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28화 (228/270)
  • 228화

    * * *

    스케줄을 짜고, 산박은 송서아를 배웅해 줬다. 주차장을 빠져나가는 검은색의 고급차 세 대는 그것만으로도 시선이 갔다.

    그녀를 보내며 산박은 지금 이 일상이 아주 좋다고 여겼다.

    ‘집안 문제만 해결하면 된다.’

    이를 위해서는 자신이 우뚝 서야 했다. 그리고 서아가 썸을 타는 것을 SNS에 서서히 보여주고 있는 것만으로도 산박은 동래 송가(家)의 사람들과 접촉할 터였다.

    동래 송가로서는 두 사람이 만나는 것을 최대한 막겠지만, 오히려 그게 산박에게 첫눈에 반한 서아를 더욱 부채질할 것이었다.

    원래 인간이라는 것은 하지 말라고 하면 더더욱 관심이 가는 법이었다. 로미오와 줄리엣도 가문이 그렇게 반대하지 않았다면 그저 잠깐의 사랑놀이로 끝났을 터였다. 가로막고 말리는 사람이 극성일수록 사람의 열정은 더욱 불타오르기 마련이었다.

    ‘빠르긴 했지만, 막을 수 없었다.’

    산박은 사진을 안 찍고 이에 대해서 논의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고 감정에 따라서 움직였다.

    오늘은 그를 위해서 모든 죄를 안고 죽은 신부님이 더욱 생각나는 날이 될 것이었다. 인간을 도축하며 삶을 도모해야 했던 산박이었다. 인간 백정으로서 살아가는 산박의 정신을 붙잡고, 유지하고, 끝내는 빛처럼 나타나 어두컴컴한 동굴 속에서 그를 끄집어내고 대신 죽은 신부 덕분에 산박은 ‘평범한 감성’을 가지고 있을 수 있었다.

    이것이 시은과 산박의 가장 큰 후천적 차이였다. 둘은 모두 사람을 죽여서 살아남았다. 하지만 그중에 하나는 도와줄 사람 하나 없었고, 다른 하나는 자신의 커리어, 신부라는 직업마저도 불태워 버리며 산박을 위해서 죽은 신부가 있었다.

    그 차이는 명백하게 드러났다. 하나는 제정신, 평범한 사람의 감성을 보유하고 있었고, 다른 하나는 그렇지 못했다. 그저 괴물로 남았다.

    ‘나도 마음의 준비를 해야겠지.’

    산박은 짓눌려도 버텨낼 생각을 가졌다. 부산 은행이 던전 경제에 첫발을 내밀고 잔잔벼락 최대 수출 기업이 된다면 그것만으로도 산박은 큰 지분을 얻을 수 있었다. 로열티만으로도 중견 기업인이나 다름없었다.

    ‘앞으로 더 많은 드루이드 기술과 주문이 날 반겨 주겠지.’

    탄탄대로. 처음 이리저리 치였던 상황 같은 것은 이제 점점 사라질 것이고 그 누구도 산박을 건드리지 못할 것이었다. 이제 어지간한 놈들은 부산 은행의 파트너라는 지위로 물리치는 게 가능했다.

    ‘이럴 때 사업거리가 하나 떨어져야 하는데. 딱히 없단 말이지.’

    아쉬운 일이었다. 현재 산박의 가장 큰 수입처는 에메랄드 활력 사업이고, 그다음이 드루이드 사과 과수원 로열티였다.

    적자인 사업은 고아원 포도 사업이다. 아직 수입이 없는데 영천 토박이 목태효에게 자문료로 월 50만 원씩 주고 있기 때문에 적자 행진을 하고 있었다. 그래도 놔두는 이유는 고아원의 아이들, 그들과 산박의 관계를 만들기 위함이었다.

    ‘인력만큼 중요한 게 없지.’

    성적 좋은 애들은 지원해 주고, 그렇지 못한 애들은 농업에 투입시킨다. 거기서 나오는 수익은 점점 불어날 것이고 이내 하나의 세력을 만들 수 있었다. 그게 산박이 바라는 가장 기본적인 구조였다. 없는 사람들을 뭉쳐서 아름다운 관계를 만들 수 있음을 고아원을 통해서 시험하고 있었다.

