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26화 (226/270)
  • 226화

    파지야 말로프. 그녀는 던전 사용자였고, 직업은 암살자였다. 후밥 달리야흐가 선두에서 적을 흔들면 그 기회를 통해서 안전하게 목표물을 취득하는 과정을 행한다. 거기에는 그 어떤 실수도 없었다. 그만큼 조리된 음식을 잘 받아먹을 수 있는 것이 파지야 말로프였다.

    하지만 이 경우는 무엇인가.

    ‘계획이 틀어졌어.’

    왜 그런가.

    ‘모르겠어.’

    그저 올라가서 집에 들어서야 했는데 그러지 않고 바로 내려왔다. 담배를 피우며 신호를 기다리던 파지야 말로프에게는 깜짝 놀랄 일이었다. 하물며 그 대상이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며 다가온다면.

    덜덜.

    손가락이 미친 듯이 떨려 왔고, 담배조차도 고정시킬 수 없었다. 이에 파지야 말로프는 눈을 내리깔며 손을 내리고 이빨로 담배를 한 바퀴 굴려서 입술로 꽉 물었다.

    “후우.”

    담배 연기가 빠져나가고, 그대로 코로만 숨을 들이쉬며 담배를 피우지 않았다. 그 과정은 산박이 보기에 확실히 도둑이 제 발 저린 모습이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아무런 연관이 없는 자라면 그렇게 행동할 수가 없었다.

    “무, 무슨 일이시죠?”

    제3세계에서 한국어는 대표적인 제2외국어 중 하나였기에 대화는 한국어로 진행됐다. 조선 후기를 지나 대한 제국 초기의 극렬 국수주의의 흔적이었다.

    기회를 받아먹는 삶을 살았기에 파지야 말로프의 말은 초보처럼 여겨졌다.

    “저요? 제가 왜요?”

    산박이 고개를 갸웃하며 그녀의 몸을 훑었다. 파지야 말로프의 몸매는 실로 매력적이었다. 그 모습에 그녀는 안도했다. 아직 자신의 목적과 정체가 탄로가 난 것은 아닌 것처럼 보였다.

    “전 결혼했어요. 쓸데없는 작업은 사양이에요.”

    “그래요? 근데 한국어 정말 잘하시네요. 유학?”

    “관광요.”

    산박이 멈춰 섰다. 서로 대화하기 편한 상태였다. 거기서 산박이 다시 한 걸음 다가오자 파지야가 반걸음 물러섰다. 조금 위험할 정도로 밀착한 상태에서 산박이 그녀의 담배를 손으로 낚아챘다.

    “……!”

    “여기 금연 구역이거든요.”

    산박은 담배꽁초를 바닥에 버리고 발로 밟고 비틀었다.

    “죄송합니다.”

    “조심해 주세요.”

    그것을 끝으로 산박이 몸을 돌렸다. 파지야는 안심했고, 산박은 이때를 노렸다. 순식간에 파지야에게 달려들어서 머리채를 잡아 쑥 내렸다. 파지야의 상체가 아래로 확 내려갔다. 산박은 그 상태에서 파지야의 오른손을 잡고 비틀며 척추 부분에 그녀의 손등이 맞닿도록 했다. 그다음에 한 걸음 물러서며 그대로 자신의 무릎을 굽혀 자연스럽게 파지야 말로프를 무력화시켰다.

    “큭!”

    주저앉게 된 그녀는 그 무엇도 할 수 없었다. 왼팔을 버둥거렸지만 엎드린 상태에서 할 수 있는 건 몇 없었다. 그마저도 잡혀서 똑같이 척추에 닿게 되었다. 산박이 파지야의 양손을 우악스럽게 한 손으로 움켜쥐었다.

    “흣!”

    힘을 줘봤지만 탈골 조짐이 보이자 결국 파지야는 힘을 뺄 수밖에 없었다. 산박이 파지야의 몸을 뒤졌다. 단검, 던전 아이템, 독침이 담긴 사출형 나무토막 등 온갖 것들이 쏟아져 나왔다.

    “비, 빌어먹을!”

    아랍어로 욕지거리를 해대는 파지야 말로프를 보며 산박은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누가 보냈지? 우릴 보고 있는 사람이 있나? 없군. 널 제압해도 다른 상황이 벌어지지 않으니까.”

