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31화 (231/270)
  • 231화

    탁자의 그림자가 양피지를 앙칼지게 확 잡아먹었다. 곧 물건이 두 개 모습을 드러냈다. 그림자가 물이 빠지듯이 사라지고, 어둠이 옅어지면서 모습을 감췄다.

    ‘야만신이라는 이름답지 않게 음흉한 힘을 다루는군.’

    두려운 마음이 조금 더 생겼다. 그도 그럴 것이 던전에서의 야만신이 가진 입지는 야만적인 괴물들의 신앙을 받아먹고 온갖 기형적인 괴물을 토해내는 초월자였다. 허나 현실에서 마주한 야만신의 면모는 오히려 차가운 혀를 지닌 뱀과 닮아 있었다.

    ‘야생 동물이라고 치면 그림자와 어둠을 이용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또 어떻게 보면 야만신이기에 오히려 그림자와 어둠을 다루는 것도 잘 맞아떨어진다고 할 수 있다.

    산박은 두 개의 장비를 냉큼 챙겼다. 빅 오버슈트는 검은색에 신축성이 강해서 바짝 줄어들어 있었지만 조금만 당겨도 쭉쭉 늘어날 정도로 쉽게 늘어나기도 잘 늘어났다.

    ‘완벽해.’

    다음으로는 빅점보 프로스트 완드를 손에 움켜쥐었다. 하늘색의 완드는 잡자마자 주변에 한기를 퍼뜨렸다.

    ‘3레벨 던전.’

    레이드 던전으로 구분되기 시작하며 던전 사용자의 가치가 폭등하는 지점 중 하나였다. 자연스럽게 장비의 수준도 확 뛴다. 물론 그렇기에 최상위와 최하위 장비의 차이도 벌어진다. 산박은 최상급 3레벨 장비를 실제로 쥐어본 적은 처음이었다.

    ‘이게 3레벨 최상급 장비.’

    하나에 5천만 원 이상의 돈을 투자해야 했고, 경쟁이 심해지면 1억도 가뿐하다. 그런 장비를 손에 넣은 것이다. 보통은 손에 쥐는 것조차도 불가능했을 터였다.

    이를 위해서는 일단 미국에 가야 하고 경매에 참가하기 위한 티켓도 구매해야 했는데 그조차도 못 구할 수 있었다. 좌석으로까지 자본주의를 확실하게 보여주는 게 미국이었다.

    수많은 거름망을 뚫고 도달해야 했기에 시간도 만만찮게 잡아먹는다. 믿음직한 사람을 쓰는 것도 현재 산박에게는 사치였다.

    ‘야만신 코인을 탄 것이 이렇게 돌아올 줄이야. 믿고 있었지만, 너무 크게 돌아와서 오히려 나중에 문제가 될까 봐 무섭다.’

    당장 3레벨 던전에 갈 것은 아니었기에 산박은 오두막 밖으로 나가 빅점보 프로스트 완드를 시험해 봤다.

    “프로스트 매지션 프로토콜 스타트.”

    시동어를 외치자마자 순식간에 완드로부터 들어오는 지식이 산박의 뇌를 헤집었다. 약간의 어지럼증이 있었지만 썩 나쁜 건 아니었다. 오히려 지식의 획득으로 인한 높은 차원의 쾌감이 더 높았다.

    ‘놀랍다.’

    마치 자신이 얼음의 마법사가 된 것 같았다. 여덟 종류에 달하는 마법은 하나같이 레이드 던전을 위해서 존재하는 효율 높은 것들뿐이었다.

    완드를 손에서 놓자 지식이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져 버렸다. 완드에서 흘러나오는 얼음 가루들도 자동적으로 사라지고 기동을 멈추었다.

    다시 집어 들었을 때에는 시동어를 또 외쳐야 했다.

    “프로스트 매지션 프로토콜 스타트.”

    얼음 가루가 다시 흩날리며 지식이 당연히 있는 것처럼 굴었다.

    ‘처음 할 때만 어지러움을 느끼는 거네.’

    사람마다 차이가 있을 수 있었지만 태산박은 자연의 드루이드. 그 누구보다 적응력이 뛰어날 수밖에 없었다.

    “빅헤드 프로스트.”

