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9화
* * *
항공편으로 합성 보석에 분류되는 에메랄드가 한 소포 도착했다. 1.5kg이었지만 개수가 250여 개에 달했다.
“앞으로도 항공편으로 옵니까?”
“무게랑 크기를 생각하면 항공편이 제격이겠지만, 대한민국 땅은 버려둔 땅이 많잖아? 컨테이너 하나 가져다 두고 보관하려고.”
그렇다면 일회성 항공편이었다. 그다음 오는 것은 화물선을 타고 올 것이었다.
장 노인이 말을 이어 나갔다.
“에메랄드 활력은 일단 흘료 자치국에 수출할 생각이다.”
“예.”
산박은 무리 없이 동의했다. 수익률은 약속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어디에서 팔아도 완판이었다.
“어디 한번 만들어봐. 구경이나 해보자.”
장 노인의 말에 산박이 손으로 에메랄드를 하나 잡았다. 정사각형에 납작한 에메랄드였다. 10×10mm짜리 보석이었고, 원가는 3천 원에 불과했다. 3백 개를 구매해도 8백 달러 수준이었다.
‘한글로 검색하면 개당 1만 5천 원짜리 보석용 합성 보석을 사야 했지만 장 노인 덕에 살았다.’
공업용이라 금이 있었지만 색은 깊은 녹색의 에메랄드였다. 밝은 녹색보다 더욱 세련되어 보였다. 모던한 짙은 녹색의 에메랄드는 나쁘지 않았다.
‘아무래도 고르고 골라서 보냈겠지.’
에메랄드 활력 아티팩트. 그걸 보내 준다고 했으니 응당 몸이 달아올랐을 것이었다. 자기가 만든 것이 완제품으로 되돌아온다. 유통까지 맡는 것이다. 팔았던 것을 또 파는 셈이었다.
거기에 원가를 생각하면 제법 재미나는 장사가 될 수밖에 없었다. 흘료족(仡佬族) 중에 트럭이나 항만 유통을 하는 자가 있다면 그 사람에게 큰소리 떵떵 치면서 따거가 될 기회였다. 남의 돈 받으려는 사람은 많지만 돈 버는 일을 가져와서 같이하자고 하는 사람은 적은 법이었다.
‘수량은 적지만, 중요한 건 혼자서도 능히 가능한 사업이라는 거다.’
상자 하나가 끝이다. 하지만 꾸준히 돈이 들어온다. 일하면서 한 번 들러서 상자 하나 가져다주면 끝이다. 그러고도 만 원 이상은 받을 터다. 30일 모으면 30만 원이다. 농민공이라면서 밀가루만 먹고 일하는 것보다는 수십 배 나은 선택이었다. 인구가 많다 보니 기상천외한 일이 벌어지는 게 56국이었다.
파아앗.
‘힘’이 산박의 몸에서 서서히 흘러나와서 에메랄드에 스며들었다.
사르르르…….
사금이 흐르는 소리가 장 노인의 귀로 들려왔다. 절로 기분 좋아지는 편안한 소리였다. 실제로 녹색 빛 가루가 에메랄드에서 후드득 쏟아져 나왔다. 그리고 그것은 서서히 나선의 회전을 보였다. 돌고, 돌고, 위로 한 번 들썩.
‘생명의 맥동.’
들썩거리고 분잡하게 움직이지만 하나같이 큰 원을 그렸다.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에메랄드가 산박의 손에서 천천히 느긋하게 떨어져 내렸다. 들썩거리는 에메랄드빛 힘이 사각형의 에메랄드의 꼭짓점으로 차곡차곡 들어갔다. 마치 개미들이 자신들의 집으로 들어가는 광경과 비슷했다. 평범한 마법과는 전혀 궤를 달리했다.
“…….”
장 노인은 이내 정신을 차렸다.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혼을 쏙 빼놓을 정도로 매력이 있는 광경이었다. 만주의 끝없는 평야를 바라봤을 때처럼…….
“어어? 이게 뭐야? 방이 왜 이래?”
