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27화 (227/270)
  • 227화

    불이 켜진 방에서 이시은은 커피가 든 머그 컵을 테이블에 놓고 노트북을 켰다. 그리고 첫 타이틀을 적었다.

    [태산박 보고서]

    암살, 살해. 그런 단어는 쓰지 않았다. 가장 먼저 그의 강점을 서술해 나갔다.

    ‘결단력.’

    추진력. 어마어마한 수준이었다. 어지간한 투자자는 생각조차도 못 할 위험한 질주를 하고 있는 게 태산박이었다. 고꾸라져도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그만큼 계속해서 사업을 벌이고, 던전에 투신한다.

    그 열정. 그것 하나만으로도 이미 태산박은 결코 적으로 둬서는 안 되는 사회인이었다. 내부에서 타오르는 장작에 끝이 없었기에 하이 커리어에 도달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커리어를 포기한 직장인이라면 의미가 없었지만, 그는 사업가다. 자신이 한 만큼 영향력을 가질 수 있었다.

    ‘뛰어난 머리.’

    말할 것도 없다. 지금의 산박을 있게 한 가장 큰 이유였다. 하지만 너무 두루뭉술했다. 시은은 타자 소리를 내며 이를 지웠다.

    ‘디테일하게. 내가 보고 송곳을 떠올릴 수 있게.’

    피곤함에 찌들어 상대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삶에 찌든 택시 기사를 죽이는 일이 아니다. 매사에 열정 있고, 하나하나 돌다리를 두드리고 건너는 호랑이를 잡아야 한다. 그러려면 전과 다른 방식이 필요했다.

    ‘성공에 대한 열망?’

    자신의 커리어를 망칠 만한 일이 터진다면 적극적으로 나설 터였다. 이를 이용한다면 산박을 끌어낼 수 있었지만, 통할 것 같지는 않았다. 통하더라도 산박이 자신의 위에 설 것 같았다.

    ‘역이용당할 위험이 있어.’

    이 또한 다시 지웠다. 떡밥 같은 걸로 낚을 수 있는 물고기가 아니었다.

    ‘접근전에도 자신감이 있다.’

    동물 변신을 통한 접근전으로 재미를 본 것이 산박이었다. 3레벨 레이드 때도 그런 상황이 온다면 능히 야수로 변신하여 개입할 여지가 있었다.

    딱 그림이 그려지자 시은은 잔혹한 미소를 지었다. 위기 속의 팀을 구하려는 산박의 뒤통수를 친다면 아주 쉽게 일이 끝날지도 몰랐다.

    그 가죽을 벗겨내고 펄떡거리는 심장을 움켜쥐고 동물로 변신한 산박의 눈동자가 생각났다.

    시은의 숨결이 거칠어졌다. 지금 당장에라도 죽이고 싶은 마음이 커졌다.

    벌컥.

    시은은 얼음이 동동 띄워진 아이스커피를 단숨에 크게 한 모금 털어 넣었다. 차가운 액체가 그녀의 몸으로 들어갔다.

    ‘중요한 건 후방 직업이라는 점.’

    레벨이 높아질수록 그 차이는 벌어질 것이다. 전방에 투입되는 횟수가 줄어들 터였다. 수작질하지 않는다면… 산박이 적을 향해 달려드는 경우는 점점 줄어들게 된다.

    ‘3레벨 던전이 마지노선이 될 수 있다.’

    전방이 탄탄한데 굳이 후방 직업 소유자가 전방을 받쳐줄 리가 없었다. 즉, 이를 노린다면 3레벨 첫 레이드에 산박을 죽여야 했다.

    ‘만약 죽인다면, 한 방에.’

    무위라 불리는 스킬도 없는 게 산박이었다. 현실에서는 고레벨 방어 아이템을 소지하고 있을지 모르지만 던전에서는 얄짤없이 3레벨 장비와 소모 아이템을 가지고 있어야 했다. 물론 이는 시은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렇게 따지면 난 사장님의 방어를 뚫을 수 있어.’

    자신 그리고 언데드까지. 두 명 모두 3레벨 공격 아이템을 쏟아붓는다면? 산박이 이를 미리 계산하고 그 모든 걸 짊어지고 3레벨 던전 공략에 임한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따지면 따질수록 3레벨 던전이 산박을 죽이고 자신은 살아갈 길로 보였다.

    ‘그게 함정이라는 거지. 던전은 배신할 순간이 정해져 있어.’

