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4화 (184/270)
  • 184화

    “갑시다.”

    “두당 4천만 원인데, 일확천금 아니겠습니까?”

    너도나도 소리를 냈다. 미리 여론을 조사해 보고 말한 것이라 제법 호응이 일어났다. 산박 또한 고개를 끄덕였다. 그로서는 최대한 많은 적을 섬멸하는 게 더 많은 카르마를 얻을 수 있어서 좋았다.

    “그럼 그렇게 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용걸섭 씨, 잠시 이쪽으로 와보세요.”

    산박의 말에 용걸섭이 동생 갑균을 토닥거리며 앞으로 나섰다.

    “최소 천만 원 이상은 드리겠습니다. 그 이상은 말씀하지 마세요.”

    “알겠습니다.”

    최소 가격을 산박이 말했다. 최댓값은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만족해야만 했다. 산박이 말하지 말라고 해서였다. 그 말을, 그 명령을 그는 지켜야 했다.

    ‘하청한테 천만 원 주는 것부터 남다르다.’

    고개를 절로 숙여야 했다. 법적으로 그 어떤 제약도 없음에도 선뜻 주겠다고 했다. 강압적으로 그냥 가버리면 그만이었다. 용용 형제는 두 명이고, 그들이 여기에 남는다고 해서 바뀌는 건 없었다. 되레 칼침 맞고 죽고 그들이 가지고 있는 장비를 내줘야 했다.

    특히 용걸섭의 방패는 모습이 바뀌고 도금을 하고 장식품을 추가로 땜질했지만 사실 2레벨 장비 중에서 가장 비싼 방패였다. 장물이기에 그렇게 숨겨야 했다. 그만큼 그게 들킨다면 상대는 땡큐인 셈이었다. 사람 하나 죽이고 수백만 원짜리 방패를 얻을 수 있으니까.

    ‘회사에서 몰래 운용하면 될 일이지.’

    섬뜩한 생각이지만 능히 일어날 법했다. 그렇기에 그는 단번에 산박의 최소 제안을 받아들였다. 나중에 공략이 끝나고 이야기하자는 산박의 제안이었다. 그게 ‘최댓값을 말하지 않은 이유’였다. 즉, 여지를 남겨 두면서 일단 최소한의 돈을 보장해 줬다. 용용 형제가 받아들일 수 있도록 배려해준 것이었다.

    다만 다른 팀원들은 좋은 표정이 아니었다. 결국 자신들에게 돌아갈 돈이 하청 따위에게 돌아가기 때문이었다. 특히 법적으로 아무 제재를 받지 않는데도 선뜻 돈을 내어주는 것 같은 모습을 보이는 산박의 모습은 따스함을 느끼기보다는 헛웃음을 짓게 했다.

    그 불온한 생각을 알고 있는 산박은 품에서 야만신의 양피지 책을 꺼내 들었다.

    ‘이럴 때 써야지.’

    힘을 숨겨도 적당히 해야 했다. 그리고 산박은 아직 힘을 숨길 정도로 강하지도 않았다. 물량을 상대하는 데 있어서 드루이드는 썩 좋은 직업이 아니었다. 영혼 불꽃 상체나 영혼 대지 하체를 비롯해서 블루 오션 페어리 스타라이트 스태프 같은 아티팩트를 전투에 많이 쓰는 것만 봐도 그랬다.

    ‘동물로 변해 봤자 다수를 죽이지는 못한다.’

    곰으로 변해도 한계는 있는 법이었다. 특히 ‘정화의 크리스털’을 모으기 위해서는 속전속결이 필요했다.

    ‘이 던전에 있을 수 있는 시간은 단 10일.’

    그 기간 동안 열두 조각의 크리스털을 획득해야 했다. 빠듯하고, 위험한 결정을 해야 하는 일이 생길 수 있었다. 그렇다면 그 전에 전력을 다해야 했다.

    ‘소모가 일어나고 나서 전력을 다하면 감당 못 하게 될지도 모르지.’

    미래를 알고 있다면 그렇게 아슬하게 줄타기할 수 있었지만 어려운 일이었다.

    펄럭.

    묵직한 양피지가 넘겨졌다. 어지러운 문양이 가득했다. 평범한 사람은 뭐가 뭔지 평생을 연구해도 모를 것이다. 하지만 산박은 달랐다. 그는 밖에서 안으로 손가락을 움직였다.

