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01화 (201/270)
  • 201화

    도축은 정신력을 마모시킨다. 매일같이 돼지 피를 보는 사람은 익숙해지기 전까지 알 수 없는 스트레스 속에서 살아간다. 그리고 체력은 남아돌지만 더는 못 하게 된다. 이상하게 가슴이 답답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건 자기 생활, 생존에 충분히 여력이 있을 때나 생긴다. 배가 고플 때는 서로 자식도 교환해서 삶아 먹는 게 인간이었다. 산채에서 고립되었을 때 할 수 있는 건 동사해서 죽은 동료를 먹는 것뿐이다.

    인간은 감성적인 동물임에도 불구하고 이성적이고 싶어 하는 동물이기에 모순된 존재였다. 그리고 우리는 언제나 노력한다. 내 지성이 본성에 패배하지 않도록.

    동시에 똥오줌 분수 쇼도 정신력에 큰 타격을 준다. 일단 더럽고 냄새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임프 던전은 오래 공략할 수가 없는 던전이었다. 그리고 짧은 순간 최대한 큰 효과를 보기도 힘들었다. 모든 문이 자물쇠로 잠겨 있는 탓이었다.

    그런 상황 속에서 일행은 복도에서 휴식을 취했다. 피 냄새를 지우고 청량감을 주는 던전 아이템도 있지만 비싸다. 현대의 복잡한 인공 화학물은 가져올 수가 없었다. 과학으로 쌓아 올린 물건은 던전에 들어올 수 없었다.

    횃불을 대충 벽에 기대어 놓고 휴식을 취하던 탕만이 눈을 떴다.

    “저 동상은 뭡니까?”

    “저게 탈출구입니다. 전에 말씀드렸죠?”

    “아.”

    그제야 탕만이 이해했다. 악마의 상(像). 이 임프 던전을 나가기 위해선 저 상을 부숴야 했다. 아주 손쉽게 부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런 악마의 상은 곳곳에 존재했다.

    산박은 그 악마의 상을 바라보았다. 가슴을 드러내고 있는 여성체 악마였다. 악마의 꼬리로 자신의 허리를 휘감고 있었고, 그 꼬리의 위에는 임프들이 놓았는지 썩은 눈알이 있었다. 날개는 짧다. 대신 검은색 산양의 뿔이 제법 크게 표현돼 있었다.

    ‘악마 숭배.’

    임프들은 악마를 숭배하는 존재였다. 그리고 이 여성체 악마는 제법 유명하다. 릴리스(Lilith)라 불리는 악마였다. 어디든 끼지 않는 구석이 없지만 낀 곳에는 형편없는 권속 악마만 가득하다. 말 그대로 간잽이 악마였고 하이에나 같은 악마였다.

    ‘그래서 이런 곳이 있는지도 모르지.’

    “이제 속은 괜찮아졌습니까?”

    산박의 말에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복도는 임프들이 날아다니기 위해서 넓었기에 작은 대지 골렘도 소환할 수 있어 보였다. 하지만 산박은 굳이 작은 대지 골렘을 소환하지는 않았다. 차라리 그 힘으로 ‘갈래 불꽃’을 한 번 더 쓰는 게 나았다.

    산박이 그냥 문들을 지나치자 탕만이 물었다.

    “사장님, 여기 다른 방은 확인 안 합니까?”

    “네.”

    “건질 게 없어서 그렇습니까?”

    “아니요. 건질 건 있는데, 시간이 아까워서요.”

    코는 이미 마비되었지만 그림자 후각은 여전했다. 계속해서 느껴지는 알싸한 피 비린내를 맡으며 산박은 판단했다.

    ‘이곳에 오래 있을 수는 없다.’

    탕만이든 시은이든 정신적으로 매우 힘들 것이 분명했다. 이를 가볍게 여기면 심하게는 반년 동안 요양해야 할지도 몰랐다. 사람은 생각보다 강인하지만 생각보다 나약하기도 하다. 고로, 과감하게 임프가 없는 방은 털지 않았다.

    “안에 뭐가 있길래 그냥 지나갑니까?”

    탕만이 잡담을 떠들어 대었다. 산박은 굳이 숨기지 않았다.

