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9화 (189/270)
  • 189화

    * * *

    N 브랜드. 부산에서는 제법 유명한 브랜드였다. 너튜브에서 옷감부터 시작해서 해당 제품의 모든 공정을 공개해 명성을 얻었고, 단연코 모든 여성들이 원하는 옷이 되었다.

    실시간 너튜브 상담 또한 채팅 및 메시지와 통화를 통해서 다양하게 하고 있었다. 이 상담 인력에 엄청난 돈을 쏟아붓고 매뉴얼은 물론이고 상담원의 교육은 물론 자격도 높은 편이었다. 그만큼 연봉도 높았다. 백화점에도 돈을 받고 입점할 정도로 명성을 얻은 것이 N 브랜드였다.

    그곳에 송서아가 경호원 둘을 데리고 들어왔다. 척 봐도 보통내기가 아님을 직원이고 손님이고 알 수 있었다.

    아무리 돈이 많아도 운전기사 한 명이고 경호까지는 쓰지 않는다. 매달, 매년 들어가는 돈을 생각하면 당연했다. 하지만 송서아는 운전 및 경호를 맡은 사람이 하나, 거기에 비서 및 경호를 맡은 사람까지 총 두 명이나 곁에 두고 있었다. 절로 눈이 갈 수밖에 없었다.

    가장 경험이 많은 직원이 다가와서 먼저 고개를 숙였다.

    “어서 오십시오, 고객님. 혹시 찾으시는 게 있으신가요?”

    “제 나이 또래 직원도 한 명 불러 주세요. 두 분이 도움을 주셨으면 해요.”

    송서아의 거침없는 말에 직원이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곧 젊은 직원이 다가왔다. 송서아가 그제야 말을 이어 나갔다.

    “맞선이나 소개팅 자리로 볼 수도 있는데, 자연스러운 만남을 최대한 유도한 상태예요. 장소는 제법 고급스러운 곳이고요. 거기에 입고 갈 옷을 원해요. 식사도 해서 드레스보다는 좀 가벼운 걸 원해요.”

    “혹시 실내인지 실외인지 알 수 있을까요?”

    “그게 중요한가요?”

    “그럼요. 아직 날씨가 풀리지 않았잖아요? 실외면 많은 걸 보여줄 수가 없어서 옷 외의 것에 무게를 둬야 하지만, 실내면 액세서리보다는 복장으로 눈에 확 들어오게 할 수가 있거든요.”

    송서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듯했다.

    “실내요.”

    “혹시 외투도 부족함이 없어야 하나요?”

    ‘제대로 돈 줄 고객이야. 모든 걸 구매하도록 만들어야 해!’

    경험 있는 직원답게 말 놀림이 예사롭지 않았다. 하지만 사실 그렇게 기합을 넣을 필요도 없었다. 송서아가 지닌 재력은 보통이 아니었다. 이런 곳에서 쇼핑 한번 한다고 타격이 있을 리가 없었다. 가볍게 권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매출을 올려줄 터였다.

    “네. 최대한 꼬투리는 잡히고 싶지 않아요.”

    “요즘 아우터 패션은 트렌치코트가 기본이에요. 특히 예전에는 베이지색 계통의 트렌치코트가 유명했다면 요즘에는 다양한 색이 나오고 있어요. 현영 씨.”

    나이 든 직원이 그렇게 말하며 옆에서 멀뚱히 서있는 여직원의 이름을 불렀다.

    “아! 네! 전! 네이비색이! 좋다고! 생각해요!”

    바짝 긴장한 티가 역력했다. 그도 그럴 것이 건장한 남자 두 명이 호위하고 있는 여성을 앞에 두고 있었다. 바짝 얼어 버려도 이상하지 않았다.

    “네이비 말고 다른 건요?”

    “핑크도 좋고, 아! 항, 항공 점퍼도 요즘에는…….”

    “무게가 있는 자리라서요. 점퍼는 싫어요.”

    젊은 여직원이 입을 다물었다. 호불호가 확확 정해진 고객이었다. 이에 나이 든 여직원이 바통을 받았다.

