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화
교구몬. 교토의 숨은 일인자라 불리는 곳이었다. 비상장 기업인데도 일본 내 200위권 안에 들어가는 자산 규모를 가지고 있다고 추측되는 곳이다. 워낙 회사가 많은 동, 서일본의 특징을 생각하면 대단한 일이었다. 특히 교토에서는 그들의 힘이 상당히 강력해서 니쥬니구치구미 중 어떤 야쿠자도 들어오지 못하고 있었다.
척 봐도 수천 평은 넘어 보이는 왕궁과도 같은 곳에 송지림 과장이 들어섰다. 계단부터 보통 비싼 집이 아니었다. 테이바치 츠요시 부장의 안내도 여기까지였고, 다른 이가 그녀를 안내했다.
기와의 형태는 일본식이라기보다는 한국식에 가까웠다. 테이바치 가문이 본디 한반도에서 온 것임을 명확히 해주는 전통 가옥들이 그득했다. 석탑도 보였는데, 양지바른 곳에 있어서 이끼 하나 없었다. 관리도 분명 잘하는 듯했다.
그 눈길을 본 안내자가 입을 열었다.
“흠명인숙광문성효대왕(欽明仁肅光文聖孝大王).”
“예?”
처음 듣는 말처럼 송지림 과장이 고개를 갸웃하자 안내자가 웃었다. 그 웃음 속에는 비웃음이 담겨 있었다.
“시호(諡號)입니다. 가장 대우받지 못한 왕을 기리는 석탑입니다. 요즘에 한국인 중 자세히 아는 이가 없다더군요.”
“아……. 예…….”
뜬금없는 소리였다. 하지만 이내 송지림 과장은 그 의도를 알아차렸다.
‘쓸데없이 애먼 사람한테 꼽을 주고 지랄이야?’
가문의 신세타령이었다.
“자세히 봐도 되겠습니까?”
“예?”
그 말에 안내자가 되레 놀랐다. 그런데도 송지림 과장은 다시 몸을 돌려서 석탑에 섰다.
“하사받은 겁니까, 직접 쌓아 올린 것입니까?”
“직접 쌓아 올렸습니다.”
“난 또, 하사받은 건 줄 알았네. 볼 필요도 없으니 다시 갑시다.”
그 말에 안내자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손을 덜덜 떨 지경이었다. 하지만 송지림은 미소를 지은 채 거침없이 앞으로 나아갔다. 안내자가 서둘러 그녀를 따라갔다.
송지림은 계단을 올라가야 하는 큰 누각에 올라섰다. 사방을 살필 수 있게 벽이 하나도 없었다. 탁 트인 곳에서는 마음이 뻥 뚫리는 기분이었다. 특히나 오밀조밀 개미처럼 살아가야 하는 게 한국인이었다.
‘병산 서원의 만대루에 오른 기분이군.’
일본, 그것도 교토에서 그런 기분을 느끼다니, 송지림 과장은 속으로 혀를 찼다. 이제는 더는 오를 수 없는 것이 만대루였고, 도시에서는 정자는 보여도 누각은 없는 게 대한민국의 현실이었다. 아예 오지로 차를 끌고 가야 볼 수 있고, 그게 아니라면 대가문의 내부에 들어서야지 하나 있다. 그만큼 보기 힘든 게 누각이었다.
“빨리도 오셨군. 하하하.”
유창한 한국어가 들어왔다. 풍채가 대단하다. 애초에 테이바치 가문의 시작이 무관이니 당연한 소리이기도 했다. 척 봐도 직계였다.
“처음 뵙겠습니다. 부산 금융의 송지림 과장이라고 합니다.”
“테이바치 아사(鄭撥 麻)라고 합니다. 교구몬의 상무요.”
지림 과장의 말에 아사가 깍듯하게 고개를 숙였다. 그는 서둘러 그녀를 안내했다. 그녀는 따로 있는 상에 앉았다. 테이바치 아사와 똑같은 크기의 상이었다.
“요즘 한국인들은 겸상한다던데, 어색하지는 않습니까?”
“가난한 자들이나 겸상을 하지요.”
그 말에 테이바치 아사가 웃으며 대답했다.
“설거지하기 싫어서 겸상 문화를 좋아한다던데.”
“요즘에는 외식합니다.”
“아니, 한국 외식은 비싼 편 아닙니까?”
