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11화 (211/270)
  • 211화

    * * *

    21:58. 늦은 밤, 부동 지구로 들어오는 차량이 한 대. 소형차에다가 색은 또 분홍색이다. 절로 뒤에서 클랙슨을 울리게 하는 나약해 보이는 차량이었다.

    조금만 잘못해도 바로 옆으로 가서 창문을 내릴 용기를 줄 수 있는 분홍색 소형 차량은 산박의 개인 낚시터가 있는 곳에 섰다. 철창과 철판으로 시야까지 막아놓은 곳이었지만, 연락을 받았는지 산박이 문을 열고 나왔다.

    시동을 끄고 좁디좁은 문에서 툭 튀어나온 건 건장한 체격을 지닌 김각두였다. 그는 차와 어울리지 않는 거구였다. 괜히 충호가 그를 가장 먼저 찾은 게 아니었다. 육체도 일품, 직업도 일품. 실제 현장에서도 양손 망치 들고 피해가 적은 미친놈이 바로 성기사 김각두였다. 무조건 A급 전방 인원이었다.

    “오랜만입니다.”

    그가 고개를 깊이 숙였다. 그 모습에 산박이 저도 모르게 주위를 살폈다.

    “하지 마, 진짜. 누가 보면 내가 깡패 두목인 줄 알겠네.”

    “하하하.”

    산박이 다가가서 김각두와 거칠게 한번 포옹하며 그를 오두막으로 안내했다. 1층 거실은 작은 조명만 커져서 조금 어두웠다. 그곳에서 산박은 뜨거운 차를 김각두에게 내줬다.

    “직접 끓이신 겁니까?”

    “티백이다.”

    “비싼 거 드시는 줄 알았는데…….”

    “돈을 허투루 쓰기는 싫어서.”

    척 봐도 김각두가 나이가 더 많았는데 산박은 거침없이 하대하고 있었다. 그들의 관계는 어느새 단번에 역전되어 있었으며, 그 누구도 모른 채로 인연을 쌓은 상태였다.

    ‘김각두는 돈보다 정과 의리로 사는 남자다.’

    은혜를 받는 경우는 적고 남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는 입장에 처한 호탕한 사내였다. 그렇기에 아직도 김연정을 위해서 헌신하고 있다. 사회에서는 보기가 드문 자였다. 김연정을 통해서 그걸 보고도 산박이 각두에게 아무런 조처를 하지 않는다면 당연히 어리석은 일이었다. 이미 김각두는 훌륭한 산박의 하수인이 되어 있었다.

    “지금 거기 인원은 몇 명이야?”

    “서 팀장에 탕만 그리고 저입니다.”

    각두가 이곳에 온 것은 당연히 서충호가 만든 파벌의 이모저모를 보고하기 위함이었다. 그것이 산박이 각두에게 내린 명령이었다. 파벌에 속하고, 그곳에 대한 정보를 보고하라.

    ‘파벌을 시작부터 차단하는 짓은 개밥 기다리는 개보다도 못한 생각이지.’

    공무원 사회에서조차도 존재하는 게 파벌이다. 들개가 다섯 마리 이상 되면 만들어지는 게 파벌이었다. 사회라는 울타리 속에서 살아가는데 소속된 곳이 없다면 무언가가 결여된 존재일 뿐이었다. 혹은 거세되었거나.

    그렇기에 산박은 파벌이 만들어지는 걸 막지 않았다. 파벌은 인간관계의 일종이며 애사심을 고취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었다. 사표 던지기 전에 한 번쯤은 더 생각할 터였다.

    ‘생명의 은인이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한다.’

    산박은 각두에게 좋은 이미지를 심을 수 있는 이유만을 전달했고, 각두는 충분히 이해하고 스파이 짓을 하게 되었다. 충호에게 있어서는 이빨을 다 뽑아내고 끓는 물을 붓고 싶을 정도로 박쥐 같은 짓거리였지만 어쩔 수 없었다. 각두는 정에 못 사는 남자이니까.

    베풀어준 만큼의 몇 배를 상대에게 줘야 한다고 여기고 있는 호인이다. 호인이면서 실력까지도 좋다. 그런 자를 산박이 가만히 두고 평범하게 굴릴 리가 없었다.