    “그럼 트위드 재킷은 어떠신가요?”

    “너무 유행 지난 거 아닌가요? 거기에 부자만 입는다는 인식이 박혀서 싫어요.”

    “유행은 돌고 도는 거고, 요즘에는 개성이잖아요? 특히 고객님은 굉장히 미인이셔서 뭘 입어도 세련되어 보이세요. 너무 부담스러우시면 롱 트위드 재킷 말고 미디엄 쇼트 트위드 재킷으로 하면 세련미가 확 살아나고, 화려하기도 화려해요.”

    “일단은 하나씩 다 가져와 보세요.”

    트렌치코트는 몸매를 가려주기 때문에 실내에서 위력을 발휘할 수 있었지만 거추장스러웠다. 무엇보다…….

    “N 브랜드가 질이 좋다고 해서 왔는데 옷감이 왜 이렇게 안 좋은 것뿐이에요?”

    송서아가 인상을 확 찌푸렸다. 저급한 건 아니다. 하지만 중고가 옷감을 사용했다. 고가품이라도 진짜 고급 원단을 사용하지 않았다. 그중에서도 10위권 아래로 볼 수 있었다.

    “죄, 죄송합니다. 물건이 보통은 이렇지 않은데…….”

    직원이 연신 고개를 숙였다. 안쪽에 실밥이 튀어나온 건 입어 보지도 않았다. 기본이 안 된 옷이라는 이유로 내쳐졌다.

    “3백만 원인데 그 값도 못 하는 걸 왜 입어야 해요? 다음 거 주세요.”

    결국 트렌치코트 중에서 건진 건 하나도 없었다.

    트위드 재킷은 대부분이 고급스러워 보였다. 그중에서도 블랙 계통이 송서아의 시선을 받았다. 동양 미인인 그녀의 새하얀 피부와 잘 대비되어서 피부색을 더욱 돋보이게 했다.

    “이 제품은 안쪽에 안감이 있어서 착용감도 우수해요. 거기에 상의 하의 세트라서 모두 맞춤형이라 더더욱 세련되어 보여요.”

    “정장 같긴 한데, H라인밖에 없나요?”

    “A라인도 있어요. 하지만 이걸 입으면 H라인 스커트가 더 보기 좋아요.”

    “너무 짧아요. 그리고 여성적인 건 A잖아요.”

    “딱 무릎 위를 아슬하게 덮을 정도로 길게 해드릴 수 있고, 허리 라인도 조정을 해드릴 수 있어요. 그리고 고객님. 여자는 A라인을 더 좋아해요. 근데 남자들은 H라인에 아주 죽어요. 한국 여성분들은 섹시미를 잘 안 내세우거든요. 이럴 때 H라인을 입는 사람이 승리자예요.”

    송서아는 약 한 시간 삼십 분의 쇼핑을 마칠 수 있었다. 그녀의 손에는 그렇게 손사래 쳤던 트렌치코트도 들려 있었고 그것과 함께 입을 분홍색 원피스도 있었다. 트위드 재킷 세트도 샀다.

    “날씨가 많이 풀릴 수 있으니까요.”

    “감사합니다! 다음에 또 이용해 주세요!”

    순식간에 8백8십만 원의 매출을 올렸다. 구두까지 사 갔기 때문이었다.

    그녀를 보내고 여직원 두 명은 진땀을 빼며 텀블러에 담긴 커피를 한 모금 했다.

    “지독한 여자야.”

    “어쩜 저렇게 철저하게……. 대체 누구를 만나는 걸까요?”

    “진짜 있는 사람이겠지.”

    “예쁘기도 진짜 예쁘던데……. 머리카락, 천연은 아니겠죠?”

    “그렇게 곧은 자연이 어딨어? 매직 했겠지. 저렇게 하면 머리카락이 오래 못 가. 30대만 되어도 뚝뚝 끊어질걸?”

    미인은 어디서든 시기를 받는 법이었다.

    “저, 아가씨? 이제 돌아가시는 거 아니었습니까?”

    “무슨 소리야. 블랙 계통의 옷을 샀는데 그냥 가면 어쩌라는 거야? 목걸이부터 시작해서…….”

