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5화
* * *
테이바치 야스시. 산박은 그 백발의 남성을 바라보았다. 서로 독대하는 곳은 평범한 방이라기보다는 회장실이라고 부르기에 걸맞은 곳이었다. 대단히 클래식했는데, 나무가 아닌 것이 없었다.
‘나무 냄새가 코에 가득 들어온다.’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농밀한 나무 향은 기분을 좋게 만들었다.
“어떤가? 나무 향내가 대단하지?”
“예. 자연스러우면서도 확 맡아지는 게 신기합니다.”
“일본은 나무가 자라기 좋거든. 자주자주 교체를 하는 편이지.”
실로 사치스러운 말이었다. 냄새가 옅어지면 그냥 나무를 뜯어내고 다시 새 나무를 집어넣는다는 소리였으니까. 허나,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있는 게 야스시 회장이었다. 돈지랄을 해도 전혀 거북하지 않았다. 오히려 돈 씀씀이가 약하다고 말하는 게 옳았다.
“오래 붙잡아 둬서 부산의 오해를 사고 싶지는 않으니 바로 본론을 말하고 싶은데, 괜찮겠나?”
“예. 말씀하십시오.”
산박의 말에 교구몬의 회장이 입을 열었다.
“우리 교토에도 떡을 하나 줬으면 하네. 물론 자본으로 단단히 뒤를 받쳐주지. 필요하다면 인력도! 제공할 의향이 있네. 그 확답을 줬으면 하는데……. 어떤가? 받아들이겠는가?”
생각이 많아질 수밖에 없는 제안이었다. 산박은 송서아와 결혼까지도 생각하고 있어서였다.
‘부산 은행을 등에 업으면 게임 끝이다.’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성장할 때까지 자신을 지켜줄 수 있었다. 굳이 교토가 있을 필요는 없었다. 아무리 사이가 좋아도 그 사이에 끼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죄송하지만, 첫 단추가 중요한 법 아니겠습니까? 아직은 부산과 교토 사이에 끼고 싶은 마음이 없습니다.”
“누가 사이에 끼라고 했어? 부산에게 준 거 교토에도 하나 달라는 말이지.”
유통이라고 해도 마진까지 고정해서 받으면 아무래도 부산만큼 얻어먹지 못한다. 그렇기에 던전 사업을 하나라도 달라는 것이었다. 기왕이면 저레벨 상품이 좋았다.
“부산과 교토는 자네가 아는 것보다 더 서로 이용하는 사이야. 그런데 그 사이에 금이 가려고 하고 있어. 득이 되니까, 상황이 그러니까 부산 은행이 여기다가 공장을 짓는 것도 있지만, 그 속에는 서로의 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것도 있어.”
“세력 차이가 크게 나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는 말씀입니까?”
그가 웃어 보였다.
“자네는 정말로 부산 은행과 부산 금융이 대한민국의 던전 기업이 무서워서 교토에 잔잔벼락 공장을 짓는 줄 아는가? 허허, 생각보다 순진하구먼.”
“여론이 있지 않습니까.”
“여론은 무슨! 당장 기존 적금보다 1% 더 주는 상품을 내놔봐. 공작이고 나발이고 통하지도 않아. 거기에 던전 기업 중에 누가 부산을 치겠어? 헛소리지. 부산 사람 돈 쥐고 있는 기업을 공격한다고? 현실적으로 생각해 보게. 누가 총대를 메겠어?”
“…….”
그럴듯했다.
“정 어렵다면 부산 쪽과도 얘기해서 교토와 하나 하자고. 자네가 그렇게 부산을 겁내는데 내가 어쩌겠나?”
그렇게 된다면 모양새가 정말 재밌을 것이다. 산박으로서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 짓을 한다면 산박은 부산에 종속되는 꼴이며, 부산의 개가 되었음을 사방에 알리는 꼴이었다.
그렇게 했을 때, 부산은 거리낌 없이 산박을 압박하며 잡아먹을 터였다. 지레 겁먹고 이것저것 눈치를 보는데 가만히 있는 호랑이는 없다. 그건 송서아와의 관계가 아무리 돈독해도 소용없는 일이었다. 그녀가 집안의 어른이면 모른다.