방은 어느새 흙으로 가득했다. 밖에서 들어온 것이었다.
“에메랄드 활력 기술을 사용하면 제가 있는 곳으로 흙이 모이더라고요.”
“그걸 왜 이제 말해! 에헤이! 이거 난리가 났네!”
장 노인이 펄쩍 뛰었다.
“흐하하.”
그 모습에 산박은 빙그레 웃었다. 오랜만에 기분이 특히나 즐거워졌다.
이어서 산박은 품에서 고아원에서 만든 자투리 천연 소가죽 팔찌를 꺼냈다. 자투리 가죽을 써도 천연 소가죽이었다. 꼬아서 만든 것이라 제법 빈티지 분위기가 났다.
“무광택? 좋아하는 사람은 많지 않겠는데.”
“던전 사용자는 광택 있는 장비를 싫어합니다.”
“고레벨 던전 사용자들 봐라. 번쩍이는 거, 금으로 된 거 아니면 안 입는다.”
장 노인은 한마디도 지려고 하지 않았다. 산박이 자신을 한 번 골려서 더욱 그런 듯했다.
하지만 사실이기도 했다. 몇몇 마법 부여는 금속의 종류에 따라서 효율성이 달라져서였다.
장 노인이 말하는 금박이들은 독일의 ‘황금 벼락 기업(Gold Blitzschlag Corporate)’의 제품을 말하는 게 분명했다. 한국에서는 금박이들로 유명했다. 너무나도 세속적인 기업이라서였다.
특히 치매에 의해서 손상된 뇌를 회복할 수 있는 던전 기업 상품을 출하하는 유일한 곳이었다. 치매 예방 상품은 많지만 치매 손상 회복 상품은 딱 하나뿐이었다.
‘주님의 은혜(der Herr Grace)’.
아직도 그 레시피는 공개되지 않고 있었다. 애초에 레시피 등록을 안 했기에 결코 공개되지 않을 터였다. 산박이 가장 증오하는 존재들이었다. 쌓고 쌓아서 지구보다 높은 크기의 돈의 산을 만들어도 멈추지 않을 탐욕스러운 기업이었다.
“차보시죠.”
장 노인이 무광택의 가죽 팔찌를 착용했다. 착용감은 나쁘지 않았다.
“오.”
늙었기에 장 노인은 확신할 수 있었다. 활력이 바로 자신의 몸으로 퍼져 나갔다. 손부터 시작해서 전신으로 활력이 뻗어 나가는 게 느껴졌다.
“이게 몇 레벨에게 파는 팔찌지?”
“2레벨 던전 사용자에게 파는 겁니다. 가격은 0레벨이 3만 원이니 그 세 배로 잡아야겠죠.”
9만 원 돈이다. 액세서리치고는 비싸다. 하지만 구매할 만했다. 던전 제한에 걸리지 않기 때문이다. 무조건 허용되는 추가 장비였다. 거기에 현실에서는 수준별로 활력의 차이를 확보할 수 있어서 2레벨 장비를 구매하는 일반인도 있을 터였다.
“좋군. 생각보다 사업성이 높아.”
단순 활력 회복이다. 그렇기에 레벨과 비교하면 효력이 높은 부여 주문이었다. 동시에 드루이드만의 독특한 ‘회복 시스템’이 일품이었다.
힘을 충전해야 하지만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그야 그럴 것이 2레벨 아티팩트니까. 유지비가 낮은 셈이었다.
던전 사용자가 되고 저레벨 던전에서 던전 공략을 포기한 사람들은 부업으로 삼아서 ‘힘’을 팔기도 했다. 그런 사업은 이미 존재했다.
특히나 저레벨 던전 구간은 후방 직업들이 기를 펴지 못한다. ‘힘’을 지닌 후방 직업들, 거기에 상업성 없는 복불복 주문을 지닌 자들은 힘을 싼 가격에 팔 수밖에 없었다.
물건값은 구매하는 기업이 정하는 법이다. 예를 들어 아무리 태양력 발전소를 세워도 전기 회사가 받아주지 않으면 말짱 도루묵이다.
