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29화 (229/270)
  • 229화

    * * *

    저벅, 저벅!

    거침없는 파워 워킹. 잔뜩 힘을 준 올백 머리와 좁은 이마는 너무나도 잘 어울렸다. 반영구 문신을 한 짙고 길쭉한 눈썹이 쭉 이어져 날카로운 이미지를 만들어 냈다.

    남자가 고급 레스토랑에 들어서자마자 종업원이 고개를 숙이며 다가왔다.

    대한민국의 서비스는 세계 최고 수준이었고, 그 때문에 수많은 서비스 직종 종사자들이 정신병에 걸리고 자살하거나 퇴사율이 높았다.

    물건을 거칠게 쓰다 보면 부품이 닳고 파손되는 법이었다. 그러나 그 누구도 이는 위험한 일이며 반드시 사회 차원에서 막아야 한다고 말하지 않았다. 갑질 하는 재미는 윗물이나 아랫물이나 좋다고 물고 빨기 바빴다.

    그저 세대를 지나며 조금 더 성숙한 시민이 탄생하기를 기대하는 수밖에 없었다. 인간은 고쳐서 쓰는 것이 아니며, 인간은 간사하며, 인간은 동물이기 때문이다.

    “송한울.”

    “아, 예! 명단 확인했습니다. 바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송한울은 고개만 까딱거렸다. 종업원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앞장섰고, 그가 따라나섰다. 종업원은 테이블의 의자를 빼주기까지 했다. 송한울은 거기에 앉자마자 테이블 위에 있던 화이트와인을 잔에 따라서 한 모금 했다.

    그사이에 잠깐 화장실에 갔었던 송한치가 돌아와 아는 척을 해 왔다.

    “왜 이렇게 늦었어? 큰형님이 한 지랄 하겠다던데?”

    “LA에 있는 사람이 어떻게 한 지랄을 해? 어렸을 때 맞은 것으로도 충분해. 주문은?”

    “넣어야지.”

    호출 벨을 누르고 풀코스 요리를 둘 시켰다. 입을 축이는 수프가 나왔는데 초록초록했다.

    “브로콜리수프입니다.”

    맛없게 보이지만 미국에서 가장 큰 인기를 구가하고 있는 수프였다. 옥수수수프와 쌍벽을 이루고 있는 수프였다.

    “겉만 살짝 구운 생굴입니다. 레몬즙을 뿌려 드셔도 좋습니다.”

    “갓 구운 빵입니다.”

    애피타이저를 먹는 사이에 스마트폰이 울렸다. 룸에는 둘밖에 없었기에 송한울은 곧바로 스마트폰을 켰다. 영상 통화를 꾹 눌렀다.

    ―왜 이렇게 늦었어, 한울이? 내 문자도 확인 안 하고. 돌았어?

    “돌았다.”

    ―이 새끼가…….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니까!”

    송한치가 역정을 냈다. 이에 둘이 헛기침했다. 나이가 마흔 살, 서른다섯 살인 두 사람이었다. 넷째 딸인 송서아와 첫째 아들인 송한명의 나이는 무려 열일곱 살이나 차이가 날 정도였다. 그런데 하는 꼬라지를 보면 아직도 학생 티를 못 벗었다.

    “서아가 지금 남자 한 놈이랑 삼귀고 있어.”

    ―삼귀다니? 그게 무슨 말이야?

    “틀딱인 형은 모르는 말이야.”

    ―뭐? 이 새끼가 지금 늙어서 서럽기까지 한데 신조어로 그렇게 두들겨 패야겠어? 너 이 새끼 내가 돌아가기만 해봐. 56국 중에 한 곳에 보내버릴 테니까.

    “응. 안 가~”

    “제발, 형님들! 그리고 삼귄다는 말은 썸을 탄다는 말인데…….”

    ―썸?

    송한명이 어리둥절해하자 셋째 송한치가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썸도 모르다니……. 형님은 대체…….’

    “자꾸 그렇게 국어 파괴하지 마. 우리 형님 울겠다.”

    ―시끄럽다.

