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07화 (207/270)

207화

* * *

복잡한 서면역 근처의 유료 주차장에 고급 세단 차량 세 대가 들어왔다. 앞차와 뒤차에서는 검은 선글라스에 검정색 슈트를 입은 경호원이 두 명, 한 명으로 총 세 명이 내렸고 중간에 있던 차에서는 경호원 두 명과 송서아가 내렸다.

남들의 눈이 많은 시내였기에 송서아는 무릎 아래까지 확실하게 덮어주는 원피스에 하늘색 짧은 재킷을 걸쳤다. 금색의 줄로 연결된 간단한 검정 백도 메고 있었다. 물론 옷 곳곳에 고레벨 던전 방어 아이템이 있는 건 말할 것도 없었다.

“사람 많다.”

송서아가 선분홍색 입술을 움직이며 말했다. 그 말에 소준석이 단박에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밖에 나가도 된다고 하자마자 서면역이라니……. 아가씨, 또 한 소리 들으실 겁니다.”

“그래? 경호원을 다섯이나 붙여 놨는데 내가 가만히 일만 해야 한다고?”

“…….”

가문의 사랑을 받는 것도 이럴 때면 지친다. 복에 겨운 소리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송서아의 실력과 커리어를 생각하면 또 대놓고 그렇게 말할 수는 없었다.

타닥. 타다닥.

송서아가 순식간에 스마트폰을 놀렸다. 산박과 문자를 나누고 있었다.

“아무리 던전 경제에 도움이 된다고 해도 너무 자주 만나시는 것 아닙니까?”

“선 넘지 마.”

“옙…….”

송서아의 말에 소준석이 입을 다물었다.

“준석 씨는 15m 떨어져서 따라와요. 나머지는 더 멀리 있고.”

“예. 알겠습니다.”

“우연을 가장해서 교차 근접 경호도 틈틈이 하겠습니다.”

“마음대로 하세요. 거기까지 터치하고 싶지는 않으니까요. 하지만 그렇게 위험한 일이 생길 것 같지는 않네요.”

약속 잡은 카페로 들어섰다. 아메리카노도 한 잔에 5천 원이 넘는 카페였다. 자릿세라고 할 수 있었다. 번화가가 으레 그렇다. 자리가 감투였고, 돈이었다. 그래서 비싼 카페였음에도 사람들로 북적였다.

산박은 딱 3분이 지나서 도착했다. 약속 시각보다 일찍 왔지만 지각이었다. 여자를 기다리게 했기 때문이다. 특히, 예쁜 여자를 기다리게 했기 때문이다. 미녀를 기다리게 한 죄는 더더욱 컸다.

“죄송합니다. 많이 기다리셨어요?”

“아뇨. 아직 주문한 커피도 안 왔어요.”

산박이 앉다가 서로 눈이 맞았는데 웃음이 자연스럽게 나왔다. 굳이 큰 사건을 겪지 않아도 눈이 맞으면 애착이 생기는 게 사람과 사람의 사랑이었다. 사랑은 이성적으로 생기지 않고 감성적으로 생기기 때문이다.

“오시는 길은 불편하지 않으셨죠? 차가 좀 막히던데요.”

상투적인 말을 하며 산박이 대화의 물꼬를 텄다.

“부산은 차가 많든 줄든 똑같아요. 산에 지어진 도시라서 교통이 엉망이거든요. 한번 싹 갈아엎기에는 너무 많은 돈이 들죠. 남천동 아세요?”

“예. 해운대에서 동쪽에 있는 곳 아닙니까. 바다가 보이고요.”

“거기 재개발하면서 도로도 싹 바꾸려고 했는데 엎어졌어요. 그런데 어떻게 교통을 제대로 잡겠어요? 하나같이 이기적이라서 절대 못 바꿔요.”

표를 먹든 말든 X 까라는 식이다. 자기 땅에 도로가 서면 이득도 없었다.

보는 눈이 다르고 있는 곳이 다르기에 서아는 간단한 잡담보다는 제법 깊이 있는 말들을 했다. 간단한 차 막힘도 재개발로 이어졌다.

‘들어오는 정보가 어마어마하구나.’

산박은 절로 감탄했다. 이래서 인맥, 인맥 하는구나 하는 소리가 나왔다.

