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42화 (242/270)
  • 242화

    * * *

    차에서 내린 배둔국은 박강민 이사가 내쳐지는 걸 볼 수 있었다.

    ‘고소하다, 새끼!’

    이사쯤 되면 임원이지만 이사 정도 되는 임원은 일이 제법 바쁘고 깨지는 것도 회장급한테 깨지기 마련이었다.

    “뭔 먼지가 이렇게 많아.”

    그 모습을 보고 배둔국은 짐짓 점잖게 굴며 흙을 털고 있는 박강민 이사를 지나갔다.

    “X발.”

    박강민이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꼴도 이런 꼴이 없었고, 쪽팔린다는 것이 무엇보다 컸다.

    ‘두고 보자. 뭣도 없는 개새끼가.’

    박강민 이사는 서둘러 장 노인의 집을 벗어났다.

    배둔국 또한 장 노인과 마주할 수 있었다.

    “일을 접으신다고 들었습니다, 어르신!”

    “장지건이가 제대로 말해줬을 텐데, 왜 먼 길을 마다치 않고 날 찾아왔어?”

    장 노인이 혀를 찼다.

    “정의 구현이 코앞입니다. 세종시 시민들을 봤지 않습니까? 이건 사과 혁명입니다!”

    “혁명이고 지랄이고 그 사람들이 너한테 돈 한 푼 쥐여준 적 있어?”

    “예?”

    냉랭한 말에 배둔국은 찬물을 엎어 쓴 것처럼 깜짝 놀랐다. 장 노인은 차갑기 그지없는 말투를 이어 나갔다.

    “너한테 돈 한 푼 쥐여 줬냐고. 네놈 살리는 데 10억이 넘게 들어갔는데, 네가 10억 낼 테냐? 그 사람들 하나하나 다 손잡아서 10억 달라고 하면 그 사람들이 줄 것 같으냐?”

    “그건…….”

    배둔국이 자연스럽게 눈을 내리깔았다. 남들이 기뻐하는 모습에 자신 또한 기뻐하며 이곳에 서둘러 찾아왔다. 세종시를 못된 사과 가격으로부터 해방시키는 건 뭔가 엄청난 사건 같았고, 큰일을 이룩한 것처럼 느껴졌다.

    무엇보다 자기 일처럼 여겨졌다. 하지만 그건 배둔국의 생각일 뿐이었다. 연기 가문의 뜻은 아니었다.

    “정신 차려, 이 사람아.”

    “죄송합니다.”

    장 노인이 담배를 피우기 시작했다.

    ‘이런 놈들이 있지.’

    남의 일을 마치 자기 일처럼 여기고 국위 선양 하는 이들의 성과를 마치 자신의 것처럼 여기는 벌레 같은 잡것들이 있다. 그건 민중의 속성이며 잡초 같은 것들의 성질이었다. 자신은 그 자리에 도달하지 못하기에 어떻게든 있지도 않은 연관성을 만들어내 타인의 성과에서 대리 쾌감을 느낀다.

    장 노인에게 있어서 그건 정말 더럽고 추잡스러운 자위행위였다. 그 행위에는 결여된 것이 있기 때문이었다.

    ‘나 자신의 이득이 없다.’

    자신이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자신의 성과가 있지 않은 곳에서 양팔 들어 올리며 환호를 내지르는 꼴은 실로 모순된 행위였다. 지금 배둔국 또한 그러했다.

    “사과 한 박스 팔 때마다 적자가 생긴다. 그 돈을 네놈이 다 감당을 하겠다면 한 달이든 반년이든 유지해 주마.”

    “아닙니다.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거듭되는 질타에 배둔국이 무릎까지 꿇으며 자세를 바꾸었다.

    “사람들이 좋다, 좋다 해주니까 마치 네가 대단한 사람이라도 된 것 같더냐? 그리고 1년 지나고 5년 지나면 그들이 아직도 너한테 웃어줄 것 같으냐? 자기 자식 초등학교 좋은 데 보내려고 눈 시뻘겋게 뜨고 이곳저곳 발품 팔고 있을 것이다.”

    “죄송합니다.”

    “쯧쯧. 이렇게 어리석어서야, 누가 널 믿고 사과를 유통해 주겠느냐?”

    “예, 예? 자, 장 어르신!”