    그 시험 결과에 따라서 산박의 미래도 달라진다. 한 도시의 약자들을 보살피고 그들을 중산층으로 끌어올리는 것을 자신이 하는 일로 여기는 자가 탄생하든지, 아니면 모든 것을 포기하고 그저 사회 복지에 헌신하는 일개 기업인이 되든지.

    작은 고아원의 작은 사업에 걸린 것치고는 지나칠 정도로 큰 방향성의 변화가 이루어진다. 그렇기에 산박은 제법 자주자주 고아원 사업의 현황을 파악했다.

    그 관심 때문이라도 실패하기는 어려웠다. 산박은 진지할 때는 냉정한 인물이었다. 그를 마주하고 일 이야기를 꺼내는 건 거북한 일이었고 그 거북함 때문이라도 많은 준비를 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가 몸을 돌렸다. 늦은 저녁 기차를 타고 세종시로 향했다. 마음 같아서는 신부님에게 가고 싶었지만 아쉽게도 종교로부터도 파면당한 것이 그분이었다. 연고지 없는 시체의 마지막 종착지는 폐기물 스티커가 붙여지는 것뿐이었다. 화장터에 지정된 곳에 뿌리려고 해보았지만 살인자를 받지 않았다. 그 대신 짊어진 십자가의 값을 톡톡히 치렀다.

    그걸 신부는 사랑이라고 말했다. 예수님도 할 수 있는 것인데 그분을 따르는 내가 하지 못한다면 그분을 믿는 이유가 없다고 산박에게 차분하게 말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산박은 그렇기에 더더욱 무신론자가 되었다. 구원조차도 내려주지 못하는 예수 따위를 왜 그렇게 믿는지 더더욱 이해할 수 없었다.

    그를 구원한 것은 예수가 아니었다. 신부님이었다. 그를 파멸로부터 구한 것은 빛이 아니었다. 죽으면 썩어 문드러지는 살과 뼈를 지닌 한낱 인간이었다. 그 위대한 인간에게 신의 이름표를 붙이고 싶지 않았다.

    산박은 다음 날부터 더욱 빠르게 움직였다. 자신과 사업하는 사람들을 차근차근 만나기 시작했다.

    “안녕하십니까!”

    생수 공장을 운영하는 관리소장이 산박의 방문을 크게 기뻐하며 맞이해 줬다. 안 그래도 생수 사업 때문에 지하수가 고갈되고 그곳에 바닷물이 차면서 제주도가 거의 망해 버렸다. 그 뒤로 생수 사업 하는 것이 많이 어려워졌는데, 그 속에서 물의 연어는 혁명이나 다름없었다.

    “반갑습니다. 그냥 공장 한번 둘러보려는 건데 굳이 관리소장님께서 와주실 줄은 몰랐습니다.”

    “아닙니다. 장 어르신에게 얼마나 말씀을 많이 들었는데요. 가볍게 대했다가 아주 큰일 납니다. 그리고 저 개인적으로도 태 사장님을 깊이 존경하고 있습니다. 개천에서 용이 되어서 승천하고 있는데, 어찌 존경심이 안 들겠습니까?”

    입을 나불거리는 것이 기가 막힐 정도로 대단했다. 침 하나 튀기지 않고 폭포수처럼 쏟아져 나오는 아첨이었다.

    “근데 전에 봤던 공장장과는 다른 분이신데…….”

    “예. 교체되었습니다. 생각보다 브랜드 생수가 갑자기 반짝 튀어 올라서 급히 인선을 새롭게 잡았습니다.”

    “아, 그렇습니까.”

    관리소장이 냉큼 명함을 건네줬다. 장면적(章綿倜)이라 적혀 있었다. 그는 하나부터 열까지 생수 공장의 현재 상황을 말해줬다.

    “주차장을 새로 확장했습니다. 전국 곳곳으로 뻗어 나갑니다. 하루에 들어오는 생수 운반 트럭만 해도 3백 대가 넘습니다. 특히 물맛이 대단하다고 여겨져서 사재기 현상까지 일어나고 있습니다.”