“비상한 요리 사업가가 한번 갈아엎었지요.”
“흘흘, 천재에 좌지우지되는 사업이라……. 재밌지 않습니까?”
“무엇이 재밌습니까?”
“정부도 농가의 생떼를 못 이겼는데 사업가 하나가 그걸 바꿨다니 웃겨서 그렇습니다.”
“다, 10년도 지난 일입니다.”
시작부터 서로 살살 긁어 대었다. 테이바치 가문은 교토의 으뜸 가문이었고, 한국에 돌아갈 수 없는 한민족이었다. 반대로 동래 송가는 부산의 터줏대감이다. 서로 은근히 라이벌 의식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실례합니다.”
고용인이 음식과 술을 가져와서 지림 과장의 앞에 놓인 전통 과자를 치웠다. 한 입도 먹지 않은 전통 과자였다. 그제야 지림 과장은 자신이 너무 날카롭게 가시를 드러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물러가겠습니다.”
간단한 육전부터 시작해서 파전과 같은 익숙한 것들 사이로 막걸리까지 한 잔 따른 후에 고용인이 물러갔다.
“죄송합니다. 제가 조금 가시가 돋쳤던 듯합니다.”
그녀는 먼저 사과했다. 가볍게 말을 건 걸 수도 있었는데, 혹여나 상대가 자신의 답변에 열을 올렸을까 두려웠다.
“아닙니다. 저도 조금 흥분했습니다. 종종 한국인을 보면 뭔가 속에서 올라오는 게 있습니다.”
“이해합니다. 이미 시간이 많이 흘렀지만, 공을 세우고 버려진 것 아닙니까.”
“흥. 지금은 이렇게 쉽게 말해도, 저희에게는 아직도 슬픔으로 남아 있습니다. 우리는 아직도 연천군에 있는 사원에 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그 안에 있는 건 다 이곳으로 옮겼지 않습니까. 그리고 지금 이런 이야기를 하러 제가 온 건 아닙니다. 전 정부의 사람도 아니고, 부산 금융의 직원일 뿐입니다.”
테이바치 아사는 막걸리를 마셨다. 그리고 주제를 돌렸다.
“이야기는 대충 들었습니다. 그런데, 부산 금융의 내부도 참 골치 아픈 것 같습니다. 굳이 공장 부지를 이곳에 하려 하다니…….”
“내부 갈등 이야기는 루머에 불과합니다. 일본은 던전 사용자 1레벨이 가장 많은 곳 아닙니까.”
안전제일주의인 일본인은 1레벨 던전 사용자가 가장 많았다. 그 이상으로 굳이 갈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위험하기도 많이 위험할뿐더러 1레벨 던전 상품만 팔아도 먹고살기 충분했다.
일본 전체를 봤을 때 커리어 상승을 위해서 괴물 도축 일을 하면서 레벨 업을 꿈꾸는 자의 비율은 15%에 불과했다. 그리고 그들의 레벨 업 속도는 매우 더딘 상태였다. 그 덕에 일본의 저레벨 던전 물품의 수출률은 높고, 고레벨 던전 물품의 수출률은 절망적인 수준이었다. 되레 수입하는 비율이 매우 높았다.
그렇기에 무관 출신 가문인 테이바치 가문이 교토를 점령하다시피 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잔잔벼락 공장을 이곳에 짓겠다. 말이야 쉽지, 자기 손에서 멀리 두는 것 아닙니까.”
“부산 내의 상황과 연관 지으셔도 제가 드릴 말씀은 없습니다.”
테이바치 아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안주를 먹으면서 말했다.
“맛은 어떻습니까. 한국 것과 차이는 없습니까?”
“예. 오히려 더 옛날 전통식입니다. 투박한 게 확실히 추운 곳에서 먹는 전으로 보입니다.”
음식 이야기를 조금하고, 다시 본론으로 들어갔다.
“한다면 어떻게 구상했습니까? 제 가문이 제안한 곳은 세 곳이지 않습니까.”
“다진시(大津市)에서 재료를 내리고 철도를 이용해서 정수정(井手町)에 있는 공장에 넣어 작업할 생각입니다.”
“이데초(井手町)? 거기는 관광 쪽인데……. 괜찮겠습니까?”
“인구도 8천 안팎이고, 공장 들어서면 충분히 제어 가능합니다. 봄에나 겨우 반짝하는 관광소 아닙니까.”