    ‘미로 형태의 비밀 문자.’

    각진 문자처럼 보이지만 ‘통로’에 불과한 거짓 문자들 속에 숨겨진 진짜 주문! 보통은 그냥 아티팩트처럼 쓸 수 있었지만 그렇게 하면 ‘소나무 향기 외뿔’의 효력을 보지 못한다. 책을 보고 직접 주문을 읊는 게 이득이었다.

    그 모습을 모든 이들이 지켜보았다. 이시은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지켜보며 주먹을 불끈 쥐고 있었다.

    ‘스킬이 아닌 주문을 읊고 있어.’

    보는 것만으로도 산박이라는 생명체가 지닌 재능을 볼 수 있었다. 그에게는 하늘처럼 넓게 변할 포텐셜이 존재했다. 그렇기에 그를 죽이면 하늘을 죽이는 것과 같았다.

    상상하기 힘들 정도의 쾌락이 예상됐다. 그의 목에 단검을 쑤셔 박고, 심장을 도려내고, 그 울컥, 울컥 쏟아져 나오는 피로 온몸을 샤워했을 때 느껴지는 뜨끈함은 상상 이상일 것이었다.

    ‘그건 평범한 피가 아닐 테니까.’

    산박은 어떤 지배자가 될까? 어떤 가능성을 보여줄까? 벌써 작은 던전 기업이다. 그리고 몇 가지 비밀스러운 사업도 진행하고 있었다. ‘기반’이 있는 가문과 연줄을 놓고도 고개를 빳빳이 들고 다니는 것이 태산박이었다.

    ‘가문의 힘에 짓눌려 실패해도 내가 죽여줄게.’

    이시은이 붉은 입술을 혀로 핥았다. 실로 퇴폐적이었다. 산박이 실패하건 성공하건 그 끝에는 이시은이 있을 것이었다. 그녀는 다른 사람과는 다르게 광적으로 산박의 행동을 파악하는 데 많은 시간을 투자하고 있었다. 하루에 네 시간 자면서 불규칙적인 조직 생활도 유지했다.

    “크허허헝!”

    주문력이 강화된 외눈붉은곰이 모습을 드러냈다. 털은 굵고 거칠기 짝이 없었으며 대단히 많았다. 검으로 베어도 털만 자르는 경우도 있을 터였다.

    “크릉!”

    외눈붉은곰이 고개를 이리저리 흔들며 몸을 털었다. 출렁이는 털가죽은 몸과 따로 노는 것처럼 비대하고 두꺼웠다. 검을 찔러 넣어도 제대로 안 통할 게 분명했다.

    “와.”

    너도나도 감탄했다. 몸길이가 1.8m는 될 법한 제대로 된 곰이었다. 척 봐도 1인분을 넘게 할 수 있는 야수였다. 보통보다 30cm는 더 크게 뽑혔는데, 산박이 적법한 절차를 밟았고 소나무 향기 외뿔의 효능까지 들어갔기 때문이었다.

    150cm짜리와 180cm짜리의 차이는 매우 컸다. 체감 자체가 달랐다. 표면적도 몇 배는 차이가 났다. 그 덕에 일행은 산박에 대한 불만을 쏙 집어넣었다. 역시 안전이 중요했다. 또 나중의 돈보다는 당장의 안전이 더욱 체감됐다.

    “대단한 아티팩트네요.”

    “소환 북 맞죠? 전 인터넷에서밖에 못 봤는데. 마법사 물품 중에서 상위권에 속하는 물건인데…….”

    너도나도 소리를 냈다. 그만큼 야만신이 뒷거래로 준 소환 북은 강력한 소환 북일 수밖에 없었다.

    옥시모론 팀은 그렇게 깊은 굴속으로 들어갔다. 굴에는 습기가 서서히 차올랐고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도 들렸다. 작은 샘도 있었는데, 잡스러운 벌레가 가득했다. 결코 마실 수 없는 샘물이었다. 끓여서 먹어도 찜찜할 수밖에 없었다.

    “여길 봐요. 도기가 있어요. 바가지로 쓰는 듯한데요?”

    시은이 그 샘의 옆에 있는 작은 그릇을 봤다. 흙을 구운 것이었다.