    물론 그 외의 선물도 존재했다. 1을 주면 2, 3으로 되갚는 것이 김각두라는 걸 점점 체감하고 있어서였다. 그는 흰 봉투를 꺼냈다.

    “받아.”

    “예?”

    척 봐도 돈 봉투로 보였다.

    “아닙니다.”

    “너한테 주는 거 아닌데? 연정 씨한테 주는 건데? 네가 왜 설레발을 쳐?”

    “그래도…….”

    “쓸데없는 자존심은 네 여자 확실하게 지키고 말해. 나중에 죽고 나서 제사에 수백만 원 털지 말고 지금 잘하란 말이다.”

    “감사합니다.”

    그가 돈 봉투를 챙겼다. 액수조차도 확인하지 않았다. 그런 남자가 바로 김각두였다.

    ‘신이 나에게 내려준 인재다.’

    인덕(人德)은 신이 내려주는 것이다. 인복(人福)은 노력한다고 얻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산박에게 있어서 두 번째로 내려온 제대로 된 사람이었다.

    첫 번째는 당연히 이시은이다. 문제도 안 일으키고 포스코 타워를 통해서 빠르게 성장하면서도 사장의 권위에 도전하지 않는 그녀는 일등 사원이었다.

    “잘 쓰겠습니다.”

    “네가 쓰지 말고 연정 씨 치료하는 데 쓰라고.”

    그 말에 각두가 흐흐 실없이 웃었다. 산박도 빙그레 웃었다. 사람을 위해서 살아가는 사람은 보는 것만으로도 웃음이 삐쭉 튀어나왔다. 선한 영향력이다. 산박은 각두 같은 사람을 싫어하지 않았다. 오히려 좋아했다.

    사람을 죽이고 그 피와 거죽으로 먹고살았던 적이 있었던 것이 태산박이다. 그런 그에게 있어서 김각두의 선한 모습은 메마른 대지에 내리는 한줄기 비와 다를 바 없었다.

    “계속 말해봐.”

    “예. 서 팀장은…….”

    김각두는 있었던 일을 빠짐없이 말했다. 그들의 상태, 생각, 앞으로 해야 할 것들에 대해서 말했고, 산박 또한 틈틈이 각두의 시선을 넓게 해줬다. 그 덕에 제법 뜻깊은 논의를 할 수 있었다.

    “앞으로도 그렇게 해. 약간의 반대와 빈번한 의견 제출. 그리고 충호가 의견을 내면 거기에 편승하도록 해.”

    “예.”

    각두의 포지션과 행동 강령을 조정해 주기도 했다.

    “연정 씨 상태는 여전하고?”

    “네. 여전합니다.”

    좋지도 나쁘지도 않았다.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2레벨 던전 사용자가 되면서 얻은 스탯 포인트 2점을 체력에 올린 덕분이었다. 암은 체력 싸움이기 때문. 암이 버티냐 내가 버티냐의 싸움이었다.

    물론 아무나 할 수 있는 싸움은 아니었다. 김연정 또한 각두가 있기에 할 수 있는 싸움이었다. 서로서로 강하게 움켜잡으며 강력한 시너지 효과를 내뱉고 있었다.

    이시은의 판단과는 다르게 각두가 강한 것은 연정 때문이며, 연정이 강한 것도 각두 때문이었다. 둘 중 하나가 없어지면 어찌 될지 아무도 몰랐다. 그렇기에 산박은 무리해서 각두와 연정을 갈라놓거나 해결하려고 하지 않았다. 현상 유지를 선택했다.

    근황을 나누고, 산박은 다음 계획을 털어놓기도 했다.

    “곧 면접이 있고 난 다음에는 투 톱 체제로 2레벨 던전 공략에 들어선다.”

    “그럼 전 서 팀장과 함께합니까?”

    “그래. 파벌이 따로 떨어지면 없던 의심도 하게 된다. 팀 만드는 건 팀장들한테 맡길 거다.”

    “사장님께서는……?”

    “번갈아 가면서 참가할 생각이다.”