“예. 그렇습니다. 철도도 있고, 국도도 두 개나 있죠.”
교토 남쪽에 있어서 테이바치 가문이 틈틈이 관리 인력을 내려보내기도 좋았다. 하지만 테이바치 아사가 덧붙였다.
“하지만 오쓰시(大津市)에서 가져오는 건 생각을 좀 해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야쿠자 때문입니까?”
지림 과장의 말에 아사 상무가 고개를 끄덕였다.
“교토 코앞 아닙니까.”
“부산의 공권력과 비교해서는 안 됩니다. 하하하. 일본의 공권력은 빨간딱지 붙일 때나 강합니다. 얄짤없이 매뉴얼대로 끊습니다.”
농담에도 지림 과장은 받아쳐 주질 못했다.
“경호 인력을 쓴다면요?”
“그러면 말리지는 않겠습니다. 돈이 더 들 뿐입니다.”
“다른 방법을 혹시 가지고 계십니까?”
“흘흘, 당연히 일본에서 재료를 구해서 공장에 넣으면 되는 것 아닙니까.”
욕심이 이글거렸다. 그 외에 한 시간을 더 이야기했지만 성과는 내지 못했다.
“다음에 봅시다.”
“예.”
지림 과장은 테이바치 가문을 세 번 더 만났다. 하지만 두 번 이후부터는 상무가 아니라 테이바치 츠요시 부장과 이야기를 해야 했다.
‘낌새를 알아차렸구나. 나중에 따로 방문해서 선물을 줘야 한다고 보고서에 올려야겠어.’
잔잔벼락 사업을 서일본에 마련한다는 건 개소리 중 개소리였다. 처음에는 상대해 줬지만 그 뒤로는 바로 빠진 상태였다. 적당히 부장과 대화나 하고 가라는 소리다. 막지는 않지만, 나중에 뭐라도 하나 가져오라는 소리였다.
아사 상무의 생각대로 부산 금융은 그저 액션을 취하고 있을 뿐이었다. 내부의 문제를 빨리 해결하기 위해서는 외부에서 움직임이 일어나야 했다.
워낙 혈족이 많은 동래 송가(家)답게 일을 빨리 진행시키려면 테이바치 가문과 조율하는 척을 하는 게 더 빨리 내부 결정을 마무리 지을 수 있었다.
5일 뒤에 지림 과장은 다시 한국으로 향했다. 공장 부지를 국내에서 결정했다는 소식을 들어서였다.
“조만간 다시 한번 찾아뵙겠습니다.”
배웅하는 이에게 전갈을 남기고 비행기에 올라탔다.
교구몬에서는 츠요시 부장과 아사 상무가 서로 마주 봤다.
“굳이 이렇게 가볍게 돌려보내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부산 놈들은 오지랖이 넓어서 말이야. 가만히 있어도 알아서 잘 챙겨줄 거다. 팍팍할 때는 이기적인 게 사람이지만, 넉넉할 때는 크게 덜어주기 쉽지.”
교수 집안이 치킨값에 그 어떤 감정도 없는 것에 반해서 배달부에게는 피 말리는 2만 원인 것처럼, 있는 사람에게는 큰돈이 큰돈이 아니었다.
“그리고 어차피 우리도 전에 부산 금융 쪽에 사람 하나 와달라고 하지 않았느냐.”
서로 이용하는 셈이었다.
“송서아가 그렇게 사랑을 받고 있을 줄은 몰랐다. 이 정도로 움직이는 건 처음이지 않으냐?”
“예. 거의 후계자나 다름없습니다. 햇수를 더할수록 엄청난 힘이 그녀에게로 향할 것입니다.”
“부산 은행이 던전 기업에도 손을 댄다…….”
“큰 항구 도시인 만큼 그 파급력은 더욱 강하게 나타날 겁니다.”
“부산 쪽에 사업을 좀 크게 해놔야겠어. 나중에 가면 늦을지도 몰라.”
“도매 쪽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럼 가게라도 차리려고? 아서라. 한국의 중간 유통업은 썩어 빠진 해골 물이나 다름없다.”
“예.”
테이바치 츠요시가 고개를 숙였다.