    보스가 거의 다 잡혔을 때. 딱 그때뿐이었다. 던전 클리어 직전에 배신했다가 죽이지 못하기라도 했다간 그 이후가 없었다. 망명하면 된다고 태평한 소리를 할 수 있었지만 그건 도망쳐본 적이 없는 자의 시건방진 소리일 뿐이었다.

    “하아…….”

    시은은 잠시 모니터에서 눈을 뗐다.

    ‘생각보다 막막하다.’

    하지만 포기할 수는 없었다. 산박이라는 스포츠카는 벌써 엔진을 켜고 고속 도로에 진입하려고 신호등이 바뀌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번 기회를 놓치면 다음은 없었다. 그저 조용히 파멸하는 자신만 있을 뿐이었다.

    짝!

    시은은 볼을 손바닥을 치고 더욱 집중했다. 현실에서 산박을 잡는 건 포기했다. 웬 이상한 중동 놈들 때문에 태산박의 경계심이 더욱 올라갔다. 그전까지는 오피스텔을 구해서 지내는 곳을 3분할 시켰는데 이제는 그마저도 걷어내고 개인 낚시터가 있는 오두막에서 지내게 되었다.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겠지.’

    올 테면 오라는 식이었다. 그리고 가게 된다면 반드시 패배할 수밖에 없었다. 홈그라운드에서 태산박을 상대로 승리하려는 생각 자체가 글러 먹었다.

    ‘목표는 3레벨 레이드 던전에서 태산박을 죽이는 것.’

    보조 목표는 자신의 생(生)을 도모하는 것. 성공한다면 시은은 살아남을 것이고 실패한다면 죽을 것이었다.

    만약 보조 목표까지 모두 성공한다면 시은은 살인죄가 드러나더라도 만족하며 교도소로 갈 수 있었다. 무의미한 무기 징역의 나날? 운이 좋으면 15년 복역으로 끝날지도 모른다. 혹은 아예 집행 유예가 될 수도 있었다. 던전 내에서의 상황은 증거 하나 없기 때문이다.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른다면 시은이 이전부터 태산박을 죽이려고 했다고, 철저한 계획에 따라 태산박을 죽였다고 단언할 사람은 없었다.

    ‘높은 경계심도 주의해야 할 부분이지.’

    시은은 이를 저장하고 노트북을 덮었다. 그리고 외투를 입고 당진 국제 던전 시장으로 향했다. 아이쇼핑을 하면서 산박을 어떻게 죽일지 상상하려는 것이었다. 이는 분명히 큰 도움이 될 것이었다.

    시은은 벌써 태산박의 움직임을 상상하며 가상 시뮬레이션을 돌리기 시작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산박과 싸우기 시작했다. 이 시간이 길어질수록 시은의 작전 성공률은 올라갈 것이었다.

    ‘지금부터 장비 목록을 만들어야 해.’

    “3레벨 제품 중에서 확실한 한 방을 원하는데요. 주 무기로 사용할 생각이에요.”

    “예, 고객님! 혹시 직업이 어떻게 되십니까?”

    “전 후방 직업인데, 전방 직업에 선물을 하려고요.”

    “아, 그러시다면 요즘에는 이겁니다.”

    직원이 곧바로 시은을 안내했다.

    “가격이 조금 셉니다. 하지만 이만큼 트렌디한 물품은 없습니다.”

    롱 소드를 직원이 가리켰다.

    “화염 계열 롱 소드이기에 레이드에서 가장 범용성이 있습니다.”

    어지간해서는 통하는 게 불꽃이었다. 하지만 시은은 고개를 저었다.

    ‘바로 들키지.’

    열기는 산박에게 가장 안 통하는 속성이었다. 공기를 타고 움직이기 때문에 곧바로 알아채기 쉬웠다. 피부로 너무 쉽게 간파당하는 힘이다. 뒤 치기 해도 검이 닿기 전에 알아차리고 피해를 최소화하며 곧바로 대처할 수 있었다.

    “화염 계열은 이미 가지고 있거든요. 그 사람이요.”

    시은은 능숙하게 변명거리를 툭 내뱉었다. 천부적인 거짓말쟁이다웠다.

    “아! 그러시다면 원하시는 속성이 혹시 있으십니까?”

    “음, 주 무기로 쓰긴 쓰는데 약간 부무장 같은 느낌으로요. 즉발적으로 확실하게 적을 침묵시킬 수 있었으면 좋겠는데요.”