    “그게 됩니까?”

    “왜 안 된다고 생각해? 아직 3레벨도 아니라서 몇 번이나 갈 수 있는데.”

    “체력은 둘째 치더라도 정신적 피로까지는 회복하려면 절대적으로 시간이 필요하지 않습니까.”

    “괜찮아. 소환수만으로 해결할 생각이니까. 난 리더로 참가하지 않고 후방 직업 중 한 명으로 참가할 생각이다. 이제 두 명의 팀장도 지휘를 해봐야지.”

    “제대로 될까 싶습니다.”

    던전에서 워낙 존재감이 큰 것이 산박이었다.

    “며칠간 잡음이 있다면 내가 사람을 잘못 본 거겠지.”

    산박은 실로 잔혹한 말을 내뱉었다. 이것 또한 하나의 시험이었다. 여기서 떨어진다면 3레벨 던전(Raid)의 지휘권을 획득할 수 없었다.

    열 명도 못 다루면 열다섯 명, 백 명도 못 다룬다. 그게 산박의 지론이었다. 이미 이 면접과 2레벨 던전 투 톱 공략 체계부터 3레벨 던전을 생각하고 치러지는 평가전이었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말고 너만 알고 있어라.”

    “예.”

    각두가 고개를 숙였다.

    “근데 차는 왜 갑자기 분홍색으로 칠했어? 전에는 검은색이었잖아.”

    “연정이가 분홍색으로 바꾸자고 해서요.”

    그 말에 산박이 웃었다. 남자의 가오보다 사랑을 베푸는 걸 즐거워하는 각두는 실없는 놈으로 여겨졌다. 적어도 요즘 트렌드는 아니었다.

    * * *

    이시은은 사무실로 출근했다. 강합과 면 대 면으로 이야기를 나누고 그다음에 산박이 있는 부동 지구로 향해서 산박과 마주했다.

    “뭐 하세요?”

    창고에 있는 마당에서 가만히 명상에 잠겨있던 산박이 눈을 떴다. 그 눈에서 광채가 흘러나왔다. 영혼 기술을 연마하고 있었다. 이미 스킬인데도 그 깊이는 이루 말할 데 없어서 산박이 최근 우물처럼 깊게 파고 있는 스킬 중 하나였다.

    “빨리 오셨네요. 들어오세요.”

    산박이 시은을 창고 안의 방으로 안내했다. 오두막으로 김각두를 들인 것과 확연히 차이 나는 모습이었다.

    “여기 선물요.”

    “막걸리? 어, 이거 시흥 막걸리잖아요.”

    “제법 비싼 거죠.”

    “힘 좀 주셨네요.”

    산박은 안줏거리를 내왔다. 하지만 한 잔 따른 막걸리를 바로 냉장고에 넣었다. 반주 하기 위한 것임을 확실하게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굳이 그렇게까지 행동으로 보여주는 건 이시은의 평소 행실 때문이었다.

    “면접 때문에 물어볼 것이 있다면서요.”

    “네. 서 팀장도 다녀갔죠?”

    그 말에 산박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어제요.”

    “몇 명 가져가고 싶다던데요?”

    “세 명요.”

    “오. 다섯 명 중에 고작 세 명요?”

    시은이 순수하게 감탄했다. 그녀가 생각한 것과는 다른 숫자였다. 이건 크게 몸을 추스르는 모습이었다. 때를 기다리는 거북이처럼, 서충호는 웅크리기를 사용했다.

    “예. 그래서 시은 씨는 몇 명 생각하고 왔어요?”

    “세 명요.”

    그녀가 배시시 웃었다. 산박과 눈이 딱 마주친 상태에서 웃는 미소는 실로 매력적이었다. 하지만 산박은 덤덤했다.

    송서아와 관계를 도모하는 것도 그녀가 지닌 배경 때문이었다. ‘신념’을 가진 자는 그만큼 무서운 존재였다. 목적을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지 할 수 있었다.

    “양보하세요.”

