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04화 (204/270)
  • 204화

    * * *

    산박은 장 노인을 만나려고 날짜를 잡을 필요도 없었다. 그는 이제 어느 정도의 선에 오른 기업가였다. 그것도 던전 기업가다.

    아무리 만주 쪽에서 다양한 지하자원을 획득하고 있다고 해도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던전 경제는 전 세계의 강대국들이 경쟁하고 있는 곳이었다. 치료수의 가격이 점점 내려가는 것도 그 때문이었다.

    ‘머릿수에는 답이 없지.’

    아무리 좋은 사업이라도 동업자가 많으면 가격이 내려가기 마련이었다. 수요를 벗어난 공급은 해외로 수출될 수밖에 없었다. 말 그대로 생지옥의 전조 현상이다. 이를 깨닫지 못하고 그저 해프닝으로 여긴다면 손절 칠 수 있을 때 미처 못 해서 그저 손해를 떠안고 재고 더미에 앉을 뿐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산박은 이상하리만치 재빠르다고 할 수 있었다.

    ‘드루이드 직업 덕분이지.’

    어쨌든 산박이 연락하자마자 장 노인은 당일에 바로 자리를 잡았다. 이례적인 일이었다.

    ‘시간’은 모든 자에게 평등하다. 그렇기에 가장 가치 있는 자원이었다. 그런 탓에 으레 갑질 하는 자들은 시간으로 장난질을 친다. 남이 자신을 기다리게 하는 치졸하기 짝이 없는 속 좁은 짓거리를 해댄다. 쪽팔리는 것도 모르고 상대가 꿋꿋이 기다리는 걸 보면서 흐뭇해한다. 여섯 살짜리 애새끼가 사탕 보고 헤헤 웃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동시에 그것이야말로 인간의 본모습이었다. 나이가 든다고 다 발전하는 게 아니라는 걸 확실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장굉려는 충호와 함께 던전 공략을 하고 있었기에 다른 자가 대문 앞에서 산박을 맞이했다. 척 봐도 제법 오래 기다린 듯했다.

    “처음 보는 분이네요?”

    “예. 거제도에서 용접하다가 여기로 올라왔습니다.”

    그가 경박하게 손을 흔들었다. 손가락이 하나 없었다. 조선소의 일은 험하다. 과거나 지금이나 바다와 관련된 일을 하는 사람은 억세기 짝이 없었다. 억세지 않으면 부러지기 때문이었다.

    “괜히 물어봐서 죄송합니다.”

    산박은 부담 없이 사과했다. 고개 숙이는 건 그에게 쉬운 일이었다. 동시에 상대에게 좋은 인상을 심어줄 수 있었다. 사과를 쉽게 하는 사람은 간혹 약자로 여겨지기도 하지만 그건 자신이 가진 것이 보잘것없을 때나 그렇다. 기업가가 고개를 자주 숙이는 것만큼, 가진 자가 고개를 자주 숙이는 것만큼 아름다운 것이 없었다.

    이름조차 묻지 않은 그가 물러가고, 산박은 장 노인과 마주할 수 있었다.

    “술은?”

    “반주만 하겠습니다.”

    “그렇지. 내 들어보니 유럽에서는 그렇게 낮술을 좋아한다지? 우리는 정반대야. 술은 밤에 마셔야 한다고 여기지.”

    조금 알딸딸한 기분에서 음주를 멈추는 것이 유럽의 주도였다. 반면 한국은 진탕이다. 고로 낮술을 금기시하는 분위기가 컸다. 술 마신 사람은 대개 끝장을 보기 때문이다.

    ‘나 매운 거 잘 먹는다’고 말하는 것은 사회에서 금기시되고 있을 정도였다. 뭣도 모르는 사회 초년생이 그걸 딱 말하는 순간, 그의 맞선임은 차에 시동을 부릉부릉 건다. 최후의 결전을 준비하며 15km도 마다치 않고 내달려서 사람 죽이는 가게로 서슴없이 웃으며 후임을 들이미는 것이다.

    장 노인은 나이가 들어서 맥주는 싫어하게 되었다. 마시면 추위를 느끼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데운 술을 좋아했다.

    “전통주도 데워서 드십니까?”

