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39화 (239/270)
  • 239화

    “우리가 양봉 기구부터 시작해서 온갖 것들을 직접 목공으로 만들었는데, 그러니까 이 백까마귀가 어찌나 현명하게 구는지 몰라. 사람들에게 벌꿀도 직접 물어다가 가져다주기도 하고, 아주 효자 노릇을 톡톡히 해!”

    노갑비 이장이 헛소리를 늘어놓았다. 방금만 해도 까마귀 새끼가 얼마나 마을에 피해를 줬는지 말했으면서도 또 말을 홱 바꾸었다. 누가 보면 정신병자라 여겼을 터였다. 하지만 거기에는 정직하게 하나의 목적이 있었다.

    ‘딱 보면 뻔하다.’

    그들이 원하는 건 이러나저러나 현상 유지였다. 딱히 개선할 것도 없었고 산박이 막 이리저리 마을 내에서 드잡이질하고 들썩거리면서 소란을 피우는 개혁도 원하지 않았다. 이는 곧 산박의 아래에 들어간다는 것이나 다름없어서였다.

    나이가 들면 더더욱 대우받고 싶은 마음이 큰데 젊은 놈에게 고개를 조아리고 싶지 않았다. 고로 그들은 현상 유지를 원했다. 그게 노갑비 이장이 단점도 장점도 생각나는 대로 지껄이는 이유였다.

    “아무리 벌들이 귀찮게 해도 벌꿀이 맛있지 않나! 하하하!”

    노갑비 이장이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어떻게 해서든지 분위기를 띄워 보려는 갸륵한 마음이 비쳤다. 하지만 거기에 비교하면 산박은 썩 달가운 표정이 아니었다. 무표정에 가깝고, 포커페이스를 유지하고 있었다. 결국 노갑비가 입을 다물고 그를 바라보았다. 이제 태산박의 차례였다.

    “벌꿀로 재미를 보셨을 텐데, 어느 정도 나옵니까?”

    시험지를 툭 던졌다. 답은 여러 개가 나올 수 있었다. 거기에 동그라미가 쳐질지, 세모가 쳐질지, 엑스 표가 쳐질지는 노갑비에게 달려 있었다.

    ‘바로 항복한다면 동그라미.’

    함께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거기서 끝이 아니다. 그 시험에서 정답을 맞힌 것뿐이다. 앞으로 나아가며 굴복해야 했다. 옥시모론 기업에 속해서 와촌리에서 기업 사업을 하게 될 것이었다. 이는 와촌리로서도 좋은 일이었지만 시골 양반들이 이를 두고 볼지는 모를 일이었다.

    ‘대답을 회피하기만 한다면 세모.’

    주변 마을 사람들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게 이장이다. 마을 유지라고 할 것도 없었고, 늙은이들이 모인 곳에서는 이장이 무소불위의 권력을 다룰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렇기에 둘 사이를 눈치를 보며 산박과 독대를 요구할 공산이 컸다.

    거기서 승패가 이루어질 것이었다. 산박으로서는 귀찮은 과정을 거쳐야 하지만 시간을 써볼 만하다. 시골은 독립된 공간이나 다름없었기에 그들을 돈으로 묶어 둔다면 문제가 크게 일어나지 않을 것이었다.

    ‘부패하겠지만, 적정 수준이지.’

    이는 외부인을 들이면 그만이다. 계약직으로! 매년 혹은 2년마다 바꾸는 셈이다. 혹 일을 잘한다면 연장할 수도 있었지만 추천할 수는 없었다. 인간은 간사하기 때문이다.

    ‘마지막 X 표.’

    당연히 산박의 권위에 도전하고, 그의 말을 사사건건 트집 잡고, 딴소리하며 반대하는 꼬라지를 보였을 때 받을 평가였다.

    “돈이라니 무슨 말을……. 까마귀가 벌꿀을 가져와야 얼마나 가져오겠어?”

    ‘거짓말을…….’

    이미 마을 회관에 벌집이 가득할 때 한번 왔었던 산박이었다. 백까마귀 양봉의 사업 가치. 그 최소한의 가능성을 깨달았다. 그게 지금 여기에 산박을 오게 하였다. 헌데 노갑비 이장은 쉽게 드러날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

    “마을 회관에 벌집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지금은 다 처분했지. 마을 회관이잖나.”

