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34화 (234/270)
  • 234화

    * * *

    이시은은 통화를 끊고 웃었다. 잔혹한 웃음이었다.

    ‘정말 끝났어.’

    허무하다? 그런 감정은 들지 않았다. 애초에 평범한 감성 따위 그녀에게 존재하지 않았다. 조금 꽃을 피우려고 했지만, 그마저도 무너져 내렸다.

    마음 한구석에 존재하는 끔찍한 감정. ‘난 다른 사람과 다르다.’라는 강박증과도 같은, 단단한 성벽과도 같은 그 생각이 이번에도 꿈틀거렸다.

    남은 쉽게 가질 수 있는 감정을 시은은 어렵게 얻었고, 남은 쉽게 버릴 수 없는 감정을 시은은 쉽게 버렸다. 그게 그녀가 가진 비틀림이었다.

    그렇기에 그녀는 손쉽게 산박에 대한 감정을 버렸다. 애초에 자신에게 어울리지 않는 감정이기도 했다. 약간의 그리움은 남았지만, 그마저도 죽였다.

    ‘지금 당장에라도 죽여야겠어.’

    시은의 두 눈이 불타올랐다. 사랑이라는 감정을 장작더미에 지자 불꽃은 거대한 증오로 불타올랐다. 늦게 배운 사랑이 수십 번 사랑을 해본 사람의 사랑보다 더 무겁고 더 질척거리는 법이었다.

    또 버렸다고 해도 사람 마음이라는 것은 그렇게 쉽게 싹 사라지지 않는다. ‘0’이 될 수가 없고 찌꺼기는 남아서 시은을 닦달했다. 내몰았다.

    시은은 채찍질당하는 것처럼 입술을 깨문 채로 스마트폰을 켰다. 단숨에 일본 교토행을 결정했다. 그리고 정신없이 짐을 쌌다.

    ‘새하얀 원피스가 좋겠어.’

    산박의 피가 고스란히 묻어야 한다. 이를 두 눈에 극명하게 새기기 위해서는 새하얀 원피스,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좋은 선택이었다.

    무기는 현지에서 조달하면 된다. 업무차 갔다면 무기를 쥐고 있을 리 없고 경호원이 하나 혹은 둘 정도 있을 터였다. 상황이 따라와 준다면 없을 수도 있었다.

    ‘관광하고 있을 때 단숨에.’

    시야를 얻기 힘든 북적거리는 곳이라면 능히 가까이 접근할 수 있었다. 그저 사람들의 머리만 가득 보이는 상황에서는 아무리 대단한 실력자라도 당할 수밖에 없었다. 조용한 시골 마을의 깜빡거리는 가로등 아래에서 다가오는 사람의 인기척은 크지만 시끄럽고 버글버글한 인파 속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은 파도에 떨어지는 한 방울의 빗방울 소리와 같다. 이를 파악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계속해서 쑤셔 박을 수 있는 단검 하나면 충분해.’

    길이도 굳이 길 필요도 없었다. 딱 6cm 이상인 것 하나만 구하면 된다. 5cm 이상만 되어도 사람에게는 위협적이었다.

    특수 부대도 단검 하나 들고 달려드는 놈 두 명을 상대하지 못한다. 그냥 넘어지면 끝이다. 아무리 단련해도 단검 하나면 속절없는 게 이 바닥이었다. 하물며 지켜야 할 여자, 관심을 쏟아부어야 할 여자가 곁에 있다면?

    ‘전력은 한없이 낮아진다. 동시에 내 살인 성공률은 높아진다.’

    그는 자신이 죽는다는 걸 깨달았을 때 어떤 반응을 보일까. 궁금한 것 중 하나였다.

    캐리어를 싼 시은의 몸은 땀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그만큼 열을 내뿜으며 열정적으로 생각하며 필요한 걸 재빠르게 챙겼다. 채 3분도 걸리지 않았는데도 캐리어가 가득했다.

    이내 그녀가 미친 듯이 웃기 시작했다.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아하하핫!”

    자지러지더니 배까지 잡고 태아처럼 웅크렸다. 그리고 미친년처럼 뚝 웃음소리가 끊겼다.

    ‘이게 뭐 하는 짓이야.’