    “지구에는 없는 희귀 금속요. 보통 10g으로 자잘하게 나와요. 그래도 제법 돈이 되는 편이죠.”

    “와!”

    탕만이 탄성을 내질렀다. 무심한 산박의 말과는 다르게 지구에서 나오지 않는 희귀 금속은 큰돈이 되기 때문이었다. 특히나 부자들이 좋아했다. 희소성 때문에 대부분 반지나 귀걸이 혹은 목걸이에 사용된다.

    또 지구에서 나오지 않고 던전에서만 나오는 던전 광물인 탓에 인챈트 효율도 좋았다. 크기에 비해서 더 강한 마법을 담을 수 있었다.

    “그걸 포기하면 좀 그렇지 않습니까?”

    그 말에 산박이 걸음을 멈추고 탕만을 바라봤다. 탕만이 움찔했다.

    “임프 던전 키가 1억입니다. 여기 돈 벌러 오는 사람은 없어요. 임프 날개를 부산물로 지정한 건 최소한의 수익 때문입니다. 아시겠습니까?”

    “예. 죄송합니다.”

    “죄송할 것 없습니다. 탕만 씨한테는 말하지 않았으니까요. 그러니 마음에 담아두지 마십시오.”

    “예!”

    그들은 복도를 가로질러서 약 200m를 진행했다. 코너가 꺾이고 내려가고 다시 올라가기도 했으며 갈림길이 나타나기도 했다. 특히 갈림길에서는 산박이 무릎을 꿇었다. 벽에 철창이 있었는데, 그 구조가 조금 이질적이었다.

    철컹! 철컹! 턱!

    두 번 흔들자 단번에 철창이 뜯겨 나왔다. 산박은 그 내부를 훑었다. 구멍이 존재했는데 제법 깊고 내리막길이었다.

    ‘나중에 확인해 봐야겠군.’

    시체와 썩은 내가 풀풀 풍겨 왔다. 분명 뭔가 있어 보였지만 산박은 당장 그곳으로 가지 않았다. 이 던전에 온 목적과 상반되는 곳이기 때문이었다. 호기심 따위로 설정해둔 목표를 버릴 순 없었다.

    “여긴 나중에 확인하겠습니다.”

    “시체 냄새가 진하게 나네요.”

    “전 썩은 내 같은데…….”

    서로 다른 판단을 내렸다. 이시은은 네크로맨서였기에 시체 냄새를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반면 탕만은 그러지 못했다. 그게 극명하게 보이자 이시은은 속으로 탕만을 비웃었다.

    ‘역시 데려온 보람이 있어.’

    탕만은 B급이다. 아무리 성장해도 이류를 벗어날 수 없었다. 그렇기에 이런 희귀한 던전에 데려오기에 딱 적당했다. 김각두는 잠재력이 뛰어난 성기사고, 서충호는 말할 것도 없이 강자다.

    ‘서충호는 적어도 고레벨이 되기 전까지는 짓눌러야 한다.’

    전사는 저레벨일 때 크게 대우받고, 고레벨에서는 조금 뒤처진다. 불변의 법칙이었다. 그렇기에 서충호를 견제하는 건 당연했다.

    ‘어림도 없지.’

    그래서 적당한 탕만을 선택했다. 그건 여기서도 확연하게 드러났다. 크게 두각을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자기 할 일은 적당히 해낸다. 그야말로 이류. 캐리하지는 못해도 보통은 갈 수 있는 재력(材力)이 있었다.

    어찌 되었든 그들은 철창을 다시 닫고 진행했다. 그리고 드디어 임프를 만날 수 있었다. 놈들은 다섯 마리였고, 하나같이 릴리스의 악마상을 혓바닥으로 핥으며 깨끗하게 만들고 있었다.

    “케엑?!”

    임프들은 산박 일행의 소리를 듣고 고개를 홱 돌리더니 바로 덤벼들었다. 당연히 상대도 안 되었다. 50cm짜리 임프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경장비 혹은 무장하지 않은 사람을 상대로는 바람 마법과 호전성으로 승리했겠지만, 그들이 싸움을 건 상대는 던전 사용자다. 그중에서도 일류라고 말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자가 두 명이나 있었다.

