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37화 (237/270)

237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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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산박은 늦은 시간에 장 노인의 거처로 향했다. 입구에는 장굉려가 연락을 받고 나와있는 상태였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사장님.”

장굉려가 깍듯하게 그를 대했다. 큰 접점은 없어도 착실하게 옥시모론 기업 내에서 활동하고 있는 게 장굉려였다. 조용하면서 최소한 할 건 다 하고 있었으며 문제도 일으키지 않는다. 곁에 두기 좋았다.

편의점부터 시작해서 자영업을 하는 사장님들은 이해할 수밖에 없었는데, 가게의 매출을 책임지고 또 자신의 체력을 보존해 주는 알바생 중 하나가 이런 장굉려 같은 사람이다? 분명 그 사장님은 전생에 유비처럼 인덕이 후덕한 사람이었을 터였다.

그만큼 문제없이 지내며 착실하게 기업의 부품이 되어주는 장굉려의 태도는 매우 소중했다. 욜로인지 골로인지 한 방 승부를 즐기는 최근 젊은이와는 크게 달랐다.

물론 그 이면에는 SNS의 기능이 너무 컸다. 남에게 허세를 부리는 것만큼 자존감을 높이는 게 없었고, 남들이 가지지 못하는, 혹은 가질 엄두도 내지 못하는 사치를 부리는 건 확실하게 자신을 특별하게 만들어줄 수 있었다.

그것이 자신을 좀먹더라도 그저 한순간의 찰칵거리는 카메라의 음성에, 전신이 떨리는 쾌감 속에 몸을 던지는 것은 그만큼 ‘행복’했기에 매우 중요했다. 그리고 그 행복에 관한 판단은 현대에 와서는 사람마다 모두 다르기도 했다.

그렇게 말하는 자가 있을 터다. 허나 그건 어리석은 일이다.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불평등하게 태어나기 때문이며, 상황에 따라서 모든 가치가 변화될 수 있었다.

적어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산박이 옳았다. 그는 기업인이며, 장굉려 사원의 사장이었다. 기업 차원에서 장굉려는 좋은 인간이었다. 착하고 선하며 필요한 인력임에 틀림이 없었다.

“이번에 서 팀장이랑 같이 안 가서 걱정했습니다. 형님의 기일이셨다고…….”

서 팀장에 소속되어 2레벨 던전을 공략하는 팀원인 장굉려는 이번 던전 공략에 참가하지 않았다. 개인 사정상 그렇다고 했는데, 절로 걱정이 되었다.

“예. 신경을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심려를 끼쳐서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위에는 형님 기일입니다. 기일에도 회사 못 쉬면 그게 회사입니까? 감옥이죠.”

산박은 개의치 말라며 굉려를 신경 써주었다. 걸어가며 장굉려가 산박에게 현 상황을 설명해 줬다.

“배둔국이라고 기억하십니까?”

“과수원 유통 때문에 지건 씨한테 접근한 유통업자로 알고 있습니다.”

“주제도 모르고 날뛰는 기색이 제법 있었지만 돈맛에 고개를 숙인 채 지금까지 함께 사업하던 사람입니다. 본인 스스로도 한번 덴 경험 때문에 자중하고 있지만, 그 기질이 어디 가겠습니까?”

“선을 넘었다는 말씀입니까?”

굉려가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 힘들 때 도와주지 않은 사람들에게 제법 큰소리를 치고 다녔던 모양입니다.”

“거기서 냄새를 맡았군요.”

“예. 물론 사업 규모를 보고 언젠가 달려들었겠지만, 이번에 그 사람 덕분에 조금 시기가 앞당겨졌습니다.”

예정대로였다면 더 수월하게 막아냈을 것이었다.

“수작질을 건 회사는 어딥니까?”

“세종 은행과 전국 사과 협회입니다.”

“두 곳이라니…….”

“애초에 두 곳이 하나라고 봐도 무방합니다. 일단은 들어가시지요.”

장굉려가 대화를 끊고 소리를 제법 높였다.

“어르신, 굉려입니다. 태 사장님과 함께 왔습니다.”

“들어오너라.”

“예.”