    시은은 캐리어를 열고 안에 있던 걸 침대에 다 털어 버렸다. 엉망진창으로 물건들이 뒤섞였다. 그중에는 온라인으로 주문해서 어제 도착한 향수도 있었다. 철벽남 고꾸라뜨리는 데 그렇게 효과가 좋다고 난리를 치던 여성 향수였다.

    이를 주워 든 시은은 화장실의 세면대에 그걸 부어 버렸다. 그리고 그대로 거실 소파에 앉았다. 어느새 손에는 작은 나이프가 들려 있었다.

    푹.

    소파를 한 번 찔렀다. 나쁘지 않았다. 내부에 나무도 있어서 반발력이 상당했다.

    부우우욱!

    아까와는 다르게 얕게 나이프를 찌르고 그대로 쭉 내려 베어 가죽만 드러냈다. 신경질적인 한 번의 길쭉한 긋기. 그것으로 시은은 마음을 조금 다스릴 수 있었다.

    “크흥.”

    콧물을 훔친 시은은 결국 술을 한 병 비워냈다. 취할 것 같으면서도 아직은 안 취한 것 같은 그 알딸딸한 기분 속에서 예약했던 항공권을 취소했다. 그대로 눈을 감았다.

    ‘참아야 해. 감정적으로 나서봤자 아무런 의미가 없어.’

    기회는 반드시 올 것이다.

    ‘의미 없는 개죽음 따위, 사장님한테 어울리지도 않아.’

    본래 계획했던 대로 산박은 레이드 성공의 기쁨과 함께 죽게 될 것이었다. 가장 신뢰했던 이의 손에 의해서……!

    * * *

    산박은 교구몬 본사를 올려다봤다. 고작 10층짜리다. 면적은 넓어 보이지만 연식이 오래되어 보이는 빌딩이었다.

    “대단한 곳인 줄 알았는데… 작네요.”

    “학습지 회사니까요. 하지만 방심하지 마세요.”

    “예.”

    산박이 앞서 걸어 나갔다. 이미 입구에는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직원만 세 명이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한국어를 구사하며 두 사람을 극진하게 대접했다.

    “회장님이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들은 곧바로 8층에 있는 회의실에 들어섰다. 널찍한 회의실이었지만 앉아있는 사람은 다섯 명뿐이었다.

    그들이 두 사람을 테이바치 가문의 본가가 아니라 굳이 이곳에 부른 것은 매우 상징적인 의미를 위해서였다.

    ‘오늘의 자리는 공적인 자리이지 사적인 만남은 일절 일어나지 않는다는 뜻이다.’

    담백하게 할 거 확인하고 바로 끝내자는 소리였다. 물론 보안 또한 엄히 다룰 수 있어서 의외의 상황이 일어나도 문제없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태산박이라고 합니다.”

    “오랜만입니다, 회장님.”

    두 사람의 인사는 서로 달랐다. 백발이 성성한 테이바치 야스시 회장이 반갑게 두 사람을 맞이했다.

    “교토는 어떻던가.”

    “멋진 곳이었습니다. 현대와 전통이 잘 조화가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먹거리부터 장난 아니던데요?”

    서아는 그를 가볍게 대했다. 안면이 있다는 것은 이토록 중요했으며, 부산과 교토의 관계를 짐작하게 했다. 서로 부족한 게 있으면 지자체 수준으로 움직이는 게 두 도시였다. 자매 도시인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차례차례로 인사를 했다. 학습지 회사의 직함을 가지고 있었지만 실제로는 자회사들의 주인이 바로 교구몬의 회장과 사장이었다. 두 사람 외에 실무진 세 명과도 악수를 나누고 두 사람은 자리에 앉았다.

    총 일곱 명이 회의에 참석했다. 이야기의 주도는 테이바치 즈쿠 사장이 잡았다. 이는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남의 영토에 와서 주인 행세를 하는 건 무례한 일이었다.

    “먼저, 이렇게 오늘 먼 곳에서 와주셔서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회의는 한국어로 진행되었다. 아무리 서일본의 교토 도시를 주름잡는 교구몬 기업이라고 해도 그 본질은 한국인이었고, 국제 무대에서 한국어의 위상은 실로 대단했다.

    산박은 괜히 미소를 지으며 이들에게 눈인사를 했다. 그들 또한 얼굴에 웃음기를 잔뜩 머금었다. 서아 또한 마찬가지였다.