    “양봉 틀도 많이 제작하셨다고 들었습니다. 본인 입으로 그렇게 말하지 않으셨습니까.”

    “취미 삼아서 한 거지. 많이는 제작 안 했어.”

    설전이 오고 갔다. 하지만 결국 노갑비는 수익 창출을 인정하지 않았다. 산박으로서는 아쉬운 일이었다. 서로 윈윈할 수 있는 기회를 와촌리가 걷어찼고, 이제 남은 건 사업 정리뿐이었다.

    산박은 고개를 돌려 주변을 둘러보았다. 모두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떻게든 이 양봉 사업을 지키려고 어찌나 눈을 부라리는지 눈이 충혈될 정도였다.

    ‘어리석은 사람들.’

    그렇기에 민초. 그렇기에 범인(凡人). 자신이 무슨 실수를 하는지 알지 못하고, 알았다고 하더라도 금방 잊으며 똑같은 실수를 하는 평범한 사람들.

    그런 이들을 산박이 안타깝게 쳐다보았다. 자신과는 선천적인 지능 자체가 다른 이들이었다. 마을을 유복하게 만들 수 있는 수단이 들어오자 돈 욕심에 눈이 먼 마을 사람들의 모습을 눈에 새긴 산박이 다시 노갑비 이장을 바라보았다.

    “생각이 그러시다니 아쉬울 따름입니다.”

    “응?”

    그가 반문했다. 갑작스러웠다.

    “시험은 끝났습니다. 와촌리 마을의 무궁한 발전을 기원하겠습니다.”

    산박이 일어섰다. 이에 너도나도 일어서서 그에게 다가왔다.

    “이게 대체 무슨? 그냥 가겠다니!”

    “시험이라니? 무슨 시험! 대답해!”

    노갑비 이장 또한 그의 옷자락을 잡았다.

    “아, 아니! 태 사장! 그게 무슨 말이야? 조금 더 자세히 말해 보게! 우리 와촌리에 양봉업을 준다는 말이지?”

    분간을 못 하고 있는 모습에 산박이 웃었다.

    “자자, 다들 진정하시죠.”

    산박이 웃으며 말하자 그들이 멈춰 섰다. 당장에라도 산박에게 달려들 것 같던 기세가 누그러졌다.

    세 치 혀에 놀아나는 쉰여 명에 달하는 마을 사람들의 모습은 비현실적이었다. 하지만 그렇기에 현실적이었다. 현실은 지나칠 정도로 가혹했으며 복잡했고 극과 극이 매우 달랐다. 선진국이 하루아침에 후진국보다 못한 신세로 전락하는 비현실적인 일이 언제든지 발생할 수 있었다.

    자연스럽게 그들을 진정시킨 산박이 밖으로 나섰다. 수동적인 사람들로 변해버린 마을 사람들도 산박을 따라나섰다.

    산박이 스마트 차 키를 이용해서 차의 잠금을 턱 열자 모두 이를 막아섰다. 노갑비 이장 또한 산박의 행동을 통해서 그가 뭘 하려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이게 뭐 하는 짓인가!”

    “소리 지르지 마십시오. 지금 소리 지를 입장이십니까?”

    산박이 냉철한 눈으로 그를 노려보자 노갑비가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다른 이들은 너도나도 손가락질하며 산박을 가리키고 가축 울음소리처럼 말을 쏟아냈다.

    “이대로 가면 우리는 어떻게 하라고!”

    자신들의 미래를 산박에게 맡기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뭐라고 말을 하고 가야지!”

    어떻게든 확실하게 지금 이 기세를 타서 산박이 자신들에게 유리한 결정을 하도록 다그치는 자도 있었다.

    “이럴 거면 우리를 왜 부른 거냐고!”

    노갑비 이장이 부른 것을 산박이 부른 것으로 착각하는 자들도 튀어나왔다. 개판도 이런 개판이 없었다. 이를 통해서 산박은 이미 했던 결정에 대한 근거를 더욱 확고히 하며 강화시킬 수 있었다.