“일단 0레벨 1레벨 2레벨 각각 균등하게 만들어 줬으면 하는데.”
“예. 그렇게 하려고요. 다섯 개씩 만들면 열다섯 개가 되잖아요.”
“으음. 근데 치료수 사업은 완전히 접었어?”
“예. 어차피 연장 계약도 안 하고 그냥 물건만 대주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큰돈도 안 되니까요. 대전 상인 공회는 딱히 절박해 보이진 않더군요.”
잘해봤자 백만 원 벌어주는 사업이다. 그것도 순수익도 아니었다.
“사장이 많으니까 쉽게 손에서 놓는 거지. 회사를 자기 회사처럼 여기는 샐러리맨이 몇이나 있겠어? 오히려 잘됐네. 쉽게 마무리되었다니.”
장 노인은 조금 아쉬워하는 눈치였다. 만약 문제가 생겼다면 또 도와줄 생각을 가져서였다. 그도 그럴 것이 에메랄드 활력 사업은 태산박의 존재가 없으면 성립 불가능이었다. 산박에게 조금 더 베풀어 주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밭을 무료로 장기 임대했지만, 아직도 부족해.’
산박의 레벨이 오르면 오를수록 산박이 만들어 내는 에메랄드 활력 아티팩트는 점점 개수가 늘어날 것이었다.
‘더 큰 에메랄드를 만들어야 할지도 모르지.’
생각만 해도 즐거웠다. 만성 피로를 싹 달아나게 할 것이었다. 그거 하나만으로도 차고 다닐 이들은 많았다.
‘3만 원~9만 원의 구매력을 지닌 사람은 많다.’
특히 직접 몸을 써서 노동하는 노동자에게 인기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들의 숫자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많았다.
‘피로 회복제 상품 혁명이나 다름없지.’
부동 지구를 주름잡는 가문 정도는 되어야지 할 수 있는 일이었다. 다른 놈들이 했으면 바로 잡아먹혔을 것이었다. 평범하게 장난감 사업을 시작하려다가 대기업의 횡포에 탈탈 털려서 빚만 지고 패망한 사람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이 세계는 그렇게 안전하지 못했다. 특히 그게 ‘돈벌이’에 관련되어 있다면 더더욱 인정사정 봐주지 않는다.
‘흘료 자치국에는 0레벨만 보내야겠다. 너무 위험해. 1, 2레벨은 국내에서 팔아야 한다.’
공무원의 숫자가 많은 것이 연기 장가(家)였다. 함부로 덤비지 못할 것이었다. 총대 메고 회사 쳐들어가서 세무 조사 단타로 쓸어 버리고 사표 쓰고 나올 혈족이 수두룩했다.
“생각을 바꿔야겠어. 0레벨만 56국에 보내고 1, 2레벨은 국내에서 소비해야겠어. 너무 좋아. 하하하.”
장 노인이 웃었다. 가격으로 승부를 보면 활력이나 피로 회복 던전 기업들은 죄다 상품을 포기해야 할 것이었다.
물론 이는 아주 나중의 일이었다.
‘하루에 열다섯 개밖에 생산 못 하는 현 상황에서는 어림도 없는 일이지.’
그런 미래를 생각하며 장 노인은 느긋하게 웃어 보였다.
* * *
서충호는 서둘러 다음 행선지로 향했다. 돼지국밥집으로 들어가자마자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형님! 여깁니다!”
탕만이 손을 흔들었다. 충호는 냉큼 그 맞은편에 앉았다.
김각두 다음은 길탕만이 목표였다. 옥시모론 회사에 들어온 순서대로 보면 엉망진창이었지만 실로 계산적이었다. 곰처럼 보여도 세상에서 다양한 일을 해보면서 자연스럽게 쌓아 올린 경험이 돋보이는 충호였다.
“주문은 했어?”
“예. 곧 나올 겁니다. 술은요?”
“해야지.”