    산박이 그녀의 양손을 잡은 채 코어의 힘으로만 일어섰다. 상체는 굽히고 하체만 바로 선 채로 거미처럼 뒤돌아가서 그녀의 어깨 부분 옷을 잡고 단번에 들어 올렸다.

    “앞장서.”

    “크윽!”

    거칠게 반항하던 그녀가 이내 말했다.

    “소리를 지를 거야.”

    산박은 거기에 전혀 말대답도 하지 않고 닥치는 대로 그녀를 끌고 오피스텔의 계단을 내려갔다. 파지야가 반항을 했지만 그 즉시 겨드랑이를 손날로 찍었다. 끔찍한 고통 때문에 눈물이 한 방울 주룩 흘러내릴 정도로 가혹한 공격이었다.

    산박은 반지하 주차장에 있는 자신의 차량에서 밧줄을 꺼내 파지야를 단단히 묶었다. 그러고 나서는 바로 무기를 챙겼다. 단검 하나면 족했다. 의외로 집의 평수에 연연하지 않는 산박이라서 집 내부는 복층식에 평수가 작았다. 롱 소드 하나 제대로 휘두르는 것도 힘든 편이었다.

    ‘인질은 중요하지.’

    다시 그녀를 이끌고 산박은 오피스텔로 올라갔다. 생각보다 적들은 많이 방심하고 있는 듯했다.

    삑삑삑. 삑!

    띠리롱!

    비밀번호를 넣고, 문을 열었다. 내부는 어둠으로 가득했다. 현관에 불빛이 들어왔지만 보이는 건 없었다. 발로 문을 열며 산박이 파지야 말로프를 앞으로 내던졌다.

    동시에 사각에 있던 한 놈이 튀어나와서 그녀를 덮쳤다. 하지만 상대가 산박이 아닌 데다 넘어지고 있다는 건 알아차리지 못했고, 그대로 서로 뒤엉켜서 넘어졌다. 그사이에 산박이 불을 켰다.

    “덮쳐!”

    아랍어가 흘러들어 왔지만 산박 대신 그의 뒤를 따르고 있던 대장삵이 날아올라서 2층에서 뚝 떨어져 거실에 착지하려는 한 놈을 덮쳤다. 공중에 떠있었기에 작은 힘으로도 충분히 착지를 저지할 수 있었다.

    푹푹푹!

    그사이에 산박은 파지야와 함께 쓰러져 있는 놈의 허벅지에 단검빵을 세 방 넣어줬다. 양쪽 고르게 했고, 지방층이 많은 허벅지 부분에 찔러줬다.

    이후에는 발로 파지야 말로프의 목을 밟은 상태로 사위를 주시했다. 세 명이 순식간에 당했고, 두 명은 이 자리에 없었다. 밖의 차량 내부에서 대기하는 중이었다.

    “캬아아악!”

    대장삵이 나히다 하와(Naheeda Hawa)의 얼굴에 손톱자국을 크게 냈다. 얼굴이 피범벅이 되었다.

    “크으윽!”

    허벅지에 칼침을 먹은 후밥 달리야흐가 몸을 일으켜 세우려고 했지만 갈비뼈를 걷어차였다. 얼굴을 양손으로 가린 채 고통을 감내하고 있는 나히다 하와도 구타를 당했다.

    적은 다수. 지금 당장 움직이지 않는다고 해서 가볍게 봐서는 안 된다. 모조리 밧줄로 묶어서 따로 둔 상태로 산박이 심문을 시작했다.

    “누구 사주를 받고 왔냐?”

    “…….”

    말을 하지 않자 산박은 두 번째 질문조차도 하지 않았다. 그저 집게손가락과 중지 손가락을 쇄골 쪽에 깊이 넣고 힘을 줬다.

    “끄으으읍.”

    제법 참는 모습에 결국 산박의 선택은 단순했다. 하나씩 화장실로 끌고 갔다. 그리고 테이프로 그 입을 막았다.

    “흐읍. 흐읍! 흐으읍!”

