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화
산박과 송서아는 강의를 들으며 식사를 이어 나갔다. 강의는 그 자체만으로도 서로 의견을 나눌 수 있게 했다.
“방금 말, 멋지지 않아요? 모든 선택을 경제적으로 생각할 필요가 있다. 하나를 선택하면 하나는 버려야 하고, 그만큼 이득이 있는 선택을 해야 하죠.”
“저도 그런 적이 많았어요. 똑같은 돈이라도 예금과 주식. 이것만 해도 확 차이가 나죠.”
제법 철학적인 내용이기도 했다. 다분히 경제적이지만 이를 인간에게 적용하는 철학적인 방법이었다.
‘배가 부르면 철학을 논할 수 있지.’
다른 것에 얼마든지 사색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이곳은 사치스러운 곳이었다. 생존에 많은 신경을 써야 하는 사람은 이곳에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그들은 더욱 고등적인 고민을 할 수 있었다. 그 고민 자체는 스트레스였지만 이들에게는 기분 좋은 스트레스였다. 마치 잡담 떠들듯이 할 수 있었다.
‘이런 기회가 자주 있다면, 자연스럽게 재미를 느끼겠지.’
어마어마한 태생적 차이. 하지만 그 누구도 그것을 깨닫고 있지 않았다. 특혜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산박은 그걸 굳이 입에 담지 않았다. 할 말이 있고 안 할 말이 있다. 그걸 잘해야지 사회생활을 잘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인간 사회는 정글. 자기 생각을 내비치는 순간 자신은 그 생각에 따른 색채를 가지게 된다. 또 사람은 흑백 논리를 좋아하고, 세상을 단순화시키고 싶은 욕구가 존재했다. 그러므로 항상 조심해야 했다.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
그런 속담은 누구나 알지만 열 길 물속보다 자신의 속을 다른 사람이 모르도록 하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송서아 지점장 같은 인물이 옆에 있을 때는 어려워도 할 수밖에 없었다. 강자 앞에 서면 긴장하기 마련이었다. 그 긴장은 생존 본능을 자극시키기에 충분했다.
“제 강의를 들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화려한 삶 속에 뜻깊은 생각이 깃들기를 바랍니다.”
있어 보이는 멘트를 끝으로 강사는 고개를 깊이 숙였다. 박수 소리가 제법 컸다. 그만큼 언변이 뛰어났고, 아는 것도 많은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의 생각을 듣는 것만으로도 듣는 이는 교양인이 된 기분에 휩싸였다. 사람을 높일 줄 아는 사람이었다.
‘인기가 있을 수밖에 없겠어.’
요즘 같은 세상에서는 빛과도 같은 강의였다. 상처 입은 자존심, 경직된 경쟁 사회에서 그래도 당신은 대단한 사람이라고 말해주는 강의였다.
이렇게 잘사는 사람들도 공감하고 있다는 것부터가 놀라웠다. 오히려 잘살기 때문에 그들은 아래를 보지 않고 위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기에 박수 소리가 제법 나오고 있었다.
“어떠셨어요?”
식사가 치워지고, 간단한 디저트와 차가 올려졌다.
“들을 가치가 충분했습니다. 책을 한 다섯 권은 읽은 기분인데요?”
그 말에 송서아가 미소를 지었다.
“저도 비슷한 기분이에요.”
두 사람의 분위기는 정말 좋았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송서아의 경우에는 태산박이라는 사내가 가지는 가치를 오늘 또 한 번 확인했다. 동시에 감정적으로도 그에 대한 애정을 품고 있었다. 딱 첫눈에 반했다.
반대로 산박은 부산 은행을 뒷배로 이용할 수 있을 거라는 기대를 하고 있었다. 교묘하게도 서로의 이해관계가 딱 떨어지고 있었다.
“던전 사용자는 운동도 많이 하죠?”
사적인 질문을 꾸준히 받은 산박은 이내 송서아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이를 이용할 생각을 가졌다.
‘그녀를 이용하면 난 내 꿈을 실현할 수 있다. 그것도 손쉽게…….’
동시에 송서아의 외모에 대한 불만도 없었다. 단아하고 우아한 것이 송서아의 이미지였다. 여배우를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그럼요. 혹시 다음에 시간 되시면 같이 조깅이나 헬스라도 하실래요? 제가 가르쳐 드릴게요.”
“음……. 배드민턴은 혹시 좋아하세요?”
서아의 말에 산박이 웃었다. 그가 웃자 그녀도 따라 웃었다.
“사실… 배드민턴은 쳐본 적이 없어요. 그래도 괜찮으시다면 해보고 싶어요.”
산박이 매우 적극적으로 감정을 내비쳤다.
서아는 손에 땀이 조금 차는 걸 느끼고 냅킨에 손을 닦았다. 목이 달아오르는 걸 느낀 그녀는 물을 마셨다. 속으로 숫자를 헤아렸다.