    거대한 머리통이 모습을 드러냈다. 허공에서 이를 만들어낸 산박은 그 무게를 가늠하고 크기를 눈에 담았다.

    ‘어지간한 중형급의 관절을 때린다면 단번에 무너질 수 있다.’

    얼음은 대단히 무거운 물질 중의 하나였다. 엄청난 둔기로 ‘중형 파괴 마법’이라 불리는 게 빅헤드 프로스트 주문이었다. 그게 빅점보 프로스트 완드의 첫 번째 얼음 마법이었다.

    산박은 다른 것도 하나씩 체험해 보고 몸을 돌렸다. 3레벨에 도달했으며 지혜 수치도 높은 산박이 지닌 ‘힘의 용량’은 동 레벨의 던전 사용자들보다 우월해서 모두 한 번씩은 무리 없이 시험해볼 수 있었다.

    그로부터 이틀 이후에 산박은 서아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일정이 바뀌었다고요? 바로 내일로요?”

    ―죄송해요. 오빠들 때문에…….

    서아가 미안함을 표시했다. 순전히 자신의 가정사로 인해서 생긴 일이기 때문이었다. 이에 산박은 가볍게 그녀의 사과를 받아들였다.

    “괜찮습니다. 가족 관계라는 게 본인이 아무리 노력해도 어느 정도 한계는 있는 것 아니겠어요? 이해하니까 너무 죄송해하지 마세요. 이러면 오히려 제가 불편해요.”

    ―배려해 줘서 고마워요.

    “서로 주고받아야죠. 딱딱 선 그어서 하면 그게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그것으로 사과는 끝이 났다. 곧바로 서아는 현재 자신의 상황에 대해서 자세히 말을 하기 시작했다.

    ―일단, 오빠들의 시선을 돌렸어요. 저희 오빠들이 제 일이라면 조금 과격해지거든요. 그래서 이렇게 하는 건데, 너무 이상하게 생각하지는 않았으면 좋겠어요. 제가 사실은 어렸을 때 건강이 조금 안 좋았거든요.

    구구절절 말을 늘어놓았다. 그만큼 서아는 산박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변명을 길게 늘어놓는 것에서 그 마음을 절절히 느낄 수 있어 산박은 기분 좋게 웃었다. 타인이 자신을 생각하며 조심스럽게 행동하는 것만으로도 웃음이 삐져나왔다. 그건 아름다운 행위였다.

    “괜찮아요, 서아 씨. 대신, 나중에 저도 비슷한 일이 생기면 배려해 주셔야 해요. 아셨죠?”

    ―그럼요!

    서아가 냉큼 받아들였다. 산박은 그제야 겨우 본론에 들어갈 수 있었다.

    “원래 일정은 가짜고, 진짜는 내일이라는 거네요.”

    ―제 방도 도청하고 있을지 몰라서 지금 이 통화도 밖에 나와서 하고 있어요.

    ‘오히려 그게 더 의심을 받을 수 있지 않을까.’

    그렇다고 해도 당장 내일이라고는 여기지 않을 터였다.

    ―출근하면서 머리를 돌릴 거예요. 그때 합류해서 같이 가요. 비행기표는 당일에 살 거예요. 충분히 표가 남을 거라고 생각해요.

    “교토는 사람들이 자주 갈 텐데, 안 그래요?”

    그 말에 서아가 자신 있어 했다.

    ―부산 은행의 힘이 있다면 능히 당일 표를 구할 수 있어요. 조금만 일정을 미루면 퍼스트 클래스에 탈 수 있다면요? 누구나 좋아하겠죠?

    특히 이코노미로 탔던 여행객이라면 SNS에 이 특별한 소식을 알리려고 노력할 터였다. 나는 공짜로 퍼스트 클래스로 변경하는 엄청난 행운을 얻은 사람이라는 것을 만인에게 알릴 기회였다.

    ‘그렇다면야 상관없지.’

    “좋아할 수밖에 없겠네요. 좋아요. 그럼 내일 몇 시에 가는데요?”

    ―새벽 네 시요…….

    “네? 몇 시요?”

    ―네 시욧……. 너무 일찍이죠?

    서아의 목소리가 절로 줄어들었다.

    “…아니요.”

    산박은 인내심을 발휘했다.