    화장실 냄새와 바닥 타일의 익숙한 감촉에 여자들의 숨이 한껏 거칠어졌다. 이들도 사람을 죽이고 다녔던 놈들이었다. 지금 산박이 뭘 하려는지 잘 알고 있었다.

    “갑자기 수도세가 많이 나와도 의심할 사람은 없어. 그리고 CCTV가 있다고 확신하고 있는 것 같은데, 그거 그냥 모형 CCTV야. 이 동네가 원래 그래. 제대로 된 CCTV가 없어.”

    있다고 해도 그걸 가만히 놔둘 산박이 아니었다.

    “읍! 으르브읍!”

    나히다 하와가 입을 바짝 열었지만 후밥 달리야흐가 몸을 틀며 그녀를 건드렸다. 하지만 그녀는 계속해서 지껄이려고 노력했다. 산박이 테이프를 벗겼다.

    “우, 우리 동료 두 명 더 있습니다. 우리 죽이면, 당신도 죽습니다!”

    “그건 내가 원하는 대답이 아닌데. 강을 건너기 전에 말해라.”

    “저희는 그저 야만신을 배신하라고 조언하러 왔을 뿐입니다! 이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신께서 말씀하셨다! 진짜 신을 믿으라고!”

    “근데 왜 정상적으로 접근하지 않고 이렇게 집에 숨어 있었지? 무기는 또 뭐고.”

    “그건…….”

    나히다 하와는 더 말을 이어 나가지 못했다. 이내 산박이 상냥하게 말을 이어 나갔다.

    “만약 그런 이유라면 난 다른 신으로 갈아탈 생각이 없어. 만족스럽거든. 이대로 조용히 너희 나라로 돌아간다면 없었던 일로 하지. 지금 죽은 사람도 없잖아?”

    “바, 받아들이겠습니다.”

    “물론, 나도 보험은 있어야겠지? 제법 협력적인 네가 내 인질이 되어 줘야겠어.”

    “예?”

    산박은 나히다 하와의 입을 다시 틀어막았다. 그리고 리더로 보이는 후밥 달리야흐를 풀어줬다.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두꺼운 입술의 그녀는 표독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개같은 년! 우리를 배신해?”

    그 말에 나히다는 답변해줄 수 없었다. 산박은 그걸 보면서 자신이 상대를 조금 과대평가했음을 알게 되었다.

    ‘다른 신들의 가벼운 잽인가. 점점 신들의 대리전에 참가하는 듯한 기분이 드는데.’

    기분이 좋지는 않았다. 이거 한 번으로 끝나지 않을 게 분명했다.

    ‘이들을 일소해 봤자 좋을 건 없다. 이렇게 둘로 나뉘어 있을 때는 더더욱.’

    끝장을 보거나 돌아갈 수 없는 강을 건너는 건 상대를 모조리 몰살 가능할 때나 가능한 일이었다. 이렇게 산박이 드러난 상태에서 그렇게 하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집의 보안에 신경 쓰려면 대출을 받아서 동네를 옮겨야 한다.’

    어려운 일이었다. 차라리 경찰서 앞이나 법원 근처로 옮기는 게 좋을지도 모른다. 거기는 말 그대로 CCTV 텃밭이었다.

    ‘희생양도 하나 건졌고.’

    “이 여자는 너희가 중동에 도착해서 1분짜리 동영상을 보내면 풀어 주겠다. 물론 공공장소에서 시간과 날짜를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 어떤 조작도 들어가서는 안 되며, 비행기 탑승 과정 자체도 틈틈이 열 개의 동영상으로 15초씩 찍어 메일로 전송해야 한다.”

    “받아들이겠습니다.”

    어차피 실패. 습격자들은 빠르게 손절 각을 띄웠다. 이를 들은 산박은 다친 것을 치료해 주고 분주하게 움직여서 방을 깔끔하게 청소했다. 쓰레기마저 어디론가 가져가서 한 시간 뒤에 돌아왔다.

    산박은 습격자들의 무장을 해제시킨 상태에서 두 명을 먼저 해방시켰다. 나히다 하와는 마지막까지 남아 있다가 풀려날 것이었다. 그녀는 모든 것을 포기한 모습이었다.

    ‘고국으로 돌아가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나히다 하와는 복잡한 얼굴을 했다. 산박이 상관할 일은 아니었다.