    그가 벌벌 떨었다. 사과에 대한 제어력을 지니고 있는 것은 태산박임에도 장 노인은 거침없이 주인 행세를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장 노인과 배둔국 사장의 위치는 철저하게 갑과 을의 관계였다. 그 속에서는 무슨 말을 해도 다 먹힌다. 사슴을 돼지라고 해도 먹히고, 호랑이를 병아리라고 해도 그렇게 된다. 그게 이 바닥이며, 현실이라는 놈이었다.

    결국,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이었다. 입신양명의 시작에는 수신(修身)이 필수적으로 필요하다. 그리고 수신은 자신을 갈고닦음을 뜻한다. 이름 또한 떨치려면 자신의 이름이 있어야 한다. 거기에 남의 이름 따위는 쓸모가 없었다.

    벌벌 떠는 배둔국을 보며 장 노인은 혀를 더욱 끌끌 찼다. 이참에 길을 제대로 들여놓을 참이었다.

    “생각 단단히 하고 행동해. 안 그러면 어쩔 수 없어. 태 사장이 배둔국 자네와 나 중에 누구를 택할 것 같나? 결국에는 누가 중요하냐가 모든 것을 가를 수밖에 없다!”

    그 말에 배둔국이 땀을 삐질 흘렸다. 지나칠 정도로 현실감이 가득 들어있는 말이었다. 웃음 하나와 1억짜리 수표. 무엇을 택할지는 뻔하다. 사람이 죽든 말든 나 먼저 가석방을 위해서 같은 깜빵에서 생활하는 동료 등쳐 먹는 건 손쉬운 선택이었다.

    “…걱정하지 마라. 그래도 태 사장이 배둔국 자네를 가만히 두고 있지 않나. 허허허.”

    장 노인이 웃자 배둔국은 그제야 고개를 들 수 있었다. 하지만 마음은 절망스러웠다. 배둔국은 태산박과 그렇게 깊은 관계를 맺지 못하고 있어서였다.

    그는 그간 복수한다고 이곳저곳을 싸돌아다녔다. 그 대가가 지금 확실하게 다가와서 그를 압박했다. 걱정하지 말라고 해도 걱정할 수밖에 없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서 태 사장이 세뇌를 당하지 않는 이상은 배둔국을 지지해줄 리가 없었다.

    이를 통해서 장 노인은 배둔국을 완벽하게 휘어잡았다. 배둔국은 이번 일을 태 사장에게 감히 말하지 못할 터였다.

    ‘여기서 나가면 바로 태 사장님에게 찾아가야겠다.’

    그런 장 노인의 생각과는 다르게 배둔국은 벌써 태산박에게 꼬랑지를 덩실덩실 흔들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미 몇 번이나 덩치 큰 놈들에게 얻어맞았던 배둔국이었다. 그의 자존심은 거의 사라져 있었고, 겁대가리는 원래부터 상실했다. 은행 찾아가서 난동 부리는 양반이다. 머리에 열이 차오르면 눈에 보이는 게 없는 망나니 새끼가 되어 버린다. 그런 그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방법은 태 사장에게 가서 일러바치고 그에게 의탁하는 일뿐이었다.

    ‘까딱 잘못하면 내 목이 달아난다.’

    순식간에 죽을 수 있었다. 그만큼 배둔국은 소위 있는 놈들이 지닌 힘을 몸으로 느꼈던 경험이 있었다. 그건 매우 값진 경험이었다. 그게 지금의 배둔국을 변화시켰다. 하지만 행동으로는 장 노인에게 납작 엎드렸다.

    “앞으로도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래야지. 나나, 태 사장 눈 밖에 안 나도록 해야지.”

    그 말에도 배둔국은 속으로 욕지거리를 날렸다. 태산박은 문제가 안 생기면 자신을 보러도 안 오는 양반이었다. 태산박→장 노인→장지건→배둔국. 이 정도로 과정이 길었다.

    그에게 있어서 배둔국은 드루이드 사업의 하청 유통업자나 다름없었다. 유통 자체도 장기 계약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우선순위가 낮았지만, 그래도 배둔국의 입장에서는 어쩔 수 없었다.

    ‘유일하게 그분만이 날 구제할 수 있다. 이러다가는 내쳐진다!’

