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6화
<사과 전쟁>
배둔국은 장 노인의 앞에 섰다. 물론 장지건도 함께하고 있었으며, 제법 큰 문제에 봉착하였기에 장굉려 또한 오고 있었다.
적어도 태산박과 함께 던전에 뛰어들 가능성을 지닌 암살자 장굉려는 이번 자리에 있어볼 만했다. 그렇기에 장 노인의 호출을 받았다. 그가 옥시모론 기업에 속하게 되었을 때부터 이미 산박과 장굉려 그리고 연기 장가(家)는 한 묶음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니까 입 잘 간수해.”
장 노인이 배둔국에게 말하자 그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며 진지한 표정을 여실히 보여줬다.
강자 앞에서는 고개를 숙여야 하는 것이 이 바닥이다. 무엇보다 배둔국은 세종 은행과 전국 사과 협회 및 과수원 협동조합으로부터 갑질을 당했다. 그렇게 돈을 찔러주고 회비도 꼬박꼬박 냈지만 필요할 때 그 누구도 그를 도와주지 않았다.
‘그때 비하면 지금은 천국이다!’
고개를 잘 숙일 줄만 알면 된다. 그리고 들어보니 계획도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서로 도움이 되는 잘 짜인 판이었다.
“내가 전화하지. 지금쯤이면 딱 던전 공략을 끝냈을 거다.”
장 노인이 스마트폰을 들어 올렸다. 통화음이 그의 귀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 * *
[레벨 업 시스템을 가동합니다. 사용자 태산박을 인식합니다. 필요한 정보를 출력합니다.]
[던전 사용자 태산박의 존재를 특정합니다. 당신은 카르마의 선택을 받은 자입니다.]
[2레벨 던전을 클리어했습니다.]
[충분한 카르마를 획득했습니다. 레벨 업을 위해서 남겨놓을 수 있고, 2레벨 주문과 기술을 획득할 수 있습니다.]
[야만신의 선물이 도착했습니다. 2레벨 야만신 권속 소환 주문 혹은 드루이드 기술과 주문 중 선택할 수 있습니다.]
한 달에 단 두 번. 그렇게밖에 갈 수 없는 2레벨 던전을 클리어한 산박이 빙그레 웃음을 지었다. 들어도 들어도 질리지 않았다.
‘바람곰의 흉터 주문 같은 것만 안 나오면 좋을 텐데.’
동물로 변신했을 때만 사용 가능한 데다가 안 그래도 공격력이 부실한 바람 마법을 다섯 갈래로 분산시킨 바보 같은 공격 주문이었다. 평생 가도 쓸 일이 없어 보이는 주문이었다.
“던전 보상으로 2레벨 주문을 선택하겠다.”
[2레벨 주문, 난쟁이 텃밭꾼(Pygmy Gardener) 소환 주문을 획득하였습니다.]
‘빌어먹을.’
들어오는 정보를 통해서 산박이 주문을 순식간에 파악하고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물론 2레벨 주문이다. 2레벨 주문의 수준을 생각하면 나쁘지 않았다.
‘해도 해도 너무하다고 해야 하나. 공격 주문이나 보조, 회복 같은 것이라도 많이 나오지.’
아직도 해독 주문 하나 없다는 건 산박이 말이 안 될 정도로 운이 나쁘다는 걸 보여주고 있었다. 그냥 회복 주문과 해독 주문은 효율성 문제로 큰 차이가 존재했다. 독만 지우고 사라지는 해독 주문과 닥치는 대로 치유하는 회복 주문의 효율성 차이는 클 수밖에 없었다.
산박은 다시 난쟁이 텃밭꾼 소환 주문에 생각을 돌렸다.
‘그래도 나니까 효율성은 낼 수 있겠어.’
난쟁이 텃밭꾼의 키는 120~140cm. 소환할 때마다 객체의 변동성이 제법 크다. 비전투 소환물인 데다가 이름 그대로 밭을 가꾸고 농사를 좋아하는 놈들이었다.
‘절대복종이 마음에 들기는 하지만, 안 하려는 것은 안 한다.’
싸우라고 해도 싫으면 웅크리는 것들이었다.
‘지혜 수치에 따라서 소환 가능한 숫자가 다르다.’