    그사이에 직원이 노크 소리를 내며 들어와서 빵을 제외한 생굴과 수프 남은 것을 거둬 가고 생선을 올려놨다. 송어스테이크였는데, 독특하게도 소스가 다섯 가지나 되었다.

    둘째 송한울은 나이프로 등뼈를 따라서 가볍게 꼬리 쪽으로 슥슥 자르며 크게 당겨서 떼어내 나이프로 크게 드러낸 것을 먹기 좋게 잘랐다. 그 위에 나이프로 소스를 조금 가져와서 바르고 포크로 쿡 찍어 먹었다.

    ―어떤 놈인지는 알아봤어?

    “태산박이라는 놈이야. 가문도 별 볼 일 없고, 고아원 출신이고.”

    ―그런 정신병 걸린 새끼를 곁에 두었다는 거냐?

    정신병. 송한명 부사장다운 발언이었다.

    세상 풍파에 맞고 어린 시절부터 보호받지 못한 어린이는 상처받은 짐승이다. 그리고 그게 자라면서 트라우마로 남는다. 그 트라우마는 온실 속에서 자란 이들이 보기에는 ‘정신병’이다. 그렇기에 송한명에게 있어서 버러지같이 자란 거지 같은 놈들은 하나같이 정신적으로 하자가 있는 쓰레기들이었다.

    “제법 큰 걸 물어 왔고 적당히 눈치도 있길래 가만히 놔뒀는데 그렇게 되었더라고.”

    ―경호원은? 그러기 전에 막았어야 할 거 아냐!

    “서아가 그걸 가만히 놔둘 것 같아? 걔 곁에 있는 애들은 하나같이 우리보다 송서아가 먼저야. 그렇게 만들어 버린다니까.”

    ―우리 서아가 좀 잘나긴 했지. 자기 사람이면 진짜 교도소에 들어가도 돈 넉넉하게 챙겨 줄지도 모르지.

    “끔찍한 소리 그만해.”

    송한울이 고개를 설설 쳤다. 범죄자들은 보는 것만으로도 짜증을 유발시킨다. 귀찮기도 귀찮아서 얽히는 것부터가 싫었다. 범죄를 저지르는 놈들은 아주 질척거리는 놈들이었다. 화이트칼라든 블루칼라든 어디에 속하건 범죄자를 끔찍이 싫어하는 게 둘째 송한울이었다.

    거기에 그의 위치까지 올라서면 범죄를 저지르고 다닐 일도 없었다. 많은 유혹이 있었지만 패밀리 사업을 하고 있는 만큼 그런 유혹에 넘어갈 수 없었다. 일보다는 가족 간의 유대를 중시하는 곳이 동래 송가(家)였다. 가족 여행도 빠짐없이 참가해야 했고 가족 내부의 규율 또한 제법 엄했다.

    “일단은 내가 가서 이야기해 보려고 하는데, 어떻게 생각해?”

    “서아한테 허락은 맡고 가는 게 좋을까?”

    ―이 녀석이……. 오빠가 되어놓고 무슨 허락? 일단 남자답게 질러.

    첫째 송한명의 말에 송한울이 인상을 찌푸렸다.

    “그럼 서아의 분노를 감당하겠어? 저번에 한번 삐져서 생일 선물도 못 받았잖아.”

    ―내가 혼나는 건 아니니까.

    침묵이 내려앉았다. 서로 눈치를 살살 살폈다. 결국 셋째인 송한치에게 시선이 모였다.

    “난 저번에 갔다 왔잖아. 이번에는 둘 중에 결정해. 동생이니까 내가 가야 한다면, 이번에는 형들이 모범을 보일 때라고 맞받아쳐 줄게.”

    이성적인 판단이었다. 지난번 태산박에게 으름장을 놓은 것이 송한치였다. 그것도 송서아가 하지 말라고 했음에도 툭 내던지고 서둘러 빤스런을 쳤다. 그 용기는 실로 대단했다.

    예쁘기도 예쁘고 경력도 있고 똑똑하기까지 하며 집안 어르신들이 엄지를 들어 올리기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이 송서아였다. 송한명이 구색만 있는 부사장에서 LA 출장을 갈 정도로 영향력을 얻게 된 것도 송서아 덕분이었다.