    “원래는 서로 많이 대화하고 가야 했는데 서로 바빠서 그러지 못했잖아요. 제가 여기서 서아 씨에게 너무 일찍이라고 하면 이기적인 거죠.”

    업무라고는 해도 관광도 즐기기 위해서 여행용 옷도 가지고 간다. 그런데 여행 전 많이 만나지도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 화를 내면 쓰레기나 다름없었다. 혹은 남을 생각하지 못할 정도로 미성숙한 인간이다. 그만큼 교토행에 산박이 노력한 게 없었다. 송서아의 주도로 이루어졌다.

    “버스 기사에게 욕하는 승객이 될 수는 없죠. 새벽 네 시에 부산 공항에서 볼게요. 양복 차림으로.”

    ―저도 한껏 일하러 간다는 분위기를 팍팍 내비칠 거예요.

    “공항에서 커피도 한잔할 거죠?”

    산박의 말에 서아가 자신 있게 말했다.

    ―새벽이라 문 열린 곳이 있을지는 모르겠는데, 그게 아니면 캔 커피라도 해요.

    “좋아요.”

    서로 착착 맞아떨어졌다.

    산박은 서둘러 짐을 챙겼다. 강합에게 문자 또한 남겼다. 최대한 강합을 통해서 원격으로 기업을 조율할 생각을 가졌다. 워낙 비정기적인 회사 일이라서 가능했다. 애초에 사장이 던전에 자주 가다 보니 현실에서는 강합 주임이 회사의 사장 대행이나 다름없었다. 그 덕을 이번에 톡톡히 봤다.

    사유도 충분했다.

    [잔잔벼락 사업 건으로 부산 은행 중진과 함께 교토로 갑니다. 가는 김에 관광도 좀 하다가 오겠습니다.]

    철면피를 좀 깔았지만, 이 정도는 뭐라고 할 수가 없었다. 그가 사장이기 때문이다.

    산박은 곧장 시간에 맞춰서 부산 공항에 도착했다. 재잘재잘 메신저로 대화를 나누는 사이에 서아도 예정된 시간보다 10분 일찍 도착할 수 있었다. 이미 전화상으로 모든 걸 마쳤기에 프런트에서 티켓을 받은 건 말할 것도 없었다.

    “이렇게 일찍인데도 카페가 운영되고 있긴 하네요. 사람도 제법 있고요.”

    “관광객이 많으니까요.”

    무조건 빨리빨리. 그게 이 부산 공항에도 그대로 적용되고 있었다. 잠을 청하는 이들이 제법 많았다. 하나같이 앞으로 있을 여행에서 조금이라도 더 오랫동안 돌아다닐 생각으로 이렇게 이른 새벽에 공항에 있었다.

    두 사람이 커피를 한잔하며 교토에 대해 떠들고 있을 때, 서아의 스마트폰에서는 진동음이 끊이질 않고 이어졌다. 이를 힐끗 본 서아가 한숨을 토해냈다.

    “오빠들이죠?”

    “네. 기어코 알아냈나 보네요. 걱정할 정도는 아니에요.”

    “그래도 문자라도 남기시지.”

    “다른 사람한테 남겨 놓았어요. 증조부님은 따로 찾아뵙고요.”

    할 건 다 해놓았다. 그래도 이 정도면 확실히 문제가 있었다. 전화를 받지도 않고 끊은 서아에게 산박이 서아의 목을 가리켰다.

    “응? 뭐 묻었어요?”

    “목걸이 하셨네요.”

    “선물을 주셨는데 해야죠. 잘 어울리죠?”

    “네. 그리고 이거요.”

    산박이 품에서 반지가 든 작은 함을 꺼내 들어서 열었다. 목걸이와 세트였다. 제법 출혈을 감당해야 했지만 산박이 이런 기회를 놓칠 리가 없었다.

    “이거… 미리 준비를 하셨던 거예요?”

    “매번 옷 사주시는데 이런 것도 안 하면 제가 무슨 꼴이에요? 한번 껴보세요.”

    산박이 반지를 건네주려는데 서아가 말했다.

    “직접 끼워 주세요.”

    “저야 좋죠.”

    산박이 반지를 들어 올리며 말했다.

    “오늘부터 1일이에요.”

    이에 송서아가 손을 내밀며 웃으며 말했다.