우웅. 우우웅.

음료 제조가 완료되었음을 알리는 진동이 오자 산박이 진동 벨을 들고 가서 커피를 가져왔다. 아이스아메리카노와 돌체라테(Dolce Latte)였다. 달콤한 커피로 여자들이 특히나 좋아하는 것이었다.

“아아, 전부터 그것만 드시더라고요. 그래서 미리 주문했어요.”

“서아 씨는 정말 하나부터 열까지 빈틈이 없으시네요.”

“던전은 잘하셨어요?”

산박은 자신의 근황을 빠짐없이 알려줬다. 서아가 본가에서 갇혀 지낸 건 문자로 충분히 들었기에 이번에 자신의 차례였다.

“던전 키 더 드려요?”

“예? 갑자기요?”

산박이 놀라자 서아가 웃음을 터트렸다. 날카로운 인상을 지닌 산박이 표정의 변화를 일으키는 건 제법 볼만해서 자꾸 농담이나 장난을 치고 싶었다.

“만날 때마다 점점 장난이 심해지시는 거 아니에요, 서아 씨?”

“그러고 싶은걸요. 싫어요? 싫으면 그만하고요.”

산박은 거기에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커피만 쪽 빨았다. 서아도 산박처럼 똑같이 빨대에 입을 가져갔다. 새하얀 손가락이 컵을 말아 쥐었다.

“부지가 정해졌어요.”

산박이 집중했다. 드디어 기다리고 기다리던 잔잔벼락 사업의 공장 부지가 결정되었다. 하도 큰 사업이다 보니 이제야 결정이 났다. 첫걸음은 어려웠지만 모든 게 빠르게 진행될 터였다.

“어딘데요?”

“함안군요.”

산박이 스마트폰을 통해서 함안에 대해 확인했다. 인구도 적고 나쁘지 않은 곳이었다. 부산의 동쪽에 있었다.

“거리는 75km 남짓이고요. 부산에서 한 시간 걸려요.”

나쁘지 않았다.

“다른 건 많이 정해져 있죠?”

“일단 국내 유통보다는 해외 쪽으로 갈 거예요. 그래서 부산 가까이에 공장을 두는 거고요.”

“국내를 나중으로요?”

“국내 던전 기업들 때문에요. 생각보다 힘을 잘 뭉치더군요.”

“상대가 강할수록 잘 뭉치는 법이죠. 탁월한 대처예요. 서아 씨의 생각인가요?”

“가문의 의지죠. 제가 가져왔는데, 제가 진행까지 하는 건 옳지 않다고 여기는 사람이 많거든요.”

공적 나누기가 시작된 듯했다. 어쩔 수 없었다. 튀어나오면 견제받기 마련이었다.

“이제 슬슬 일어날까요?”

“네.”

카페에서 나와서는 곧장 교부문고로 향했다.

“앗.”

서아가 지나가는 사람한테 어깨를 부딪쳤다. 상대는 그냥 가버렸다. 대신 산박이 서아의 어깨를 자연스럽게 터치했다.

“괜찮으세요?”

“사람 많은 곳에는 잘 안 다녀서요. 사람 진짜 많네요.”

“곧 익숙해지실 거예요.”

산박은 어깨에서 손을 내리며 서아의 손을 잡았다. 그녀의 손은 차가웠다. 그녀는 굳이 산박의 손을 뿌리치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이끌렸다.

“저거 봐요.”

“행사 하나 보네요. 근데 가기는 좀 그렇네요.”

부부들이 잔뜩 있었다. 그들을 부부라고 생각한 건 아이들 때문이었다. 매대에는 온갖 어린이책이 쌓여 있었다. 10070 행사라고 적혀 있었는데, 눈여겨보니 100% 모든 제품 70% 할인이라서 10070 할인이라는 듯했다.

“후흐. 저거 봐요. 그냥 옆으로 가면 되는데.”

서아는 애들을 보며 절로 웃음 지었다. 서로 마주 보면서 씨름하듯이 밀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자존심 싸움으로 번진 듯 다섯 살짜리 애 두 명은 결코 물러섬이 없었다. 아주 당당하게 앞으로 가려고만 하고 있었다.