    ‘역시 내가 옳았다.’

    하나를 알면 됐는데, 둘도 알게 되었다. 더는 미련이 없었다. ‘프로세스’, ‘절차’. 그런 게 존재하지 않고 주먹구구식으로 살아가는 이들에게 떨어질 떡은 없었다. 이제는 그런 시대였다. 협회가 돈 잔치 하기 바쁜 야구조차도 데이터로 하는 시대인데, 이들은 그런 협회보다도 못했다.

    “이익! 이이익!”

    그렇기에 그들은 기를 쓰고 차 문을 닫고 차를 에워쌌다. 이번에도 주먹구구식으로 나서면 뭐라도 될 것처럼 여겼다.

    2000년대, 행패를 부려서 기업의 농업 진출, 스마트 농법을 막아섰던 것이 대한민국의 자랑스러운 농부들이었다. 흙 묻은 농기구 양손에 꼬나들고 우직하게 움켜쥐었던 그 영광스러운 승리가 이번에도 나타날 것이라 의심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번에는 상대가 나빴다. 산박은 이들을 겁주는 것조차도 사치라 여겼다.

    ‘철저한 무관심이 그들에게 쥐어질 열쇠다.’

    그가 주문을 읊었다. 이에 푸른 빛이 그 몸 주변으로 뻗어 나왔다. 사실 지금까지 거의 사용하지 않은 주문이었다. 그 기이한 모습에 마을 사람들이 너도나도 물러갔다.

    “비, 비켜!”

    “악!”

    팔꿈치를 이용해 뒷걸음질 치는 자신을 막는 놈들의 옆구리를 쿡 찌르면서 제법 소란이 일어났다. 그러다가 입을 콱 다물고, 멍하게 산박을 바라보았다.

    펄럭!

    푸른 새 변신 2레벨 주문을 사용한 산박은 순식간에 거대한 대형 조류가 되어 있었다. 푸른 깃털은 윤기가 좔좔 흘러내렸고, 주변으로 깃털 수백 개가 흩날렸다. 급격한 변신 때문에 깃털이 쓸데없이 방출된 탓이었다.

    신비로운 눈동자를 한 푸른 새가 고개를 까딱이더니 이내 단번에 날아올랐다. 날개가 워낙 컸고 체중은 적어서 준비 동작 없이 그저 바로 날아오를 수 있었다. 그대로 날아서 사라져 버리는 그를 보며 마을 사람들이 악다구니를 썼지만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그, 그래도 이 차를 지키면 언젠가는 올 거 아냐!”

    “에효…….”

    바보 같은 소리를 하는 마을 사람의 말에 노갑비 이장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도 그들과 별반 다를 바 없다는 걸 깨닫지 못했다.

    “장 어르신을 찾아뵙자고! 그분이라면 놈을 움직일 수 있을 거야!”

    “말 같은 소리를 해!”

    시골 촌구석이다. 부동 지구의 옆에 있어서 그 혜택을 본 것뿐이었다. 그들이 장 노인에게 해줄 것은 아무것도 없는데도 그들은 장 노인을 외쳐 대었다.

    거기에 태산박은 장 노인이 그들에게 추천해준 사람이었다. 누가 중요한지는 형세를 보면 알았는데 그걸 볼 줄 몰랐다. 몇 번을 생각해도 성립할 수가 없는 거래였다.

    하루 뒤에 장굉려가 차 키를 들고 나타났다. 마을 사람들은 그의 앞에서 사정사정하며 굽신거렸다.

    “어떻게든, 안 되겠습니까? 다시 한 번만이라도 방문하게 도와주십시오.”

    노갑비 이장은 산박에게 허리를 굽히지 않고 장굉려한테 굽히기 바빴다. 소 잃고 외양간을 고치는 사람이 얼마나 많으면 속담까지 있겠는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인간의 속성이었다. 천천히 늪으로 들어가는 게 평범한 사람의 몰락이었다. 반짝 찾아온 행복이 얼마나 중요한지 몰랐다.