    주먹으로 맞고, 목을 잡혀서 벽에 대가리가 박히고, 순식간에 임프 다섯 마리가 떡이 되었다. 바람의 마법에 투구가 긁혀서 탕만이 좀 주저했다는 것 빼고는 흠잡을 수 없는 전투였다.

    그 속에서 산박은 기묘함을 느꼈다.

    “이 팀장, 아직도 검술 배우세요?”

    “예. 여자라서 오히려 검술이 저한테 맞더라고요.”

    검의 구조적인 힘. 아무리 덩치 큰 거구의 공격이라도 검 손잡이 바로 위쪽에 무기를 걸고 자신의 몸 쪽에서 막아내면 그 어떤 공격도 흩트림 없이 막아낼 수 있었다.

    쌀 포대를 그냥 들어 올리는 것과 몸에 바짝 붙여서 들어 올리는 것. 둘의 차이는 매우 심하다. 그 거리의 묘리는 검에도 적용 가능했다.

    또 검은 길면서도 무게가 적다는 장점이 있었다. 그렇기에 이시은은 검을 버릴 생각이 없었다.

    “정말 부지런하십니다.”

    탕만이 감탄했다. 보통 후방 직업이 활성화되면 그 분야에 몰두하기 마련이었다. 자연스럽게 검을 손에서 놓게 된다.

    “던전에 가서도 아직도 적과 자주 싸우잖아요? 소홀히 할 수가 없죠. 왜들 이러세요? 갑자기 부끄럽게……. 헤헤.”

    그녀가 웃자 탕만의 입꼬리가 헤벌쭉 벌어졌다. 이시은의 미모가 대단하기 때문이었다. 특히 섹시함이 발군이다. 그런 미녀가 수줍은 듯 웃으니 흐뭇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임프 날개를 회수하고, 그들은 문 하나에 또 작업을 시작했다. 이번에는 불꽃두더지 파수병 카누토가 접이식 곡괭이를 들었다.

    “하압!”

    그는 탕만보다 더 빨리 자물쇠를 부숴냈다. 힘이 강해서가 아니라 적중률, 기술이 좋아서였다.

    할버드는 중병기 중에서도 까다롭다. 그런 걸 다루는 파수병의 무기 실력은 환도를 드는 탕만보다 좋을 수밖에 없었다. 검은 자신이 무게 중심의 기둥이지만 할버드는 도낏자루로 인해 무게 중심의 기둥이 할버드의 도끼와 자신, 두 곳에 존재하는 복잡한 무기였다.

    텅!

    안에 있던 임프들은 개구멍을 통해서 나간 상태였다. 그렇기에 무주공산이 된 방 안으로 달려들어 가서 자리를 잡았다. 어차피 임프들이 날아오겠지만 그렇게 방에 들어간 이유는 당연히 나중을 위해서였다.

    ‘닥치는 대로 잡아 죽이고 그 냄새가 퍼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이런 방에서 잡아야 한다.’

    복도에는 최소한의 피 냄새만 흐르도록 해야지 멘탈 관리에 좋았다.

    그렇게 주변 임프들을 소음으로 끌어들인 뒤에 곤죽을 만들고, 희귀 금속도 챙겼다.

    “무슨 금속인지는 아세요?”

    복도에서 휴식을 취하며 이시은이 물었다.

    “아트 블랙(Art black)이라는 거예요. 여기 자세히 보시면 가끔 내부에서 흑점 폭발 같은 게 일어나요.”

    그 말에 모두 아트 블랙에 시선을 두었지만 동그란 희귀 금속은 그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검은색이었다. 다만 괴이하게도 표면의 감촉은 맨들했는데, 내부에서 무슨 가루 같은 것들이 잔뜩 움직이는 현상이 눈에 들어왔다.

    “꺼림칙한 금속이네요.”

    “던전 금속이 뭐 다 그렇죠. 2레벨에서부터 희박하게 나오는 만큼 고가품이고요.”

    신기하기에 인기가 있다. 당연한 소리였다.

    산박은 다른 이들보다 확연하게 많은 임프를 때려죽였다. 불꽃두더지 파수병, 외눈붉은곰, 대장삵까지 있어서였다.

    이들은 또 특이한 곳을 발견하기도 했는데, 바로 모독 성소였다. 가히 3천 평은 되어 보이는 탁 트인 성소였다.