    장 노인의 말 속에 깃들어 있는 송곳을 배둔국은 정확하게 훑었다. 협박 좀 당해보고 이리저리 처맞고 다녀본 덕분에 생긴 눈치였다.

    “최대한 빨리 수습해서 마무리하겠습니다.”

    “그래. 인터넷 기자들한테 50만 원씩 돌려서 이것저것 헛소문을 낼 테니까 걱정 없이 진행해. 누구도 자네를 나무라지는 않을 거야. 전화번호 바꾸는 것도 잊지 말고.”

    “예!”

    배둔국이 냉큼 대답하며 묵례를 했다. 그러고는 장 노인이 축객령을 내리자 혼이 빠지도록 빠른 걸음으로 도망쳤다.

    그가 사라지자 장 노인이 지건에게 말했다.

    “유통도 다각화를 시켜야 해. 알겠느냐?”

    “예. 알고 있습니다. 집안 내에서 찾아보실 생각입니까?”

    “공무원 가문에 무슨……. 유통은 사람 장사야, 사람 장사. 사람 많이 필요하다.”

    하청만 한다고 다 되는 게 아니다. 그리고 그런 백정 사업을 하고 싶지도 않았다. 사람 장사 아무리 불황이 없다고 해도 손에 묻히기 싫었다.

    “허면, 어디를 생각하고 계십니까?”

    “기다려야지 내가 왜 찾아? 고기 냄새가 맛있어 보이면 오고, 아직 그 정도는 아니다 싶으면 안 오겠지.”

    그 기회를 누가 잡을지도 볼만할 것이었다. 나무 생육 호박젤리가 새롭게 드루이드 사과 과수원에 투입되고 있었기에 후보자들은 더더욱 빠르게 모습을 드러낼 터였다. 거기서 재미를 보는 건 연기 가문이었다. 산박이 과수원 사업을 그들에게 맡겼기 때문이었다.

    ‘그때 내치면 그만이지.’

    지금은 그저 겁을 줘서 배둔국이 딴짓을 못 하게 할 뿐이었다. 말로 협박한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여겼다.

    그사이에 배둔국은 다이렉트로 태산박에게 전화를 걸었다.

    ―예. 태산박입니다.

    무심한 듯한 목소리가 배둔국의 귀로 들려왔다.

    “안녕하십니까. 다름이 아니라 저는 배둔국이라고 합니다.”

    “예! 다름이 아니라 저 좀 살려 주십시오! 이러다가는 목이 잘려 나갈지도 모릅니다.”

    급발진 하는 모습에 산박이 그를 진정시켰다.

    ―무슨 일입니까? 진정하고 말해 보세요.

    배둔국이 모든 걸 말하자 태산박은 속으로 헛웃음을 지었다.

    ―배 사장, 여기서 내가 뭘 도와줍니까?

    “예?”

    ―납작 엎드리고 계세요. 괜히 이 줄, 저 줄 잡으려고 하지 마시고……. 아셨습니까?

    “예…….”

    전화가 뚝 끊겼다. 배둔국은 차를 갓길로 멈춰 세웠다. 갑갑한 마음이 하늘을 다 가릴 정도였다.

    배둔국은 운전석을 뒤로 쫙 빼서 드러누웠다가 다시 문을 열고 차 밖으로 나갔다. 하늘은 넓었으나 자신의 마음은 턱 막혀 있었다. 혈관 하나하나가 자꾸 멈추는 기분에 휩싸여서 가슴을 주먹으로 쾅쾅 두드렸다.

    기반이 없으면 그저 처맞고 다닐 수밖에 없고, 고개를 조아리고 다니는 수밖에 없었다. 그 현실에 배둔국은 눈시울이 조금 붉어질 지경이었다. 하지만 그런 시간조차도 그에게는 사치였다.

    ‘돈 벌어야지. 뭐 하냐, 둔국아.’

    가족이 자신만 바라보고 있었다. 여유가 생겼음에도, 사장 노릇 하고 떵떵거리며 다녔을 때도 자기 아내는 손에 물 묻히며 남의 식당 장사 도와주고 50만 원 집에 벌어 오고 있었다. 짧게 하는 것이라서 돈이 적다. 그래서 하지 말라고 했던 적도 있었다.

    “고작 50만 원 아니야? 그냥 하지 말고 애들이나 행복하게 해줘.”