    “그런 거라면 바람 속성을 추천해 드립니다. 회피하기가 쉽지 않죠. 그리고 응집시킨다면 다른 마법 검에 비해서 전혀 밀리지 않습니다.”

    “육체 능력 보정도 가능하고요?”

    “가능은 하지만 그러면 값이 비싸져서……. 대체제도 충분히 존재합니다.”

    직원이 순식간에 태세를 전환했다. 매출을 바짝 올리는 영업원답게 대체제를 툭 집어넣었다. 너무 높은 가격은 소비자에게 부담만 줄 뿐, 도망갈 길이 반드시 있어야 했다.

    그러나 시은은 거기에 편승하고 싶은 마음이 조금도 없었다.

    ‘필요하다면 대출을 해서라도 구매하면 될 일.’

    나중의 일이지만 비싼 것이라도 충분히 구매 가능했다.

    “중고가부터 보여 주세요.”

    “예!”

    종업원이 냉큼 대답하며 곧바로 바람 마법 검을 소개했다.

    “평범한 검처럼 보이지만 전혀 다른 시스템이 적용된 것입니다.”

    “어떤 건가요?”

    “리볼버 증폭 시스템이 탑재된 최신식 롱 소드입니다. 여기 손잡이 안쪽을 보시면 탄창을 끼울 수 있습니다. 격발 스위치를 누르면 마법 검에 순간적으로 마력이 주입되고 주문력이 급격하게 증가합니다.”

    “어떤 방식이길래 그렇게 되는 거죠?”

    시은이 흥미로워하는 표정을 지었다.

    “탄창 내부에 있는 추가 용량 덕분입니다. 딱 5초 동안 유지되고, 내부에 있는 젤리 형태의 연금 물약은 소모되어서 사라집니다. 물론 탄창당 세 번 사용할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습니다.”

    “탄창 가격이 어떻게 되죠?”

    “3레벨 던전 소비 아이템치고는 제법 비싼 가격입니다만, 현재 특가로 탄창 열 개에 열 개를 더 얹어서 팔고 있습니다.”

    안 팔리고 있다는 증거였다. 그도 그럴 것이 바람 마법 검은 가장 선호도가 낮았다. 전투에 사용하는 검이라면 무조건 화염을 외치는 신봉자들이 많았다. 시각적 효과 때문에 불이 가장 선호도가 높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시은은 씨익 웃었다.

    “계속 설명해 주세요.”

    순간적인 차이를 벌려놓을 수 있다면 얼마든지 돈을 쓸 생각이 있었다.

    ‘암살이라는 건 한순간에 끝나 버리지.’

    * * *

    3레벨에 도달한 산박은 굳이 이를 다른 이에게 말하지 않았다. 대신 행동으로 그 사실이 드러났다. 3레벨에 도달하면 2레벨 던전을 한 달에 두 번밖에 못 돌기 때문이었다. 그 덕에 축하 인사가 이어졌지만, 공개적으로 무언가를 회사 차원에서 한 것은 없었다.

    “그냥 조용히 보내고 싶어서요. 레벨 업 한 게 뭐가 대수라고요.”

    산박은 이 주제에 대해서 웃어넘겼다. 본인이 그렇다는데 남이 덩실덩실 춤추면서 적극적으로 캠프파이어를 피우고 폭죽을 터트릴 수는 없는 법이었다. 그 정도로 그와 친밀한 관계의 인물이 없는 것도 컸다.

    ‘허리띠를 졸라매야 해.’

    교토로 가는 일정이 잡혔다. 그 때문에 송서아가 쇼핑 한번 같이 하자고 제안한 상태였다. 본래라면 남자인 산박이 권유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

    ‘내가 요즘 많이 피곤한가?’

    여성은 수동적이다. 자동차를 운전할 때조차 남자와 다른 공감대를 형성한다. 이는 생물적인 차이였다. 엔지니어는 남자가 극단적으로 많고 간호사는 여자가 많은 것과 같은 맥락이었다.

    산박은 자신의 실수를 무마하려 송서아에게 선물 하나를 하려고 하고 있었다. 그래서 허리띠를 바짝 졸라매고 돈을 장전하기 바빴다.

    ‘무리하지 말라고 해도 사는 세계가 달라도 너무 달라.’

    서아와 함께한다는 것은 그녀의 배경까지 함께한다는 소리와 같았다. 산박은 이를 감수해야 했다.