    “본제에 들어가겠습니다. 먼저 송서아 지점장님, 일어나서 부산의 목적을 다시 한번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예.”

    서아가 일어섰다.

    “저희 부산 은행은 국내에 있는 던전 기업들의 이목을 잠시 돌리기 위해서 교토를 선택했습니다. 그게 이번 사업의 진짜 목표입니다. 자세한 사항은 이미 모두 알고 계실 거로 생각합니다.”

    “지금도 그 생각은 그대로라는 말씀이시죠? 그리고 ‘잠시’라는 말씀을 하셨는데, 정확히 말씀해 보시죠.”

    “예. 하지만 ‘잠시’라고는 해도 잔잔벼락 무기는 큰 변동이 없을 시 계속 교토에서 생산될 것이며 교구몬의 자회사를 통해서 유통을 맡겨 일본 전역에 판매하게 될 겁니다.”

    이에 모두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이대로 계약서를 작성하면 될 정도였다.

    “좋습니다. 이제 앉으셔도 됩니다. 언제나 이렇게 척척 일이 진행되면 정말 좋을 텐데요. 일본 회사들은 부산 은행을 좀 본받아야 합니다. 솔직하지를 못합니다. 테이바치 아사 상무.”

    “예.”

    그가 일어났다. 곧바로 화면에 불이 들어왔고, 그가 레이저 포인터를 들고 곧장 발표하기 시작했다.

    “현재 일본 내에 있는 1레벨과 2레벨 던전 사용자들의 인구수 통계입니다. 비율로만 따지면 압도적인 수준입니다. 즉, 저레벨 던전 장비에 대한 엄청난 수요가 있습니다. 여기에 공급이 들어온다면 보시다시피 매출액은 수직으로 상승할 수밖에 없습니다.”

    테이바치 아사가 확정적인 어조로 말을 이었다.

    “거기에 현재 교토는 관광 수입은 대단하지만 그 외에 특출난 수익은 보이지 않습니다. 부족한 건 아닙니다만, 특별하지 못합니다. 이 상황에서 던전 사업이 발돋움한다면, 유통만이라도 저희 테이바치 가문이 잡아낸다면 교토는 다시 한번 크게 부흥할 수 있습니다.”

    짝짝짝짝!

    박수 소리가 우레처럼 쏟아져 나왔다. 그만큼 그래프는 수직으로 상승하고 있었다. 예상치였지만 솔직히 실패할 수가 없는 사업이었다. 거대한 덩치를 지닌 두 곳이 모여서 진행하는 사업이었다.

    ‘수치는 공개하지 않는 걸 보니 이 자리는 그저 허울뿐이다. 이미 모든 걸 결정했겠어. 도장만 찍으면 끝이겠지.’

    마지막의 마지막 점검에 불과했다. 확정까지 해놓고 이렇게 다시 마주한 건 그만큼 서로가 서로를 중요하게 여긴다는 뜻이었다.

    망하는 사업도 자본으로 성공시키는 게 자본주의였다. 1억을 벌려면 3억을 투자하면 될 뿐이다. 산박은 그 모습을 보면서 참으로 단추 메꾸기에 열심인 모습을 바라보았다.

    ‘얼핏 보면 교토만 이득을 보는 것 같지만 전혀 아니다.’

    부산 은행이라는 이름이 쏙 빠지고 교토의 자회사가 유통하게 된다. 아마 대한민국으로도 많이 들어오게 될 터였다. 특히 여기에는 대단히 음흉한 생각이 비집어 들어와 있었다.

    ‘교구몬의 수십 개에 달하는 자회사들.’

    브랜드만 다르게 찍어내면 전혀 다른 회사의 것이 되어 버린다. 국내 던전 기업은 결코 이를 알아차리지 못할 터였다. 그런 걸 일일이 찾아볼 정도로 현대 사회는 천천히 돌아가고 있지 않았다.

    대한민국의 하루는 다른 나라에서보다 몇 배는 바쁘게 돌아가고, 정신없이 휘몰아치는 태풍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오늘 유행하던 물품이 사장의 미친 짓으로 엎어지고 곤두박질쳐서 한순간에 몰락하는 게 대한민국이다. 소비자들이 지배자인 세상. 그곳이 바로 대한민국이었다. 이런 곳에서는 모든 것이 이슈고 죽고 사는 기업들이 수없이도 많았다.