    실력이 있다고 일감이 내려오는 건 아니었다. 일감이라는 것은 배경이 좋아야지 받을 수 있었다. 그게 안 된다면 아무리 혈족이라고 해도 허울 좋은 직함에 사건이 터졌을 때 책임만 떠안고 사라질 뿐이었다.

    물론 그렇게 한다고 혈족에서 내쳐지는 건 아니었다. 합당한 일을 했기에 그 뒤로는 유유자적, 세상에 자신의 이름 석 자 내비치지 못할 뿐 평범하게 살아가게 된다.

    그러나 이마저도 비관하며 절망에 빠지는 혈족이 적지 않았다. 입신양명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출세하여 이름을 떨치지 못하면 아무것도 남기지 못하고 사라진다. 이는 살아가는 데 그 어떤 어려움도 없는 자들에게 가장 두려운 일이었다. 힘들어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삶이 아니라 무료해서 참을 수가 없으며 선민사상을 가지고 있기에 더더욱 그러했다.

    그렇기에 그들 셋은 알게 모르게 송서아에게 어떻게든 잘해 주려고 하고 있었다. 그 결과 더 좋은 배우자를 만나기를 원했다. 탐욕스러운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게 자신들의 이기적인 생각이라는 건 깨닫지 못했다.

    “그럼 결국 내가 나서야 한다는 거네.”

    둘째, 송한울 전무. 그가 한숨을 내쉬었다. 귀찮은 일이다. 하지만 절로 웃음이 나왔다. 사랑스러운 여동생을 위한 일이었다. 내심 하고 싶었던 것이 그였다. 내색하기 싫어서 싫은 티를 냈을 뿐이었다.

    “아니면 내가 할까?”

    “서아한테 허락받는 것만 네가 해라.”

    “에이, 그럼 안 하지. 근데 정말로 허락받고 할 거야?”

    “나도 생각이라는 게 있어서, 그런 방식으로는 안 해.”

    선천적으로 몸이 약했던 송서아였다. 어렸을 때는 던전 아이템 덕분에 몸 상태를 근근이 유지했는데, 던전 아이템이라고 해서 모든 것이 만능은 아니었다. 오히려 치유의 힘을 나약한 몸이 받아들일 수 없어 부작용이 컸다. 그 때문에 청소년이 되었을 즈음에야 건강해졌다.

    여전히 잔병치레가 많아서 그때그때 치유 아이템을 써야 했는데 송서아는 그런 걸 최대한 자제하는 편이었다. 구매하면 집안이 가만히 있지 않고 호들갑을 떨기 때문이었다.

    ‘엄청나게 반발하겠지.’

    그렇게 얻은 자유. 이를 건드는 것만으로도 서아는 과민 반응 했다. 하지만 가만히 있을 수도 없었다.

    ‘고아라니?’

    기반 없는 남편만큼 불쌍한 것도 없었다. 거기에 대한민국에서의 결혼은 당사자와 당사자만의 결합이 아니었다. 가족과 가족의 결합이고, 배경과 배경의 부딪침이다. 서로의 배경이 다를수록 불협화음은 심할 수밖에 없었다.

    ‘불행할 수밖에 없지.’

    끼리끼리 논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었다. 그게 편하니까, 그런 말이 있었다. 옛말은 틀린 말도 많았지만 맞는 말도 많았다.

    “적당히 말하면 그놈도 알아듣겠지.”

    여덟 살짜리 애가 말하는 것과 대기업을 등에 업고 말하는 것은 큰 차이가 있었다. 뒤에서는 임금도 욕하다가도 임금이 앞에 오면 넙죽 절하면서 그를 태양에 비유하기를 주저하지 않는 것이 범인(凡人)이었다. 그들의 생태를 잘 알고 있었기에 실로 가볍게 말했다.

    물론 그들의 동태를 못 알아차릴 서아가 아니었다. 최근에 그녀에 대해서 꼬치꼬치 캐묻고 다니는 횟수가 확실하게 늘어났음을 자신의 경호원인 소준석과 대유준을 통해서 이미 알아차린 상태였다.