    하루 뒤에 산박은 예정보다 빨리 그녀를 풀어줬다. 이런 곳에 시간을 더 투자하고 싶지 않아서였다. 그녀는 멍한 표정으로 산박에게서 풀려나 그대로 주저앉았지만 산박은 전혀 상관하지 않았다.

    이내 나히다 하와는 도망쳤다. 산박에 대한 복수심도 있었지만 산박에게 손쓸 도리도 없이 무력화당했다는 걸 아직 잘 기억하고 있었다.

    ‘임대 창고, 개인 낚시터 그리고 오피스텔.’

    허술한 놈들은 이 세 곳 중 오피스텔을 바로 지목했다. 그건 이상한 일이었다.

    ‘날 노리고 있는 놈이 있다. 이번 일도 확실하게 어딘가에서 지켜보고 있을 게 분명하다.’

    산박은 보이지 않는 적을 바라보았다. 짚이는 점은 없었다.

    ‘누구냐… 넌.’

    * * *

    이시은은 줌을 가득 당겨 놓았던 망원경을 정리했다.

    ‘평소에도 경계심이 대단해. 역시 사장님이야.’

    짜릿했다. 저 정도로 완벽한 암살자를 자신이 죽인다면 자신의 내면, 그게 아니더라도 무언가가 바뀔 것이 틀림없었다.

    ‘욕심. 아아, 정말 이걸 어떻게 해야 하지?’

    갈등이 삐쭉 튀어나왔다. 두 가지의 갈림길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하나하나 장점과 단점이 있었다.

    현실에서 산박을 죽일 시, 장점은 높은 고레벨 던전 장비로 순식간에 죽일 수 있다는 점이었다. 동시에 산박이 낌새를 알아차릴 공산이 컸다. 즉, 시은 또한 파멸을 맞이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여겼는데.’

    다시 한번 산박의 홀로 싸우는 모습을 본 시은이 가슴을 움켜쥐었다.

    ‘역시, 죽이고 그 살을 먹고 또 이 세상을 살아가고 싶어. 난 분명 변할 수 있어. 사장님을 죽이고 내가 그걸 온전히 받아들인다면 난 더 진화할 수 있어.’

    두 날개를 펴고 더 높은 곳으로 날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기에 시은은 던전에서 산박을 죽이는 방법 또한 고려하려고 하고 있었다.

    던전에서 사람이 죽는 건 일반적인 일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또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동일한 레벨의 장비를 소지하고 산박을 죽일 수 있을까에 대한 문제였다. 그걸 해결해야 했다.

    ‘3레벨 레이드에서 수작질을 벌인다면 가능성이 있어.’

    보스 몬스터와의 싸움에서 동귀어진을 유도함과 동시에 자신은 수습하면서 모든 힘을 소진한 산박을 죽이는 것이다.

    ‘썩 좋은 생각은 아니지만, 그래도 만약 성공한다면 난 다시 태어나서 현실 세계로 돌아올 수 있어.’

    시은이 주먹을 꽉 쥐었다.

    포스코 타워에서 적패 네크로맨서로 활동하고 있는 이시은은 점점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유지하는 데 힘이 들고 있었다. 종종 불현듯이 찾아오는 멈출 수 없는 스트레스의 폭발. 이를 악물어도 사라지지 않는 파괴 충동과 바짝 척추를 당겨 오는 살인 충동.

    ‘곧 한계가 찾아와. 난 알 수 있어.’

    ‘이시은’이라는 존재는 평범한 생활을 유지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고로 그녀는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태산박을 죽여야 한다는 결단을 내려야만 했다.

    그건 그녀가 좋아서 하는 게 아니었다. 말 그대로 앞으로 생존하기 위해서 해야만 하는 것이었고, 반대로 산박 정도면 그녀 또한 이 삶을 놓을 생각도 하고 있었다. 산박에게는 미친 소리였지만 이시은은 진정으로 자신의 생을 마감할 동반자로 산박을 고려하고 있었다.

    또한 만약 그를 죽이고 그녀가 살아남는다면, 이시은은 자신이 태산박처럼 일상과 비일상 사이에 공존하는 존재가 될 수 있을 거라 여겼다. 그건 너무나도 매력적인 제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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