선천적인 수치가 능력치였으며, 1 레벨 업을 할 때마다 1밖에 못 올린다. 기술을 통해서 얻을 수도 있지만 미미한 수준에 불과했다.
‘지혜 3당 한 마리 더 소환.’
기본 한 마리+지혜 보정치. 현재 산박의 지혜 수치는 16에 달했다. 다른 후방 직업과 견주어 봤을 때도 압도적인 수치였다. 아무리 발악해도 3레벨 던전 사용자의 지혜 수치는 9 혹은 8, 엘리트라고 한다면 10이었다. 16이면 상위 0.001%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저 다른 수치들이 대단히 낮아서 하위권에 등록되었을 뿐!
총 여섯 마리의 난쟁이 텃밭꾼을 소환한다면 농사로 나름대로 재미를 볼 수도 있어 보였다.
특히 고가치 상품인 파프리카가 가장 먼저 산박의 뇌리 속에 들어왔다. 특히 대한민국 파프리카의 일본 의존도는 80%에 달할 정도로 높았다.
수많은 한국인이 한국을 농업 후진국이라 생각하고 있지만 실상은 농업 대국 중 하나였다. 그저 단가가 다른 곳에 비해 높아서 수출액이 낮은 건 한없이 낮을 뿐이었다.
단가가 높은 것 중에 대표적인 것으로는 쌀이 있었다. 그 덕에 한해 대한민국이 소비하는 ‘쌀 보관비’만 해도 수백억에 달하는 형편이라 최근에는 나라쌀이라는 브랜드명으로 곳곳의 사회적 약자들에게 달마다 투입되고 있었다. 보관해서 오는 혈세의 지출을 감당하지 못해서 어쩔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렇게 쌀이 썩어도 신청하지 않으면 오지 않는 그 나라쌀, 한 포대가 있다는 것조차도 모르는 사람도 있었다. 모르면 혜택조차도 받지 못하는 이 더러운 세상은 오로지 아는 이들이 독식하는 곳이었다. 비싼 고급차 끌고 임대 아파트에서 10년, 15년 떵떵거리며 소비 줄이며 하고 싶은 거 하고 사는 이들이 가득했다.
‘생각하면 나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대단한 것도 아니다.’
산박이 내린 난쟁이 텃밭꾼 소환 주문(2레벨)에 대한 총평이었다.
“야만신의 선물은 드루이드 주문으로 획득하겠다.”
[2레벨 주문, 떡갈나무 옷 피부(Oak tree Clothes skin)를 획득했습니다.]
지식이 스며들어 왔다. 산박은 냉정하게 주문의 이모저모를 파악해 나갔다.
‘외형적인 특징.’
장비에 얇게 도포될 수 있고, 피부에 바르는 머드 팩처럼 달라붙는다. 형편 좋은 버프 마법이었다.
‘효과.’
낮은 보호력을 주는 것에 불과했다. 장비가 보호하기 힘든 곳도 능히 보호할 수 있다는 점에서 높은 점수를 받을 수 있었지만, 보호력이 너무 낮았다. 작은 나무 판 하나 덧댄 것에 불과했다. 없는 것보다는 확실히 낫지만 대단한 방어 마법이라 부르기 힘들었다.
‘장점.’
힘의 소모가 매우 낮은 편이다. 마음껏 쓰기 좋았다.
‘장기간 지속 가능.’
반나절 이상 유지되지만, 타격에 따라서 소실되는 속도도 빠르다. 곧, 장점이라 할 수도 없었다.
‘마음껏 쓰기 좋은 버프 마법이라.’
눈도장 찍기는 좋았다. 1레벨이나 2레벨 때 나왔고 산박이 별 볼 일 없는 사람이었다면 정치질에 톡톡히 썼을 터였다. 하지만 지금은 하등 쓸모없었다.
허나 높은 지혜 수치가 정확하게 그 주문에 대한 지식을 관통했고, 산박의 머릿속에서 하나의 폭죽이 터져 나왔다. 남들은 수없는 검증과 비교 분석을 통해야 얻을 수 있는 ‘느낌’과 ‘결론’을 산박은 이미 손으로 짚어냈다.
‘쓸 만할지도 모르겠는데.’
특히 떡갈나무 옷 피부는 나무 생육 주문과 비슷한 면이 존재했다. 그 형질의 교집합을 융합한다면 제법 그럴듯한 결과물이 나올 수 있어 보였다.