* * *
스님이 버스에서 내렸다. 아직 가로등이 켜져 있는 새벽 시간대였다. 그는 곧장 걸음을 옮겨서 골목길에 있는 여관에 들어갔다. 제지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3층 303호. 허름하기 짝이 없고, 계단 옆 벽에 붙은 벽지는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처럼 오래된 것이었다.
똑똑.
노크하자 안에서 바로 문이 열렸다. 아마 스님을 기다리고 있었던 듯했다.
조금 주홍빛이 감도는 머리카락은 윤기가 났고 웨이브가 진 머리카락만으로도 화려하고 세련되어 보였다. 눈동자는 크고, 피부는 새하얗다. 그리고 곳곳에 점이 많은 여자였다. 하얀 티셔츠의 사이로 보이는 쇄골에도 점이 하나 박혀 있었다.
꿀꺽.
스님이 절로 침을 삼켰다.
“왜 그래? 안 들어오고.”
그 말에 스님이 짧게 어어 대답하며 안으로 들어갔다. 그 뒤로는 서로 살을 뒤섞었다.
종교 카르텔 대구 천지신교의 간부 박지아의 선교는 성행위로 시작하는 선교였다. 선교는 전쟁이며 선교를 위해서는 예수조차도 부정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 천지신교의 선교 방침이었다. 그들은 한 명의 교인을 얻기 위해서 자신의 입에 거짓을 마구잡이로 집어넣을 수 있는 교인들이었다.
“후으, 하아. 하아.”
스님이 매트리스에 그대로 널브러졌다. 박지아는 서른세 살의 젊은 여자였고, 천지신교로부터 막대한 돈을 받는 2억 연봉의 여자였다. 다른 사람을 등쳐 먹어서 추가로 빼 오는 돈은 제외한 돈이었다. 오로지 천지신교로부터 받는 고정금이 연 2억이다.
그녀는 하나부터 열까지 몸매를 가꾸기 위해서 노력하는 여자였다. 평범한 일반인은 죽었다 깨어나도 손 하나 잡는 것도 어려운 외모를 지니고 있었다.
“통장은 가져왔어?”
“응. 이걸로 집을 구하면 돼.”
“고마워. 역시 자기밖에 없어. 우리 새집이네?”
쪽.
박지아가 능숙하게 키스를 하며 소리를 냈다. 그 소리만으로도 스님의 사타구니가 불룩 솟아 나왔다.
“든든하네. 역시 남자는 든든해야지.”
“흐흐흐.”
저급하지만 간드러진 여성의 목소리에 스님이 절로 웃음소리를 냈다. 하지만 추가로 살을 섞지는 않았다.
‘돼지 새끼. 스님이 뭐가 이렇게 살이 쪘어?’
칙. 칙.
라이터를 움직여서 박지아가 단번에 담배를 피웠다. 스님의 두꺼운 손이 박지아의 새하얀 허벅지를 쓰다듬고 위로 올라왔다. 하지만 박지아는 되레 다리를 더 벌렸다.
“허! 흐흐흐…….”
그 움직임에 스님이 깜짝 놀라며 헛바람을 집어 먹는 저질스러운 웃음소리가 들려왔고, 박지아가 이내 더는 못 참겠다는 듯이 웃음을 터트렸다.
서로 한바탕 웃고 나서 스님은 그대로 곯아떨어졌다. 남의 눈치를 피해서 여기까지 왔다. 실로 피로할 것이었다. 그사이에 박지아는 통장을 확인했다.
‘2억 8천.’
적다. 하지만 스님 하나가 꿍쳐놓은 돈으로 치기에는 많아도 너무 많았다. 그럴 수밖에 없었는데, 대구의 황금이나 다름없는 수성구의 아래쪽 산에 있는 것이 대덕사였다. 그곳의 스님이 돈이 없을 수가 없었다.
“후우…….”
그녀가 담배 연기를 내뿜으면서 눈을 조금 내리깔았다. 긴 속눈썹과 함께 헝클어진 주홍색 머리카락을 새하얗고 긴 손으로 쓸어 넘겼다. 긴 손톱에는 분홍색 매니큐어가 발라져 있어서 과하지도 덜하지도 않았다.
멍하게 있던 박지아는 이내 명품 백에서 프로포폴을 하나 꺼내 들었다.
탁탁.
주사기를 치는 소리가 들리고 이내 신음 소리가 한숨 소리처럼 뻗어 나갔다. 박지아의 공허한 눈에 행복감이 스며들어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