    송서아가 손을 꼽았다. 열 손가락이 모두 접혔다.

    “응. 열 개는 더 봐야겠네. 그래도 괜찮아. 최대한 효율적으로 동선을 정했거든.”

    ‘맙소사.’

    “정말…입니까? 앞으로 열 개요?”

    “최소. 많이 양보한 거야. 그러고 보니, 너도 좋은 공부가 될지도 몰라. 넌 분명히 여성의 쇼핑에 어울려준 적이 없지?”

    “아니, 그걸 왜 여기서 가르쳐 줍니까? 저는 그냥 실무 쪽이랑 경호만…….”

    경호는 밥줄이라도 하라고, 실무는 혹시 몰라서 배우고 있는 게 소준석이었다. 그런데 뜬금없이 쇼핑 공부라니?

    “요즘 커리어 우먼이 얼마나 많은데? 적어도 그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노력으로 어떤 복장을 하고 내 앞에 혹은 네 앞에 섰는지, 그 정도는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하지 않겠어?”

    “형편 좋은 명분 같습니다만…….”

    “그럼 가.”

    “경호 대상을 놔두고 어떻게 갑니까.”

    송서아가 힐 소리를 내며 앞서 걸어갔다. 장난도 여기까지. 김해 소가(家)의 사랑을 받고 있는 게 소준석이었다. 그는 실력이 안 되어도 가문으로부터 많은 자원을 받을 것이었다. 그걸 알기에 동래 송가(家)에서도 굳이 그를 엄친아 송서아에게 붙였다.

    친해져야 할 이유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물론 인간 소준석도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송서아의 가슴을 떨리게 하지는 못했다.

    * * *

    산박은 오랜만에 정장을 입었다. 세탁소에서 가져온 뒤로 비닐도 벗기지 않았다. 그만큼 그가 정장을 입는 날은 거의 없었다.

    ‘수달군 과장과의 만남이다.’

    허투루 할 수 없었다.

    한식당은 중저가로 정했다. 그와는 자주 만날 것 같았기에 비싼 곳을 고르지 않았다. 법인 카드로 해결하겠지만, 그런 것마저도 심리적으로는 부담이 된다. 어려운 사람이 되는 건 필요한 일이지만 돈 많이 드는 사람이 되는 건 여기서는 아웃이었다.

    룸을 잡았기에 조용히 기다렸다. 한식당이지만 좌식이 아니라 입식이었다. 의자에 앉았을 때, 노크 소리와 함께 수달군 과장이 들어왔다. 자연스럽게 산박이 일어섰다. 두 명 모두 악수를 굳세게 했다.

    “운동하십니까?”

    “예. 시작했습니다. 아무래도 부산에서 세종시로 오고 가다 보니까 체력이 부족하다는 걸 느껴서요. 30대 넘겨서는 살려고 운동한다고 하지 않습니까.”

    간단한 잡담부터 시작했다. 음식이 들어오고 서로 근황을 나누었다.

    “쉽게 클리어했습니다. 하지만 기술이나 주문 그런 걸 얻어야 해서 당분간은 2레벨에 잔류할 것 같습니다.”

    “돌다리도 두드려서 건너는데, 던전은 더더욱 조심해야지요.”

    “부산 은행은 어떻습니까?”

    “공장 부지는 아직도 난항입니다. 아시다시피… 가문원이 많은 게 부산이라…….”

    “그래도 남이랑 싸우는 게 아니니, 큰일이 나겠습니까?”

    “그럼요. 확실하게 한 걸음씩은 나아가고 있습니다. 사실 저도 잘 모릅니다. 그냥 이렇게 말하라고 위에서 말해 줬습니다. 하하하!”

    그가 웃자 산박도 웃어줬다. 감정을 똑같이 가지는 건 동질감을 주기에 중요한 일이었다.

    부산 은행의 근황을 듣고, 산박은 자신의 현황을 알렸다. 앞으로도 이 관계는 계속 이어질 것이었다.

    ‘무거운 이야기는 안 하는 걸 보니, 걱정은 기우였군.’