그저 주문을 터득한 것만으로도 결과를 짚어낸 산박이 곧 새하얀 공간에서 두 가지의 주문을 융합하기 시작했다.
‘하나의 주문을 사용할 줄 안다면 응당 그 주문의 발현을 조각조각 내서 구분할 수 있지. 이는 주문 사용자로서 가지는 당연한 잔재주.’
틀렸다. 그런 게 가능한 던전 사용자는 극히 일부분에 불과했다. 단순히 레벨 업 시스템의 보정으로 주문을 비교적 쉽게 사용 가능하기 때문이다.
물론 산박 또한 그들과 다를 바 없었다. 중요한 것은 태산박은 ‘외눈붉은곰’의 소환 북을 통해서 하나하나 빠짐없이 주문을 그 어떤 보정도 없이 실현시키는 연습을 했다는 점이었다. 그 경험은 산박에게 날개를 달아줬고, 이런 것을 잔재주라 여길 수준으로 만들었다.
모든 것이 거미줄처럼 연결되며 산박의 성장을 도왔다. 매번 주문을 수련하며 지식을 체득하고 숙련도를 높이는 데도 꼼꼼히 공을 들이는 것이 태산박이었다. ‘진리’의 맛을 봤기에 노력했다. 그게 지금 이렇게 도움을 주고 있었다.
사아아…….
바람이 스쳐 지나가는 나뭇잎 소리와 나뭇가지의 단단함이 산박의 손에서 느껴졌다. 곧 하나의 기운이 되었다. 산박은 나무 생육 주문이 지닌 ‘핵심’만을 손바닥에 모았다. 그리고 그곳에 떡갈나무 옷 피부 주문의 ‘몸’ 내지는 ‘외형’을 심었다.
부룩.
액체가 불룩 튀어나오더니 이내 호박색으로 변질해 갔다. 탄력이 있어 보이는 액체가 서서히 굳었다. 지속력이 특히나 긴 떡갈나무 옷 피부 주문은 발현하면 그것으로 끝인 나무 생육 주문과 달랐다.
‘하나로 만든다.’
나무라는 공통점을 지닌 주문이었지만 그 외에는 모든 것이 다른 주문 두 가지가 산박의 손에 의해서 입맛대로 조작되어 새로운 주문으로 만들어졌다. 이를 인식한 카르마 시스템이 산박에게 말했다.
[융합 주문을 인식했습니다. 수준 확인 중……. 승인 절차를 이행합니다.]
[2레벨 주문 나무 생육 호박젤리(Tree growth Pumpkin jelly)를 획득하였습니다.]
[주문의 데이터를 갱신합니다. 갱신 완료. 해당 데이터를 던전 사용자 태산박에게 이전합니다.]
산박은 주문이 사용되었을 때 얻을 수 있는 걸 확인했다. 아주 편리한 시스템이었다.
‘나무 생육 주문을 떡갈나무 옷 피부 주문을 통해서 2레벨로 만든 가치가 있었는지 정확하게 판단할 수 있다니, 레벨 업 시스템은 쓰기 나름이다.’
나무 생육 호박젤리는 무려 10일 동안 나무 생육 주문을 퍼뜨릴 수 있었다. 던전 과수원에 심거나 장지건에게 관리를 맡기면 자주 갈 필요도 없었다.
‘좋다.’
산박의 몸은 하나뿐이었기에 대단히 편한 물건이었다.
새하얀 공간이 무너졌다. 밖으로 나오면서 산박은 이번 던전에서 얻은 물건을 위로 올렸다. 그리고 맡겨 두었던 물품을 수령했다.
‘부재중 통화가 한 건.’
곧바로 스마트폰을 조작한 산박이 통화 목록을 확인하고 곧장 그곳으로 전화를 걸었다. 상대는 금방 받았다.
“장 어르신, 무슨 일이십니까?”
―문제가 생겨서 말이야. 한번 와봐야겠어. 자네 빼고 일단 모두 모여 있거든.
“최대한 처리하고 가도 세 시간은 걸립니다. 여기 서울입니다.”
―저녁에 보자고. 들어가게. 던전 공략하고 나왔는데 바로 일을 맡겨서 미안하네.