    “우리나라 전통주는 대게 화주(火酒)거든. 더운 여름에 왜 더운물로 샤워를 하겠어?”

    “아하.”

    산박이 이해했다. 여름날에 찬물로 샤워하는 경우는 잘 없었다. 찬물을 맞으면 몸은 체온을 소비해서 열을 끌어 올린다. 자연히 샤워하고 나와도 금방 땀범벅이 되어 버린다. 다음 수도 모르고 행동하는 건 어리석은 일이었다.

    반면 뜨거운 물로 샤워하고 나오면 무더운 날도 시원했다. 여름에 얼음도 안 먹고 뜨거운 차를 마시는 변태 민족 중국인보다는 그나마 나았지만 그 분류에 들어가는 게 한국인이었다.

    산박은 얼음이 동동 띄워진 막걸리를 마셨다. 장 노인은 선물로 받은 걸 서둘러 처리해야 했는데 마침 산박이 와서 다행이라는 둥, 잡담을 떠들었다.

    “어르신, 오늘 제가 이렇게 만나 뵙자고 한 것은 다름이 아니라 사업 때문입니다.”

    “던전 갔다 오더니, 바로 좋은 게 떴나 보구먼?”

    그 말에 산박이 눈웃음을 지었다.

    “반반입니다.”

    에메랄드 활력 인챈트에 대해서 산박이 짧게 설명했다.

    “좋군. 아주 좋아.”

    장 노인은 그것만으로도 돈이 된다는 걸 꿰뚫어 봤다.

    ‘역시 장 노인이다.’

    산박은 시작부터 호의적인 답변을 내놓는 그를 보며 절로 감탄했다. 사업 결정을 빠르게 하는 장 노인은 정말 좋은 파트너였다. 바로 긍정적인 답변을 내놓은 것부터가 평범하지 않았다.

    “하지만 생각해야 할 것이 많아 보이는군. 그게 걸려.”

    그리 말하며 장 노인이 담배를 입에 물었다. 건강을 걱정할 필요는 없었는데, 레이드(Raid)에 속하는 3레벨 던전에 나오는 ‘발광늪나무 해독 수액’ 덕분이었다. 담배의 유해 성분을 대부분 해독 가능했다.

    물론 비싸다. 담배를 피우는 사람들의 수요를 생각하면 그야말로 금보다도 비싸다. 1g당 백만 원을 호가할 정도였다. 제대로 효과를 보려면 1g씩 10일, 10g을 복용해야 했기에 사실상 천만 원짜리였다. 그래도 장 노인은 거침없이 그 은혜를 입을 수 있었다.

    현대야말로 가문이 중요시된다. 괜히 법조 가문이라는 말이 있는 게 아니었다. 하물며 공직에 5급 이하로 자리를 꿰차고 있는 연기 장가(家)는 나랏돈을 받는 가문이다. 망하고 싶어도 나라가 망하지 않는 한 망할 수가 없었다.

    돈 이야기가 나오자 장 노인은 담배를 피우며 머리를 팽팽 돌렸다. 담배는 쾌락을 주고, 생각은 스트레스를 부여한다. 힘이 들기 마련이다. 그렇기에 담배는 머리 쓰는 사람들에게 필수적이었다. 담배를 안 하면 술이라도 마시기 마련이었다. 장 노인은 그 두 가지 모두를 하는 편이었다.

    “아티팩트로 팔기 때문에 공업용 보석은 사용할 수 없습니다.”

    산박이 운을 띄웠다. 보석용 합성 보석은 제법 값이 나가는 편이었다.

    “왜 못 써? 예뻐서 쓰는 것도 아닌데…….”

    “크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10mm은 되어야 해서…….”

    힘을 크게 부여하려면 크기가 커야만 했다.

    그 말에 장 노인이 혀를 찼다. 이내 장 노인은 스마트폰으로 한 곳에 전화를 했다. 통화 목소리는 오직 장 노인만 들을 수 있었다.

    ―예! 어르신!

    깍듯하기가 대단했다.

    “오랜만이야. 자네 요즘 많이 바쁘지? 고려 인삼은 잘 팔리나?”

    ―예. 중국에 사람이 좀 많습니까? 없어서 못 팝니다. 예나 지금이나 고려 인삼 명성 하나는 여전하잖습니까. 머리가 어지러울 지경입니다, 어르신!