    슬슬 일어날 시간이었다. 반주도 했고, 서로의 친목도 확인했다. 이때 수달군 과장이 품에서 새하얀 봉투를 꺼내서 건넸다.

    “뭡니까?”

    “혹시 강의 좋아하십니까?”

    “강의요? 뭐, 명사 초청 강의 그런 거 말씀하십니까?”

    “예. 요즘 핫하지 않습니까. 책 읽는 것보다는 책을 많이 읽은 사람의 생각을 듣는 게 더 효율적이지요.”

    “한 번도 가본 적은 없지만 너튜브에서 종종 듣기는 합니다. 실패한 사람의 이야기보다는 성공한 사람의 이야기가 더 값진 법이니까요.”

    실패한 내용보다는 성공하는 내용을 듣는 게 생산적인 일이라고 할 수 있었다. 심하게는 대리 만족도 할 수 있었다. 그게 바로 인간이다. 내가 한 일은 아니지만 내 국가, 내 민족이 한 일은 자신이 한 것처럼 공감할 수 있는 게 인간이었다.

    “확인해 봐도 됩니까?”

    “네.”

    산박이 종이를 펼쳤다.

    서울 조선 호텔 영빈관 2층 VVIP(1석) A02.

    ‘카이스트 졸업부터 미국 진출까지.’

    강의의 내용은 제법 궁금증을 일으키기 충분했다.

    “여기 정찬 코스는 뭡니까?”

    “강의를 들으면서 식사를 하는 겁니다. 150석밖에 없는 초호화 강의지요.”

    ‘허.’

    대학교에서 하는 강의와는 또 다른 강의의 모습이었다.

    “음식 냄새가 풍기는 곳에서 강의를 해야 한다니…….”

    “똑같은 한 시간이라도 가격이 다르니까요. 강의하는 사람들도 돈에 움직이는 사람들입니다.”

    그 말에 산박은 짧게 대꾸했다.

    “그게 자본주의니까요. 아무튼, 감사합니다. 시간 내서 억지로라도 가보겠습니다.”

    자신과 완전히 다른 길을 걸었던 자의 이야기는 한 번쯤 들을 만했다. 무엇보다 산박은 현재 마음이 조금 여유로웠다.

    ‘야만신 코인을 제대로 탔다.’

    소환수 네 마리가 만들어 내는 전투력은 상상 이상이었다. 2레벨 던전에서 자신은 결코 죽을 수가 없었다. 그 덕에 산박은 오랜만에 문화를 즐기기로 했다. 하지만 그냥 즐기는 것도 아니었다.

    ‘도움이 된다. 누가 생각했는지는 몰라도, 상당한 솜씨야.’

    산박은 커리어에 미친 남자였다. 성장하는 데 돌아버린 기업가였다. 그런 자에게 자기 계발의 시간을 내어주고, 동시에 식사도 챙긴다. 효율적인 계획이었다.

    ‘훌륭한 실무다. 준달독 차장인가?’

    실무진과 지배자는 다르다. 실무를 했기에 효율적인 게 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산박은 송서아가 아닌 준달독 차장을 이번 일의 배후로 봤다. 무엇보다 송서아는 너무 높은 인물이라 자신과 엮인다는 생각 자체를 할 수가 없었다.

    산박은 몇몇 조사를 끝낸 뒤에 이것이 생각보다 위험한 초대인 걸 알게 되었다.

    ‘브랜드 하나 못 걸친 내가 가도 될까?’

    보면 그나마 멀끔한 슈트를 입고 있었지만 제법 잘사는 사람은 전혀 모르는 브랜드 정장이었다. 조금 열등감이 생겼지만 어쩔 수 없다고 여겼다.

    ‘그들에게 줄을 대는 건 필요하지만 이를 위해서 쓸데없는 지출은 하기 싫다. 가벼운 마음으로 가도록 하자.’

    지출할 곳은 많았다.

    산박의 눈은 아주 먼 곳을 응시했다. 그곳에는 분명 그가 지배하고 관리하는 아름다운 세계가 펼쳐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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