    그들은 더욱 깊게 굴속으로 들어갔다. 곳곳에 구멍이 존재했고, 구멍 내부는 횃불을 켜서 쑤셔 넣어도 깊은 어둠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냥 허투루 판 게 아닙니다. 하나같이 다 통로예요.”

    구멍은 모두 확실한 통로였다. 가볍게 그냥 대충 파놓고 가짜처럼 한 게 아니었다. 모두 진짜 얼굴 없는 악굴종이 돌아다니는 통로였다.

    “킁킁. 크어.”

    외눈붉은곰이 코를 킁킁거리며 울음소리를 작게 냈다. 불꽃두더지 파수병과 대장삵 또한 코를 꿈실거렸다. 냄새, 냄새가 났다.

    “여기서부터는 긴장을 놓쳐서는 안 되겠다. 어디서 나타날지 몰라. 놈들의 냄새가 진해.”

    굴이라는 특징에 바람도 그렇게 대단하지는 않았다. 입구에서 불어왔던 바람은 제법 강했지만 걸으면 걸을수록 굴이 좁아지며 바람도 적어졌다. 그 덕에 농밀한 냄새가 가득 자리 잡혀 있었다. 악굴종의 체취는 강렬했지만 이렇게 공기가 정체된 곳에서는 오히려 놈들을 찾기가 어려웠다. 모든 곳에서 놈들의 냄새가 났다.

    “크릉, 크릉!”

    외눈붉은곰이 고개를 기민하게 움직였다. 눈이 하나 없었기에 한쪽 눈으로만 이리저리 살펴야 했다. 그 덕에 전투력은 크게 반감된 상태였고, 습관적으로 자꾸 어깨를 크게 움직여서 좌우를 한쪽 눈으로만 살펴야 했다. 그 덕에 비효율적인 움직임이 너무 컸다.

    ‘상처도 많이 받겠지.’

    사각이 많았기에 그냥 무기로 쑤시고 박아도 맞을 수밖에 없었다. 덩치가 큰 것도 문제다. 투사체도 잘 얻어맞을 수밖에 없었다.

    ‘오래 싸울 수는 없다.’

    빠르게 상처 입고 빠르게 죽는 게 외눈붉은곰이었다. 다행이라면 그 덩치와 포악성을 생각하면 적도 빨리 죽일 수 있다는 점이었다.

    ‘쓸 만한 소모품.’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하지만 물량이 많이 나오는 이런 던전에서는 최고의 소환물이었다. 거리낌 없이 돌진시키면 그만이었다.

    ‘작은 대지 골렘과 합쳐서 돌진시키면 큰 혼란이 일어나겠지.’

    적어도 열 마리, 스무 마리를 붙잡을 수 있을 것이었다. 압도적일 정도로 쉽게 전투가 끝날지도 모른다. 지금의 팀에게 필요한 일이었다.

    ‘10일 이내에 이런 굴 열두 개를 처리해야 하니까.’

    백 걸음 더 걸어가기도 전에 굴에서 울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뀌익! 뀌이이이익!!”

    돼지 멱따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 구멍 하나를 시작으로 곳곳에서 소리가 울려 퍼졌다. 너무나도 시끄러운 울음소리 때문에 귀가 따가울 지경이었다.

    “크윽!”

    절로 고통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으면서도 일행은 서둘러 전투 준비를 끝마쳤다. 바닥에 최대한 구멍이 없는 곳에 옹기종기 모였다. 후방 직업은 안전하게 보호받으면서 천장을 노려봤다.

    이시은은 언제든지 트위스트 스네이크를 쏠 수 있게 미리 주문을 발현시켜서 팔에 감아 놓았다. 아쉽게도 유골을 보지 못해서 서리 해골을 일으키지는 못했다.

    배낭도 바닥에 놓아서 엄폐물로 사용했다. 배낭은 특히 장굉려의 앞에 쌓였는데, 방어력이 낮은 암살자여서였다. 공격력이 높아서 적을 굉장히 빨리 죽일 수 있지만 수비력이 낮은 게 흠이었다.

    “뀌이이이이익!”

    마지막 소리가 울리고 침묵이 내려앉았다.

    ‘X발.’

    길탕만은 몸이 뻣뻣하게 굳는 걸 느꼈다. 너무 힘을 줘서 등 근육이 아파져 왔다. 몸을 좌우로 틀어서 근육을 풀었을 때, 수십 곳에서 얼굴 없는 악굴종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의 얼굴에는 눈 코 입이 존재하지 않았다. 등이 꼽추처럼 굽어있고 팔다리는 매우 길쭉길쭉했다. 하나같이 다양한 무기를 들고 있었다. 입이 크고 이빨이 아주 날카로웠다.