    “네. 뭐, 어차피 두 명이 한계라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저레벨 던전은 전방 직업이 우세였다. 주문을 사용하고 나면 전투력이 크게 떨어지는 게 후방 직업이다. 반면 전방 직업은 전투력의 유지가 쉽고, 일시적이기는 하나 던전 아이템을 통해서 후방 직업의 역할도 능히 수행 가능했다.

    다방면으로 활약해야 하는 게 저레벨 던전이었다. 후방 직업도 근접전을 해야 할 때는 해야 했다. 그런 상황에서 살아남고 경험치를 더 쌓을 수 있는 건 전방 직업들이었다.

    ‘서충호가 잘 판단했다.’

    그가 물러섰기에 깔끔하게 인력을 분배할 수 있었다.

    ‘욕심을 부린다면 네 명을 말했겠지.’

    그리고 현재 기업 상황을 생각하면 네 명을 전방 직업으로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어차피 이후에 고레벨 던전에 들어서면 그냥 그 레벨의 후방 직업을 영입하거나 오퍼를 넣어서 하청으로 사용하면 된다.

    다양한 방법을 사용할 수 있는데 굳이 전방 직업 세 명에 후방 직업 두 명으로 맞추는 건 조금, 너무 균형을 맞추려는 모습이었다. 산박이 이를 조금 유도한 것도 있었다. 그 이유.

    ‘그래도 해야 하는 건 이시은의 대체재가 없기 때문이다.’

    이시은이 아무리 말 잘 듣는 인재라고 해도, 세상일은 모르는 법이었다. 사람 속을 잘 알 수는 없는 노릇이었기에 언제나 차선은 존재해야 했다. 특히 기업 경영에서 차선도 생각 안 하고 있으면 망해도 할 말이 없었다.

    “후방 직업은 제가 정하면 되는 거죠?”

    산박은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다.

    “제가 사장인데, 그게 되면 시은 씨가 사장이겠죠?”

    “아, 그럼 왜 면접까지 시키는 건데요?”

    “어떻게 하나 보려고요.”

    시은이 인상을 찡그렸다. 실로 형편 좋은 태도를 보이고 있는 태 사장 때문이었다. 그는 그야말로 갑의 위치에 있었다. 일 시키고 마음에 안 들면 엎어버릴 수 있는 자리. 그게 바로 사장이었다. 꼬우십니까? 창업하십시오.

    이시은은 금방 떠나려고 했다. 무엇이 그리 바쁜지 서둘러 일어나려고 했다.

    “오늘은 많이 바쁘신가 봐요?”

    “네. 강합 씨가 직원들이랑 같이 일차적으로 지원자를 추렸거든요. 그거 메일로 받아서 확인하려고요. 그러려면 몸이 두 개라도 부족해요.”

    인천 포스코 타워, 옥시모론 기업을 왔다 갔다 하고 가끔 1레벨 던전도 꼬박꼬박 다니면서 운동도 하는 게 그녀였다.

    산박은 몰랐지만 이시은은 살인 충동을 해소하기 위해서 사람도 죽여야 했다. 틈틈이 요즘 자신 또래의 여자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알아봐야 했다. 사회적 스킬을 배워도 관련 센스가 없었기에 하나부터 열까지 조사해야 했다.

    면접 날, 산박은 세탁소에 맡긴 정장의 비닐을 뜯어 착용하고 사무실로 향했다. 사무실에는 의자가 마련되어 있었고, 면접자들이 열다섯 명 앉아 있었다. 하나같이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긴장할 만하지.’

    경쟁률만 42:1이었다. 별로 크지 않은 기업인데도 엄청난 숫자가 몰려들었다. 고무적인 일이었다. 사장이 던전 기업에서 나오는 수익을 가져가지 않고 회사에 재투자한다는 점이 너무나도 큰 장점이었다. 돈만 보고 올 정도로 좋은 기업이었다.

    정이 많아서 웃음이 꽃피는 가족 같은 기업? 싸대기 처맞는 소리였다. 취업은 일단 돈이다. 사람에 따라서는 욕먹어도 계속 출근하게 하는 것이 기업이고 직장이었다. 면접자들의 제1목적은 돈이었다. 돈이 목적이 아니라는 자들은 사기꾼이다. 반드시 조심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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