몇 번을 생각해도 부산에 말하고 테이바치 가문과 사업한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전 부산의 개가 아닙니다.”
“그렇지. 개가 아니니, 그쪽 눈치는 볼 필요도 없지. 안 그런가?”
“조금은 다르지요.”
“다를 게 뭐가 있다고. 뭐라고 하면 나한테 달려와서 말해. 내가 따끔하게 한 소리 해주겠네.”
산박이 피식 웃었다.
“흠…….”
그 웃음에 야스시 회장이 코에서 숨을 길게 내뻗었다. 산박이 말했다. 그 목소리는 굉장히 차가웠다.
“회장님이 무슨 소리를 하든, 당장 사업을 같이하고 싶지 않습니다. ‘때’가 무르익으면 하나 해줄지도 모르겠지만, 지금은 아닙니다.”
“때라……. 자네가 때를 기다릴 줄 안다고는 보기 힘든데. 지금의 자네를 보게. 부산 은행이 하라는 대로 움직이고 있지 않나. 왜 이곳 교토까지 온 거지? 관광은 구색 아닌가. 정신 차리게!”
“오해하고 계십니다.”
“오해?”
산박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조금 상체를 들이밀었다.
“제가 부산의 그늘에 들어서려는 것은 맞습니다만, 부산의 개가 되려는 것은 아닙니다. 더더욱 교토와는 크게 상관하고 싶지 않습니다. 애초에 국외이지 않습니까.”
“국내에서만 활동하겠다? 이 말인가?”
“당분간은요. 앞서 말했듯이 때가 무르익어야지요.”
뜬구름 잡는 소리였지만 야스시 회장은 소파에 몸을 기대었다.
‘제법이다.’
시기를 기다리는 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처럼 보인다. 하지만 손에 땅을 쥐든, 주식을 쥐든, 적금을 쥐든, 그걸 10년 넘게 움켜쥐는 건 보통 일이 아니었다. 그걸 이해하고 있는 태산박은 이질적이었다.
“분명 개천에서 용 난 기업가라고 했는데, 허허. 신기한 사람이군.”
활화산처럼 타오르며 자신의 몸에 불을 질러 내달리는 것이 개천에서 용 난 사람의 기본적인 기질이다. 돈이 없으면 노력하고, 운이 찾아오지 않으면 그 운을 찾을 때까지 발을 멈추지 않는다. 그게 개천에서 용 난 놈들의 특징이었다.
운 좋게 하나 얻어걸리면 반짝 튀어 오르지만 그 뒤로는 내리막길 혹은 현상 유지에 머무른다. 기반이 없기 때문이다. 의사 합격해도 돈이 없어서 개원할 수 없는 의사들이 수두룩 빽빽하다. 빚더미에 앉은 개원 의사도 세상에는 많다.
이를 생각했을 때, 산박의 ‘때’를 기다리라는 말은 오히려 야스시 회장이 해야 할 말이었다.
‘도발해서 확 내지르는 도박사 같은 면모를 끌어 올리려고 했는데 정반대라니.’
달릴 땐 달리고, 멈출 땐 알아서 멈출 줄 안다.
“교토와 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지금은 아닙니다. 그러니 이해해 주십시오.”
“허허. 화끈하게 확 질러서 여기까지 도달한 거 아닌가?”
“예. 하지만 저는 멈출 줄도 압니다.”
“아쉽구만.”
야스시 회장이 실로 탄식하듯이 답했다. 산박이 이렇게까지 자신의 현 상황을 잘 파악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끝없는 투자. 멈추지 않는 기업가는 결국 역으로 내몰려서 잡혀 죽는다. 덩치를 키우면 매출은 계속해서 올라가지만 그 속에서 쓸모없는 것들이 득실거린다. 이를 일찍 정리하지 않으면 고꾸라질 뿐이다. 평범한 사람은 감히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의 부채가 들러붙어 결국 그 최후는 끔찍하다. 그게 혜성처럼 등장한 기업가의 말로였다.
산박은 멈출 줄 아는 사람이었다. 부산 업고, 교토 더블로 갈 수는 없었다.
‘거기까지 가면 제어할 수 없다.’
문제가 생겨도 답을 낼 수 없었다.
“필요한 일이 있으면 말하게. 부산에게 치일 것 같아도 말하고. 쫄딱 망하면 더더욱 나한테 말해주게.”