    놈들은 서로 호흡을 맞추듯이 고함을 간헐적으로 내뱉으며 돌진했다. 입에서 마비 독액을 내뿜었다.

    투둑!

    방패로 막아도 워낙 곳곳에서 뿌려지고 있는 게 마비 독이었다. 특히 천장에서 뚝 떨어지면서 몸을 뱅글뱅글 돌려 마비 독액을 거침없이 뿌리는 미친놈도 있었다.

    “저 빌어먹을 새끼!”

    충호가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놈이 시은의 트위스트 스네이크에 의해서 목이 조였다. 무기를 버리고 켁켁거리는 놈이 머리부터 땅에 처박혔다. 할버드를 들고 있어서 2열에 있던 카누토가 발로 놈의 갈비뼈를 두 번 걷어찼다.

    퍽!

    금이 가고.

    퍽!

    갈비뼈가 그대로 부러졌다. 폐를 단번에 짓눌렀다. 고통에 소리 하나 못 내는 놈은 서서히 질식해서 죽을 것이었다. 무기는 어디에 버렸는지 잡히지도 않았다. 그저 맨손으로 카누토의 강철 보호구를 만지작거릴 뿐이었다.

    쿵쿵!

    작은 대지 골렘과 함께 외눈붉은곰이 날뛰었다. 곳곳에서 전투가 일어났다. 산박은 이를 구경하며 잔잔벼락의 환도로 능숙하게 사람들을 지켰다.

    파지직!

    “크카가가가가각!”

    벽에 있는 구멍을 손으로 단단히 잡고 발로 벽을 박차며 허공에 뛰어올라서 검을 역수로 잡고 내려치려는 악굴종이 잔잔벼락에 그대로 노출되며 몸이 경직된 채 뚝 떨어졌다.

    서걱!

    산박은 놈을 그대로 베어냈다. 피가 사방으로 쏟아져 나왔다. 그러면서 놈의 마비 독액이 산박의 얼굴에 투둑 묻었다. 한파에 혹독하게 다루어진 볼처럼 볼의 감각이 무뎌져 갔다.

    “뭉쳐!”

    그사이에 충호가 용용 형제에게 고함을 내질렀다. 두 명은 서로 호흡이 잘 맞았지만 팀 전체를 봤을 때는 뚝 떨어져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충호의 외침에 용걸섭의 눈이 충호와 마주쳤다. 그리고는 그냥 다른 곳으로 향했다. 무시한 것이었다.

    ‘저 개새끼가.’

    서충호의 표정이 절로 무서워졌다. 자신의 판단이 옳은데 대꾸도 안 하고 무시해서였다.

    화르르!

    불꽃두더지 파수병의 입에서 화염이 쏟아져 나왔다. 그를 노리던 마비 독액이 화염에 뒤덮이며 타올랐다. 타들어 가는 독액이 강철 갑옷에 들러붙었다.

    후웅!

    위협적인 할버드가 단번에 충호와 싸우고 있는 악굴종의 어깨 옆쪽을 쿵 쳤다. 단번에 몸이 휘청거렸고, 이어지는 충호의 일 검에 목이 베어져 크게 피를 쏟아내며 앞으로 고꾸라졌다. 충호는 고꾸라지는 놈의 턱을 무릎 보호대로 올려 쳤다. 턱이 홱 돌아가면서 악굴종이 쿵 하고 쓰러져서는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다.

    순식간에 싸움이 끝났다. 작은 대지 골렘이 사라지고, 털이 상하고 가죽이 상했지만 아직도 거뜬한 외눈붉은곰이 부상자의 전부였다.

    “바닥에 구멍이 없는 곳에서 진형을 짜니까 할 만한데요?”

    탕만이 희희낙락했다. 하지만 모두 그게 산박의 소환수 때문임을 알았다.

    ‘아무리 아티팩트라지만 소환수가 무려 4체.’

    황당할 정도로 많은 소환수 숫자였다. 대장삵, 불꽃두더지 파수병, 작은 대지 골렘, 외눈붉은곰까지! 이 정도로 소환수가 있는데 전투가 어려울 리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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