    “사재기요?”

    “한 사람이 못해도 한 달 먹을 걸 한 번에 주문합니다. 그 덕에 아주 호황입니다. 매출이 정말 크게 증진되었습니다. 아쉬운 건 물의 연어가 생산하는 물의 양이 항상 정해져 있다는 겁니다.”

    “성장이 좀 느리긴 합니다.”

    “그래도 대단합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것 아닙니까?”

    정확히 말하자면 초월의 힘을 소비해서 물을 만들어 내는 것이지만, 굳이 깊게 설명하지는 않았다.

    “다른 생수 회사에서도 저희한테 하루에 몇 통씩 전화를 겁니다. 저희 쪽 물을 가져가고 싶다고, 하하하! 기존 생수 사업체들도 계약 기간이 다가오자 어찌나 다급해지는지. 말도 마십시오!”

    그는 기분이 좋은지 이것저것 말해 주었다. 그중에는 쓸데없는 것도 있었지만, 사업의 장래가 밝다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그럴 수밖에.’

    하다 하다 초월의 힘으로 굳이 물을 만들어서 파는 경우는 없었다. 단가가 낮기 때문이다. 브랜드 이미지를 입혀서 가격을 높여도 푼돈이다. 던전 사용자가 할 일이 아니었다.

    ‘물의 연어가 아니었다면 나도 안 할 짓이지.’

    차라리 물약으로 만들어서 조금이라도 돈을 더 받는 선택을 할 것이다. 대장삵의 치료수도 같은 맥락이었다.

    “원래는 야간작업이 없었는데, 제법 장사가 잘되어서 요즘에는 파트타임으로 야간 근무자도 구하는 형편입니다. 청소업체도 새로 구했습니다.”

    “야간 근무요?”

    “예. 네 시간 짧게 하고 저녁 열 시에 퇴근하는 사람들입니다. 일주일에 한 번은 청소업체와 함께 청소하고 두 시간 일찍 보냅니다.”

    말 그대로 알바하러 오는 사람들인 셈이었다.

    “근데 그럴 물이 있습니까?”

    “정령에서 나오는 물은 정직원이 관리하고 원래 펌프로 끌어 올리던 물만 그렇게 관리합니다. 전혀 걱정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확실하게 구역도 나누어서 관리합니다.”

    “좋군요.”

    공장 한 바퀴를 확 돌고 산박은 곧바로 관리소장과 함께 점심을 먹었다.

    “제가 모시겠습니다.”

    “아닙니다. 공장 내에 식당이 있잖습니까. 거기서 해결하겠습니다. 굳이 대접해줄 필요는 없습니다.”

    “아… 그러시다면야……!”

    관리소장은 산박과 함께 구내식당에서 밥을 먹었다.

    “진수성찬이네요. 원래 뷔페식으로 합니까? 가짓수만 해도 여섯 가지나 되네요.”

    밑반찬 네 개에 메인이 두 개. 이 정도면 진수성찬이나 다름없었다. 무엇보다 양을 알아서 맘껏 먹을 수 있다는 것이 컸다.

    “외진 곳이라 근처에서 직접 물품을 구입해 가져오는 덕분입니다. 사업하는 사람이 어디에서든지 싸게 가져와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저기 안쪽에 조리하는 곳이 바로 보이기에 믿음도 줄 수 있을뿐더러 이번에 제법 큰 세척기까지…….”

    산박은 이를 들으면서 내심 놀랐다. 관리소장의 관리력이 대단했다. 모르는 게 없어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장 노인이 한번 훑고 지나간 길을 산박이 걷고 있었다. 장 노인에게 대답했던 것을 똑같이 산박에게 대답하면 된다. 그것도 못 하면 그냥 장사 접고 귀농하는 게 옳았다.

    산박이 실망하는 것 없이 성공적으로 그를 배웅한 관리소장은 서둘러 스마트폰을 놀렸다.

    “예! 어르신!”

    ―어떻게 되었어?

    “실망 하나 하지 않았습니다.”

    ―좋아, 잘했어.