    잘못을 고치는 방법은 현실에 많지 않았다. 인생이라는 정류장에 선 버스는 지나가면 끝이다. 똑같은 버스는 결코 돌아오지 않는다. 똑같은 버스가 돌아왔다고 여길 뿐이었다.

    “말씀은 드려 보겠습니다. 그런데 왜 건드신 겁니까?”

    “예? 건드렸다뇨……. 전혀 그런 게 아닙니다.”

    “아니라고요? 사람 쉰 명 잔뜩 불러서는……. 그게 사람이 할 짓입니까? 후우……. 그래도 말씀은 드려 보겠습니다. 자중하고 계세요.”

    “예.”

    물론 장굉려가 태산박에게 한번 권유할 일은 절대로 벌어지지 않았다. 그저 립 서비스이며 소셜 스킬에 불과했다.

    차가 떠났고, 그 하루가 저물 때까지도 태 사장에게서 연락은 없었다. 반대로 그들이 연락해도 받지 않았다. 스팸으로 처리되어서 자동으로 전화가 끊기고 있었다.

    산박과의 거래는 그렇게 뚝 끊어졌고, 무관심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그래도 시간은 흘러간다. 와촌리의 시간 또한 흘러갔다.

    투둑, 툭!

    가장 먼저 꿀통백까마귀가 역소환되면서 그로부터 온기를 받지 못한 꿀벌들이 죽어갔다. 계곡에 있는 마을이었기에 추울 때면 매우 추웠다. 곳곳에 꿀벌들의 시체가 즐비했다. 이를 먹으면서 곤충들이 갑자기 많아졌고, 나방이 사람들의 창문에 드득드득 붙어 있기도 했다.

    호러 영화의 한 장면 같은 기이한 일들이 와촌리에서 알게 모르게 퍼져 나갔지만, 그마저도 서서히 사라져 갔다. 씁쓸한 결말이었다.

    * * *

    깔끔하게 차려입은 남자 직원은 흡사 모델과도 같은 핏을 자랑했다. 머리도 뒤로 깔끔하게 넘겨서 댄디해 보였다. 비비 크림으로 잡티를 제거하고 피부 톤을 밝게 맞췄다. 피부가 밝으면 막노동꾼으로는 안 보이기 마련이었다.

    “이게 요즘 가장 잘나가는 3레벨 던전 소비 아이템, 화염 텁 뭉게 가루라고 불리는 겁니다. 레이드 필수품 중에 하나라고 말해질 정도로 효능이 좋은 반면에 들어가는 원가가 크지 않아서 1g당 1만 원 꼴입니다.”

    직원이 손을 들어 시연 영상을 가리켰다.

    “자! 여기 보시면 아시겠지만, 화면 속에 보이시죠? 처음에는 가루에서 화염이 쏟아져 나오고 그다음에 매캐한 독 연기가 쏟아집니다. 무엇보다 가루여서 바람만 잘 분다면 굉장히 광범위한 곳에 뿌려질 수 있습니다.”

    그 말에 이시은이 물었다.

    “제가 후방 직업이라서요. 인간형 괴물이나 비슷한 크기의 괴물에게도 효과적인가요?”

    “그럼요! 화상의 고통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다른 것에 비해서 불꽃이 빨리 꺼지기는 하지만 중요한 건 매캐한 독 연기를 오래 내뿜는다는 점입니다.”

    “불꽃이 꺼져도 연기는 계속 나온다?”

    “예. 그래서 일품 중 일품입니다. 실전을 겪다 보면 아실 텐데 사실 피해를 주는 것보다는 상대가 자신에게 얼마나 피해를 못 입히게 하는지가 더 중요합니다. 혼란을 오래 유지할 수 있다는 장점은 다른 던전 소비 아이템과 확실히 다르다는 걸 보여 줍니다.”

    “최소 몇 g을 구매해야 하나요?”

    “권장량은 30g입니다.”

    “50g. 일시불로요.”

    시은이 카드를 건넸다. 냉철한 산박을 상대로 쓸 만해 보이는 아이템이었다. 특히 시야를 차단한다는 것이 마음에 들었다.

    ‘리볼버 윈드 롱 소드’, ‘화염 텁 뭉게 가루’. 두 개가 갖춰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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