    그리고 알지 못한 채로 꿀만 빠는 중견 기업도 있기 마련이다. 대기업이 그런 거 하나하나 추적하기에는 부산과 교토의 밀약으로 맺어진 잔잔벼락 공장을 찾아내는 것도 힘겨워 보였다. 작정하고 숨길 것이기 때문이었다.

    ‘무섭군.’

    그 규모에 산박의 마음속에 절로 두려움이 일어났다. 내가 사고 입고 쓰는 것이 사실은 전혀 다른 기업인의 주머니에 들어갈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국내 기업의 탈을 썼지만 그 실상은 일본 기업일 수도 있는 것이었다.

    이번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부산 은행의 던전 사업은 국내 던전 기업의 직접적인 견제에서 벗어나게 된다. 그도 그럴 것이 교구몬에서 판매하는 것이니까.

    “회장님, 한 말씀 하시지요.”

    “왜? 회의가 너무 일찍 끝나는 것 같아? 흐흐.”

    그가 마이크를 잡았다. 옆에 있는 이가 세심하게 마이크의 높이를 조정해 줬다.

    “우리 테이바치 가문이 이번에 원하는 것은 단 하나다. 이를 동래 송가에 잘 전해주길 바라는 바이다. 그것은 유통이다. 마진도 그렇게 많이 받을 생각도 없다. 오로지 부산 던전 사업의 독점 유통을 원한다.”

    테이바치 야스시가 서아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마진 % 고정으로 계약에 임하고 싶다. 그것도 장기 계약으로 10년.”

    파격적이다. 허나, 서아는 의외의 표정을 짓고 있었다.

    “고작 10년인가요? 공장 하나 지으면 30년은 굴려야죠.”

    “30년 해주면 더 좋고.”

    적어도 잔잔벼락의 무기를 뛰어넘는 저레벨 던전의 알짜배기 부무장 혹은 주 무장 던전 장비가 나오기 전까지는 현금을 톡톡히 빨아들이는 장사가 될 터였다.

    “10년으로 할게요. 세상일이라는 건 모르니까요. 오히려 부산을 배려하는 것 같아서 마음 같아서는 15년 하고 싶네요.”

    서로가 덩치가 있다 보니 큰돈에 비해서 너무나도 쉽게 결정되는 분위기였다. 있는 놈들끼리는 돈독해질 수밖에 없었다. 사기를 치는 것조차도 귀찮다고 여겨질 정도였다.

    ‘이게 권력자의 거래.’

    호탕하고, 쉽게 끝난다. 오히려 서로 협력하고 싶은 마음이 대단히 컸다. 중소기업은 물건 하나라도 더 개발하고 성능 업그레이드해서 서로 물어뜯고 출혈을 내고 있지만 그 위의 세상은 천국이나 다름없었다.

    다투기보다는 악수하는 것이 더 큰 이득으로 돌아온다. 그런데 싸울 이유가 없었다. 그게 바로 위에 있는 것들의 사업 방식이었다. 다툼은 없고 오로지 담합만이 있을 뿐이었다.

    회의는 순식간에 끝났다. 계약서도 서로 법적 절차를 확인한 다음에 도장만 찍으면 끝이었다. 하지만 진짜는 이제부터였다.

    “송서아 지점장, 잠깐 태 사장과 독대를 해도 괜찮은가?”

    “네?”

    그녀가 예상치 못한 말을 들은 것처럼 움찔하며 반문했다. 이에 산박도 조금 긴장했다. 이대로 회의가 끝나면 교토 남쪽에 있는 공장 부지로 향할 생각이었다. 그만큼 이번 만남은 다시 한번, 그저 별일이 있나 없나 재확인하는 회의에 불과했다. 그렇기에 서아도 쉽게 산박을 이곳에 데리고 왔다.

    “저……. 회장님, 태 사장은 부산 은행과 함께할 사람입니다. 죄송하지만…….”

    “허허, 잔잔벼락을 가져가 놓고 그다음 거도 가져가겠다? 그건 너무한 거 아닌가. 우리 페어플레이 하세. 결정은! 태 사장이 하는 것 아닌가?”

    그가 물러설 기색이 없자 서아가 산박에게 미안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산박은 그녀의 어깨를 살짝 두드리고는 그대로 회장의 뒤를 따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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