    “감사합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도 빠짐없이 상세하게 적어서 서류 봉투, 퀵으로 확실하게 보내. 혹시라도 놓친 게 있을 수 있으니까.

    “예!”

    그가 냉큼 대답했다. 집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결혼했다가 돈 때문에 이혼당하고 돌아온 것이 장면적이었다. 그런 그를 장 노인은 다정하게 받아줬다.

    세상 풍파 제대로 맞아본 사람답게 장면적은 일을 꼼꼼히 하며 즐거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새벽 두 시가 넘도록 택배 상하차를 해본 경험이 매우 컸다.

    그것에 비하면 지금 하는 관리직은 몸이 아주 편했다. 방문하는 높은 사람에게 굽신거리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세상에게 배웠다. 자존심은 남에게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꿈에 내세워야 하는 것이라고. 그리고 그의 꿈은 이 공장에서 관리소장으로 있을 때는 내비쳐지지 않는다. 퇴근할 때가 되어서야 툭 튀어나오는 것이다. 그렇기에 그는 아무리 젊은 놈이 와도 자존심을 내세우지 않았다.

    * * *

    산박은 눈을 떴다. 자신의 침실이 보였다. 창문 너머로는 낚시터가 눈에 들어왔지만 이상하게 색감이 지나치게 짙었다. 마치 옅은 어둠이 온 세상에 깔린 것 같았다.

    저밀도의 어둠을 바라보는 산박의 앞에 슬금슬금 그림자가 피어올라 왔다.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불길하기 짝이 없었다. 그곳에서 음성이 흘러나왔다.

    “챔피언으로서 계약이 완료된 드루이드, 태산박에게 의뢰를 넣는다. 이 의뢰는 이행해도 되고, 그러지 않아도 상관없다. 하지만 반드시 나중에 적법한 불이익을 받을 것이다.”

    ‘불이익인데 적법하다니…….’

    전혀 맞지 않았다. 하지만 이해하지 못할 것도 아니었다. 호구 짓을 하도 남발하다 보면 때로는 불이익이 필요하기 마련이었다.

    “의뢰의 내용은 건방진 벼락의 신에게 야만신이 이 세상에서도 건재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 중동 놈들을 말하는 것인데…….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나?’

    서로 싸우면 당사자들끼리 피를 흘리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아무리 거리가 멀다고 해도 산박은 자신의 적대 세력을 추가하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었다.

    “보상은 원하는 3레벨 장비 아이템 다섯.”

    3레벨 장비는 비싸다. 무지막지하게 비싸다. 최소 천만 원은 기본이다. 무려 중고임에도, 나온 지 몇 년이 지나서 재고 처리에 골머리를 썩이고 있음에도 천만 원 이하로는 절대 내려가지 않는다. 훌륭한 담합 덕분이었다.

    그렇기에 지정 가능한 장비를 다섯 개나 얻을 수 있다면 엄청난 가치를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수지에 맞지 않는 거래였다.

    ‘배보다 배꼽이 커지지.’

    분명 ‘돈’으로 따지면 로우 리스크 하이 리턴이다. 하지만 세력으로 따지면, 자신의 인간관계를 위해서는 하이 리스크 로우 리턴이었다.

    ‘중동 놈들은 특히나 위험해. 굳이 일부러 밟을 필요가 없다.’

    싸대기를 한 대 맞아도 웃으며 그 상황을 모면하는 게 옳았다. 해외여행을 할 때 인종 차별에 대처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도망치기다. 어쭙잖게 입 털다가 진짜로 맞아 죽는 수가 있다. 인종 차별을 제대로 당해본 사람들은 하나같이 RUN을 조언한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고민해 보도록.”

    “아닙니다. 의뢰 포기하겠습니다. 불이익, 달게 받겠습니다.”

    이에 대답은 없었다. 그저 산박은 잠에서 깼다. 어느새 온몸이 식은땀으로 가득했다.

    물을 한 잔 마시며 산박은 야만신에 대해서 생각했다.

    ‘폭주 기관차나 다름없네. 확확 지르는 것 봐라.’

    큰 비밀이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산박은 그것을 직접 조사할 결심은 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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