    ‘그렇게 나올 줄 알고 있었지. 내가 바보인 줄 알아?’

    이를 위해서 서아가 택한 것은 정면 타격이 아니었다. 용맹함보다는 비상함이 필요한 것이 현대 사회 생활이었다.

    ‘셋째 오빠일까, 둘째 오빠일까.’

    첫째 오빠는 당연히 제외했다. 워커홀릭이고, LA에서 큰 계약을 추진 중이었다.

    먼저 가장 만만한 셋째 오빠인 송한치에게 문자를 보냈다.

    [오빠, 달맞이 고개 알아?]

    답장은 금방 왔다.

    [엉. 거기 유명하잖아. 저번에 달맞이 성당 쪽에서 가족사진도 찍었잖아.]

    [거기 다시 가고 싶은데, 혼자 가기는 좀 그래서……. 혹시 같이 갈래? 둘째 오빠한테도 물어봐 줘.]

    [정말? 나야 좋은데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었어?]

    [봄이잖아. 거기에 다음 주에는 교토에 가니까. 그 전에 부모님이랑도 추억 하나 만들고 가고 싶어서.]

    [부모님? 좋은 생각이다. 이참에 가족 여행도 가야지. 엄마가 요즘 너 보기 힘들다고 말씀하시더라.]

    [전화는 매일 하는데?]

    [일 좀 그만하고, 부모님한테 자주자주 통화해.]

    [오늘 하니까 내가 1등 딸이라던데.]

    [방금 내가 전화했는데 내가 1등이라더라.]

    [(대충 건방진 소리 하지 말라는 이모티콘)]

    [(대충 너야말로! 소리 지르며 화내는 이모티콘)]

    [둘째 오빠한테 전하고 부모님한테는 내가 말해볼게. 거기 갤러리 하나 오빠가 찾아놔. 예약도! 전화도 해놓고!]

    [오케이.]

    둘째 오빠의 대답은 냉큼 도착했다. 반드시 간다는 소리였다.

    “좋았어. 이걸로 시선을 돌렸으니까 산박 씨한테 큰 민폐는 못 끼칠 거야.”

    * * *

    “또냐.”

    산박이 피곤한 눈을 했다. 이 야만신이라는 놈은 자존심도 없는지 어김없이 오늘도 꿈에 또 나타났다. 매번 나타날 때마다 땀에 젖어서 깨어나야 했기에 정말 싫었다.

    ‘미치겠네, 진짜.’

    체력 관리는 던전 사용자의 기본이며, 특히 남들보다 두 배, 세 배는 더 일하는 것이 산박이었다. 거진 일주일 내내 일만 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 상황에서 자꾸 이렇게 꿈의 막바지에 등장해서 깽판을 치는 야만신은 산박에게 있어서 그저 미친놈에 불과했다.

    ‘이게 신이야?’

    자꾸 꿈에 나타나서는 자기 위신을 위해서 중동 놈들을 죽여야 한다고 필멸자한테 거래를 거는 놈이라니. 황당하기 그지없었다. 다만 매번 그 요구 조건이 달라지고 있다는 건 조금 노련했다.

    “나쁜 거래가 아니다. 받아들여라. 다 챔피언으로서의 너의 완성을 빠르게 할 나의 안배다.”

    “그렇다고 중동의 광신도들과 트러블을 일으키고 싶지는 않습니다. 세상일이란 모르는 것투성이 아닙니까.”

    “그럼 한 명만 죽여라. 놈은 천신, 벼락의 신을 믿고 있다. 이름은 나히다 하와. 휴즘 하디라 불리는 놈들에게서도 버림받은 여자다.”

    솔깃.

    산박의 마음이 흔들렸다. 박쥐 짓을 했다가 버림받은 그 여자가 생각났다. 지금은 뭐 하고 있을까? 뭐가 되었든 쉽게 죽일 수 있어 보였다.

    “보상은 그대로입니까?”

    “원하는 3레벨 던전 장비 두 개.”

    “좋습니다.”

    바로 승낙했다. 리스크가 적다는 것이 중요했고, 무엇보다 야만신이 더는 찾아와 주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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