    “50만 원이라니? 2억 4천만 원이지.”

    “응?”

    “내 나이를 생각하면 적어도 40년 동안은 돈 벌 수 있잖아. 한 달 50만 원이면 2억 4천만 원이잖아? 그런데 무슨 적은 돈이야? 나중에 우리 애한테 그만한 돈을 내가 줄 수 있다는 거잖아. 얼마나 기분이 좋아?”

    “…….”

    그 돈은 차곡차곡 통장에 쌓여가고 있었다. 그리고 배둔국 아내의 손은 이제 제법 거칠어졌다. 온수를 틀고 설거지를 하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서빙하기에는 마음이 약한 아내였기에 설거지를 자처하는 것도 있었다. 편한 일보다는 사람 부딪치지 않는 일을 찾는 그녀였다. 그런데도 뚝심 하나는 대나무보다 단단하다.

    배둔국은 다시 도로를 질주했다. 분했던 마음은 이미 싹 사라졌다. 거기에는 자식 둘 아래에 둔 아빠가 있었다.

    ‘태 사장 말대로다. 지금은 바짝 엎드리고만 있어야 한다.’

    기회는 반드시 올 것이었다. 그리고 애초에 자신이 잘못했다. 태산박에게 그 어떤 것도 쥐여주지 않았고, 자주 보지도 않았다. 그런데 자기를 살려 달라고 했으니 얼마나 웃겼을까.

    ‘나, 배둔국이도 밟히면 꿈틀한다는 걸 보여주면 된다.’

    * * *

    [레벨 업 시스템을 가동합니다. 사용자 이시은을 인식합니다. 필요한 정보를 출력합니다……. 던전 사용자 이시은의 존재를 특정합니다. 당신은 카르마의 선택을 받은 자입니다.]

    [2레벨 던전을 클리어했습니다.]

    [죽음의 신이 당신을 주시하고 있습니다.]

    [탯줄로 뒤엉킨 발이 획득 카르마를 10% 상향 적용했습니다.]

    [시체 묘지가 던전으로부터 시체를 10구 확보했습니다. 현재 확보된 시체는 101구이며 시체 100구를 소모하여 네크로맨서의 무작위 주문과 기술을 획득할 수 있습니다. 단, 현재 레벨보다 높은 것은 얻을 수 없습니다.]

    [마녀의 신이 당신을 주시하고 있습니다.]

    [원한의 잔에 원혼이 충분히 담겼습니다. 무작위 마녀 주문 혹은 기술을 획득할 수 있습니다. 단, 현재 레벨보다 높은 것은 얻을 수 없습니다.]

    [충분한 카르마를 획득했습니다. 레벨 업을 위해서 남겨놓을 수 있고, 자신의 수준에 맞는 새로운 주문과 기술을 획득할 수 있습니다.]

    “레벨 업을 위해서 남겨.”

    시은이 거침없이 말했다.

    [확인했습니다. 레벨 업 하였습니다.]

    ‘드디어……!’

    시은은 전신의 세포가 일깨워질 정도로 환호했다.

    “상태 창.”

    [능력치

    근력(Strength) 6

    민첩(Agility) 10

    체력(Stamina) 10

    지능(Intelligence) 12

    지혜(Wisdom) 9

    매력(Charisma) 11

    추가 능력치 : 1]

    압도적인 능력치가 모습을 드러냈다. 같은 인간이라도 능력치의 편차는 심한 편이었다. 시은은 지금까지는 지능을 올렸지만, 이번에는 다른 걸 선택했다.

    ‘근력.’

    만약 태산박이 첫수를 벗어난다면 근접전이 벌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곳에서 우위를 점하려면 근력에 투자해야 했다.

    시은은 과감하게 근력에 추가 능력치를 투입했다. 거침없었다. 예정된 D-day에 산박을 죽이는 것만이 지금 그녀의 가장 중요한 목표였다. 보통 후방 직업은 안 찍는 근력을 찍는다면 나중에 큰 대가를 치러야 했지만, 이시은에게 그건 생각할 필요도, 가치도 없는 일이었다.

    ‘모든 건 그날을 위해서.’

    그녀의 새빨간 혀가 입술을 핥았다. 굉장히 긴 그녀의 혓바닥은 성적 매력이 다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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