살면서 이런 기분은 처음이었다. 송서아는 성과를 내는 천재였고, 수많은 선도 봤다. 하지만 이만큼 두근거린 적은 처음이었다. 마치 유전자가 그를 원하는 것처럼 강렬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좋아요. 장소는… 제가 알아보고 연락을 드릴게요. 세종시 근처로요.”
“부산이어도 괜찮아요.”
“멀잖아요.”
서아의 말에 산박은 빙긋 웃었다.
“장소 섭외를 지점장님께서 하시는데, 가는 거라도 제가 가야 하지 않겠어요?”
“배드민턴 하자고 한 건 저잖아요. 일 바쁘신데 부산까지 올 필요는 없어요. 전 업무를 전산으로 처리하면 되고요.”
서아가 고집을 부렸다. 이에 산박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까지 배려를 해주다니, 아무래도 송서아가 지닌 감정은 조금 무거워 보였다.
‘하지만 감정이 아무리 무거워 봤자 부산 은행보다 무겁겠어?’
자신이 가지지 못한 것. 가문, 기반, 혈족.
그 어떤 천재도 기반이 없으면 황제가 될 수 없었다. 그렇기에 송서아의 가치는 산박에게 있어서 컸다. 만약 그녀가 자신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다면 이는 이용해야 했다.
‘대한민국의 대도시 하나.’
그곳에 사는 이들만 ‘구원’해도 산박은 만족할 수 있었다.
“전에 받은 연락처로 연락하면 될까요?”
산박의 말에 송서아가 고양이가 털을 세우듯이 어깨를 덜컥거렸다. 그리고 냉큼 품에서 새로운 스마트폰을 꺼내 들었다.
“오해하지 마세요. 오빠들이 극성이라서요.”
충분히 열등감을 느낄 수 있는 장면이라 송서아가 도둑이 제 발 저린 듯이 먼저 변명했다.
“네. 저번에 한 분 만났었죠.”
“그때는 진짜 죄송했어요.”
새로운 번호를 교환하고, 둘은 쉽게 헤어졌다.
송서아는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수많은 연애책을 섭렵한 내공이 존재했다. 공부를 잘하고 암기력도 뛰어난 것이 송서아였다. 책이 하라는 대로 하지는 않았지만, 이성적으로 필요하다고 여겨지는 것을 현실에 적용했다.
‘지나친 관심은 상대를 거북하게 만들어. 동시에 서로 호감이 있어도 불꽃처럼 타오르면 끝이 안 좋아.’
사귀기 전에 섹스부터 시작하는 남녀는 결코 그 인연을 길게 끌고 갈 수가 없었다. 서아는 이를 연애책을 통해서 알게 되었다. 그녀에게는 충격과 공포였다. 그래서 뇌리에 크게 낙인찍혀 있었다.
‘어떻게 그렇게 문란할 수가 있지?’
엘리트로 가문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살아온 그녀에게 있어서 사귐 전 섹스는 충격과 공포,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그 때문에 처음 만났을 때부터 늦은 밤까지는 결코 함께하지 않을 생각을 하고 있었다.
송서아가 시야에서 사라지자 산박도 몸을 돌렸다.
‘큰 패가 들어왔다. 이 카드를 밀고 나가야 하지만, 그 과정이 평탄할 것 같지는 않다.’
그래도 밀고 가야 했다. 살아가면서 처음으로 눈앞에 떨어진 복이었다. 세계 경제의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던전 경제의 작은 회사를 차리자마자 떨어진 복이었다. 옛날로 치면 성공이 약속된 벤처 기업의 사장과 비교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런 이들에게 복은 거대하게 한 방에 뚝 떨어지는 법이었다.
‘드디어 빛이 쏟아지는 곳에 내가 올라왔다.’
쓰레기 냄새. 피가 썩어 문드러져 굳어버린 계단. 그곳을 지나서 양지에 들어섰다는 게 체감되었다. 평범한 사람은 결코 도달하지 못하는 곳에 산박은 서있었다. 그리고 다시 고꾸라져서 굴러떨어질지 정신없이 앞으로 달려 나갈지는 그 누구도 예상할 수가 없었다.
졸부의 최후는 각양각색이다. 모든 것은 운이 결정한다. 실력이 아무리 대단해도 빛을 받지 못하는 이들은 수두룩했다. 아무리 대단한 곳에서 요리를 해도 자기 가게를 열면 파리가 날리는 게 이 세상의 논리였다.
저벅. 저벅.
산박은 복잡한 표정으로 택시를 타는 곳까지 천천히 걸어가다가 이내 멈췄다. 그 누구도 찾지 않는 연못을 관리하는 호텔 직원과 틈틈이 그런 연못을 찾아오는 송서아를 떠올렸다. 실로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그것은 내가 약자의 입장에 서있기 때문이지.’
자본주의가 만든 의자. 어떤 의자에 앉느냐에 따라서 판단은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에 산박은 꿈꿨다. 거대한 풍요로움을 만들어낸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단 하나의 요람을 자신이 만들기를.