    ‘목걸이가 좋겠지.’

    알지도 못하는 브랜드를 검색하고, SNS를 돌아다니며 해시태그를 쫓아다니기도 했다. 그리고 백화점에서 서아를 만났다.

    먼저 권유한 것이 송서아였기에 산박이 부산까지 내려가야 했다. 장거리였음에도 불편하지는 않았다. 갑자기 확 달린 만큼 잠깐의 공백 기간이 찾아온 상태였다. 다른 팀원이 3레벨에 도달하기 전까지 산박은 상당한 여유가 있었다.

    “오랜만이에요.”

    송서아가 가볍게 손을 들어 올려 휘저었다. 그녀는 블랙 스커트에 새하얀 재킷을 입고 있었다. 그리고 눈에 익숙한 백을 어깨에 걸쳤다.

    “잘 어울려요. 굳이 옷을 살 필요가 없겠는데요?”

    “오피스 룩이에요. 교토는 관광이 주목적이고, 사업은 그다음이에요.”

    산박이 자연스럽게 그녀의 손을 잡았다. 송서아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그렇게 우두커니 있다가 둘 다 웃음을 터트렸다.

    “으! 오글오글!”

    “흐흣흐……. 저도 똑같은 생각 했어요.”

    그렇게 말해도 손을 놓지는 않았다. 가슴이 간질거리는 이 감각 때문에 연애를 한다.

    “목걸이를 선물해 주고 싶은데, 괜찮으시죠?”

    산박은 그녀의 쇼핑 루트에 혼선을 주지 않기 위해서 먼저 자신의 목적을 밝혔다.

    “안 그러셔도 돼요. 아직 사업 초기잖아요? 목걸이에 쓸 돈으로 조금 더 재정적으로 안정되는 게 좋지 않겠어요?”

    그 말에 산박은 깜짝 놀랐다.

    “정말이죠? 다시는 안 물어볼 거예요. 목걸이 선물 필요 없어요?”

    “네. 대신 같은 브랜드 시계나 하나 맞춰요. 요즘 그게 유행이거든요.”

    “그러죠.”

    산박은 자연스럽게 송서아가 이끄는 대로 움직였다. 쇼핑은 여성의 무대이고 그들의 영토였다. 굳이 사사건건 개입한다면 더 오래 걸릴 뿐이었다. 여기서는 흐르는 강물에 집어 던져진 사람처럼 폐에 공기를 가득 넣은 채로 가만히 떠있어야 했다.

    순식간에 쇼핑을 마치고 백화점 내부에 있는 카페에서 곧바로 시계 사진을 찍기 위한 세팅을 시작했다. 먼저 시계가 들어있는 귀해 보이는 갑을 닫은 채 브랜드명이 확실하게 보이도록 살짝 기울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산박도 눈치껏 이를 따라 했다.

    송서아가 헛기침하며 자신이 찍으려는 포즈가 담긴 사진을 보여줬다. 시계를 차고 서로 손가락 끝이 살짝 닿는데, 역하트 모양이었다.

    ‘이거, 너무 노골적인데…….’

    그 탓에 송서아도 대놓고 설명해 주지 못하고 사진을 불쑥 들이민 것이었다.

    명품, 사랑 그리고 카페.

    “자, 이제 찍을게요.”

    “팔이 꼬여 있는데 사진 찍을 수 있겠어요?”

    “으, 앗?”

    검지손가락을 놀리던 송서아가 스마트폰을 놓쳤다. 산박이 가볍게 이를 잡아챘다.

    “휴! 고마워요. 사실 이런 건 처음이라서요.”

    “저도 처음이긴 한데, 제가 한번 찍어 볼게요.”

    산박이 일어섰다. 생각보다 자세가 나오지 않아서였다. 역하트라는 게 어려워 보였다. 그림자가 확 시계를 가렸다. 이에 송서아가 풋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다른 사람들도 이렇게 힘들게 찍는 걸까요?”

    “그렇겠죠. 오히려 재밌는데요? 산박 씨는 아니에요?”

    “저도 좋아요. 원래는 싫어하는데, 생각보다 재밌네요.”

    우웅! 우우웅!

    주문한 커피가 나왔다는 걸 거세게 알리는 알림에 산박이 스마트폰을 테이블에 놓고 커피를 받으러 향했다. 그 모습을 송서아가 가만히 지켜봤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