문을 열고 장굉려가 손짓하며 산박에게 먼저 들어갈 것을 권유했다. 낯간지러운 짓이었지만 산박은 이를 받아줬다. 괜히 실랑이를 하는 게 더 문제라 여겼다.

산박이 안에 들어가자 장 노인을 제외한 이들이 괜히 몸을 일으켜서 반갑게 그를 맞이해 줬다. 서로 악수를 나누고 웃는 낯으로 마주 보았으며 덕담을 나눴다.

특히 배둔국은 허리를 팍 꺾었다. 배꼽 인사를 하고 산박과 양손으로 악수를 했다. 실로 극진한 대접이었다. 시작부터 찍! 소리도 못 내고 굽신거리기 바쁜 모습을 보여줬다.

‘다른 사람 눈치도 안 보고, 허. 대단하다고 해야 하나…….’

산박은 오히려 그 모습에 조금 감탄했다. 사업하는 사람 중에는 자존심 없는 사람이 많다고 할 수 있었지만, 그래도 누구보다도 더 남의 눈치를 보는 게 사업하는 사람이었다. 사정이 조금만 허락되면 바로 외제 차부터 뽑고 보는 게 사업하는 사람이다.

“큰일이 나서 다급하게 왔음에도 다른 분들보다 늦게 와서 죄송합니다.”

조금 분위기가 가라앉자 산박이 그렇게 사과하며 장 노인에게도 인사를 올렸다.

“앉아, 앉아. 급히 오느라 고생했네!”

장 노인은 남들이 다 앉고 나서야 자기 혼자서 일어나서 크게 산박을 대우해 줬다. 똑같이 인사하는 것에 불과함에도 유독 튀어나오는 모습이었다. 연륜이 아깝지 않았다.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상대는 은행과 농업 조합입니다.”

산박의 말에 장 노인이 냉큼 주먹을 흔들어 보이며 목에 핏대를 세웠다.

“힘을 합쳐야지! 보통 놈들이 아니야.”

금융은 돈을 쥐고 있고, 농사일하는 협회는 인력 하나는 차고 넘친다. 가장 까다로운 놈들이었다. 자신이 가지고 있지 않은 걸 서로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부산 은행의 도움이 필요합니까?”

산박이 가장 중요한 것을 입에 담았다.

“나야 편하지. 근데, 괜찮겠어?”

장 노인의 의미심장한 말에 산박이 미미하게 웃었다.

‘여기서 굽힌다면 내 의도가 보인다.’

이래서 기반이 없으면 몰락하기 쉽다. 계속해서 자신의 의도가 내비쳐지기 때문이다. 잽에 맞아도 가만히 있는 덩치 큰 사람과는 다르게 뿌리가 얕은 사람은 계속해서 휘청거리고 자신의 약점, 자신이 원하는 바를 드러낼 수밖에 없었다.

‘다른 방도가 없지.’

정석이다. 되레 여기서 자신의 의도를 드러내지 않으면 손해가 막심한 것이 산박이었다.

첫째, 부산 은행에 속박된다.

‘차라리 장 노인이 낫다.’

둘째, 송서아와의 관계 또한 의존적으로 변하거나 그녀의 태도가 변할 수 있었다.

‘사랑은 변하지 않아도 사랑하는 배경은 변하는 법이다.’

그 배경에 의해서 보는 세계가 달라지고, 느끼는 바도 달라진다. 현실에 살아가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인도에 사는 사람과 강남에 사는 사람은 확연히 다를 수밖에 없었다.

사랑만 보는 사람은 현실적이지 못하다. 인간은 먹어야 하고, 잠을 자야 했다. 3일 72시간 잠도 안 재우는 반려자의 얼굴을 보면 뺨을 때리고 싶은 게 인간이었다.

“안 괜찮으면, 연기 장가가 나섭니까?”

이에 장 노인이 전을 하나 입에 집어넣었다. 다른 이들도 모두 상을 하나씩 가지고 있었고, 자신의 상에 술과 안줏거리가 있었다.

‘장 노인으로서는 고민해볼 만하다.’