낮인데도 거침없었다. 불규칙한 생활을 하는 게 던전 사용자들이었다. 처음에 반짝 했던 사무실 출근도 은근슬쩍 빼먹어도 산박이 아무 말 없자 아예 발길을 끊게 되었다. 애초에 산박이 요구하지도 않았기에 사실 아무 말 없다는 말도 맞지 않았다. 그냥 도둑이 제 발 저려 하는 것뿐이었다.
충호는 각두에게 했던 말을 되풀이했다. 탕만은 제법 진지하게 들어줬다.
“그리고 넌 강합 씨랑도 친하잖아.”
“예. 제 사촌형인데요.”
“그러니까 네가 나한테 정말 필요하다는 거야. 넌 던전도, 사무실도 확 잡을 수 있는 가교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아…….”
탕만이 실로 감탄했다. 자기도 몰랐던 자신의 가치! 그걸 충호가 말해주는 모습은 실로 감동적이었다.
“형님…….”
“그래, 탕만아. 어쩔래? 네가 나한테 확실하게 해주면 그다음에는 각두 씨를 포섭해볼 생각이다.”
“김각두 씨요? 하지만 그 사람 옆에 있는 연정 씨는 좀… 그렇잖아요?”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 여자였다. 그런 여자의 곁에 머무는 각두를 받아들인다면 던전에서 항상 하자가 있는 싸움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각두 씨 실력을 봐라. 어딜 가도 A급 소리는 듣는다. 그리고 3레벨 레이드를 생각해. 5레벨까지는…….”
탕. 탕.
충호가 가슴을 쳤다.
“전방 직업이 중요하다고. 물론 사장님은 소환수 때문에 전방 직업이 좀 의미 없는 것 같긴 해도…….”
그 말에 탕만이 서둘러 한마디 했다.
“그럴 리가요. 항상 앞에 서는 사람이 있어야 주문도 쓸 수 있고 판단도 할 수 있는 거죠.”
그 말에 충호가 웃으면서 잔을 들어 올렸다. 탕만이 냉큼 잔을 부딪쳤다. 근데 탕만의 잔은 텅텅 비어 있었다. 워낙 이야기에 집중하다 보니 잔이 비어있는 줄도 몰랐다.
“하하하하!”
탕만이 웃었다.
‘빌어먹을, 젠장…….’
쪽팔렸다. 인생 살면서 파벌이 생성되는 순간을 함께하다니, 가슴이 벅찰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빈틈을 보였다.
충호는 굳이 그걸 꼬집지 않았다. 되레, 기뻐했다.
‘이놈! 동아줄을 그렇게 필요로 하고 있었구나. 하긴 나 같아도 그러겠다.’
산박의 밑에서 일하면 자연스럽게 주눅이 들 수밖에 없었다. 무려 소환수 네 마리를 사용하는 던전 사용자였다. 전사는 자연스럽게 고개를 숙여야 했다. 전사보다도 더 목숨을 도외시한 공격이 가능한 게 소환수였다.
“한번 해보자. 엉? 전방 직업끼리 일찍 뭉쳐야지. 나중에 5레벨 던전 가서 그럴 거야? 그러면 늦어!”
“맞습니다, 행님!”
“그리고 강합 씨는 네가 알아서 포섭해 둬라. 할 수 있지?”
“예! 맡겨만 주십시오!”
“포섭 못 해도 최소한 발목은 걸지 않게 해. 그것만 해도 넌 임마, 내 오른팔이나 다름없어.”
“옙! 근데, 사장님이 하지 말라고 하면요?”
그 말에 충호가 헛기침했다.
“그럼 하지 말아야지.”
아무리 파벌이라도 그 회사에 적을 두고 있어야지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산박에게 까불 수는 없었다. 산박이 냉철한 모습을 몇 번이나 보여줬기 때문이었다.
‘평소에 한 걸음 양보하는 모습을 보여 주니까 모르는 놈들이 많지.’
충호는 잘 알고 있었다. 아니, 그 외에도 산박과 함께 던전에 들어간 이들은 잘 알 수밖에 없었다. 전투에 들어서면 산박은 차가운 카리스마를 풀풀 풍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