    “지금부터 1초.”

    * * *

    와촌리. 그곳에 사는 박 할매는 시끄러운 까마귀 소리에 빗자루를 들고 방을 나섰다.

    “이놈의 건방진 까마귀 놈! 해가 중천에 떴는데 닭대가리처럼 시끄럽게 울어대고 자빠졌어?”

    용맹하게 빗자루를 들고 바로 휘두를 것처럼 마당으로 나온 박 할매가 눈을 깜빡이며 빗자루를 내렸다. 마당에 널찍하게 자리 잡혀있는 평상 위에 까마귀가 큰 꿀벌 집을 턱 놓고 있었다. 꿀벌은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다.

    “어므머머머머머! 이게 대체 무슨 일이람…….”

    그 단내를 맡은 박 할매가 빗자루를 내리고 이내 웃었다.

    “그래! 고맙다! 근데 시끄럽게 굴지는 마라! 귀가 떨어져 나가겠어!”

    “까악!”

    소리를 한 번 낸 백까마귀가 날아올랐다. 백까마귀는 아주 영악해서 곳곳에 꿀이 잔뜩 들어간 벌집을 뇌물로 제공했다. 자연스럽게 와촌리 마을 사람들은 백까마귀를 아주 좋아하기 시작했다.

    간악한 백까마귀는 그렇게 호응을 얻어내고 서서히 마을 사람들에게 마수를 뻗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소일거리를 하며 살아가고 있는 이정학 할아버지를 노렸다.

    “으응? 이렇게 하라고?”

    “까악! 깍!”

    날갯짓하며 머슴처럼 이정학을 굴리기 시작했다. 무료한 노년의 삶에 찾아온 백까마귀에게 호통칠 사람이 아닌 게 이정학 할아버지였다. 오히려 자신을 필요로 하는 모습에 열정이 샘솟았다.

    “아하! 이놈, 양봉 틀을 만들어 달라는 거구나!”

    벌들이 살 수 있는 집을 만들어 달라는 소리를 찰떡같이 알아들은 그가 이내 순식간에 직사각형의 벌집을 만들었다. 네 면 모두 벽을 빼낼 수 있어서 벌집도 냉큼 손으로 빼는 게 가능했다. 이 모습에 백까마귀가 아주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정학 할아버지는 내친김에 백까마귀가 원하는 곳에 자신이 만든 벌집을 놔뒀다.

    그가 떠나가자 백까마귀는 부리에 여왕벌을 하나 물어 와서 그 안에 들여보냈다. 겨울에도 활동 가능한 것이 백까마귀의 기운을 받은 꿀벌들이었다. 봄에는 더더욱 왕성하게 활동할 터였다.

    이를 시작으로 와촌리에 새로운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기가 막힌다니까!!”

    사람들은 마을 회관에서 참외를 먹으며 떠들기 바빴다. 이번 마을 회의는 다름 아닌 벌꿀 사업에 대한 것이었다.

    “허리 접어 가면서 농사지으면 뭐 혀~ 먹고살 수만 있지 다 골병 들었자너~ 이제는 우리 마을 영물 덕을 톡톡히 봐야지~”

    산박은 백까마귀에게 사업성이 있다고 보고 있지 않았지만 와촌리는 현재 진행형으로 그 면모를 확인하고 있었다. 너도나도 돈을 벌려고 혈안이었다. 몇몇 노인들은 아직 결정하지도 않았는데 여기 벌꿀 통은 내 것, 거기 벌꿀 통들은 네 것이라는 식으로 오지랖을 놓고 있었다.

    그 행태를 보는 이장 노갑비는 참담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들에게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할꼬.’

    백까마귀 녀석이 쓸데없는 짓을 벌여 놓았다. 이장은 그 까마귀가 소환수임을 잘 알았지만 세상이 어떻게 되든 시골에서 지내는 이들에게는 씨알도 안 먹히는 소리였다.

    “자자, 진정들 해보시오!”

    그가 소리를 크게 냈지만 진정되기는, 갑자기 아줌마 두 명이 서로 머리카락을 쥐어뜯기 시작했다.

    “뭐, 뭐야! 왜들 저래!!”

    “썅년아아아악!”

    59세로 제법 젊은 축에 들어가는 아줌마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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