산박은 안주 대신에 그냥 술만 한 모금 하며 장 노인의 표정을 살폈다.

연기 장가(家)도 결국에는 산박에게 기대고 있는 형국이다. 현금을 쫙쫙 빨아들이는 것이 산박의 사업이었다. 그런 돈 나오는 곳에 다른 놈들이 손을 뻗치려고 한다. 이를 막아야 하는 건 당연했다.

거기에 드루이드 사과 과수원의 수익은 공무원이 많은 연기 가문에 있어서 제법 중요했다. 형국만 놓고 보자면 연기 가문이 나서는 게 당연해 보였다.

산박이 굳이 먼저 자신의 입으로 직접 부산에 대해서 논한 것은 선수 친 것이나 다름없었다. 연기 가문의 자존심을 긁고 그들이 지닌 드루이드 과수원 사업의 수익이 누구에게 중한 것인지를 말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드루이드 사과 사업은 부산과 아무 상관이 없는데 그들 손을 뭣 하러 빌리겠어? 만약 부산이 나선다면 동래 송가(家)가 가만히 있을 리가 없지.”

“잔잔벼락을 가져갔는데 사과까지 노리겠습니까?”

산박의 말에 장 노인이 웃었다. 아주 킬킬대며 웃는 얼굴이 찌그러질 정도로 대차게 웃어 보였다. 이에 산박이 물었다.

“뭐가 그렇게 재미나십니까?”

“우리 태 사장이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군. 지건아, 드루이드 사과 하나 가져와라.”

“예.”

장지건이 일어나서 방을 나섰다. 그리고 장 노인은 스마트폰을 놀려서 영상 하나를 산박에게 보여줬다.

‘너튜브.’

전 세계에서 떼돈을 쓸어 담으면서도 국가에는 세금을 안 내는 파렴치한 곳이었다.

해당 영상의 조회 수는 그렇게 높다고는 할 수 없었다. 말 그대로 관계자들만 보는 재미없는 영상이었다.

거기에는 햇빛이 사과를 하나 비추고 있었다. 누가 봐도 드루이드 사과였다.

“이거…….”

빠르게 낮과 밤이 바뀌고 있었으며 사과는 계속 햇빛이 딱 노리는 자리에 놓여 있었다. 한쪽에는 투박한 글씨로 DAY 1이라 적혀 있었고 계속 숫자가 바뀌고 있었다.

“어때? 직사광선을 받아도 무려 보름을 버티는 사과야.”

“방부제 사과라고 난리 나겠는데요.”

산박이 부정적인 의견을 내놓았다. 이에 장 노인이 빙그레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너튜브 채널을 하나 보여줬다. ‘사과부부’라는 채널이었다.

‘구독자 숫자가 제법인데?’

1만 8천 명에 달했다.

“봐봐. 여기 보면 어떻게 하는지 다 보여주고 직접 주문을 받고 있다.”

“직접 주문요?”

“응. 말이 직접 주문이지 배 사장이 맡아서 하고 있지.”

이에 배둔국이 한마디 턱 보탰다.

“목록만 받고 택배를 보냅니다. 제법 인기가 많고, 정 의심이 가는 사람은 직접 여기까지 와서 가져가기도 합니다. 메신저를 통해서 그룹도 만들어서 틈틈이 물량을 공개하고 있습니다.”

“그렇게까지 해서 사과 사는 사람이 있습니까?”

“마진이 확 줄어들어서 기존보다 30% 싸게 살 수 있는데 당연히 사죠. 때에 따라서는 두 배 차이도 납니다. 물건 파는 놈들 중에는 양심이 배 밖으로 나오다 못해서 자기 부모 칼로 찌르는 놈들도 있습니다.”

똑같은 상품이라도 적게는 몇천 원에서 크게는 몇만 원이나 차이 나는 경우도 있었다. 한 놈만 걸리라는 식의 배짱 장사였다.

그런 놈들에게 한 푼, 두 푼 당하다 보면 짜증이 차오르고 어떻게든 싸게 구매하려고 애쓰기 마련이었다. 특히 이런 경향은 소비를 주도적으로 하기 시작하는 성인 때부터 점점 커진다. 종국에는 싸다 싶으면 차를 타고 가서 직접 가져오기도 한다.