    던전 물품이 많아져도 고려 인삼의 명성은 여전했다. 그 생각은 잘 바뀌지 않았다.

    “하하, 그래도 돈이 나잖아? 사업이 되는 게 중요하지. 그건 그렇고, 자네 고객 중에 합성 보석이나 그런 거 잘 아는 사람 있어?”

    ―예! 당연히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있어?”

    ―귀주성(贵州省)을 거점으로 하는 흘료(仡佬) 자치국에 있는 합성 보석 공장장이 하나 있습니다. 거기는 베트남 쪽이랑도 잘 연결이 되어 있어서 장신구가 잘 팔립니다. 공업용이든 보석용이든 뭐든 만드는 족족 팔린답니다. 장기 고객도 많고……. 그 사람이 또…….

    그는 자기가 아는 내용을 구구절절 읊었다. 최대한 많은 정보를 주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가상했다.

    “요즘 합성 보석 중에서… 그…….”

    장 노인이 말을 끌자 산박이 대답했다.

    “에메랄드입니다.”

    “에메랄드는 얼마나 하나? 녹색으로 때깔 좋은 걸로 말이야. 10mm로.”

    ―알아보고 바로 연락드리겠습니다.

    “어어.”

    30분 뒤에 바로 연락이 다시 왔다. 그사이에 산박과 장 노인은 반주를 하고 해물부추전을 해치웠다.

    ―10×10mm면 2~3달러는 합니다. 물론 낱개로는 안 팔고, 최소 300개요.

    “그럼 대충 600~900달러라는 소리네. 참, 보석용이야?”

    ―보석용이면 열 배 가격입니다.

    열 배면 20~30달러다. 합성 보석의 세계에서 공업용과 보석용의 차이는 극심했다. 사업적으로 구매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 공업용이 2, 3달러라는 거지? 크기도 10mm 정사각형으로.”

    ―납작하지만, 예. 그렇습니다.

    “좋아. 나중에 또 이야기하자고.”

    ―예. 들어가십시오. 이번 여름에는 꼭 한번 찾아뵙겠습니다.

    “그래.”

    장 노인이 통화를 끊고 산박에게 정보를 알려줬다. 산박은 놀라워하는 표정을 지었다.

    ‘내가 조사했을 때는 없었는데.’

    역시 발이 넓어야 했다. 인터넷으로는 한계가 있었다. 아무래도 영어로 검색을 안 한 것이 큰 듯했다.

    환율을 생각하면 들쑥날쑥이겠지만, 한화로 쳐줄 수 있어 보였다. 아는 사람한테서 구매하면 좋은 게 쉽게 쉽게 진행된다는 점이고, 귀찮은 일도 하나둘 정도는 감수해 준다는 점이었다.

    “봤지? 공업용도 된단다.”

    “예. 역시 발이 넓으십니다. 합성 보석 공장은 또 뭡니까?”

    “보석 싫어하는 사람이 어딨어? 인공 보석 사업이 이슈였을 때 하나 작게 했지. 실패할 수는 없는 사업이니까. 그리고 중국 쪽 인력은 워낙 싸잖나.”

    인력이 싸면 공장이 문을 닫을 수가 없었다. 그게 제조업이었다.

    “하루에 몇 개 부여할 수 있겠어?”

    산박은 웃었다. 이에 장 노인도 마찬가지로 웃어 보였다.

    “흐흐, 안 넘어오네.”

    수량을 파악하면 마진부터 시작해서 순수익도 뚝딱이다. 즉, 가장 핵심이고, 판단할 수 있는 거리를 제공해 준다.

    ‘평범한 사업이면 말해주는 게 먼저지.’

    순수익을 보고 투자하는 게 투자자다. 하지만 이 경우에는 이미 견적이 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먼저 수요. 0레벨 던전에서도 효력을 발휘하는 미친 아이템이다. 수준이 낮아도 수준 낮은 곳에서 쓸 수 있다는 게 중요했다.

    그다음 원가. 합성 보석, 공업용 에메랄드 10x10mm에 간단한 구리 반지나 은반지도 가능하다. 팔찌도 나쁘지 않았다.

