수밖에 없었다. 산박은 이를 이해했다. 그라도 그럴 것이었다. 그들의 여동생처럼 빛나는 업적을 쌓아 나가는 자는 잘 없을 테니까.

“그럼 제 이름으로라도 미루세요. 아직은 서아 씨 옆에 당당히 설 위치는 아니니까요. 첫 단추를 그렇게 남의 뜻대로 끼우고 싶지는 않아요.”

“저도 똑같은 생각이에요. 흐흡흣…….”

그녀가 웃음을 참는 소리를 냈다.

“하지만 산박 씨를 변명거리로 내세우지는 않을 거예요.”

“마음대로 하세요. 서아 씨의 의견에는 웬만하면 동의할게요.”

그 뒤에 던전 훈련소에 대해서도 대화를 나누었다. 그를 키우기 위해서는 던전 훈련소가 필요했다. 던전 기업을 이끌고 있기에 이는 자연스럽기도 했다.

“리모델링 중이에요. 다 끝나면 옥시모론은 최신식 던전 훈련장을 대여하게 될 거예요.”

“고마워요.”

산박이 순수하게 감사를 표했다. 다만, 대여는 대여였다. 언제든지 출입을 금지당할 수 있었다.

‘내 가치를 꾸준히 내보이고, 내 커리어를 높이고, 더 높은 곳으로 나아가야겠지.’

“스테이크나 썰러 가요. 오랜만에 레드와인을 마셔야겠어요.”

“좋습니다.”

하루가 저물어 갔다. 그녀를 지키는 경호원의 눈이 있었기에 저녁 아홉 시에 일찍 헤어졌다.

그 뒤로 산박은 연기 가문의 장 노인 덕을 봐서 농원에 도로를 깔기 위한 허가를 받고 공사도 빠르게 진행할 수 있었다.

아스팔트를 까는 곳의 양옆에는 150평 남짓의 온실을 건설하기로 했다. 따뜻한 온실에서 꽃을 피우고 양봉할 생각이었다. 그 공사는 족히 1년은 더 걸리는 공사였다. 빨리빨리의 민족답게 1년이면 빠른 수준에 속했다.

* * *

“축하합니다!”

서충호가 3레벨에 올라섰다. 축하할 만한 일이었다. 그 또한 이 팀장처럼 크게 축하받아야 마땅했다. 그러지 않는다면 산박이 서충호보고 이 회사에서 나가라는 말을 행동으로 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렇기에 서충호 또한 크게 축하받았다.

그 광경을 보며 산박은 냉철한 이성을 드높였다.

‘물꼬가 트였다.’

이제 하나, 둘 서서히 3레벨 던전 사용자들이 태어날 것이었다. 만약 이전과 같다면 산박은 서둘러 2레벨 전담 팀을 만들어야 했다. 옥시모론 기업을 저레벨부터 보고 있던 이들을 통해서 충성심 높은 던전 사용자를 키워내는 가장 좋은 방법이 전담 팀을 운용하는 방법이었다.

‘그러기에는 3레벨 레이드 던전에 들이는 돈이 만만찮지.’

1레벨 전담 팀만으로도 힘들었다. 1레벨 전담 팀도 적자기 때문이다. 게다가 2레벨 팀이 만들어지면 자연히 1레벨 팀에서도 2레벨 팀원이 되고 싶어 하는 이들이 나올 것인데… 그마저도 문제가 된다.

‘그렇다고 버릴 수는 없지.’

매주궤 팀장은 1레벨 던전 공략만 놓고 봤을 때 훌륭한 인력이었다. 여기에 관한 판단은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했다.

‘또 하나는 3레벨 레이드 던전 공략의 준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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