그런 소비자들은 더더욱 대우받기 마련이었다. 메신저를 통해 물량을 먼저 파악해서 예약하고 택배를 보내는 등 활동을 펼친다. 그들의 목소리는 매출과도 직결되기에 담당자까지 붙여놓는 편이었다.

“와.”

산박이 감탄했다. 커뮤니티 및 그들만의 플랫폼은 확실히 이슈 몰이로 이어질지도 몰랐다. 아직은 아니지만, 언젠가 빵 터질 포텐셜은 확보했다.

그저 운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웅크린 곰처럼 겨울을 딛고 나서 따스한 봄에 다시 밖으로 나설 수 있는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기회가 온다면 반드시 잡아챌 것이다. 너튜브를 통해서 커뮤니티를 서서히 굳히고 있었다.

‘콘크리트 층이 생기면 새로운 소비자가 유입이 되었을 때 분위기를 만들어 나갈 수 있다.’

대단히 중요했다. 거기에 장지건이 들고 온 사과 또한 놀랄 만했다.

“사과가 배처럼 크네요.”

“그래서 저희 과수원은 kg 대비 값이 쌉니다. 모두 태 사장님 덕분입니다.”

“하하, 관리한 사람이 대단한 거 아닙니까.”

“아닙니다. 가만히 둬도 사과가 알아서 자라는데요.”

지건이 그렇게 말해도 산박은 손사래를 쳤다.

“관리하지 않는 나무와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서로 좋게 좋게 이야기를 이끌어 나갔다. 산박 또한 사과를 든 채로 말했다.

“확실히 이 정도까지 상품성이 높아진 사과라면 부산 은행도 눈독을 들일 만합니다.”

선물용 사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배도 선물용으로 많이 구매하는데, 사과가 한국 배처럼 크고 싸다면 말할 것도 없었다.

‘대단한 상품성…….’

선물용 거대 한국 배와 견줄 만한 크기를 지녔다는 것만 해도 그 위력을 실감할 수 있었다. 무조건 돈이 된다.

예를 들어 일정 금액 이상 혹은 적은 자본이라도 장기간 부산 은행을 이용한 이들을 가려 뽑아서 매 분기마다 1천 명에게 5kg의 드루이드 사과를 선물한다면? 그야말로 선방하는 것이었다.

단순히 생각해도 과일이 지니는 특별함은 한국에서 더더욱 컸다. 물론 그렇게 하지 않고 은행 고객에게 세일권을 줘도 나쁘지 않았다. 수익도 올리고, 홍보도 하고, 서로 윈윈이었다.

‘서아라면 분명히 날 위해서라도 부동 지구로부터 드루이드 사과 사업을 가져가려고 하겠지.’

뜻대로 안 된다면 한 다리라도 쑥 집어넣고 싶을 터였다. 다만, 그래서야 산박만 불편해질 뿐이었다. 부동 지구와의 인연을 최대한 오래 끌고 가고 싶은 것이 그였다.

‘도망칠 곳이 하나라도 있어야 하니까.’

“그럼 장 어르신께서는 어찌할 생각이십니까?”

이에 장 노인이 미소를 흘렸다.

“어쩌긴, 맞서 싸워야지.”

장 노인이 배둔국을 보며 말했다.

“연기 장가(家)가 돈 되는 대로 쏟아부어 주겠다. 닥치는 대로 사과 사들여서 70% 할인 가격으로 때려 넣어. 세종시의 사과 가격을 박살을 내버리란 말이야!!”

이에 배둔국이 냉큼 고함을 꽥 내질렀다.

“예!”

“그리고 태 사장도 로열티를 당분간 참아 줘야겠어! 그렇게 해주겠는가?”

“모두 출혈을 감수하고 있는데 제가 어떻게 돈을 탐하겠습니까? 마음대로 하십시오.”

“고맙네. 그리고 지건이는 전화 돌려라. 세종시에서 밥벌이하는 지방 은행 주제에 누굴 건드렸는지 보여 줘야겠다.”

“예!”

그들이 빠르게 행동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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