“애들 좋아하시나 봐요?”

“네. 보면 그냥 사랑스럽잖아요. 하지만 소리를 지르는 건 별로예요.”

우는 소리를 들으며 서아는 싫은 기색을 내비쳤다.

회전문을 통과했다. 로비는 대단히 넓었다. 그곳에는 작은 원형 단상이 있었는데, 독서회가 열리고 있었다. 구경하는 이들도 있고 똑같은 책을 가진 채 참가하고 있는 회원도 보였다. 서점은 더는 책만 파는 곳이 아니었다. 문화를 팔고 있었다.

“잠깐 가서 들어 볼까요?”

계단 형식으로 된 앉을 곳에 나란히 앉았다. 산박이 손수건으로 대충 서아가 앉을 곳을 닦아줬다.

“고마워요. 왠지 부끄럽네요.”

그녀가 고개를 살짝 숙이며 손으로 가슴을 가렸다. 몸이 조금 달아오르는 기분이었다. 똑같은 배려라도 상대에 따라서 다르게 받아들여지는 법이었다.

“나다운 나를 찾는 건 어렵죠?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고민을 했습니다. 이 책에도 간단하게 그에 대해서 전해지고, 개인이 어떻게 그걸 실천했는지를 보여 줍니다. 가장 먼저 과거에서 벗어나고 후회에서 떨어지는 건 어떻게 해결했을까요?”

주부 10년 차, 나이 47세의 아줌마가 했던 방법이 책에 설명되어 있다면서 작가가 말을 이어 나갔다.

“…걱정만 사라져도 여유 시간이 만들어지죠. 그걸 통해서 날 찾아낼 시간을 확보한 경우예요. 여러분도 자잘하게 상념에 빠질 수 있는 시간을 확보한다면, 그 시간을 날 위해서 쓸 수 있을 겁니다.”

그의 뿔테 안경이 송서아에게서 딱 멈췄다.

‘와, 미쳤다. 뭐가 저렇게 우아해?’

이곳에서 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여자 중에서 가장 예쁜 여자였다. 특히 단아함이 세상 넘쳐흘렀다. 동양 미인의 표본이나 다름없었다. 슬픈 가야금을 연주하면 딱 어울릴 것 같았다. 가슴이 큰 것도 아니었지만 시선이 갈 수밖에 없었다.

“작가님?”

진행 요원이 가만히 있는 그를 보며 말하자 그가 정신을 바짝 차렸다.

“하하. 그럼 질문 타임을 좀 가져 볼까요?”

그 말에 송서아가 일어섰다. 산박도 일어서는 모습이 보였다. 서아가 자연스럽게 산박의 팔뚝에 손을 가져가는 걸 보고 작가의 표정이 조금 안 좋아졌다.

“어땠어요? 잠깐 들었는데.”

“별로였어요. 애초에 주부라니… 뜬금없어요.”

그녀는 마음에 들지 않는 듯했다.

“주부가 왜요?”

“은행 일 하면서 많은 여직원을 봐요. 목이 부풀어 올라도 출근하는 여직원도 있어요. 출산해도 바짝 일하고 가요. 그런 사람들 입장에서 주부가 시간이 없다니, 말이 된다고 생각하세요?”

“지, 진정하세요, 서아 씨.”

“후우……. 죄송해요. 계장 중에 열심히 하던 여직원이 있는데, 2년 간격으로 출산 휴가를 좀 썼다가 최근에 그걸로 밀려났거든요.”

“밀려나요?”

“1년 365일 초과 업무 하는 남자들을 어떻게 이기겠어요? 그거 때문에 여직원이 난리를 쳤는데, 그래도 어쩌진 못했어요. 자기 나름 모든 걸 잡으려고 해도 결국 시간은 못 이기는 법이죠.”

여자라고 우대는 없었다. 모든 건 실적이 결정한다. 그렇기에 송서아가 해줄 건 없었다. 일에 미친 남자들 또한 하나같이 유부남들이다. 가정을 위해서 자진해서 내달리는 경주마였다. 어느 쪽도 선택할 수 없어서 짜증이 솟구친 것이었다.