* * *
어두컴컴한 방 안에서 이시은의 눈동자가 컴퓨터를 쭉 훑어 내렸다. 컴퓨터에는 외장 하드가 USB 포트에 연결되어 있었다. 동시에 새끼손가락만 한 휴대용 USB 저장소도 다른 곳에 끼워져 있었다.
‘흠…….’
딸칵.
사진을 확인하는 시은의 표정은 차가웠다. 그곳에서는 파파라치가 산박을 찍고 있었다. 택시를 타는 모습부터 이를 따라가는 모습도 훑을 수 있었다. 최소 2분마다 의무적으로 사진 찍기를 요구한 대로였다.
산박은 아직도 재건하고 있지만 서서히 모습을 되찾고 있는 서울의 한 곳, 유명한 역사를 지닌 호텔에 섰다. 그 이후의 모든 것이 사진에 담기지는 않았다. 외부인이었기에 멀리서 줌을 당겨서 찍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시은은 모든 정보를 획득할 수 있었다.
기십만 원~백만 원 이상으로 굴릴 수 있는 게 파파라치들이었다. 그 덕을 이시은은 톡톡히 봤다. 특히 빙췌몽의 라인을 타면서 돈도 제법 들어와서 거침없이 인력을 사용해 산박의 동태를 살피고 있었다.
그렇기에 이시은은 현재 생활을 유지하고 있었다. 평범한 살인마는 결코 유지할 수 없는 평범한 생활을 유지했다. 던전 사용자였기에 가능했지만 날이 갈수록 스트레스는 쌓여만 갔고 그 속도는 빠르게 증가하고 있었다. 고로 이시은이 이렇게 긴 기간 동안 한 조직에 소속되어 있다는 건 모든 살인마들이 경악할 일이었다.
그 이유에는 태산박이 있었다. 처음에는 살의. 이제는 동질감. 그 두 개가 충돌하며 만들어 내는 내면적 파괴는 아이러니하게도 이시은의 스트레스 수치를 낮추는 효과를 가져왔다. 결국 파괴는 이시은의 내면에 안정을 준다.
‘거물 같은데.’
그녀의 눈이 경호원을 대동하고 있는 송서아에게로 꽂혔다. 그녀를 찬찬히 훑은 시은의 표정이 변했다. 작은 새하얀 가죽 가방에 그 눈이 멈췄다.
정확히는 그 가죽 가방에 연결된 금색 줄이었다. 그냥 눈으로 보면 평범했지만 사진에 찍혔을 때 금색 줄은 마치 하나가 된 것처럼 인위적이었다. 줄이 아니라 ‘작대기’로 보였다.
‘던전 아이템이다.’
매우 특징적이다. 하지만 특징이 있기에 강력하다. 특히 ‘태산박을 죽이는 상상’을 하는 이시은에게는 익숙했다. 정상에 오른 태산박은 실로 죽이기 힘든 상대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녀는 고가 아이템에 다분히 관심이 많았다.
‘천상의 황금 줄. 만능의 보호.’
길이에 따라서 보호의 경중이 달라질 뿐, 모든 것을 보호할 수 있다고 여겨지는 물품이었다. 1cm당 1억을 호가하는 제작 아이템이며 멕시코에서 개발되었다. 이 레시피 때문에 멕시코의 시장이 열두 번이나 암살당했다. 멕시코 내부에서 엄청난 내분을 일으킨 아이템이었다. 그리고 현재는 멕시코와 남미, 두 곳에서 생산하고 있었다.
황당하게도 그 내분으로 레시피가 유출되었고, 남미(Confederate States of America)가 이를 얻은 것이다. 이에 북미의 정치적 공세가 있었지만 흐지부지되었다. 결국 얻은 놈이 장땡이다.
북미와 남미는 앙숙 지간이었다. 남미의 대영웅 로버트 E. 리의 ‘모두 잃거나 하나만 얻거나(Lose all or keep one)’라는 말로 진행된 자살적 북진 덕분에 남미는 자신들만의 국가를 정립했고, 그 유구한 역사는 아직도 내려오고 있었다.
민병대로 이루어진 남미였기에 끝없는 피해와 답 없는 미래 속에서 로버트 E. 리는 오로지 북으로 진군했고, 북미의 참모진은 북미의 압도적인 역량 때문에 소극적으로 전쟁 초기를 보냈다. 그게 패착으로 모든 것이 끝났다.
‘…평범한 방법으로는 이 여자를 죽일 수 없겠어. 어떤 여자인지부터 알아봐야겠어.’
시은의 눈이 송서아의 얼굴을 담았다. 환하게 미소 짓고 있는 모습은 그녀의 파괴 욕구를 더욱 높였다.
그 외에도 이시은은 그녀가 소지하고 있는 물품을 꼼꼼히 캡처해서 이미지 검색을 돌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사장님은 걱정 없지.’
태산박은 본인의 실력을 맹신하고 있었다. 어느 정도 자본이 쌓이기 전까지 현실에서 자신을 보호하려고 노력하지 않을 것이었다. 이시은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