“말씀만이라도 감사합니다.”
예의 차리는 말에 야스시 회장은 참으로 아쉬움이 들었다.
“혹시 사귀고 있는 여자는 있는가? 사업으로 함께하지 못하면 다른 것으로라도 함께하고 싶은데…….”
그 말에 산박이 웃었다.
“지금은 송서아 지점장과 사귀고 있습니다.”
“약혼이나 혼인 신고는 하지 않았지?”
“예? 하하하! 농담도 짓궂으십니다.”
산박이 웃어넘기려고 했지만 야스시 회장은 웃음기를 싹 뺀 표정으로 일관했다.
“한 번만 만나봐. 정말 괜찮은 손녀딸이야.”
“아쉽게도 저는 호색한이 아니라서 한 명으로도 버겁습니다.”
일이 이렇게 되자 야스시 회장이 한숨을 내뱉었다.
“부산 은행이 보물을 가졌군.”
“더 하실 말씀은 있으십니까?”
“우리가 부디 서로 적으로 만나지 않았으면 좋겠군.”
“그런 일이 왜 생기겠습니까? 부산 은행과 교구몬은 서로 친하고, 대한민국만큼 교구몬의 학습지를 우대하는 곳도 없지 않습니까?”
두 사람은 빠르게 독대를 마쳤다. 산박은 철벽으로 잘 수비해 냄과 동시에 자신의 가치를 알렸고, 야스시 회장은 행패를 부리지 않고 일단 한 걸음 물러났다. 산박의 뒷배 때문이었다. 산박의 머리를 한 대 때리는 것도 고민해야 할 정도로 그의 뒷배는 컸다.
툭.
“그래도 부산 하나 줄 때 나한테도 하나 줘. 그게 맞는 거지.”
“생각해 보겠습니다. 미래에 일어날 일을 제가 어찌 확답을 해드리겠습니까?”
“한 번을 원하는 대답을 안 주는구먼. 그렇게 부산 은행이 좋은가?”
“부산 금융도 좋지요.”
송서아가 벽에 기대서 그를 기다리고 있다가 빠르게 다가왔다.
“이상한 소리는 안 하셨죠?”
“내가 그런 사람으로 보이더냐?”
“죄송합니다. 하지만 독대를 하셨으니 이 정도 의심은 해도 괜찮잖아요?”
야스시 회장은 한 번 웃으며 서아의 등을 두드렸다. 그리고 몸을 돌렸다.
송서아는 부산 공항으로 산박은 인천 공항으로 향했다. 산박은 공항에서 가만히 눈을 감으며 생각에 잠겼다.
‘이제 어쭙잖은 놈들은 내 상대도 되지 않는다.’
사회 계층이 크게 올랐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천방지축으로 다니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문제가 생기면 서아 혹은 서아의 부하 직원이 나서야 한다. 그 하나하나가 빚이었다.
‘자주 사용하면 서아의 영향력이 내 몸 깊이 침투하겠지.’
은혜를 갚으려고 하다가 어느새 전혀 다른 처지에 놓일 수 있었다.
‘3레벨 공략… 언제쯤 할 수 있을까.’
옥시모론 기업의 이들이 빨리 3레벨에 도달하기를 기다려야 했기에 언제가 될지 몰랐다.
‘1레벨이나 2레벨 던전을 돌면서 사업에 쓸 만한 주문이나 획득해야겠어.’
앞으로 해야 할 일에 대해서도 고민했다. 그저 카르마를 축적시키는 것보다는 1, 2레벨 주문과 기술을 획득하는 게 3레벨 던전에서 큰 도움이 될 수 있었다. 3레벨에서는 아주 다양한 놈들이 쏟아져 나오기 때문이다. 괜히 레이드 던전이라 불리는 게 아니었다.
* * *
“오랜만입니다, 사장님!”
배둔국이 웃음기를 가득 머금고 장지건과 악수했다. 그러고는 옆을 보았다.
“사모님도 대단히 아름다우십니다.”
“고마워요.”
윤다연이 눈웃음을 지었다. 대단히 차려입은 것도 아니었지만 돈이 해결되니 그녀는 절로 예뻐지고 있었다. 최근에는 눈독 들이던 화장품도 샀고 팩을 꼼꼼히 할 여유도 가졌다.