    “엄청난 숫자인데, 괜찮겠어요?”

    그곳에는 딱 봐도 수백 마리에 달하는 임프들이 있었다. 보통 수단으로는 처리하기가 어려웠다.

    동시에 산박은 그들이 정신없이 모독하고 있는 석상에 시선이 갔다. 척 보면 척이었다.

    ‘빛의 신 팔라딘이잖아?’

    빛의 신의 석상을 만든 임프들은 그 석상을 모독하기 바빴다. 얼굴에 오물을 뿌리고 성기를 비비거나 저주의 말을 퍼부었다. 파손된 팔라딘의 석상이 곳곳에 존재했고, 그 주위에 침을 뱉고 일부러 밟고 지나가는 임프도 있었다.

    ‘야만신에 이어서 물량의 악마 릴리스까지…….’

    빛의 신은 적이 많은 듯했다.

    “힘을 좀 회복하고, 하루 뒤에 칩시다.”

    모두 동의했다. 그들은 조금 되돌아가서 복도에서 휴식했다. 힘을 충전하고, 소모되면 제대로 판단하기 어려운 정신력을 채웠다. 만반의 준비를 하고 이들은 모독 성소에 들어섰다.

    쿵쾅쿵쾅!

    작은 대지 골렘이 그대로 질주했다.

    “끼에에에에에에에에에!!”

    임프 하나가 이들을 보자마자 소리를 꽤애액 내질렀다. 곳곳에서 소란이 울려 퍼지고 먼 곳에서도 화답하듯이 고함을 내지르는 소리가 미약하게 들려왔다. 보이는 것보다 임프들이 많다는 걸 모두가 알 수 있었다.

    * * *

    “어어, 노 이장!”

    노갑비가 고개를 천천히 돌렸다. 농사일로 허리가 굽은 박 할매다. 그래도 건강해서 어지간한 곳에는 얼굴을 들이미는 편이었다.

    “무슨 일이시오?”

    그가 서둘러 다가갔다. 보통 그를 잘 찾지 않는 게 박 할매였다. 부르면 불렀지 찾아오지는 않았다.

    “자네도 봤어?”

    “예?”

    “봤냐고!”

    “예? 무, 뭐 어떤 걸 말씀하시는지?”

    “새하야코롬 생긴 이상한 까마귀 말이여!”

    “아, 전에도 말씀드렸는데 그게 양봉 사업에 쓰는 까마귀랍니다.”

    그 말에 까무잡잡한 박 할머니가 눈을 똥그랗게 떴다. 입도 조금 벌렸다. 워낙 초콜릿을 좋아해서 입 안이 충치로 가득했다. 자식이 어떻게든 치과에 데려가려고 해도 똥고집을 부리기를 벌써 5년째였다. 늙어서 자식 돈 쓰는 부모는 되고 싶지 않다는 것이 박 할머니의 마지막 신념이고 고집이었다.

    “으머머, 그러니 내가 이상하다고 본 거지.”

    “뭐가 이상한지…….”

    “아니, 까마귀가… 말벌을 죄다 잡는다니까?”

    “예? 참말로?”

    “그럼. 요즘에 말벌이 하나도 안 보인다니까. 전에는 멧돼지 잡으러 온 사람들한테 일부러 부탁도 하고 그랬자너.”

    애지중지하는 사냥개가 말벌한테 쏘여서 끙끙 앓는 건 큰 손해였다. 무슨 고기든지 비싸지고 있는 요즘에는 멧돼지 고기를 가지고 가려는 사냥꾼도 점점 증가하는 추세였다. 잡내? 향신료의 국가가 바로 한국이었다. 마늘의 국가에서 고기 잡내로 징징거리는 건 자기 요리 실력을 탓해야 했다.

    “신기하네…….”

    “근데, 이상하다니까.”

    “또 뭐가 이상하다고…….”

    “호박 씨앗을 그렇게 가져가.”

    “빗자루라도 던지시지.”

    그 말에 박 할머니가 손사래를 쳤다.

    “말벌 잡는 놈을 어찌 건드려!”

    “하하하.”

    시골의 깡패가 바로 말벌이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말벌 잡는 신기한 까마귀는 이로운 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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