“아닙니다. 들어가십시오.”
통화를 끊은 산박은 팀원이 올라오기를 기다렸다. 곧 서충호가 지하철역 입구에서 올라오는 게 산박의 눈에 들어왔다. 서 팀장은 자신이 없어도 능히 상황을 정리할 수 있었다.
“일이 생겨서요. 부탁 좀 하겠습니다.”
“예! 맡겨만 주십시오. 잘 마무리하겠습니다.”
산박은 곧장 움직였다. 세종시, 그곳에서부터 산 하나를 넘어서야 도착할 수 있는 부동 지구로 향했다.
* * *
송서아는 공항을 나오자마자 손짓을 하는 남자에게 한숨 쉬며 다가갔다. 그녀의 셋째 오빠 송한치 상무였다. 부산 은행에는 있지 않고 영업이 주류를 이루는 부산 금융에서 일하고 있었지만…….
“지금 평일 아니야? 출근은 어떻게 하고 여기까지 찾아온 거야?”
그 말에 송한치 상무가 그녀의 캐리어를 빼앗아 가며 말했다.
“여동생이 여행 외박 했는데 가만히 있을 오빠가 어딨어? 그놈은? 도망친 거야?”
“죄지었어? 도망은 왜 쳐. 세종시로 간 거뿐이야.”
송한치가 서아에게 다독이듯이 말했다.
“서아야, 네가 그렇게 하면 우리 가족은 계속 너한테 뭐라고 할 수밖에 없다. 그걸 왜 모르니?”
“성인 되어서도 연애 허락받고 해야 해? 그런 집구석이 어딨어?”
“적어도 배경이 비슷한 사람과 만나라는 거다. 너 둘째 형이랑 첫째 형이 얼마나 화가 났는지 알기나 해?”
“몰라. 알고 싶지도 않아. 그리고 우리 엄마는 벌써 허락하셨는데? 연애도 제대로 못 할 거면 여자로 왜 태어났냐고. 아빠랑도 연애결혼 했잖아.”
“그래서 그 고초를 겪었잖아…….”
서아는 그 말에 쿡 하고 손가락으로 송한치의 옆구리를 찔렀다.
“짜증 나는 소리 하지 마. 지금 잘됐으니까 됐잖아?”
“그건 그렇지. 뭐든 잘되면 추억이 되기는 하지만…….”
안 되면 큰 문제다. 송한치는 그게 걱정이었다. 자신이 가진 것이 신기루처럼 사라지는 것도 조금 두려웠다.
“진지하게 생각해 봐. 계속하다 보면 결국 가주님한테도 이야기가 들어갈걸.”
“응.”
서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전에 어떻게든 뒤를 받쳐주고 앞으로 당겨줘야 했다. 적어도 결혼하기 전까지는 두고 보겠지만, 그것도 언제가 될지 모른다.
‘선 보라고 할지도 모르니까.’
빨리 결혼해서 자식이라는 문제를 해결해야 부모 마음이 편해진다. 그리고 일찍 낳고 일찍 자식을 키워놔야 나중이 편하다. 20대에서 30대, 30대에서 40대로 갈수록 체력이 후달린다. 운동을 꾸준히 하면 유지할 수 있다고 해도 체력이 20대 같을 리 만무했다. 하나부터 열까지 복잡하기 그지없는 문제들이 서아의 눈앞에 툭툭 들이밀어졌다.
“에효.”
“젊은 애가 한숨은. 그러니까 빨리 정리하라니까. 어차피 걔는 기반이 안 돼서 결코 허락 안 해주신다니까.”
“데릴사위로도?”
“사회 활동 그렇게 많이 하는 데릴사위가 어딨어? 길길이 날뛰실걸.”
“이제 그 주제로 말하지 마.”
“좋아. 밥은?”
“대충 기내식으로 해결했어. 생각도 없고…….”
“빵 먹으러 가자. 바로 건너편에 맛집 생겼다더라. 대왕카스텔라에다가 치즈를 그냥 확! 그 뜨끈한 걸 부어 주는데, 장난 아니라더라.”
그 말에 서아가 냉큼 발걸음을 옮겼다.
“좋아. 하나만.”
남자가 성욕에 미치듯이 여자는 식욕에 미친다. 송한치는 이를 잘 이용할 줄 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