“출산 축하합니다. 아기는요?”
“자고 있어요. 온종일 잠만 자는데, 그게 엄청난 축복이래요.”
“무슨 네 시간마다 밥 먹여야 한다고 들었는데…….”
“저희 애는 아니에요. 물론 자주 먹긴 하는데 한번 자면 정말 세상이 뒤집어져도 몰라요.”
다연은 곧 안으로 들어갔다. 반면 지건과 둔국은 평상에 앉았다.
“오시느라 고생했습니다. 요즘은 별다른 어려움 없으시죠?”
“예. 누가 알겠습니까? 사과를 싸게 파는데 돈은 더 많이 떨어질 줄 말입니다. 하하하! 이번에는 직원도 세 명을 더 뽑았습니다. 그중에 한 놈은 10년째 음식점 배달만 한 놈인데, 좋아 죽습니다.”
“음식점이나 사과나 배달하는 건 똑같은 거 아닙니까?”
그 말에 배둔국이 손사래를 쳤다.
“말도 마십시오. 배달시켜 먹는 놈치고 제대로 된 놈 없습니다. 그게 제 지론입니다.”
“편하잖습니까.”
“배달, 시켜 드십니까?”
“여기까지 오는 배달은 치킨 한 곳뿐입니다. 비싸기도 하고요.”
그 말에 배둔국이 옳다구나 덩실 몸을 한 번 출렁거리며 무릎을 탁 쳤다.
“봐요! 배달이 편하기는 해도 만들어 먹는 게 싼데 어떻게 거기에 그렇게 돈을 펑펑 쓰는지……. 전 도저히 이해가 안 간다니까요. 그러니까 배달시켜 먹는 놈들은 조심하셔야 합니다.”
그가 머리에 검지를 놓으며 말했다.
“나사 하나 빠진 놈들이 분명합니다.”
“너무 일반화 아닙니까?”
“내가 그렇게 생각하겠다는데 뭐가 문젭니까. 그건 그렇고 이렇게 온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그가 눈치를 살살 봤다. 지건이 어리둥절해했다.
드루이드 사과 과수원의 물량은 세 달 전부터 점차 폭증하기 시작했다. 그 덕에 배둔국 또한 어엿한 사장님 소리를 들으며 관리직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무슨 문제라도 생겼습니까?”
“아유! 문제라뇨. 제가 3일에 한 번씩 직원들 따라다니면서 얼마나 관리를 철저히 하는데요. 매장도 찾아뵙고, 비리 이런 거! 착착 잡아내는 사람입니다.”
“예, 예. 잘 알지요. 근데 문제라는 게…….”
“하하! 다름이 아니라… 장 어르신을 한번 만나 뵙고 싶습니다.”
“예? 뭣 때문에 뵈려고 하십니까?”
“흠……. 그것이 제가 협동조합에 속했던 적이 있는데, 놈들의 갑질에 힘들었던 적이 있지 않았습니까?”
“예. 그렇지요.”
“그 개잡놈들이 냄새를 맡고 지랄을 하기 시작했는데, 아무래도 장 어르신께서 해결을 해주셔야 할 것 같아서요……. 그래도 제2금융권인 놈들 아닙니까. 사과 유통하는 제 입장에서든 장 사장님 입장에서든 그대로 두면 힘들 겁니다.”
지건이 고민했다.
“매출이 많이 오르긴 올랐습니다. 그런 곳에서 접근할 정도면 관계자 중 모르는 이가 없다는 소리 아니겠습니까.”
“그렇지요. 작정하고 가격 경쟁 해보자고 으름장을 놓고 갔습니다.”
“어제요?”
“예. 그래서 제가 온 거 아닙니까. 사과 물량을 이렇게 잘 대주는데 제가 무슨 걱정이 있겠습니까? 다 돈맛에 이끌려서 파닥거리는 파리 새끼들 때문에 온 것이지요!”
지건은 일단 장 노인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르신, 다름이 아니라…….”
사정을 이야기하자 장 노인이 답을 줬다.
―옘병할 놈들이구만……. 바로 해결할 수는 있지만, 태 사장도 불러라. 오랜만에 일하는 모습 좀 보여 주자꾸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