    디자인은 굳이 아름답게 할 필요도 없었다. 무광택이나 검은색이 오히려 던전에 어울린다. 즉, 디자인을 깔끔하게 포기할 수 있었기에 제작 비용이 한없이 낮아질 수 있었다.

    “…정말 말 안 해줄 거야?”

    “비슷한 걸로 해봤는데 열다섯 개요.”

    “정말? 하루에 열다섯 개라고? 참말이야?”

    “예.”

    그 말에 장 노인이 무릎을 쳤다.

    “연봉 1억짜리 사업이로구만. 거기에 월급쟁이 놈들과는 다르게 세금도 10%지.”

    그럼 남는 돈은 9천만 원이 넘는다.

    “팔찌는 가죽으로 해. 요즘 천연 소가죽이 얼마나 싼데.”

    못 팔아서 66% 세일로 소가죽 패션 팔찌를 2천 원에 파는 업체도 있었다. 그런 떨이까지 생각한다면 미친 듯이 남는 장사였다. 대충 원가를 뺀다면 연 8천만 원은 넘게 벌리는 사업이었고, 레벨이 오르면 더더욱 크게 부흥할 수 있었다.

    그렇게 판단한 이유는 간단했다. 적어도 개당 3만 원에 팔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런 계산이 있었다.

    실제로 산박은 0레벨 던전 사용자를 상대로 판다면 3만 원에 팔 생각을 가졌다. 제법 고가였다.

    ‘0레벨 던전 사용자의 구매력을 생각하면 그게 가장 적합하다.’

    동시에 2레벨 던전 장비였다. 판매율과 명성을 매번 확인하며 가격을 올리거나 내릴 생각도 가지고 있었다. 물론 나중의 일이었다.

    “후우우.”

    장 노인이 담배 연기를 뱉으며 말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자고. 깊게 고민해야 할 사업이야.”

    “예.”

    오늘은 가치를 확인한 것만으로도 족했다.

    * * *

    충호의 공략 팀이 귀환했다. 그들은 성공적으로 2레벨 던전을 클리어했다. 하청 팀이 한 개 있었지만 인원수는 두 명에 불과하고 그마저도 A급 전사로 이루어진 용용 형제들이었다. 실패할 수가 없었고, 변수도 없었다.

    산박은 그들을 치하하기 위해서 연회장을 하나 빌렸다. 제법 돈이 깨졌지만 이제는 그런 소비를 하면서 기업의 미래를 보여줘야 했다.

    ‘대우받는 곳.’

    대우를 해주는 곳.

    작지만 보통 룸보다는 큰 연회 룸에 모여서 사진을 찍고 코스 요리의 사진도 찍어 각자 SNS에 올렸다. 남들에게 자랑할 만한 저녁 식사였다.

    참석할 이유가 없는 1레벨 전담 팀도 모였다. 옥시모론 팀의 의미 있는 날이었다. 사장이 아닌 다른 팀장에 의해서 추진된 2레벨 던전 클리어는 유의미했다. 때문에 1레벨 전담 팀원에게도 옥시모론 기업의 현재 상황을 확실하게 인지시키고, 사장이 팀원에게 돈 쓰는 사람임을 깨닫게 해줬다.

    “서 팀장을 비롯한 2레벨 공략을 성공적으로 마친 사람들은 나와서 보너스 받아 가세요. 금일봉은 아니지만, 회사에서 주는 겁니다.”

    산박이 푸근한 이미지로 가볍게 말하며 그들에게 봉투를 건넸다. 50만 원이 든 돈 봉투였다. 적다면 적고, 많다면 많다. 하지만 이들에게는 많았다. 보너스다운 보너스를 한 번도 받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봉투를 받은 팀원들의 얼굴에 절로 웃음꽃이 피었다. 돈은 아랫사람을 확실하게 붙잡아둘 수 있었고, 동시에 아랫사람이 야망을 품게 할 수 있었다. 이는 독립을 하게 만드는 독이 될 수 있었지만 회사에 대한 열정이 타오르게 할 수도 있었다.

    ‘옥시모론 기업은 최대한 지금 멤버 그대로 나아가야 한다.’

    아직은 팔이 안으로 굽는, 폐쇄적인 기업 형태를 지녔을 때 오는 이득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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