특히 한국인들은 향상심이 부족한 자를 보기가 힘들 지경으로 부지런한 민족이라 더더욱 내부 경쟁이 피 말릴 수밖에 없었다. 휴가를 쓰라고 해도 말 안 듣는 골칫덩이들이다. 휴가 쓰고 출근하는 실적광도 있었다. 적어도 은퇴는 과장 달고 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애 둘 낳고 승진 경쟁이라…….”

산박은 무슨 말도 하지 못했다. 태생적인 조건, 그로 인한 하자라고밖에 볼 수 없었다.

“이런 업무 얘기는 좀 별로죠? 괜히 무거워지고.”

“아뇨. 오히려 은행은 철 밥통이라는 관념이 깨졌는데요?”

“T/O 때문에 내부는 전쟁이죠. 요즘에는 영업도 마다치 않는 여직원들도 많아요.”

“옛날에는 안 그랬나요?”

“네. 돈 많은 고객 상품 가입하게 하려면 접대는 기본이니까요. 하지만 요즘은 실적 때문에 영업에 손대는 여직원이 많아서 진짜 제대로 된 전쟁이라고 할 수 있죠. 오히려 여자니까 득을 보는 경우도 있어요.”

“대표적으로?”

“술 권유가 적죠. 그래서 몇 사람이나 더 만날 수 있고요. 이 이야기는 여기까지만 해요. 더 하고 싶지 않아요.”

서아가 앞장서 나아갔다. 산박이 그녀를 쫓아갔다. 잘 진열된 베스트셀러를 그녀가 훑었다. 그리고 한 권을 집어 들어서 산박에게 보여줬다.

[남녀가 다투는 건 도박이다]

“풋.”

산박이 웃었다. 그도 책 한 권을 보다가 냉큼 꺼내 들었다.

[나는 일단 도망쳐 본다]

“흐흣.”

서아가 참는 듯한 웃음소리를 냈다. 그녀 특유의 웃음소리였다.

산박은 정말로 살살 뒷걸음질 쳤다. 이에 서아가 산박에게 바짝 다가섰다. 그걸 옆에서 본 남자가 인상을 팍 찡그렸다.

‘이게 나라냐. 이런 X부랄 진짜, 내가 책 사러 와서 이런 걸 보게 하는 게 나라냐고!’

* * *

서충호가 버스에서 내렸다. 세종시 도담동. 아파트 단지들이 모여있는 곳이었다. 하지만 그곳은 휑하기 짝이 없었다. 아파트 단지가 워낙 많아서 버려진 단지 중 하나였다. 돌아다니는 사람은 있지만 그렇게 많지 않았다.

충호는 마트에 들러서 휴지 묶음을 구매하고 전통주도 하나 챙겼다. 그는 아파트로 가지 않고 그 아파트에 일조권을 뺏긴 빌라의 1층 101호의 벨을 꾹 눌렀다.

“네! 나가요!”

다급한 목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염색도 하지 않고 화장기도 없어 보이지만 남자들의 눈에만 그럴 뿐 기본 화장을 한 김연정이 충호를 반갑게 맞이했다.

“두 분끼리 재밌게 사시는 곳에 제가 들어가도 괜찮을지…….”

“괜찮아요.”

웃으며 김연정이 그를 들였다. 그녀의 뒤에서 김각두가 손을 흔들고 있었다.

던전을 같이 도는 것만으로도 전방 직업은 단번에 친해질 수 있었다. 그게 무인들의 친화력이었다. 끈끈한 피로 이루어진 다리를 서로 건널 수 있었다.

“뭘 이런 거까지 가져와요?”

“그럼 돈으로 드릴까요?”

충호가 품에 손을 넣자 김각두가 성을 냈다.

“이런, 씨! 진짜 지갑 꺼내기만 해봐.”

서로 거침없는 모습이었다. 충호가 웃으면서 들어왔다. 음식 냄새가 났다.

“킁킁. 와, 불고기 냄새!”

달리 더 올 사람은 없었다. 모두 자리에 앉았다. 당연히 술자리였다. 그리고 보통 자리는 아니었다.

“내가 전에 말했었지?”

“사장님이랑 이 팀장 그리고 탕만만 갔다는 던전?”

“응.”

말을 하며 충호가 전통주를 까서 잔에 따랐다. 절로 분위기가 무르익는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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